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전리 유래
본래 돌산군 금산면의 지역으로 진장과 어전(於田)일부 및 대흥(大興) 일부를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고흥군 금산면의 어전리로 하였다. '어전'이라는 지명은 본래 고개 밑에 마을이 있어 「늘앗」 또는 「고개밭」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어전(於田)이라 하였으며 이곳에 1916. 1월에 건립되어 1958년에 개수한 금산지서(현재 금산 파출소)가 위치하고 있다. 사찰로는 오래된 송광암(松廣庵)이 있다. 1970.3.1에 개교한 금산제일초등학교와 금장초등학교, 1965.4.25에 설립된 익금분교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금장분교장(금장초등학교)와 익금분교장이 문을 닫아 현재는 '금산제일초등학교'만 남아 있다.
東村(동촌) → 洞村(동촌)
마을이 골짜기 안에 있어 '골몰'이라 하고 어전리의 동쪽에 있으므로 동촌(洞村)이라고 한다. 본 마을은 어전리에 속하며 마을이 용두봉 동북 골짜기에 위치한다 하여 '골몰(谷村)'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1907년에 마을 名을 洞村이라 改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평지[平地(於田)]
於田이란 地名은 本是 고개밑에 마을이라 하여 '늘앗'또는 '고개밭'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於田이라 表示했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於田里 동쪽에 있는 '늘앗터'를 平地마을로 改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소蓮沼(연못금)
어전리에 속하며 마을앞에 연꽃이 많아 연소 또는 연못금이라 불러왔고 옛날선배들은 마을앞에 우뚝솟아 있는 봉우리를 필봉이라 응하고 마을지형이 반달처럼 생겨 반월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옥룡玉龍(眞幕金. 질망
마을 뒤에 옥녀봉(玉女峰)이 있고 옆에 용두봉(龍頭峰)이 있으므로 두 봉우리의 첫 자를 따서 옥룡(玉龍)이라 하며 속칭 진막금(眞幕金)이라고도 부른다. [병자호란(丙子胡亂) 時 이곳에 관군(官軍)이 퇴군(退軍)하면서 잠시 진陳을 치고 막幕을 쳤다하여 진막금(陣幕金)이라 불렀다고 하며 또 마을 앞에 옥녀봉(玉女峰)이 있고 옆에 용두봉(龍頭峰)이 있어 두 봉우리의 첫 자를 따서 玉龍이라 하였는데 속칭 진막금(俗稱 陣幕金)이라고 불렀다.] 그 후 1939년 일정(日政)때 지방행정(地方行政) 구역 개편(區域 改編)에 따라 옥룡玉龍마을로 분리分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익금 益金(旭金)
바다에서 해가 뜨면 마을앞 모래에 햇빛이 반사되어 금빛이 나므로 욱금이라고 불렀으며 부촌이 될것이라 하여 금을 더한다는 뜻으로 익금으로 칭하였다
금장金藏(眞藏)
옛날부터 이곳에 금이 많이 묻혀 있다는 전설에 의하여 금장(金藏)또는 진장(眞藏)이라 불리어왔으며 1958년 美國 OAC 원조에 의하여 이민정착지(離民定着地) 마을로 되었다.
금장상동
1974년에 이민離民정착지 금장마을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금장(金藏)의 위쪽에 위치한다여 上洞마을로 分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법정리의 명칭은
늘어진(넓은) 터(밭)가 늘앗터 - 느라터(느라테)로 변형되어 넓은 땅이지만 논보다는 밭이 많은 금산의 특성상 밭들이 늘어진 곳이라 하여 한자를 일본식으로 차용하여 於田里라고 명명되었으며
행정마을은(동촌, 평지, 연소, 익금, 금장, 상동)
골몰(용두봉 골짜기 마을)을 한자를 빌어 오면서 골을 고을동(洞)으로 마을을 마을 촌(村)으로 洞村이라 표기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느라터는 어전이라 표기되기도 하고 또는 평편하게 넓은 땅으로 직역하여 평지(平地)로 이름 지어졌을 것이며
연못금이는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연못에 비치는 가을 달이라고 거금팔경에 蓮沼秋月이 전해 오듯이 연꽃이 있는 연못이 있는 마을로 蓮沼로 불리어짐이 당연지사이며
질마끄미의 경우 목장의 말을 길들이던 장소로 해석이 가능하나 용두봉과 앞의 산(사봉:蓑峯으로 추정됨)에 얽힌 용과 여의주의 전설을 부가시켜 옥룡(玉龍)으로 마을 이름이 결정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며
잉금이는 용이 새끼를 밴 형국의 지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한자 차음 시 망망대해와 은빛모래사장을 앞으로의 재산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익금(益金)으로 지었으리라 여겨지며,
진자무는 어느 시절의 소재지로 아니면 목장을 관리하던 병사들의 주둔지 로 진을 치고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나 금광을 개발하던 해변에 이어 금이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명명당시의 일인 관리들이 금장(金藏)으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정착촌으로 형성된 상동은 일제시대 같았으면 신기촌(新基村)등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나 1970년대 이후 생성된 행정마을이라서
금장의 위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상동(上洞)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