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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중촌(中村) : 본래 대망천(큰망내) 마을의 일부였다. 대흥리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중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2005.05.03 17:23

절이도 해전

조회 수 26832 추천 수 0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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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문제 등 일본과의 갈등과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KBS, 불멸의 이순신)의 영향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영원한 스승이고 지고한 영웅이신 이순신 장군이 새삼스럽게 부각되고 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만약에 장군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한민족의 존재는 역사속에서만 있었다고
조그만하게 기록될 뻔 했던 민족 존립의 가장 위급한 시기에 장군께서는 국가와 민족을 구원하신 성웅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과정에서 23번의 왜병과의 해전 승리중
우리들의 고향 절이도(거금도의 조선시대 지명) 인근에서 왜선 50여척을 수장시킨 큰 규모의 승전보가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역사에 아주 간단하게만 기록되어 있어 이순신 장군의 전기에 절이도 해전의 규모만큼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금산 출신 우리 모두가 안타까워 할 따름이다.
제대로 부각되었다면 배천이나 신양부락 부근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라도 세워져서
우리의 고향을 외부에 알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그러면 절이도 해전에 대해 부족한 자료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모든 관련자료를 전부 동원하여
1. 절이도 해전"을 재 구성해 보고 다음으로
2. 절이도 해전의 의미"를 살펴 본 다음 마지막으로
3. 절이도 해전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차례대로 설명해 보겠다.

1. 절이도 해전

 

1. 절이도 해전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탐욕으로 발발한 임진왜란이 1596년 불안정한 강화조약으로
 왜병이 철수하여 전란이 끝난듯하자
조선 조정은 이순신장군을 역적으로 몰아 붙여 무지한 고문을 가하고 끝내는 죽이려 하였으나
1597년 일본과의 강화조약이 결렬되면서 정유재란으로 왜병이 조선 산하를 또 다시 짓밟아 오자
조선의 위정자들은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지낸 장군을 아무런 직위도 없이 백의종군하게 하다가
원균 장군이 왜병에게 산산히 부수어져 버리자 (칠전량 해전에서 전멸)
할 수 없이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임진왜란 기간중에는 장군께서는 군량과 병사들의 공급처였던 전라도가 무너지면
조선은 망한다는 신념으로 전라도를 굳게 지켰으나
원균이 지휘한 칠전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전멸당하면서
왜병은 전라도를 휩쓸어 버리고자 전라도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기 시작한다.
 
이에 통제사로 복귀한 장군께서는 전라도의 마지막 방어선인 해남과 진도사이  바다인
명량(울돌목)에서 마지막 남은 전선 12척으로 200여척의 왜선을 격퇴하면서 전라도의 최후 방어선을 지켜내고
왜병을 부산쪽으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명량해전 승리후 장군께서는 지휘본부를 완도군 고금도로 옮겨 벌교 부근에 주둔한 왜병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1598년 7월 18일 왜병의 100여척의 함대가 절이도 쪽으로 이동중이라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은 장군께서는
함대를 일단 금당도로 옮겨 왜선의 이동을 주시하다가
그 다음날 새벽(1598년 7월 19일)왜선이 녹동과 절이도를 통과하자
장군께서는 함대를 출동시켜 배천과 고라금 앞바다를 지나는 왜 함대를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함대에 선두에 서서 공격하여 100여척의 왜군의 함대중 50여척을 수장시켜 버리는 대승전을 거두게 된다.

*참고로
우리가 잘아는 한산대첩에서는 70여척, 명량해전에서는 30여척의 왜선을 수장시켰다.
100여척의 일본 함대는 16,000명의 왜군이 승선해 있다고 추정이 가능하므로
그 중에서 50여척의 왜선이 수장되었다는 전과로 볼때 왜군 8,000여명 이상이
절이도 인근 바다의 고기들에게 양식으로 제공되었다는 계산이 되므로
절이도 해전이 끝난뒤 절이도 주민들은 밀려드는 왜군 시체더미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시기는 더운 여름이었으므로 더욱 그렇다.
또한 장군의 투철한 애민정신으로 해전이 끝난뒤 절이도에 상륙하여 절이도 주민의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를 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보여진다.
장군이 초급장교 시절 녹동에서 포두쪽에 있는 발포만호를 역임한 적도 있고
그 뒤로도 녹동부근의 둔전을 관리한 적도 있으므로 그 이전에 이미 절이도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절이도 해전이 끝난뒤 절이도에 상륙했을 가능성이 너무 많다고 보여진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절이도 해전기록에는 해전장소가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아   
정확하게 해전이 벌어진 바다 위치는 알 수가 없다.   

