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814 글쓴이 : 이종만 |
조회 : 7 스크랩 : 0 날짜 : 2007.03.24 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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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숨어 우는 줄 알았는데 나무에 핀 꽃들이 울고 있었다 화병에 꽂으려고 가지를 꺾으려다가 그 마음을 뚝 꺾어버렸다 피 흘리지 않는 마음, 버릴 데가 없다 나무의 그늘에 앉아 꽃 냄새를 맡았다 마음속엔 분화구처럼 움푹 패인 곳이 여럿 있었다 내 몸속에서 흘러내린 어둠이 파놓은 자리, 오랜 시간과 함께 응어리처럼 굳어버린 자국들 그 자국들을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때 깊고 아린 한숨만 쏟아져나왔다 꽃 냄새를 맡은 새의 울음에선 순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의 힘으로 새는 사나흘쯤 굶어도 어지러워하지 않고 뻑뻑한 하늘의 밀도를 견뎌내며 전진할 것이다 왜 나는 꽃 냄새를 맡고 어지러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늘에 누워 올려다보는 하늘에는구름이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이 머물렀던 자리가 움푹 패여, 그 자리에 햇살들이 피라미처럼 와글와글 꼬리를 치며 놀고 있었다 아니, 황금의 등을 가진 고래 한 마리가 물결 사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마흔도 되기 전에, 내 눈엔 벌써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사후死後의 어느 한적한 오후에, 이승으로 유배 와 꽃멀미를 하는 기분 저승의 가장 잔혹한 유배는 자신이 살았던 이승의 시간들을 다시금 더듬어보게 하는 것일지도 몰라, 중얼거리며 이 꽃 냄새, 이 황홀한 꽃의 내장, 사후에는 기억하지 말자고 진저리를 쳤다 =================================================================================== 해설 이광호 화자는 "나무 그늘에 앉아 꽃 냄새를 맡았다." 화자의 시선은 두 곳을 향한다. 우선, 자신 안의 어둠, "내 몸속에서 흘러내린 어둠이 파놓은 자리, / 오랜 시간과 함께 응어리처럼 굳어버린 자국들"을 응시한다. 그리고 안으로의시선은 바깥의 공간으로 이동하여 "꽃 냄새를 맡은 새의 울음" 을 응시하고 다시, '나' 는 "그늘에 누워" 구름이 이동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곳에서 "황금의 등을 가진 고래 한 마리" 를 본다. 화자의 시선의 이동과 '앉음-누움' 으로 변화하는 자세는 꽃 냄새에 취하는 정도의 깊이와 일치한다. 그래서 그 꽃멀미의 정절에서 화자는 저승으로 자리를 이동하여 "이승으로 유배 와 꽃멀미를 하는 기분"을 경험하고, '진저리' 를 친다. 모든 극단적인 매혹과 도취에는, 거기 생의 끝이, 생의 저편이 있다. 혹은 생의 저편에서 다시 바라보는 진저리 치는 이승의 시간들이 있다.
※작가 소개 김 충 규 1965년 경남 진주 출생.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