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이언트 바바·안토니오 이노키·맘모스 스즈키. 스승 역도산은 프로레슬링의 또다른 흥행을 위해 '신 4인방 체제'를 구축했다. 네 사람중 가장 연장자는 나였다. 덩치가 크고, 키 큰 선수들은 투지와 끈기가 약간 떨어진다. 스승은 그 끈기를 갖도록 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훈련시켰다. 스승이 구두를 신을 때 네 명 중 한명은 잘 신을 수 있도록 신발을 앞에 내놓는다. 그러면 갑자기 발로 얼굴 혹은 몸통을 가격하곤 한다. 그럴때면 난 이들에게 "이런 시련을 견디지 못하면서 무슨 레슬링을 하겠다고 하느냐"며 질책과 격려를 했다. 선수가 훈련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프로레슬링 선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야구나 축구 등 다른 운동 종목 선수들도 불만을 제기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스승이 훈련시키는 것은 국제적 선수로 키우기 위한 일환이었지 별뜻은 없었다.
하지만 냉혹한 프로레슬링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나이는 숫자일뿐이고 경쟁에선 나이가 밥먹여 주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링 밖에선 나를 선배로 깍듯이 모셨지만, 링만 올라 가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그러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링밖에선 이들이 후배로 보였지만, 링위에선 반드시 꺾어야 할 적수였다. 네 사람은 자신만의 독특한 전매특허 기술을 갖고 있었고, 개성이 남달랐다.
나의 트레이드 마크는 박치기였다. 또 자이언트 바바는 로프로 밀친 후 반동으로 튕겨져 나오는 상대를 큰 발로 킥하는 16문킥, 이노키는 코브라 트위스트, 맘모스 스즈키는 보디슬램이 탁월했다.
스승은 네 사람을 각자의 특기를 살린 기술 배양에 앞장서도록 했지만 늘 강조한 것은 투혼과 투지였다. 스승은 프로 레슬링 선수의 첫째 조건으로 체격을 강조했다. 기술은 그 다음이었다. 하지만 이들도 끈기와 투지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또 윗옷을 주더라도 그렇다. 옷을 드리면 옷을 입는 척 하고 팔꿈치로 상대를 가격한다. 사실 이런식으로 한방 맞으면 기분이 상한다. 스승이 이렇게 갑자기 때리는 것은 레슬링은 언제 어디서든 갑자기 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비의 습관화를 길러준 것이었다.
이런 것은 또 인내심이 요구된다. 인내심을 기르도록 하기 위해 스승의 훈련은 도장이든 밖이든 훈련의 생활화가 되도록 했다. 자고로 스승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서로가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했다. 이는 존경의 의미도 있지만 옆에 있으면 날벼락을 맞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었다.
1960년 9월30일 이노키와 바바가 데뷔전을 치른 후 스승은 네 사람을 국제적 선수로 키우기로 결심을 굳혔다. 프로레슬링의 참된 시련은 이제부터였다. 난 스승의 트레이닝 스타일을 잘알아 그런대로 참고 견뎠다. 하지만 세사람은 달랐다. 오죽 그 훈련이 가혹했으면 스즈키는 달아나기도 했다. 또 바바도 "프로야구 훈련도 힘들지만, 프로레슬링이 이렇게 힘든 운동인 줄 몰랐다"면서 "솔직히 그만 두고 싶다"라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어린 이노키도 불만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스승은 우리들을 훈련시키면서도 경기에 출전하는 것을 미루는 경우가 없었다. 1960년 1월경 스승은 미국의 흑인 레슬러 리기 왈드와 경기를 했다. 이 경기에서 한번은 무승부, 또 한번은 스승이 이겼다. 그런데도 리기 왈드는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계속 도전을 신청했고, 그럴 때면 스승은 받아주었다.
리기 왈드는 박치기 명수였다. 아마도 동양에서 최고의 박치기가 나였다면, 서양 박치기 왕은 단연 리기 왈드였다. 그의 머리가 얼마나 돌이냐면 돌도 두조각으로 쪼갠다는 스승의 가라데 촙을 수십번 맞아도 끄덕하지 않을 정도다. 그와 내가 맞붙은 적이 있다. 소위 서양의 해머와 동양 해머간의 한판 대결이었다.<계속>
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44]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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