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문제 등 일본과의 갈등과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KBS, 불멸의 이순신)의 영향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영원한 스승이고 지고한 영웅이신 이순신 장군이 새삼스럽게 부각되고 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만약에 장군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한민족의 존재는 역사속에서만 있었다고 조그만하게 기록될 뻔 했던 민족 존립의 가장 위급한 시기에 장군께서는 국가와 민족을 구원하신 성웅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과정에서 23번의 왜병과의 해전 승리중 우리들의 고향 절이도(거금도의 조선시대 지명) 인근에서 왜선 50여척을 수장시킨 큰 규모의 승전보가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역사에 아주 간단하게만 기록되어 있어 이순신 장군의 전기에 절이도 해전의 규모만큼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금산 출신 우리 모두가 안타까워 할 따름이다. 제대로 부각되었다면 배천이나 신양부락 부근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라도 세워져서 우리의 고향을 외부에 알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그러면 절이도 해전에 대해 부족한 자료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모든 관련자료를 전부 동원하여 1. 절이도 해전"을 재 구성해 보고 다음으로 2. 절이도 해전의 의미"를 살펴 본 다음 마지막으로 3. 절이도 해전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차례대로 설명해 보겠다.
#1 ▲ 불멸의 이순신 62회(2005년 4월3일) 중에서 절이도 부분해설
위 녹음내용 불멸의 이순신 대사보기
임진년 개전이래 첫 승전이자, 이순신의 첫 승전인 옥포해전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순신과 첫번째 교전을 벌였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그는 일본의 수륙 병진 전략을 위한 선봉 수군이었다. 그러나 그의 수군은 전멸하다시피 했으며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는 전선을 모두 잃고 육상으로 도주하기에 이른다 후일 그는, 칠천량 해전에 참가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세우게 되나
명량과 절이도 해전에서 다시 이순신과 만나게 되니 실로 질긴 악연의 시작이 아닐 수 없었다.
도원수 권율과 명군 제독 마귀 등이 이끄는 조명 연합군 육만 대군은 일본군 제 1군 선봉장 가토가요마사가 주둔한 울산성 포위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중략]-------------------
이영남(E) 함대를 절이도로 전진배치 하라 하셨습니까?
19. 회의 군막(낮)
중앙에 앉은 순신..그 앞에 권준, 이순신(동), 황세득, 이영남, 우치적, 김완, 나대용, 송희립, 서군관 등 앉아 있다.
순신 (끄덕인다.) 우리 수군이 울산성에서 분전하는 아군을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네.
장수들(보는데)
순신 조선 수군의 함대가 절이도로 전진배치 되면..적은 쉽사리.. 울산성으로 원군을 보낼 수 없을 것이야.
권준 만에 하나 왜교성을 비우고 지원을 한다면..그 또한 나쁜 일은 아니지요. 그때 왜교성 신성포로 진격.. 함대를 궤멸시킬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순신 (끄덕인다.)황첨사와 이첨사가 일단 사도군과 가리포군을 이끌고 가 주시오.
이영남 알겠습니다, 장군.. 황세득 그리하지요. 순신 그리고 조방장.. 김완 예, 장군.. 순신 인근 바다를 탐망하여.. 적의 움직임을 보다 주밀하게 살펴주게. 적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전함대를 즉시 투입할 수 있도록 말일세. 김완 잘.. 알겄구만이라. 순신 (끄덕인다.)
위의 글은 바쁘신 와중에도 불구하고 장문의 글을 작성하시어 우리 모두에게 읽음의 기쁨을 전하시려고 병옥형님께서 자유게시판에 올려 놓으신 글을 우리동네 카페에 옮겨왔으니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시고 댓글들도 달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동네 선,후배님들 활기찬 우리동네 카페를 꾸려보자고요. 늘 건강하시고요....
오래 만에 오셔네요 우리 고향에 역사에 글을 읽으수있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향상 살기 바빠서 발버둥 칠줄만 알아는데 이소중한 절래을 모르고 살아는데 만약 우리고향이 역사에 한페이지였다면 아쉬움이 났습니다 우리 마을에 이렇게 밝은 불이 커 있으니 오빠 참좋다 언제나 행복하고 건강하시요...
이런 놀라운 일이 역사에 있었다니 참으로 가슴에 새겨둘 일입니다. 요즘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역사에 이토록 백성을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나 가슴 뭉클할 때가 많았는데 우리 고향과 관련된 "절이도해전"이라...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시고, 고향사랑도 전해주신 대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금매 분명히 이순신자군 께서 금산 어딘선가 왜군을 작살냈을 끈디. 항상 속 으로만 생각해 왔고. 왜! 하필 이쪽만 빠졌을까 생각했는디. 이 글이 분명 할 거요. 겁나게 애썻소. 금산 갱본에 생선 맛이 좋은 것이 그때 왜놈 잇갑이 워낙 좋아서 그 맛이 유전되어 전국에서 괴기 맛이 최고제라 암요 고생 겁나게 허벌나게 엄청시럽게 애썻소 . 속이 후련해부요
어제 방영된 이순신)서 "절이도 해전" 장면이 나옵디다. 때는 1598년 7월 19일 장소는 녹동에서 월포를 지나 명천 앞 바다 즘으로 보임(화면에 비춰주는 해전도 상) 적선이 100척, 우리 함대는 80여척 명나라의 진린이 처음으로 출전하였으나 직접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음 왜장 도도가 맨날 이순신에게 당하여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질책을 당하고 이 전 투를 승리하여 명예를 회복하기 최선을 다함 그러나 왜군은 대패하였고(적선 59척이 소실, 사망자 16,667명),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풍신수길은 실권하게 되고(그 해 8월 사망) 왜군은 철군을 하게 됨 이때부터 일본의 정권은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쥐게 됨.
