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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도 목장성-지방기념물제206호

by 운영자 posted Apr 1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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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면 목장성은 금산의 주봉인 적대봉(積台峰 : 표고 592.2m)과 용두봉(龍頭峰 : 표고 418.6m) 사이에 거의 남북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있다. 남쪽의 어전리 금장마을에서부터 북쪽의 석정리 성치마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전체 길이는 약 4.5km에 달한다. 이 성은 5만분지의 1도상에도 뚜렷이 나타나 있으며, 몇가지 전설도 구전되어 오고 있다. 거금도는 행정명으로 금산면이며, 고명은 절이도이다. 이 절이도에 목장과 목장성이 있었다는 기록은 다음과 같은 사료(史料)에서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세조 12년(1430) 2월 기축(己丑) 조(條)

全羅道 點馬別監 朴埴 道內興陽 折爾島 周回二百七十里水草 俱足可放馬八百餘匹 請以會寧浦金甲島突山南桃浦於蘭浦等 諸浦船軍修築 從之[전라도 점마별감 박식 도내흥양 절이도 주회 이백칠십리수초 구족가방마 팔백여필 청이 회령포 금갑도 돌산 남도포 어란포등 제포선군수축 종지](전라도의 점마별감 박식이 아뢰기를 "도내의 흥양 절이도는 주위가 2백 70리인데,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말 8백여필을 방목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회령포, 금갑도, 돌산, 남도포, 어란포 등 여러 포구의 선군으로서 목장을 수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성종 1년(1470) 1월 계미(癸未) 4일 조(條)

사복시 제조(司僕寺 提調)가 각지에서 기르는 마소의 원래 숫자와 현재 잃어버린 숫자를 아뢰다. ……흥양의 도양곶이(道陽串)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6백 66두였는데 고실이 1백 36두, 유실이 5두이며, 절이도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3백 64두였는데 고실이 72두이며, ……

『신증동국여지승람』제40권 흥양현 산천조(山川條)

절이도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으니, 둘레가 1백리요, 목장이 있다.

『호남읍지』부사례(1895년 작성) : 흥양목장목지사례

折爾島東西三十里 南北十里 周一百里 自官門距 鹿島津頭十里 水路三十里 民戶一百八十戶 放牧 [절이도 동서삼십리 남북십리 주일백리 자관문거 녹도진두십리 수로삼십리 민호일백팔십호 방목] ("절이도는 동서 30리이고 남북 10리이며 둘레는 100리이다. 관문으로부터 거리는 녹도진까지 10리이고 수로로 30리이다. 민호는 180호이며 방목을 한다)


절이도 목장성지

위의 사료에서 보면 절이도의 목장성은 조선 세조 12년(1430) 전라도 점마별감 박식의 주청에 의하여 말을 기르기 위해서 절이도 가까이에 있는 선군을 동원하여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장성으로서 조선전기에 축성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축성 당시 절이도 목장성에는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약 800여필의 말을 기를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며, 실제로 1470년에는 364필의 말을 방목하고 있었다.

이때 전국적인 말의 방목 상황은 아래와 같다.

