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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2015.02.10 09:55

6. 김인의 굴욕

 

 

한국서 1인자 넘보는데 일본서 연구생 하라고?”

 

순수토종’ ‘된장바둑으로 불렸던 서봉수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바둑계는 일본 유학파의 세상이었다. 1호 프로기사 조남철을 시작으로 김인·윤기현·하찬석·조훈현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선진바둑을 배워 온 인물들이 1인자의 계보를 이어 갔다.

 

조남철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현대바둑 보급을 시작한 지 18년 뒤인 1962, 김인은 일본으로 홀홀히 떠나게 된다. 이때 김인의 나이 스물. 이미 한국에서 프로 4단의 신분이었다.

일본으로 떠나는 김인에게 조남철은 자신의 스승 기타니 미노루 9단 앞으로 쓴 소개장을 쥐어 주었다. 일본 최대의 바둑 도장에서 수학한다면 한국 바둑도 장족의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당시 자신의 1인자 자리를 끊임없이 노리던 김인에게 소개장을 써 준 것에서 조남철의 대인배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김인의 굴욕은 엉뚱한 데서 시작됐으니.

일본으로 간 김인은 먼 친척에게 몸을 의탁했다. 바둑을 모르는 친척은 연줄을 동원해 이웃에 사는 프로기사를 연결시켜 주었다. 고스기라는 인물로, 그도 김인과 마찬가지로 4단이었다. 고스기는 김인이 프로 4단이라는 말에 피식 웃었다. ‘어디 감히 한국 4단을 일본 4단과 비교하느냐는 투였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거만하게 말했다.

지인의 부탁이고 하니 내 특별히 힘을 써서 일본기원 원생으로 넣어 주리다. 열심히 하면 초단으로 입단도 할 수 있겠지.”

김인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한국에서 1인자를 넘보던 자신에게 프로 인정은 커녕 연구생이 되라니.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그제야 김인은 조남철이 써 준 소개장이 생각났다. 친척에게 보여 줬더니 이걸 왜 이제야 내놓느냐!”며 바로 기타니의 기원으로 데리고 갔다. 애제자의 소개장을 본 기타니는 김인을 즉각 제자로 받아들여 주었다.

 

당시 일본 바둑계에서 기타니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김인은 간단한 시험기를 거쳐 바로 일본 프로 3단 자격을 부여 받았다. 일부 일본 기사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후 김인이 승단대회를 비롯해 각종 기전에서 맹위를 떨치자 쑥 들어가고 말았다.

 

언론에서는 김인, 오타케 히데오, 린 하이펑의 이름을 따서 향후 긴죽린(竹林)’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김인에게 원생으로 넣어 주마!”고 선심(?)을 썼던 고스기 4단은 이후 김인의 승승장구 소식을 접할 때마다 쥐구멍을 찾았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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