해전장소가 배천이나 고라금 앞바다라고 추측한 것은   
본인이 "이순신의 리더쉽(이선호 著)"과 "불멸의 이순신(김탁환 著)"을 참조하고   
이순신의 함대 100여척과 왜선 함대 100여척 도합 200여척이 어우려저  해전을 벌일 절이도 인근 바다는
본인이 추정하는 배천과 고라금 앞바다라고 보아  그렇게 재구성해 보았으니 이 점은 양해하기 바란다.   
다만, 다른 측면에서는 익금이나 옥룡 앞바다에서도  절이도 해전이 벌어질 장소적으로는 합당하나   
왜선이 굳이 육지와 가까운 항로를 두고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이순신 함대를 생각해 볼때   
그렇게 먼 바다로는 항해하지 않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다른 작가나 학자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다.


 

2. 절이도 해전의 의미

 

2. 절이도 해전의 의미

 

절이도 해전결과 이순신 장군은 적함선 50여척을 격침시키고 이와 함께 수많은 왜적(많게는 수천명)을
절이도 앞바다의  물고기 밥으로 아낌없이 주는 전과를 기록하면서도 아군은 단 한척의 군선 피해도 입지는 않았으나
병사들은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 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군의 사상자 숫자로 볼때는 명량해전(10명이내)보다도 더욱 치열한 해전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더구나 명량해전은 군선 수로는 10/1의 열세적인 상황에서 치른 해전이었음에도 아군 사상자가 매우 적었으나
절이도 해전은 군선 수로는 쌍방이 비슷하게 100여척으로 싸운 해전이었으나 사상자가 그많큼 많이 발생한 것은
지리적인 여건이 달랐다 할지라도 그 만큼 치열한 해전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어쨌든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절이도 해전의 대승으로 왜군은 두번 다시는 수군을 동원하여
해전을 벌일 전투력은 물론 그 기세가 완전히 꺽여져서 벌교 부근의 왜성으로 깊숙하게 잠적하게 되었으며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도에서 고흥반도와 절이도까지 확장하므로써
전라도 지방을 거의 수복함과 동시에 전선을 여수반도와 광양만으로 이동시켜 벌교부근에 주둔한 일본 주력군을
공격할 위치를 확보하면서 그 기회를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정유재란의 발발후 밀리기만 하던 전선을 이제는 수비에서 벗어나 왜병을 부산쪽으로 몰아 부칠
공격적인 자세로 역전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우리의 선조들인 절이도 주민들은 왜병의 그늘에서 벗어 났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절이도 해전이 1598년 7월 19일 새볔부터 개시되었다고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이후 왜란 과정에서 19일은 많은 달의 날과 겹치게 된다. 첫째로 기록에는 없으나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순신 장군이 이 날 절이도에 상륙하였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며
한달후인 8월 19일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4개월후인 11월 19일날 우리들의 영웅이신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적의 조총에 의해 해전이 거의 끝날 무렵 아깝게 순직하게 된다.



3. 절이도 해전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

 

3. 절이도 해전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

 

절이도 해전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몇가지가 있으나 임진왜란의 가장 방대하고 자세한 기록인
장군이 손수 작성한 "난중일기"중 절이도 해전을 전후한 부분이 망실되여 후세에 전하지 않고 있어
절이도 해전이 아주 단편적으로만 기록되는 결정적인 사유가 되버렸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초부터 1598년 노량해전에서 장군이 순직하기 얼마전까지
왜란에 관한 모든 것과 일상생활까지 일기형태로 손수 장군께서 기록하셨는데
안타깝게도 절이도 해전이 속한 기간인 1598년 2월부터 8월까지의 7개월간 "난중일기" 부분이 망실되여
후세에 전하지 못해  전세를 완전하게 역전시킨 절이도 해전기록이 자세하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난중일기"가 완전하게 보존되었더라면 이런 일도 실려 있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절이도 해전이 끝난뒤 장군께서는 우리의 고향 절이도에 상륙하여 해전중 부상자를 치료하게 하고
장병들을 격려하면서 어느 고을 누구 집에서 식사를 했다. 는 기록만 남아 있었다면
우리의 고향 금산은 우리가 객지에서 고향이 어디라고 누누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절이도가 고향이며
절이도 해전후 이순신 장군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병사들을 쉬게 했던 섬이라며 자랑 할 수 있었을 터인데
마치 우리들이 한산도를 한번도 가보지 못했어도 초등학교때부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이런 싯귀를 읊으면서
한산도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난중일기"중 절이도 해전부분이 망실 된 것이 생각하면 할 수록 아쉬움만 남는다.

