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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는 뭐 날 잡아서 치는 것은 아니고 바람 부는 날이 농악 흐는 날이여. 바람 불문 바닷일을 못 흔께 사람들이 모타져.” 월포농악 시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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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농악복을 입으문 귀찮애, 귀찮애서 ‘쟁’을 못 쳐.” 나이가 들어 힘에 부쳐도 김금암 할아버지 징소리에는 여전히 신명이 넘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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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 달갯재에 서니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고흥 금산면 신평리 월포마을.
거금팔경 중 하나인 ‘月浦歸帆(월포귀범, 월포 갯가에 앉아 먼 바다에 나갔던 돛단배가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는 정취)’이 절로 떠오른다. 월포는 거금도 동북쪽에 위치한 해안마을. 마을 포구가 반달형이어서 ‘달개’마을이라고 했다는데 그 말이 딱 맞구나 싶다. 달개마을로 부르다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옛지도에 ‘월포(月浦)’로 표기되어 있어 195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월포마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달개마을’이라고 한다. 뒷산인 적대봉(赤台峰, 마을 사람들은 ‘코뚜레 몰랑’ 혹은 ‘탱자골’이라고도 불렀다)과 앞산인 오룡등, 달개등(마을 사람들은 ‘섬바구등’이라고도 불렀다)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바닷바람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지붕이 낮고 서로 가깝게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처럼 80여 호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골목길도 유별나게 좁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바람이 원체 많이 들어”라던 마을 사람들의 얘기가 이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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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월포굿은 벅구 장단이 제일이여.” 벅구를 들고 장단을 맞추는 신상인 할아버지. |
“우리 월포굿은 벅구를 많이 해”
한줌도 아깝고 귀한 오후의 햇볕을 안고 김금암(86) 할배가 돌담집에 앉아 있다.
“이따가 당산거리에서 굿 친께 놀러와.”
50년을 넘게 월포농악단에서 징잽이로 활동하고 있는 할배였던 것이다.
“나가 쟁(징)을 50년 동안 쳤어. 인잔 늙어갖고 쟁이 무거서(무거워서) 들기도 힘들어.”
흰머리를 날리며 두 손을 모아 다소곳이 햇빛바라기를 하고 있던 할배는 조용하게 시선을 멀리 둔다.
“쟁소리가 보통 좋은 게 아녀. 시작이고 끝이거든. 굿에서 쟁이 빠지문 시체고.”
황성남(66) 할배가 마당으로 들어선다.
“이 어른이 평생 동안 징만 치던 어른이요. 근디도 아직꺼정 장학생이란 말이요. 문화재가 되야 헐 것인디 아까와.”
월포농악은 1994년에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됐다. 일반인들이 아는 인간문화재 즉 기능보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할아버지는 월포농악의 전수 장학생이었던 것이다.
“원래 우리 동네는 요 뒤 ‘코뚜레 몰랑’ 넘어 오룡동에서 시작되었어. 지금은 세 가구 뿐인디 거그서부터 오늘날까지 한 200여 호가 확산이 된 거제. 양주 허씨, 청주 한씨가 들어와 입촌이 되었다고 흔디 지금은 없고 열두 성바지가 항꾸네 모타서 살제.”
“언제부터 메구를 쳤는디는 모르제. 한 이백 년 되었다고도 헙디다만 정확히는 모르고 그냥 옛날 어른들이 치던 거 보고 우리도 따라 치고 했을 뿐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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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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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 소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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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인(79) 할배가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우리 월포굿은 벅구를 많이 해. 벅구 알제? 북보다는 작은 것인디 소구보다는 더 크제. 벅구를 많이 흐는 것이 우리 동네 굿의 특징이여.”
벌써 어르신의 몸짓은 벅구 가락을 따라가는 것처럼 약간씩 흔들거린다.
“이 어르신 벅구는 최고여. 얼매나 멋진지 몰라. 보는 사람들이 환장허제.”
