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오전 7시50분쯤 전남 고흥군 금산면 신촌리 신양선착장 .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리자 잔잔한 물결의 바다 건너편 작은 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섬에서 예술의 섬으로 변신 중인 연홍도(連洪島)다.
섬 모양이 바다 위에 떠 있는 연(鳶) 모습과 비슷해 연홍도(鳶洪島)라 부르다 일제강점기 동쪽 섬 거금도와 맥이 이어져 있다는 의미로 현재 이름으로 바꿨다고 전해진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의 연홍도 속 주황색·파란색 지붕을 얹은 집 모습에 빠져들기 시작할 무렵 군내 버스 한 대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연홍도를 오가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배편과 시간이 동일한 버스다.
오전 8시가 가까워지자 “삐삐”하는 경적과 함께 연홍도에서 배 한 대가 물살을 가르며 출발했다. 단 3분 만에 신양선착장에 도착한 배는 섬 주민들과 육지를 연결하는 4.95t급 연홍호다. 크기나 형태로 볼 때 여객선보다는 어선에 가까운 모습이다. 크기가 작은 탓에 선장을 포함해 단 10명만 탈 수 있다. 연홍호는 동절기(10~3월)와 하절기(4~9월) 모두 오전 7시를 시작으로 하루 7차례 운행한다. 편도 요금은 성인 기준 주민 1000원, 관광객 3000원이다.
선장과 몇 마디를 나누다 보니 도착한 연홍도 선착장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두 개의 뿔소라 조형물이다. 방파제 위에 사람보다 큰 크기로 만들어졌다.
연홍미술관 앞바다에 설치된 생선 조형물. [프리랜서 장정필]
선착장에서 만난 한 주민은 “원래 하나는 파란색, 다른 하나는 누런빛이 도는 흰색이었는데 주변 경관과 더욱 어우러져 관광객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모두 흰색 페인트를 칠했다”고 말했다. 뿔소라 옆에도 자전거를 타거나 바람개비를 들고 뛰는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철제 조형물이 줄줄이 세워져 있다. 작은 섬마을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예술 작품들이다.
선착장 삼거리에서 마을회관으로 가기 위해 왼쪽으로 향하면 길을 따라 늘어선 주택 담벼락에도 예술 작품들이 설치돼 있다. 벽화·사진 등이다. ‘연홍 사진박물관’이라는 제목이 붙은 담장 속 작품에는 섬 주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주민들의 출생·졸업·결혼·여행 등 특별한 순간을 담은 사진 수백 장이 널찍한 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사진이 담기는 것을 꺼렸던 주민들은 작품이 완성되자 “사진을 낼 걸 그랬다”며 아쉬워 했다고 한다. 연홍도에는 51가구 82명의 주민이 모여 산다.
연홍도 인근 섬 거금도 출신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가 그려진 벽화. [프리랜서 장정필]
마을로 진입하면 본격적으로 담장 벽화가 펼쳐진다. 소재는 꽃과 나무, 소꿉놀이 하는 아이들, 동화 속 주인공 등 다양하다. 고흥 거금도 출신 프로레슬러인 고(故) 김일(1929~2006) 선수, 부친이 고흥 점암면에서 태어난 전 축구 선수 박지성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동요 가사가 적힌 나무 액자나 생선 모양 조형물을 담에 붙여 놓은 주택도 있다. 노인들의 사랑방인 연홍복지회관 담벽에는 색색의 동그란 조형물이 매달려 있다. 어촌에서 쓰는 플라스틱 부표에 색을 입힌 작품이다. 길바닥 맨홀 뚜껑도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마을을 가로질러 10여 분을 걷다보면 선착장 맞은편 바다와 함께 미술관이 나타난다. 미술관 입구에는 원래 이곳이 어떤 장소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오래된 동상 하나가 나온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이순신장군상이다. 연홍미술관 건물은 원래 학교였다. 1998년 폐교된 연홍분교장을 리모델링해 전국 유일의 섬 속 미술관으로 꾸몄다. 정식 명칭은 ‘섬 in 섬 연홍미술관’이다. 화가인 선호남(56) 관장이 부인과 함께 운영한다. 서양화 등 120여 점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연홍도를 찾아와 벽화를 둘러보는관광객들.[프리랜서 장정필]
연홍도에는 규모는 작지만 해변도 있다. 연홍미술관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펼쳐진 100m 길이의 백사장이다. 그 끝에도 예술 작품이 있다. 폐가에 페인트칠을 해 만든 작품이다. 지난해 11월 연홍도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출신 작가가 섬에 찾아와 약 일주일간 머무르며 작업했다고 한다. 낡은 건물과 일부가 무너져내린 담벼락을 손보지 않은 채 그대로 작업한 점이 인상적이다.
