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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2015.03.01 11:59

14. ·중 친선대회

 

 

이승만 대통령께서 내 앞에서 한판 둬 보게

 

때는 바야흐로 1954. 한국 바둑의 개척자이자 최강자였던 조남철은 사단법인 한국기원 출범을 기념해 원대한 계획을 세웠으니, 바로 최초의 국제바둑대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그 첫 출발은 한·중 친선바둑대회였다. 여기서의 중국은 대만을 가리킨다. 6·25전쟁을 치른 우리에게 중국은 불구대천지 원수일 뿐이었다.

첫 대회는 이듬해 2월에 대만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대회 날을 못 박아 놓고 선수 선발전을 치렀다. 12명이 선발전에 참가해 조남철·김봉선·민영현·장국원이 발탁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대표 바둑선수단 탄생이었다.

이제 문제는 돈!

돈이 없는 것은 아닌데, 환전이 걸림돌이었다. 당시엔 외화가 너무나 귀해 환전을 하기 위해서는 무려 대통령의 사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기원의 이사장은 장경근이란 인물로, 자유당 서열 3인자였다. 장경근의 으로 일단 이승만 대통령을 경무대(청와대)에서 알현하기로 했다.

조남철은 고민했다. 달러가 금보다 귀한 시절이었다. 외국에 나가 바둑을 두고 오기 위해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가 대통령한테 욕이나 잔뜩 얻어먹고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우려됐다. 접견실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조남철 일행 앞에 허연 머리의 이승만 대통령이 나타났다.

자네들이 바둑을 잘 둔다며? 어디 내 앞에서 한판 둬 보게.”

 

 조남철과 김봉선은 부랴부랴 바둑판 앞에 앉았다. 대통령의 요구는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무조건 한 시간 이내로 바둑을 끝내자고 미리 짜 놓았다. 바둑 한판을 관전하고 난 이대통령이 물었다.

 그런데 자네들은 어찌하여 왜놈 바둑을 두고 있는가?”

미리 흑백 8개씩의 돌을 놓고 대국을 시작하는 우리 고유의 순장바둑이 아닌, 빈 바둑판에서 시작하는 일본식 바둑을 두느냐는 책망이었다. 조남철 일행의 등짝에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간 뼈도 못 추릴 터.

조남철은 원래 바둑이 창시되었을 때에는 반상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두었습니다. 훗날 변형이 되어 순장바둑으로 전해졌을 뿐입니다라며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대통령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순장바둑으로 한판 더 둬 보게.”

 

이렇게 하여 조남철과 김봉선은 계획에도 없던 바둑을 두 판이나 두어야 했다.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흐뭇한 표정의 대통령이 말했다.

이왕 가는 것이니 꼭 이기고 돌아오게나.”

안채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가는 대통령의 뒤를 장경근이 따랐다. 잠시 후 나온 장경근은 종이 한 장을 조남철 일행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종이에는 만년필로 휘갈겨 쓴 두글자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可晩(가만·이승만 대통령의 결제를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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