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우리 집에는 감나무가 네 그루 있었다.
두 그루는 단감나무, 그리고 두 그루는 떨감나무 였다.
봄이면 마당 한 쪽에는 눈처럼 감똥이 쏴하게 깔려 있었다.
어미 암닭 담순이는 그 감똥이 먹이인줄 알고
한 번 두 번 쪼아 보고는 먹이가 아닌줄 알았다.
그 뒤를 삥아리들이 쫑쫑쫑, 삐약 삐약 거리며
따라 다녔다.
누나는 감똥을 국그릇에다 주워담고,
지푸라기나 발장실을 가져다가 거기에 끼워
목걸이를 만들었다. 나도 멋모르고 따라하곤 했는데
조금 크자 그건 남자애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개 작대기나, 딱지치기, 다마치기를 하러가곤 했다.
우리집 단감은 빨리 단물이 들지 않아
앞집 강욱이네 단감을 모르게 몇 개 따먹기도 했다.
가을이 되었을 때
떨 감의 색갈은 점점 지는 태양의 색깔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날이 쌀쌀해 지면서는 감이 빠른 속도로 빨간색으로 변해 갔다.
더러는 홍시가 되기도 전에 땅에 떨어져서
아까운 맘에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내고 성한 부분을 먹기도 했다.
한 푼이라도 벌어보고 싶었던 엄마는
홍시가 되기전에 따서 다라에 담아 녹동에 팔기도 하였던 거 같다.
외지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자
그 때부턴 더 이상 이 감나무와는 인연이 없어지게 되었다.
감똥이 떨어지는 모습도, 감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모습도 볼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내가 안타까웠는지
엄마는 광주리에 가득 홍시감을 담아다가
시원한 마루의 광에다가 숨겨 두곤했었다.
그게 장남을 사랑하는 엄마의 표현이었다.
내가 겨울 방학을 맞아 집에 왔을 때에는
홍시는 광주리에 가득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홍시는 항상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동생 넷이 서로 번갈아 가며
하나 씩, 하나 씩
엄마 몰래 먹어오다가
차마 마지막 하나 남은 하나는 먹을 수 없어서
하나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홍시는 무지 좋아한다.
아내는 홍시를 무지 좋아했던 자기 할매가 내한테 쒸어서
내가 그리도 홍시를 좋아한다고 한다.
이유야 어떻든 홍시는 참 맛있다.
아직도 거금도의 가을 하늘엔 홍시가
주렁주렁 열릴까?
두 그루는 단감나무, 그리고 두 그루는 떨감나무 였다.
봄이면 마당 한 쪽에는 눈처럼 감똥이 쏴하게 깔려 있었다.
어미 암닭 담순이는 그 감똥이 먹이인줄 알고
한 번 두 번 쪼아 보고는 먹이가 아닌줄 알았다.
그 뒤를 삥아리들이 쫑쫑쫑, 삐약 삐약 거리며
따라 다녔다.
누나는 감똥을 국그릇에다 주워담고,
지푸라기나 발장실을 가져다가 거기에 끼워
목걸이를 만들었다. 나도 멋모르고 따라하곤 했는데
조금 크자 그건 남자애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개 작대기나, 딱지치기, 다마치기를 하러가곤 했다.
우리집 단감은 빨리 단물이 들지 않아
앞집 강욱이네 단감을 모르게 몇 개 따먹기도 했다.
가을이 되었을 때
떨 감의 색갈은 점점 지는 태양의 색깔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날이 쌀쌀해 지면서는 감이 빠른 속도로 빨간색으로 변해 갔다.
더러는 홍시가 되기도 전에 땅에 떨어져서
아까운 맘에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내고 성한 부분을 먹기도 했다.
한 푼이라도 벌어보고 싶었던 엄마는
홍시가 되기전에 따서 다라에 담아 녹동에 팔기도 하였던 거 같다.
외지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자
그 때부턴 더 이상 이 감나무와는 인연이 없어지게 되었다.
감똥이 떨어지는 모습도, 감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모습도 볼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내가 안타까웠는지
엄마는 광주리에 가득 홍시감을 담아다가
시원한 마루의 광에다가 숨겨 두곤했었다.
그게 장남을 사랑하는 엄마의 표현이었다.
내가 겨울 방학을 맞아 집에 왔을 때에는
홍시는 광주리에 가득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홍시는 항상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동생 넷이 서로 번갈아 가며
하나 씩, 하나 씩
엄마 몰래 먹어오다가
차마 마지막 하나 남은 하나는 먹을 수 없어서
하나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홍시는 무지 좋아한다.
아내는 홍시를 무지 좋아했던 자기 할매가 내한테 쒸어서
내가 그리도 홍시를 좋아한다고 한다.
이유야 어떻든 홍시는 참 맛있다.
아직도 거금도의 가을 하늘엔 홍시가
주렁주렁 열릴까?
봄에 피는 노오란 감꽃이 아니라 가을에 빠알갛게 피어 있는 감 꽃!
어렸을 적 우리집에도(쇠머리의 추억에서 밝혔듯이)
우리 5남매의 탄생을 기념하여 부모님께서 심으신
다섯그루의 감나무가 있었지요.
큰 누나 감나무.
작은 누나 감나무.
형 감나무.
나 감나무.
그리고 동생 감나무.
욕심 많은 동생은 지 감나무가 제일 작으니 꼭 큰 누나 감나무를 지 감 나무라 우겼고.
17~8년전 11월 하순의 어느 날.
지리산 피아골 계곡의 연곡사에서 출발하여 왕시리봉을 오르는데
주인이 있는지 주인이 없는지는 모르지만
야산에 감나무 한 그루가 가을 서리를 맞은 홍시를 주렁주렁 메달고 서 있습디다.
우리 일행 넷(두 부부)은 딸 수 있는 것은 죄다 따서 먹는데
서리를 맞은 자연 그대로의 홍시라 어찌나 맛있었던지 그 맛은 평생을 못 잊고 있습니다.
지금도 감을 보거나 감 이야기만 나오면 그 때 거기에서 먹었던 감이야기가 자연스레이
연상되어 양현님의 이 글을 읽고는 또 이렇게 쓰지 않고는 못 베기니 그 맛을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 날!
먹을 수 있을만큼 배불리 먹고는 그것도 모자라
코펠이란 코펠엔 가득 담아 산엘 올랐드랍니다.
산에 올라 코펠을 열어보니 감의 형체는 없어지고
감 쨈으로 변하여 수저로 떠 먹었던 기 막힌 그 맛.
왕시리봉은 경관이 아름다워 미국선교사들의 별장지로 잘 알려져 있는데
눈이 쌓여있는 그 곳을 지나면서
저 별장들을 지을 때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하여
이 높은 곳까지 건축자재를 등에 지고 올라왔을 우리네 어르신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하고는 우리도 어서 빨리 부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오기가 발동하더라구요.
양현님의 글을 읽고
또 옛 날을 회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