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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2015.02.16 09:29

9. 기인 서봉수

 

 

어차피 저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데요!”

 

요즘이야 국제기전이 많지만,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바둑계는 한··일 각국이 자기 우물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았다. 그 가운데서도 우열은 있었으니, 현대바둑의 종주국이라 할 일본이 실력으로나 인프라로나 위세를 떨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말 국제대회가 생기고 세계 바둑의 변방 취급을 받던 한국이 우승을 휩쓸면서 대역전극이 펼쳐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때는 프로는 고사하고 아마추어 국제교류전조차 희귀했다. 국제교류라고 해 봐야 일본 정도인데 그나마 19656월 한·일 국교 정상화 전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여하튼 196512월 한·일 대학생 교류전이 생겼고, 이듬해는 고교생 교류전으로 확대됐다. ·일 고교생 교류전이 대박을 내자 손가락을 빨고 있던 대만에서 즉각 이 들어왔다. 2회 대회부터는 우리도 끼워 달라!”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그리하여 2회 대회는 한··일 동양3국 고교생 대회로 확대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는 물 건너가면 무조건 이겨야 하는불꽃 애국의 시대. 한국바둑의 대부 조남철의 특명을 받은 제자 김수영 5단이 고교생 선수 훈련을 위한 조교로 임명받았다.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하늘같은 프로의 특훈 마사지를 받은 학생들의 기량은 일취월장, 첫 대회만 패했을 뿐 5년 내리 우승을 차지했다. 결국 한국 고교생들 너무 강하무니다!”며 일본이 슬그머니 빠지면서 대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동양3국 고교생 대회 당시의 에피소드 한 토막.

대만에서 대회가 열렸을 때의 일로 당시 한국팀에는 서봉수가 끼어 있었다.

대회 일정이 비는 날 3국 고교생들은 버스 한대를 빌려 단체관광에 나섰다. 요즘이야 단속의 대상이지만 관광버스란 것이 본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노래방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는 한국뿐 아니라 대만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한명씩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순번이 돌고 돌아 서봉수 차례가 됐다. “나는 노래 못한다!”며 버티던 서봉수를 다른 학생들이 좌시할 리 없다. 결국 질질 끌려 나가다시피 해 마이크를 잡은 서봉수.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입을 뗐다.

맛을 보고 맛을 아는 X표 간장~.”

한국 학생들이 배를 잡고 뒤집어지는 모습을 대만·일본 학생들은 멀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CM송을 다 부르고 제자리로 돌아온 서봉수에게 조남철 단장이 이놈아, 그것도 노래라고 불렀냐?” 했다. 그러자 서봉수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어차피 저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데요, .”

 

과연 기인은 떡잎부터 기인스러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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