경기도 장단의 호곶이 340두, 강화의 북일곶이 331두, 진강장 1,302두. 충청도 태안 대소산 458두, 지령산 300두, 이산곶이 322두, 안면곶이 354두, 홍주 원산도 122두 . 전라도 영광 진하산 214두, 고이도 219두, 강진 신지도 299두, 흥양의 도양곶이 666두, 해남의 황원곶이 1,449두, 진도의 지럭산 1,312두. 경상도 고성의 말을상곶이 284두, 해평곶이 742두, 동래 오해야항 793두, 울산 방어진 360두. 함경도 단천의 두언태 103두, 북청의 나만북 389두. 황해도 웅진의 창비도 167두, 강령의 등산곶이 551두, 황주의 철도 78두, 풍천의 석도 122두. 평안도 철산의 대곶이 1,293두, 가도 145두, 선천 신미도 280두, 정주 도치곶이 240두.
이렇게 경기도 3곳, 충청도 5곳, 전라도 6곳, 경상도 4곳, 함경도 2곳, 황해도 4곳, 평안도 4곳 등 모두 28곳에서 말을 방목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절이도 보다 많은 숫자를 방목하고 있는 곳은 10곳 뿐이다. 따라서 절이도 목장은 조선전기에 중요한 목장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위 사료에서 보면 절이도 목장은 조선전기부터 19세기 말까지 꾸준히 목장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목장성터는 전체적으로 많이 훼손되고 파괴되었지만 금장마을에서 내동마을까지 약 1,000m 구간은 그래도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이 구간을 보면 체성은 용두봉쪽 즉 서쪽으로 2단의 계단이 형성되어 있고 적대봉쪽 즉 동쪽은 수직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성곽의 체성 축조기법은 일반적인 방어목적의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축성법이다. 그러므로 축성기법에서 볼 때도 이 성곽은 목장성의 기능을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 성곽의 나머지 구간은 파괴가 심하며,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으나 원형을 파악할 수는 없다. 성곽 안에는 조그마한 우물지도 있으나, 체성 부분에서는 와편이나 자기편들은 보이지 않고 있다. 1999년 3월 순천대박물관의 학술조사결과 성의 규모는 다음과 같으며, 앞으로 정밀조사를 실시하여야만이 여러 가지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길 이 : 전체 약 4.5km. 지도상에 나타나 있는 현존길이(약 1,910m)
1구간(금장과 내동사이) 길이 약 1,160m.
2구간(성의 중간부분) 길이 약 350m.
3구간(성치마을부분) 길이 약 400m .
너 비 : 3.4m. 현 높이 : 약 0.5∼1.7m

조선시대는 마정이 군국의 중대한 일이었다. 여러 가지 개발로 인하여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축의 목장성 예가 많지 않은 실정이다. 그런데 금산면에는 비록 부분적이지만 성곽의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어 크게 주목된다. 그러므로 이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자료조사 및 지방기념물로 지정 보존책을 강구해야 한다.

  2002.11.27일에 전라남도에서 지정고시된 우리고장의 문화재는 9건으로 절이도 목장성이 지방기념물 제 20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아래 내용 참조]



2002.11.27 일 전라남도에서 지정고시된 우리고장의 문화재는 9건으로 총괄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고흥 절이도 목장성-지방기념물 제 206호- 금산면

2.고흥남양리 산성-지방기념물 제 207호- 남양면
3.고흥 독치성- 지방기념물 제 208호-포두면
4.고흥 백치성- 지방기념물 제 209호-도화면
5.고흥 오치 음성-지방기념물제 210호-도화면
6.고흥 옥하리 곰솔-지방기념물 제 211호-고흥읍
7.고흥 관리 탑상골 곰솔-지방기념물제 212호-도양읍
8.고흥 금사리 은행나무-지방기념물 제 213호-영남면
9.고흥 대강리 느티나무-지방기념물 제 214호-동강면

이며 각 문화재별 자세한 사항은 아래 게재하는 조사보고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군에는 성터(읍성,진성,산성,장성,목장성등)19개소와 20개소의 봉화대등 호국사적지가 전국에서 제일 많이 보유한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관심있는 분들을 위하여 문화재별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이 내용은 전라남도보에 게재된 것으로 전문 학술용어가 포함되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그럼, 고흥 절이도 목장성 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고흥 절이도 목장성

1.문화재명; 고흥 절이도 목장성
2.지정별; 전라남도 기념물 제 206호
3.소재지;금산면 어전리 산 1-1,석정리 870-1일대(75필지)
4.지정구역: 97,033평방미터
5.시 대; 조선시대
6.관리단체: 고흥군
7.신청인: 고흥군수
8.조사자; 송정현,성춘경,최인선,김희태
9.지정사유