둘째로 절이도 해전기록이 다른 사료에서도 다른 해전과 같이 세밀하게 기록해 두지 않았던 이유는
절이도 해전시기가 장군이 복권되어 처음으로 왜병을 크게 무찌른 명량해전과 장군이 마지막으로 왜병을 수장시키고
장렬하게 순직하신 노량해전의 틈에 끼여 있어 절이도 해전 앞뒤로 보다 큰 의미의 해전이 있었던 관계로
 절이도 해전이 큰 규모의 해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군이 또 한번 승전한 해전의 하나로만 축소되어
절이도 해전기록을 간단하게 기록해 놓았으리리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이순신 장군이 절이도 해전에서 왜선을 향해 총통을 발사하여 깨부수고 있는 동안 처음 원군으로 참전한
명나라 해군 재독인 진린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면서도 참전하지 않고 있다가 장군이 지휘한 절이도 해전이
대승을 거두자 그때서야 나타나서는 장군이 거둔 전공을 탐내자 장군께서는 참전도 하지 않은 명나라 장수에게
왜병의 수급을 잘라 나누어 줄 수 밖에 없었던 미묘한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 즉, 명나라 장수를 임금 대하듯이 하라는
왕의 칙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명나라 장수의 치졸한 면을 자세한 기록으로 남겨 둘 수 없는 현실이
조선의 사가들에게 절이도 해전을 고의로 왜곡 또는 축소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후세 사가들이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에 본인은 전적으로 동조하면서 결과적으로 절이도 해전 기록은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게 되어 버렸다.   

  -   끝  -     감사합니다.


 




#1 ▲ 불멸의 이순신 62회(2005년 4월3일) 중에서 절이도 부분해설

 

위 녹음내용 불멸의 이순신 대사보기

임진년 개전이래 첫 승전이자, 이순신의 첫 승전인 옥포해전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순신과 첫번째 교전을 벌였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그는 일본의 수륙 병진 전략을 위한 선봉 수군이었다.
그러나 그의 수군은 전멸하다시피 했으며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는 전선을 모두 잃고 육상으로 도주하기에 이른다
후일 그는, 칠천량 해전에 참가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세우게 되나

명량과 절이도 해전에서 다시 이순신과 만나게 되니 실로 질긴 악연의 시작이 아닐 수 없었다.

[중략] .................

 




#2 ▲ 불멸의 이순신 98회(2005.8.7.일요일) - 절이도(거금도의 옛지명) 전진배치 명령하는 장군(재생버튼클릭)

 

위 녹음내용 불멸의 이순신 대사보기

 

해설        서기 1597년 정유년 12월 22일.

도원수 권율과 명군 제독 마귀 등이 이끄는 조명 연합군 육만 대군은 일본군 제 1군 선봉장 가토가요마사가 주둔한 울산성 포위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중략]-------------------     
       
이영남(E)   함대를 절이도로 전진배치 하라 하셨습니까?

 19.     회의 군막(낮)

        중앙에 앉은 순신..그 앞에 권준, 이순신(동), 황세득, 이영남, 
        우치적, 김완, 나대용, 송희립, 서군관 등 앉아 있다.

순신   (끄덕인다.) 우리 수군이 울산성에서 분전하는 아군을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네.

장수들(보는데)

순신   조선 수군의 함대가 절이도로 전진배치 되면..적은 쉽사리.. 울산성으로 원군을 보낼 수 없을 것이야.

권준   만에 하나 왜교성을 비우고 지원을 한다면..그 또한 나쁜 일은 아니지요. 그때 왜교성 신성포로 진격..
함대를 궤멸시킬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순신        (끄덕인다.)황첨사와 이첨사가 일단 사도군과 가리포군을 이끌고 가 주시오.

이영남      알겠습니다, 장군..
황세득      그리하지요.
순신        그리고 조방장..
김완        예, 장군..
순신        인근 바다를 탐망하여.. 적의 움직임을 보다 주밀하게 살펴주게. 
              적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전함대를 즉시 투입할 수 있도록 말일세.
김완        잘.. 알겄구만이라.
순신        (끄덕인다.)