“우리 동네는 뭐 날 잡아서 치는 것은 아니고 바람 부는 날이 농악 흐는 날이여. 바람 불문 바닷일을 못 흔께 사람들이 모타져. 우리 동네가 매생이 원조 동네여. 그래서 바람 불문 암 것도 못해.”
“그래서 우리 동네 농악단은 우리 동네 사람들만 있어. 한 50여 명 되는디 앞으로가 걱정이여.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야 쓴디, 사람이 있어야제. 다 묵고사는 디 바쁘다고 정신들이 없는디 어디 농악에다 신경쓰겄어. 큰일이여 큰일.”
월포농악의 가장 큰 특징은 ‘문굿’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기를 세우고 두 줄로 늘어서서 농악을 치는 문굿은 고흥 이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소멸되었기 때문에 월포에서 전승되고 있는 의미가 더욱 크다. 이 문굿은 마당밟이 때 집 앞 문에서 치는 문굿과는 다른 것으로 한바탕의 놀이판 전부를 일컫는 이름이며 높은 기량이 요구된다.
한바탕 농악 뒤에 함께 나누는 매생이국 한 그릇
마을에 교회가 있어 물었다. 1983년도에 설립된 교회란다.
“우리 교회 목사 괜찮은 양반이여. 직접 농사도 지서.”
신도는 마을 사람 16명인데 대부분 칠팔십대 노인들이란다. 마을행사나 마을 사람들 대소사가 있으면 목사가 찾아오는 등 마을 사람들과 유대가 좋다고 말했다. 20여 년 전 월포교회로 부임한 강태봉 목사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매실을 생산하여 수익을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섬 교회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립한 몇 되지 않은 교회라고 한다.
이 때 마을 스피커에서 “농악단원들은 전수관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마을 아낙들이 매생이국을 끓여서 쟁반에 받쳐들고 전수관(월포문굿농악전수관)으로 가져간다며 종종걸음을 친다. 농악복을 입은 마을 사람들이 겨울바람을 맞으며 당산거리로 모여들고 있다. 바람소리에 쇠, 장구, 북 소리가 한데 섞여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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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여 호 집들이 서로 가깝게 어깨를 맞대고 사는 월포마을 전경. |
바삐 당산거리로 달려가니 이미 농악은 시작되었다. 마침 월포농악의 시연회가 있었던 것이다. 주민들 50여 명이 고깔을 쓰고 신명나게 농악을 친다. 김금암 할배도 신명나게 ‘쟁’을 친다. 할아버지는 농악복을 입지 않았다. 왜 농악복을 입지 않으셨냐고 물으니 “난 농악복을 입으문 귀찮애, 귀찮애서 ‘쟁’을 못 쳐” 하신다.
나이가 들어 힘에 부쳐도 할아버지 징소리는 여전히 신명난다. 차가운 날씨에도 마을 사람들도 많이 나와서 구경하고 있다.
신상인 할배가 벅구를 들고 장단을 맞춘다. 부드럽고 가벼운 벅구 장단에 마을 사람들의 입장단이 더해져 더욱 신명난다. 신상인 할배는 살랑살랑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흥을 높인다. 평생 벅구만 치던 어르신의 몸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런 몸짓과 가락인 것이다.
“우리 월포굿은 벅구 장단이 제일이여.”
기팔호(82) 할배도 벅구를 들더니 신상인 할배와 함께 맞장단을 친다. 마을 주민들이 ‘어잇!’ 하고 추임새를 넣는데 보통 신명나는 게 아니다.
“아이구, 인자는 늙어갖고 못해.”
이내 신상인 할배가 상기된 표정으로 가픈 숨을 몰아쉰다.
농악 시연회를 마친 뒤 주민들이 함께 모여 따뜻한 매생이국을 한 그릇씩 나누고 있다.
“우리 동네가 매생이 원조”라고, 매생이 자랑이 또 한바탕 흐드러진다. 당산거리 당산나무를 할퀴고 지나는 겨울바람은 차갑지만 매생이국을 함께 나누는 주민들의 마음은 따뜻하게 덥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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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당산거리 당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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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너머 빨래 널린 정경에 사람 사는 집의 훈짐이 피어오른다. |
글·사진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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