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언론인이 나를 취재했고 거쳐 갔지만 그중 잊을 수 없는 언론인이 있다. 일간스포츠 전 편집국장을 역임한 박정수씨다. 1994년 당시 한국일보 사회부장이었던 박 국장은 일본 후쿠오카병원에서 투병하고 있는 나를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 주역이다.
내가 일본 후쿠오카에서 투병 생활하는 것을 한국에서는 몰랐다. 후쿠오카로 여행 온 한 재미교포가 삼중스님에게 이같은 사실을 전하면서 알려졌다. 삼중스님은 내가 일본에서 투병 중이란 충격적 사실을 평소 절친했던 박 부장에게 알렸다.
그때 박 부장은 삼중스님에게 "국민 영웅이었던 김일 선수가 일본에서 투병 생활하는 것은 국민적 수치며 자존심이 상한다"며 "일본에 가서 한국으로 반드시 모시고 와야 한다"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박 부장은 나의 귀국에 보탬이 됐으면 한다는 뜻으로 삼중스님에게 100만원을 쥐어 줬다.
일본에 온 삼중스님은 나에게 "한국 정부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 대신에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라고 말하자 삼중스님은 의아해 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일제 강점기 시절, 어느 날 일본 순사가 나의 집을 지나치다가 진돗개를 보고는 공출을 빌미로 빼앗아 갔다. 하지만 그 개는 다음날 아침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도망쳐 왔다.
기쁨도 잠시, 성난 순사가 개를 찾으러 다시 집에 왔고 그 개는 나를 쳐다보고 울부짖으면서 목을 끌린 채 순사에게 끌려갔다. 결국 진돗개는 일본군 군용 방한복이 된 채 죽임을 당했다.
일본에서 투병 생활을 하면서 순사에 의해 끌려갔던 그 진돗개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의리와 충정의 그 진돗개 넋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워 주고 싶었기 때문에 김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부탁했다.
삼중스님은 나의 이런 바람과 투병 생활을 박 부장에게 알렸고, 얼마 후 한국일보 보도를 시작으로 한국의 언론들이 잇따라 기사화했다. 그때 박 부장은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에게 나의 입원 치료를 부탁했다.
어릴 적 나의 열렬한 팬이었던 박 이사장은 혼쾌히 이를 수락한 후 94년 1월 삼중스님과 함께 후쿠오카로 왔다. 그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지금까지 을지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호탕하고 적극적 성격이었던 박 부장은 2001년 작고했다. 틈만 나면 병실로 찾아와 나의 건강을 걱정하며 얼마의 돈까지 쥐어 줬던 박 부장이 늙고 병든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뜰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고 보니 나의 눈물은 모두 이별과 닿아 있다.
63년 12월 스승 역도산의 사망, 78년 3월 군 복무 중이던 막내 아들 사망,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서거, 그리고 박 부장까지 이승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이들을 만나러 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난 경기 중 맞아서 운 경우는 없다. 정에 약하고 마음이 약해서인지 이별할 때만은 펑펑 울었다. 나의 청춘을 불살랐던 사각의 링을 떠날 때였다. 95년 4월 2일 도쿄돔 은퇴식. 일본 스포츠 기자단들이 나의 은퇴식을 마련해 줬다.
그날 도쿄돔은 6만 명의 관중으로 초만원을 이뤘다. 투병 중이라 링까지 혼자 걸어 들어갈 힘이 없었다. 왕년의 숙적 루 테즈와 후계자 이왕표가 휠체어를 나눠 잡았다. 루 테즈도 레슬링 후유증으로 투병 중이었고 당시 그의 대퇴부는 인공 관절이었다.
내가 휠체어에 탄 채 무대로 입장하자 장내는 "오키, 긴타로~"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동문인 자이언트 바바를 비롯해 일본의 기자들과 팬들이 모두 기립 박수로 맞이해 줬다. 라이트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던 사각의 링을 비추었다.
잠시 후 나를 위한 공이 도쿄돔을 울렸다. 링 아나운서가 선창한 구령을 관중도 따라했다. "원, 투, 쓰리, … 텐." 카운트가 끝난 순간 적막이 흘렀다. 열을 셀 동안 링에서 내려가지 못한 난 뜨거운 울음을 터뜨리며 링을 떠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