 


#3 ▲ 불멸의 이순신 99회(2005.8.13.토요일) - 절이도(거금도의 옛지명) 해전 시작과 해전의 의의(재생버튼클릭)



 

 

 

▼ 불멸의 이순신 99회중 절이도 해전分 동영상 보기

 

 


 


jeolido_haejeo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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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길수 2005.05.03 17:27
    위의 글은 바쁘신 와중에도 불구하고
    장문의 글을 작성하시어
    우리 모두에게 읽음의 기쁨을 전하시려고
    병옥형님께서 자유게시판에 올려 놓으신 글을
    우리동네 카페에 옮겨왔으니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시고 댓글들도 달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동네 선,후배님들 활기찬 우리동네 카페를
    꾸려보자고요.
    늘 건강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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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적 2005.05.03 23:38
    너무나 자료가 부족한데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님의 탐구정신이
    남달리 강하다고 할 수 밖에.
    또한 없어진 사료에 대한 안타까움과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

    아까의 만남이 없었다면 다른 각도로 촌평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어쨓던 수고 많이 하였고
    예정하고 있다는 우리 금산의 역사에 대하여도 기대가 크네.

    나도 하루 빨리 끝내고 쓰고 싶은 글들을 쓸 수 있어야 할 것인데.........
  • ?
    양현 2005.05.04 02:41
    오랫만이어서 참 반갑습니다.
    가끔 올리시구요. 저도 여기서 요즘 보고 있는데 아직 전쟁 준비 중입니다.
  • ?
    선정호 2005.05.04 08:35
    선배님 지난 달 총회장에서
    뵙게되어 반가웠습니다.
    울 동네 선배님들
    자주 만나고 인사 나누며 삽시다.
  • ?
    동창생 2005.05.04 10:59
    참 반갑네요
    먼저 부락에 대한 글을읽었는데 많이 반성하고 ****
    앞으로 자주들어와 올려준 좋은 글들 부지런히 읽고 배워야겠네 ***
  • ?
    경숙 2005.05.04 19:06
    오래 만에 오셔네요
    우리 고향에 역사에 글을 읽으수있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향상 살기 바빠서 발버둥 칠줄만 알아는데
    이소중한 절래을 모르고 살아는데 만약 우리고향이
    역사에 한페이지였다면 아쉬움이 났습니다
    우리 마을에 이렇게 밝은 불이 커 있으니
    오빠 참좋다
    언제나 행복하고
    건강하시요...

    위에
    길수랑 정호 반갑다...........
  • ?
    김만성 2005.05.27 00:37
    이런 놀라운 일이 역사에 있었다니 참으로 가슴에 새겨둘 일입니다.
    요즘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역사에 이토록 백성을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나 가슴 뭉클할 때가 많았는데 우리 고향과 관련된 "절이도해전"이라...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시고, 고향사랑도 전해주신 대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 ?
    박오심 2005.05.31 21:32
    선배님의 이 글을 읽고 이번에 울 아버지 일로
    이곳에서 내려왔던 친구들과 신랑과 아들 딸한테
    아는 척 좀 했습니다
    이럴때 쓰는 말!
    '아는것이 힘이다' 그래서 힘좀 썼습니다
    원님덕에 나팔분셈이 된네요
  • ?
    금산아 2005.07.18 23:46
    금매
    분명히 이순신자군 께서 금산 어딘선가 왜군을 작살냈을 끈디.
    항상 속 으로만 생각해 왔고.
    왜! 하필 이쪽만 빠졌을까 생각했는디.
    이 글이 분명 할 거요.
    겁나게 애썻소.
    금산 갱본에 생선 맛이 좋은 것이 그때 왜놈 잇갑이 워낙 좋아서 그 맛이 유전되어 전국에서
    괴기 맛이 최고제라 암요
    고생 겁나게 허벌나게 엄청시럽게 애썻소 .
    속이 후련해부요
  • ?
    무적 2005.08.15 00:24
    어제 방영된 이순신)서 "절이도 해전" 장면이 나옵디다.
    때는 1598년 7월 19일
    장소는 녹동에서 월포를 지나 명천 앞 바다 즘으로 보임(화면에 비춰주는 해전도 상)
    적선이 100척, 우리 함대는 80여척
    명나라의 진린이 처음으로 출전하였으나 직접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음
    왜장 도도가 맨날 이순신에게 당하여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질책을 당하고 이 전
           투를 승리하여 명예를 회복하기 최선을 다함
    그러나 왜군은 대패하였고(적선 59척이 소실, 사망자 16,667명),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풍신수길은 실권하게 되고(그 해 8월 사망) 왜군은 철군을 하게 됨
    이때부터 일본의 정권은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쥐게 됨.

