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 반기
큰집 제사에 다녀오신 엄마가 내놓은 떡과 쌀밥을 맛있게 먹던 녀석이 문득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제사가 뭐야?”
“후손들이 돌아가신 조상의 은덕을 잊지 않고 기리는 것이란다.”
“왜 제사를 지낼 때는 떡도 하고 쌀밥을 하는 거야?”
“돌아가신 조상이 맛있게 드시라고 그런단다.”
그 말을 듣고는 한참을 생각하던 녀석이 하는 말.
“엄마, 그라먼 울 아부지 죽어부라고 해!”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우리 쇠머리마을에서 회자되고 있는, 나하고는 초등학교 동기 녀석이 여섯 살 때인가 실제로 했다는 말이다.
옛날 가난한 우리네 농촌에서는 먹을 것이 부족하여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볍씨와 얼마만큼의 쌀을 남겨놓아야만 했다.
볍씨는 말할 것도 없이 내년의 농사밑천이지만 그 얼마만큼의 쌀은?
그것은 조상님 제삿날에 쓸 것이었다.
우리 집의 경우 아버지께서 당신의 증조부모와 조부모(나중에는 당신의 아버지까지)의 제사를 모셨는데 어린 시절의 우리는 그 제삿날들을 무척 기다린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제삿날에는 쌀밥과 고깃국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삿날 밤에는 제례가 끝나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보면서 졸음을 쫓으면서까지 기다렸으나 한 번도 제례가 끝날 때까지 버텼던 기억은 없다. 그래도 다음날 아침이면 엄마는 우리에게 맛있는 쌀밥과 고깃국을 주었으니 어찌 다음 제사가 기다려지지 않겠는가?
설과 추석 그리고 몇 번의 제삿날에나 먹어볼 수 있는 쌀밥과 고깃국은 왜 그리도 맛이 있었던지!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그 철없는 녀석은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을까?
드디어 기다렸던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부터 나는 마음이 바빠진다.
벌써부터 나의 코는 집에서 굽는 감미로운 고기냄새로 벌름거린다.
지금쯤에는 고모님들도 와 계시겠지!
제사상에 올리기 위하여 준비된 갖가지의 음식들과 과일, 그리고 떡.
이제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다.
이웃집에 떡을 나누어 돌리는 발걸음도 마냥 가볍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제례가 다 끝나지도 않아 끝내 잠이 들어 마음껏 먹지는 못하였지만 어린 우리에게 제삿날은 참 흥겨운 날이었다.
이렇게 지낸 제사음식은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과 이웃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데 그렇게 여러 군데에 나누어주기 위하여 담아놓은 음식을 반기라고 한다는 것을 보고,
그 어려운 시절에 선대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야 했던 우리네 부모님들의 애환과
얼마 되지 않은 음식이라도 서로가 나누어 먹을 줄 알았던 아름다운 우리의 풍습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반기 - 잔치나 제사 후에 여러 군데에 나누어 주려고 목판이나 그릇에 몫몫 이 담아 놓은 음식.
반기살이 - 잔치나 제사 음식을 여러 군데에 나누어 줌.
우리의 윗 세대인 부모님들은 전부 고인이 된 지금
'울 아부지 죽어부라고 그래'라고 했던 그 친구는
목사가 되어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