고흥 거금도와 완도 금당도 사이의 섬 연홍도에서는 특별한 볼거리도 구경할 수 있다. 연홍미술관 앞에 서면 보이는 금당도 해안절벽으로 금당 8경 가운데 하나인 병풍바위다. 미술관 바로 앞 바닷속에는 생선 모양의 대형 철제 조형물도 설치돼 있다. 바닷물이 가득 차면 조형물의 아래쪽 절반 이상이 물에 잠긴다.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이색 예술 작품이다.
방파제 위에 세워진 사람 형태의 조형물. [프리랜서 장정필]
연홍도에는 3개 산책 코스도 조성돼 있거나 만들고 있다. 선착장 도착 후 교회를 거쳐 미술관에 들렀다가 마을회관을 가운데 두고 돌아오는 약 1.16㎞ 길이의 ‘연홍도 골목길 코스’, 선착장에서 왼쪽으로 향해 섬의 한쪽 끝을 돌아 마을회관 쪽으로 오는 1.76㎞ 길이의 ‘아르끝 숲길 코스’, 반대쪽 끝에 다녀오는 940m 길이의 ‘좀바끝 코스’ 등이다. ‘아르’는 ‘아래’라는 단어에서, ‘좀바’는 붉은빛을 띤 생선 쏨뱅이를 주민들이 일컫는 의미의 ‘좀뱅이’에서 따온 것이다.
연홍도에는 아직 식당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다. 다만 관광객들을 위해 부녀회가 마을회관에서 음식을 판매하고 있다. 오전에 연홍도에 들어온 관광객은 마을회관에 들러 미리 예약하면 점심식사가 가능하다. 미역과 다시마 등 특산물 반찬이 포함된 집밥을 맛볼 수 있다. 연홍미술관에 딸린 방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섬을 찾기 전 선 관장에게 예약하는 것이 좋다.
연홍미술관 전경. [프리랜서 장정필]
2015년 시작된 연홍도 예술섬 조성사업은 현재진행형이다. 다음달 8일 연홍도를 알리기 위한 ‘섬 여는 날’ 행사도 치러진다. 관광객들을 위한 펜션 5개 동도 올해 안에 설치된다. 이에 따라 현재 미역·다시마 양식, 밭일 등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는 주민들의 삶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주민 40여 명으로 꾸려진 ‘섬 in 섬 연홍도 협동조합’ 측은 펜션 운영, 특산품 갓김치 판매를 준비하고 있다.
프랑스 작가가 작업한 폐건물. [프리랜서 장정필]
연홍도를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거치는 한센인들의 보금자리 소록도는 고흥에 왔다면 꼭 함께 들러야 할 곳이다. 개원 101년이 된 소록도병원에는 한센인들이 피와 눈물로 가꾼 아름다운 조경의 중앙공원, 일제의 인권침해 현장인 감금실 등이 보존돼 있다. 지난해에는 한센병박물관도 문을 열었다. 문화·인권·역사·생태가 어우러진 섬이다.
연홍복지회관 담벼락. [프리랜서 장정필]
김길곤(66) 연홍도 가고 싶은 섬 추진위원장은 “조용한 섬이 조금씩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활기를 띠고 있다”며 “소박한 멋이 있는 섬으로 가꿔 가겠다”고 말했다.
■[S BOX] 2165개 섬 몰린 전남도, 멍 때리기 좋은 곳 등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전남 완도군은 최근 ‘생일도의 멍 때리기 좋은 곳’ 3곳을 선정해 발표했다. 섬 내 너덜겅(돌숲), 용출갯돌밭, 구실잣밤나무숲이다. 일상에 지친 도시민들 욕구에 맞춰 신선한 공기를 내뿜고 풍광이 뛰어난 3곳에 공사 등 별다른 작업을 하지 않고 의미만 부여한 것이다. ‘섬의 재발견’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남도의 섬이 재조명 받고 있다. 그동안 식당·숙박시설 등이 부족해 다른 지역의 섬들에 비해 낙후된 이미지가 강했지만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오염되지 않은 섬을 찾으려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다.
전국에는 11개 시·도에 3355개의 섬이 있다. 이 가운데 약 65%인 2165개(유인도 279개, 무인도 1886개)가 전남 지역에 밀집해 있다. 전남도가 지난해 전국의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전화 설문조사를 한 결과 76%가 “전남의 섬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주민들은 이 같은 수요에 맞춰 섬의 원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한 채 테마별로 각종 체험형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해산물이 들어간 음식 메뉴를 개발하는 등 수익사업을 하고 있다. 전남도가 2015년부터 2024년까지 10년간 추진하는 장기 프로젝트인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의 일환이다.
섬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드는 고흥 연홍도를 비롯해 여수시 낭도·손죽도, 강진군 가우도, 완도군 소안도, 진도군 관매도, 신안군 반월도·박지도, 보성군 장도, 완도군 생일도, 신안군 기점도·소악도 등이 이 사업을 통해 가꿔지고 있는, 불편하지만 가 볼 만한 남도의 섬이다. 」
[중앙일보] 입력 2017.03.18 01:00
연홍도=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