    결국 절이도해전은 1592년에 시작된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을 철수하게 하는 마지막 큰 전투였으니 전쟁사 및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인데 아쉽게도 사료가 없음을.......

    김병옥님께서는 절이도해전을 신양 앞 바다 내지는 익금 앞 바다라고 추측하였는데  그 근거를 이순신의 본진이 고금도에 있었고  그래서 함대가 고금도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이었는데  어제의 극에서는  이순신은 본진영은 고금도에 두었으나 이 전투를 염두에 두고 미리 본진을 녹도(현재 녹동)으로 비밀리에 옮겼다는 것으로 해설하였음을 밝힙니다.  
  • ?
    김병옥 2005.08.16 10:19
    절이도 해전 장소가 어느 바다였느냐? 는
    지금 현재로서 사료가 불충분하여 명확하게 단정할 수가 없어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근거로 추정할 수 밖에 없는데

    절이도 해전 바다를 추정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사료의 근거는
    절이도 해전 승전이유를
    절이도해전 과정에서" 좁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해전을 펄쳐
    크게 승리하였다는 기록을 비추어 해전장소를 생각해 볼때
    고라금이나 배천 앞 바다가 가장 적합하게 들어 맞는다는 생각이다.

    절이도 해전무렵에
    이순신장군께서는 수군통제영을 고금도에 두고
    벌교부근에 주둔한 왜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왜군이 출동할 기미를 보이자
    장군께서는 수군을 금당도에 전진 배치하여 두고는
     *8.14일 방영 "불멸의 이순신" 극에서는
       녹도(녹동)에 전진 배치하였다고 했으나
       다른 자료에는 금당도에 전진 배치하였다고 하고 있음
    왜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왜군이 나라도를 거쳐 명천과 신평 앞바다를 지나
    금진과 소록도(또는 소록도와 녹동) 바다 사이로 빠져 나오자
    금당도에 전진 배치된 이순신장군의 수군이 출동하여
    고라금(배천) 앞바다에서 해전이 개시되었으나
    왜군은 앞에는 이순신장군의 수군이 공격을 하고
    뒤에는 100 여척의 함대가 일시에 빠져 나갈 수 없는
    금진과 소록도 사이의 좁은 수로(水路)가 막혀 있어서
    자유롭게 기동을 할 수 없는 왜군이 참패를 하였다는
    추정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금당도가 아닌
    녹도(녹동)에 전진 배치하여
    절이도 해전 바다 위치가
    명천이나 신평 앞바다라고도 추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나
    이 추정에는 모순이 몇가지가 있다.

    제일 먼저
    사료에 기록된 좁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절이도 해전을 대승하였다는 기록에
    결정적으로 해전장소를 명천이나 신평 앞바다라고 하기에는 대비가 불가능하다.
    특히, 명천 앞바다를 좁은 바닷길이라고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전세가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왜군은 조금만 후퇴를 해서 나라도쪽으로
    빠져 나가면 이순신 장군께서는 더 이상의 추적이 어려워
    절이도 해전의 대승은 불가능했으리라 본다.