고흥 절이도 목장성은 금산면 거금도의 어전리와 석정리 일대에 위치하는데 절이도는 거금도의 조선시대 지명이다. 이 성은 적대봉(적대봉, 592.2m)과 용두봉(용두봉, 418.6m)의 중간 계곡을 형성하는 부분과 두 봉우리가 연결되는 능선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섬을 중간으로 나눈 남북방향으로 축성되어있다. 체성은 완만한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 부분의 서쪽 사면 끝자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해안선까지 이어진다.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왕조실록> 세조 12년(1466) 이월 기축(17일)조에 "전라도의 점마별감 박식이 아뢰기를, "도내의 흥양 절이도는 주위가 2백 70리인데,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말 8백여 필을 방목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회령포, 금갑도, 돌산, 남도포, 어란포등 여러 포구의 선군으로서 <목장을> 수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 <조선왕조실록> 성종 1년(1470) 일월 계미(4일)조의 "사복시 제조가 각지에서 기르는 마소의 원래 숫자와 현재 잃어버린 숫자를 아외다....흥양의 도양곶이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6백 66두엿는데 고실이 1백 36두, 유실이 5두이며, 절이도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3백 64두였는데 고실이 72두이며, ... " 의 기록,
<시증동국여지승람> 제40권 흥양현 산천조의 "절이도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으니, 둘레가 1백리요, 목장이 있다."는 기록, <호남읍지>(1895년)의 흥양목장지사례에 나타난 "절이도는 동서 30리이고 남북 10리이며 둘레는 100리이다. 관문으로부터 거리는 녹도진까지 10리이고 수로로 30리이다. 민호는 180호이며 방목을 한다."는 기록을 통해서 연혁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절이도의 목장성은 조선 세조 12년(1466) 전라도 점마별감 박식의 주청에 의하여 말을 기르기ㅣ위해서 절이도 목장성에는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약 800여필의 말을 기를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며, 실제로 1470년에는 364필의 말을 방목하고 있는 등 절이도 목장은 조선 전기에 중요한 목장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성은 중간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축조된 차단성 즉 장성이며, 내외협측의 석축성이다. 체성의 길이는 섬 북쪽의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제하고도 4,652m에 이른다.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이다. 체성의 축조방법은 내벽의 경우 먼저 바닥에 잡석을 깔고 그 위로 너비 30-80cm, 두께 20-60cm 크기의 부정형 할석으로 80cm까지는 성돌의 열이 맞지 않게 막쌓기를 하였으며, 그위로 너비30-50cm, 두께 15-30cm의 판석형 석재를 사용하여 열을 맞추었다. 그리고 비교적 성돌의 정연한 면을 바깥쪽으로 하여 성벽의 전체 면이 고르게 축조하였다.
이에 비해 외벽은 3단의 계단식으로 축성되었는데, 1단은 수직으로 80cm올라가서 내측으로 80cm 들어간다 2단은 80cm올라가서 내측으로 40cm 들어가고 3단은 다시120cm 올라간다.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흔치 않은 목장성이며 축성시기 등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고흥 남양리 산성

1.문화재명:고흥 남양리 산성
2.지정별: 전라남도 기념물 제 207호
3.소재지:남양면 남양리 산 75-1,중산리 산 150일대(11필지)
4.지정구역:29,564평방미터
5.시대 ;백제시대
6.관리단체:고흥군
7.신청인:고흥군수
8.조사자:송정현,성춘경,최인선, 김희태
9.지정사유

