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은 내게 "빨래와 집안청소를 해"라는 말을 남긴 채 체육관으로 갔다. 나는 그들이 남긴 밥과 반찬을 보고 본능적으로 달려들어 후딱 먹어치웠다. 워낙 곯아 그들의 말을 가슴속에 담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밥을 먹고 난 뒤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와 설거지감을 보니 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편으로 허탈한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역도산을 만나면 곧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레슬링을 할 수 없었다. 내가 고작 할 수 있었던 것은 합숙소와 체육관 청소였다. 프로레슬링의 위계질서는 엄격했다. 우선 선.후배간의 서열은 군대보다 더 엄격했다. 나이로 치자면 나는 중간쯤에 해당됐다. 하지만 나이가 밥 먹여 주는 것이 아니었다. 나보다 레슬링에 먼저 입문했다면 나이 어린 사람일지라도 "선배님"하며 깍뜻이 존중해 주어야 했다. 숙소에서 밥을 지으며 나를 향해 슬며시 미소지었던 그 선수의 웃음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그가 했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역도산 도장에 입문한 내가 하는 일은 고작 청소하고, 밥 짓고, 빨래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선배의 잔심부름을 도맡지 않으면 안되었다. 선수들의 등.목.팔.목 마사지도 책임져야 했다. 취침도 자유롭지 못했다. 선배들의 침구를 모두 펴 주고 난 다음에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아침에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다. 웬만한 인내심을 갖고 있어도 하루를 견디기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각종 운동 기구를 녹슬지 않게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빗자루와 걸레를 분신처럼 옆에 끼고 다니며 쓸고 닦아야 했다. 나를 더 비참하게 했던 것은 빨래였다. 매일 수십 벌의 빨래를 해야만 했다. 돌아서면 청소.빨래.기구 정리였다. 선수들 치닥거리하느라 24시간도 모자랐다. 청소가 잘돼 있지 않고 약간이라도 지저분하면 그들은 나를 심하게 혼냈다. 원산 폭격을 시킨 후 나의 엉덩이를 몽둥이로 후려 갈겼다. 그들의 매를 그냥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약소국에 태어난 내가 재일 한국인의 설움을 겪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내가 조선인이란 사실만으로 비웃었고, 더 혹독하게 대했다. 나는 그때만은 밀항한 것을 대단히 후회했다. `역도산 제자가 되기 위해 밀항한 것이다. 청소부 노릇을 하기 위해, 또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받기 위해 일본에 온 것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론 표시를 안 냈지만 스승 역도산이 같은 한국인이면서 이렇게 차별 대우하는 것에 대해 모른 척할 수 있느냐라는 서운함도 들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서러움이 들 때면 나는 고향 생각을 하면서 기분을 달랬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까`란 생각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고향 가는 것은 쉬울 것 같았다. 나의 밀항 코스 반대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즉, 동경에서 기차를 타고 오사카로 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시모노세키역으로 가서 항구로 가면 한국의 선원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그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고향에 가면 된다. 둥그런 달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가 지우고, 또 하고 그랬다. 몇 번이고 짐을 쌌지만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겨우 청소부를 하기 위해 밀항했는가"라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 낯짝도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란 말을 떠올렸다. 언젠가는 즐거운 날이 올 것이라 확신했다. 가슴속에 참을 인(忍) 자를 새기며 하루하루 견뎌냈다. 정병철 기자 <계속>
사진=이호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