    둘째로
    이순신 장군께서 금당도가 아닌 녹도(녹동)에 전진 배치했다는 주장은 불합리하다.
    임진왜란의 전과정을 보면 장군께서는
    전락적으로 수군을 가급적 섬에 주둔시켰지 육지에는 주둔시키지 않았으며
    육전에 강한 왜군의 대군이 한나절 거리의 벌교에 주둔하고 있는데
    주위의 섬이 많은데 굳이 기습 위험을 무르쓰고  녹도에 전진 배치했다는
    추정은 아주 불합리하다.
    그래서 녹도에서 왜군을 기다리다 명천이나 신평 앞바다에서
    해전을 벌였다는 추정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그 당시 우리의 고향 절이도는 거의 버려진 땅이였고
    명천이나 신평 건너편에는
    수군기지가 있었던 녹도와 발포가 있어
    만약 절이도 해전이 명천이나 신평 앞바다에서 전개되었다면
    그 해전 명칭은 절이도 해전이 아닌
    녹도해전이나 발포해전으로 기록되었으리라 확신해 본다.
    그래도 알려진 녹도나 발포가 있는데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절이도"라는 명칭을 붙여
    전승 기록을 남긴 것은 "절이도"라는 명칭을 붙일 수 밖에 없는 해전장소였으므로
    절이도 해전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여지므로
    절이도 해전 위치는 고라금이나 배천 앞바다라고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멸의 이순신" 극은
    우리의 고향 부근에서 촬영한 것이 아니라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촬영하였으므로
    극중에서 절이도 해전장소가 신평이나 명천 앞바다라고 보여
    절이도 해전 장소를 신평이나 명천 앞바다라고 추정한다는 것은
    더욱 더 불합리함을 밝힐 수 밖에 없다.
  • ?
    양현 2005.08.17 07:25
    여기는 아직 한달은 뒤쳐져서 진행되고 있나 봅니다.
    다행이 이 글 읽고 어제 저녁 회식때 절이도 출신이라 한목소리 했네요.
    두 분 형님들 감사합니다.
  • ?
    김병옥 2005.08.17 08:50
    외국에서도
    "불멸의 이순신" 극을 방영하고
    또 자네가 보고 있다니 우리나라의 위상이 새삼스럽게 다듬어 지네
     
    한국에서는 지난 주말(8.13~14) 방영분에서
    절이도 해전부분을 방영해서
    절이도 전경(실제는 아님)과 절이도와 녹도(녹동)라는 대사가 10여차례 나와
    알만한 고향사람들은 극을 보는 의미가 아주 컷다네 

    "불멸의 이순신"  극도
    고국에서는 장군께서 전사하신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만 남아서
    거의 끝나가고 있다네
    미국에서는 한달정도 늦게 방영한다니까
    아직 명량해전부분도 방영하지 못했으리라 보네

    그럼 곧 전개될 절이도 해전부분을 보면서
    고향의 향기를 만끽하길 바라면서

    항상 잘 있길 바라네.
  • ?
    yang 2005.09.24 12:59

    못봤는데 다시 Catch up하고 있습니다.


    이렇에 인사말 남겨 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 ?
    제주미씨 2006.12.27 17:13
    제가생각하는분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오래간만입니다,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곘죠
    역시 병옥씨답습니다,   건강하시고
    새해복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
  • ?
    금옥 2008.10.21 15:36
    내 고향이 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음을 알게되었읍니다.
    귀한 자료 수집하여 이렇게 적어주셔서 감사드림니다.
    내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역사적인 자랑거리네요
    알으로 내고향 자랑거리로 삼겠읍니다.
    병옥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림니다.
    언제나 행복하세요
  • ?
    김병옥 2009.01.07 18:00
    "절이도 해전" 글은 2005. 5월 그 당시
    "불멸의 이순신" 이라는 TV극이 한참 인기를 끌며 방영중일때 작성된 글인데
    <거금도 닷컴> 운영자의 배려로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상단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원글을 작성한 사람으로서는 큰 영광이라 생각이 듭니다.

    또한,
    원글이 게재된지 3년이 지났어도
    댓글을 달아 주고 감사말씀까지 해주는 것은
    너무 고맙습니다만

    다만,
    하나가 아쉬운 부분이 발견되어서 말씀을 드리오니
    조금도 오해마시고 정정해 주었으면 합니다.

    "제주미씨"는 누군지 알기 때문에
    전화를 해서 수정해 줄 것을 이야기했으나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은 해 놓고 수정하지 않기 때문에
    또 다시 2번 말하기는 그렇고 해서 더 기다려 볼 생각이고

    바로 위에 "금옥"씨는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어 이 자리를 빌려 부탁하는데

    이 글을 작성한 사람의 이름은
    금옥씨와 마지막 글자가 동일한 <병옥>이므로
    "욱"을 '옥"으로 수정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
    김병옥 2013.02.22 17:10

    이 글을 쓴지가 8년이 거의 되었는데 아직도 중촌부락에 실려 있다니

    너무 반가워서 댓글을 달아 봅니다.

    8년전만 해도 많은 꿈과 그리고 여러 모든 것에 대한 애정이 넘쳐 흘렸는데

    지금은 모두 흩어져 버린 것 같아서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그래도 작은 글이 그대로 남아 있어

    조그마한 기쁨을 느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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