결국 절이도해전은 1592년에 시작된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을 철수하게 하는 마지막 큰 전투였으니 전쟁사 및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인데 아쉽게도 사료가 없음을.......
김병옥님께서는 절이도해전을 신양 앞 바다 내지는 익금 앞 바다라고 추측하였는데 그 근거를 이순신의 본진이 고금도에 있었고 그래서 함대가 고금도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이었는데 어제의 극에서는 이순신은 본진영은 고금도에 두었으나 이 전투를 염두에 두고 미리 본진을 녹도(현재 녹동)으로 비밀리에 옮겼다는 것으로 해설하였음을 밝힙니다.
절이도 해전 장소가 어느 바다였느냐? 는 지금 현재로서 사료가 불충분하여 명확하게 단정할 수가 없어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근거로 추정할 수 밖에 없는데
절이도 해전 바다를 추정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사료의 근거는 절이도 해전 승전이유를 절이도해전 과정에서" 좁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해전을 펄쳐 크게 승리하였다는 기록을 비추어 해전장소를 생각해 볼때 고라금이나 배천 앞 바다가 가장 적합하게 들어 맞는다는 생각이다.
절이도 해전무렵에 이순신장군께서는 수군통제영을 고금도에 두고 벌교부근에 주둔한 왜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왜군이 출동할 기미를 보이자 장군께서는 수군을 금당도에 전진 배치하여 두고는 *8.14일 방영 "불멸의 이순신" 극에서는 녹도(녹동)에 전진 배치하였다고 했으나 다른 자료에는 금당도에 전진 배치하였다고 하고 있음 왜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왜군이 나라도를 거쳐 명천과 신평 앞바다를 지나 금진과 소록도(또는 소록도와 녹동) 바다 사이로 빠져 나오자 금당도에 전진 배치된 이순신장군의 수군이 출동하여 고라금(배천) 앞바다에서 해전이 개시되었으나 왜군은 앞에는 이순신장군의 수군이 공격을 하고 뒤에는 100 여척의 함대가 일시에 빠져 나갈 수 없는 금진과 소록도 사이의 좁은 수로(水路)가 막혀 있어서 자유롭게 기동을 할 수 없는 왜군이 참패를 하였다는 추정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금당도가 아닌 녹도(녹동)에 전진 배치하여 절이도 해전 바다 위치가 명천이나 신평 앞바다라고도 추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나 이 추정에는 모순이 몇가지가 있다.
제일 먼저 사료에 기록된 좁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절이도 해전을 대승하였다는 기록에 결정적으로 해전장소를 명천이나 신평 앞바다라고 하기에는 대비가 불가능하다. 특히, 명천 앞바다를 좁은 바닷길이라고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전세가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왜군은 조금만 후퇴를 해서 나라도쪽으로 빠져 나가면 이순신 장군께서는 더 이상의 추적이 어려워 절이도 해전의 대승은 불가능했으리라 본다.
둘째로 이순신 장군께서 금당도가 아닌 녹도(녹동)에 전진 배치했다는 주장은 불합리하다. 임진왜란의 전과정을 보면 장군께서는 전락적으로 수군을 가급적 섬에 주둔시켰지 육지에는 주둔시키지 않았으며 육전에 강한 왜군의 대군이 한나절 거리의 벌교에 주둔하고 있는데 주위의 섬이 많은데 굳이 기습 위험을 무르쓰고 녹도에 전진 배치했다는 추정은 아주 불합리하다. 그래서 녹도에서 왜군을 기다리다 명천이나 신평 앞바다에서 해전을 벌였다는 추정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그 당시 우리의 고향 절이도는 거의 버려진 땅이였고 명천이나 신평 건너편에는 수군기지가 있었던 녹도와 발포가 있어 만약 절이도 해전이 명천이나 신평 앞바다에서 전개되었다면 그 해전 명칭은 절이도 해전이 아닌 녹도해전이나 발포해전으로 기록되었으리라 확신해 본다. 그래도 알려진 녹도나 발포가 있는데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절이도"라는 명칭을 붙여 전승 기록을 남긴 것은 "절이도"라는 명칭을 붙일 수 밖에 없는 해전장소였으므로 절이도 해전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여지므로 절이도 해전 위치는 고라금이나 배천 앞바다라고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멸의 이순신" 극은 우리의 고향 부근에서 촬영한 것이 아니라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촬영하였으므로 극중에서 절이도 해전장소가 신평이나 명천 앞바다라고 보여 절이도 해전 장소를 신평이나 명천 앞바다라고 추정한다는 것은 더욱 더 불합리함을 밝힐 수 밖에 없다.
장문의 글을 작성하시어
우리 모두에게 읽음의 기쁨을 전하시려고
병옥형님께서 자유게시판에 올려 놓으신 글을
우리동네 카페에 옮겨왔으니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시고 댓글들도 달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동네 선,후배님들 활기찬 우리동네 카페를
꾸려보자고요.
늘 건강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