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충사 후문입니다.쌍충사를 활선어 위판장 쪽에서 올라가는 길 반대.. 북촌마을쪽에서 후문으로 올라가면 사진처럼 아담하게 공원이 꾸며졌습니다.
쌍충사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무신인 이대원(李大源)과 정운(鄭運)을 배향한 사우(祠宇). 지정번호 : 전남기념물 제128호 지정연도 : 1990년 2월 24일 소재지 :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2202 시대 : 조선시대 면적 : 850㎡ 1990년 2월 24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모충사에서 관리하며 면적은 850㎡이다. 봉암리 해안가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 앞에서 보면 녹동 항구와 소록도가 바로 보여서 전면의 자연 경관이 뛰어나다. 이대원의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호연(浩然)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고 1586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 1587년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았다. 이어 흥양(興陽)에 침입한 왜구와 손죽도(巽竹島)에서 싸우다 사로잡혔으며, 항복을 거부하여 살해되었다. 뒤에 병조참판이 추증되었다. 고향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으며, 선조가 사당을 지어 인근 주민들에게 향사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쌍충사의 전신인 이대원사당이다. 정운은 유성룡이 천거하여 1591년 녹도만호로 부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옥포·한산해전 등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였고, 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하였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부탁으로 1592년 그 위를 합향하였다. 이 사당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고 1681년(숙종 7) 사우 중건을 추진하였다. 1682년 임조·서봉영 등 호남유림 연명의 청액소를 올려 1683년 쌍충사로 사액되었다. 1735년(영조 11) 보수하였고 1868년(고종 5) 전국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22년 고흥향교의 선비들이 힘을 합하여 강당을 짓고 1924년 신실까지 지었으나 1942년 일본인들이 다시 폐허화하였다. 1947년 녹도 쌍충사 복구 기성회가 조직되어 1957년 신실과 강당을 다시 지었다. 건물은 1947년에 중건된 사당과 1957년에 건립된 강당, 사각대문, 관리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당의 좌향은 임좌병향이며, 건물은 맨 위쪽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사당을 배치하였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며 겹처마로 꾸민 팔작지붕이다. 사당과 2.5m의 지반 차이를 두고 이루어진 아래단의 왼쪽에 동향으로 놓여 있다. 대지 오른쪽 밑에 강당과 마주보며 관리사가 있다. | |||
이대원 [ 李大源 , 1566~1587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 함평 별칭 : 자 호연 활동분야 : 정치 본관 함평(咸平). 자 호연(浩然). 1583년(선조 16)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586년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다가 같은 해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 1587년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수사(水使) 심암(沈巖)에게 압송하였다. 그러나 전공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심암의 부탁을 거절하는 바람에 미움을 샀다. 이어 흥양(興陽)에 침입한 왜구와 손죽도(巽竹島)에서 싸우다 사로잡혔으며, 항복을 거부하였으므로 살해되었다. 한편 남해안의 왜구를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은 사실과 심암의 행패가 관찰사의 장계로 조정에 보고되었으며, 이에 따라 심암은 파면되고 그는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명령이 도달하기 전에 죽었으므로 병조참판이 추증되었다. 고향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으며, 흥양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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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 鄭運 , 1543~1592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 하동 별칭 : 자 창진, 시호 충장 활동분야 : 군사 출생지 : 전남 영암 본관 하동(河東). 자 창진(昌辰). 시호 충장(忠壯). 영암(靈巖) 출생.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웅천현감(熊川縣監)을 지냈다. 제주판관(濟州判官) 때 목사(牧使)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녹도(鹿島)만호가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도대첩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부산포해전에서 추격 도중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며,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영암의 충절사(忠節祠), 흥양(興陽)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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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배지붕 지붕의 완각이 잘려진 지붕. 가장 간단한 지붕형식이며, 지붕면이 양면으로 경사를 지어 책을 반쯤 펴놓은 八자형으로 되었다. 정면에서 보면 장방형의 지붕면이 보이며, 측면에서는 지붕면 테두리(내림마루)가 보일 뿐이다. 맞배지붕은 측면 가구(架構)가 노출되므로 측면관(側面觀)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는 수덕사 대웅전(修德寺大雄殿:국보 49)·무위사 극락보전(無爲寺極樂寶殿)에서 볼 수 있듯이 처마의 양끝이 조금씩 치켜올라가고 용마루선 역시 중앙부를 처지게 하여 서로 어울리게 하고 있다. 이것은 만약 용마루선과 처마선이 수평으로 되면 부자연스럽게 처져 보이는 것을 역으로 더한층 처지게 하여 교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상류주택의 행랑채와 서민 주택의 몸채에 이용되었다. | |||
팔작지붕[ 八作- ] 한식(韓式) 가옥의 지붕 구조. 합각(合閣)지붕·팔작집이라고도 한다. 지붕 위까지 박공이 달려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루고 처마끝은 우진각지붕과 같다. 맞배지붕과 함께 한식 가옥에 가장 많이 쓰는 지붕의 형태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