고흥 남양리 산성은 고흥군 남양면 남양리와 중산리 일대에 있는 해발 162m의 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산성으로 동서 양쪽의 바다를 조망 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지역일대는 백제시대에 조조례현이 있었던 곳이다. 조조례현은 통일신라 경덕왕대에 이르러 충렬현이 되었다가 다시 고려시대에 이르러 남양현으로 이름이 바뀐다. 남양리 산성의 평면형태는 부정형으로 남북이 동서에 비해 길다. 체성은 동벽과 북벽 일부가 잘 남아 있는데 성벽의 형태를 보아 전체적으로 내외협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내부는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완만하게 내려가는 지형으로 내부의 평탄지는 12곳이 조사되었는데, 계단식 형태를 띄고 있으며 대부분이 예전에 경작을 하였던 폐경지이다. 우물이 2개소가 조사되었는데, 성의 중앙부에 나란히 있다. 우물은 석조 우물로 부정형 할석을 사용하여 원형을 이루게 쌓아올렸으며 현재는 폐쇄되어 물이 나지 않는다.
남양리 산성의 총 둘레는 534m이고, 너비는 4m내외이다. 성은 단곽으로 석축된 산성이며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용된 석재는 부정형 할석으로 비교적 방형을 이루며 고른면을 전면으로 놓고 쌓아올렸다. 성돌의 크기를 보면 너비 28-60cm, 두께 9-22cm로 전체적으로 비슷한 성돌을 쌓아올려 성벽 상.하 석재 크기의 차이가 없다. 외벽이 잘 남아있는 부분은 6m이상 남아 있고, 석축의 방법에 있어서 산세가 경사진 부분은 수평쌓기가 되어 있고, 평탄지는 층쌓기의 형식이 보인다. 내벽은 석축을 하기위해 생토층을 L자형태로 깊이 20cm 정도를 굴토하고, 아무런 기단 시설을 하지 않고 바로 수직에 가깝게 석축한 다음에 굴토한 부분까지 흙으로 다진 것으로 보여진다. 석재는 상.하부가 거의 일정하며, 석재의 장축이 체성의 방향과 직교하게 쌓았고, 비교적 고른면을 바깥으로 하고 있다. 또한 빈공간은 쐐기돌을 사용하여 빈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채움석은 내외벽과 함께 수평을 이루며 쌓아올린 것으로 보여진다. 일부 유실되어 수축한 흔적이 보이고 있다. 내부에 빗물을 모아버리는 배수로는 확인이 되지 않으며, 체성 내벽 안쪽 퇴적도니 단면에서 3개 정도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회벽은 생토면이나 암반 위에 석축을 하였는데, 기단부의 시설은 보이지 않고 바로 체성을 쌓아올렸다. 내벽과 마찬가지로 1.5cm정까지는 거의 수평에 가깝게 올라가지만, 그 상부는 상당히 내만되어 있다.
석재의 크기는 상.하부가 거의 일정하며, 쌓아올리는 방법도 내벽과 동일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내면에 비해 석재의 외면은 정연하지 못하고, 내벽보다 쐐기돌이 많이 사용되었다.성과 관련된 시설로는 문지 1개소가 조사되었다. 문지는 현 출입로로 이용되는 성의 남동쪽 회절부에서 서쪽으로 40m정도에 있다. 현재 잔존상태는 토사에 밀려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동쪽의 외측 모서리부분이 높이 90cm가량 남아 있다. 이 부분은 말각을 이루며 돌아 들어가는데, 석재는 수평을 맞추어 쌓아올렸으며, 기울기는 88도 로 수직에 가깝다. 수습된 유물로는 토기류(고배편,개편, 관자명 토기편, 주름무늬병편, 시루편 등), 자기류(백자편, 분청사기편 등), 기와류(격자문, 선문, 승문, 무문, 사격자문, 복합문 등 평기와편)와 방추차, 숫돌, 석환 등이다. 남양리 산성은 입지와 축성법, 출토유물 등의 양상등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초축된 테뫼식산성이며, 이 지역일대에 백제시대부터 현[조조례현]이 있었던 지역이기도 하여 이와 연관된 곳으로 보인다.
산성 내에서 출토된 유물상으로 볼 때 이 산성은 초축된 후 조선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해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남양리 산성은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산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고흥 독치성

1.문화재명 : 고흥 독치성
2.지정별 : 전라남도 기념물 제208호
3.소재지 : 고흥군 포두면 봉림리 산 1번지,상대리 산46(11필지)
4.지정구역 : 25,289평방미터
5.시대 : 백제시대
6.관리단체 : 고흥군
7.신청인 : 고흥군수
8.조사자 : 조원래, 최인선, 김희태
9.지정사유

독치성은 서북쪽에 해발463.1m 조계산이 있으며, 이 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려온 능선의 끝자락 한 부분에서 작은 봉우리(해발 175-212m, 성뫼산이라 부르고 있음)를 이루고 있는데 이 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남쪽에 있는 평지가 한 눈에 들어오고, 동쪽의 바다도 보이고 있다.
독치성의 전체 길이는 508m로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석성 가운데 광양 마로산성(길이550m, 전라남도 기념물 제207호)에 이어서 세번째로 큰 산성에 해당한다. 성벽의 방향 구간별로 보면 북쪽이 190m로 가장 길며, 너비도 5.7-5.3m로 넓고 높이도3m까지 남아있는 곳이 있다. 다음으로 서쪽이 120m로 길며 너비는 대략 3.9m 정도이고 높이 2.5m 까지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동쪽은 길이 113m이며, 너비는 3.7-4.2m 정도이고 많이 무너져 있다. 남쪽은 있으나 약 4m 구간은 흔적이 거의 없다.
이처럼 독치성은 남벽의 일부 구간만 없어졌을 뿐 대부분은 체성의 흔적이 뚜렸이 남아 있다. 산성의 형식은 백제산성 가운데 가장 많은 형식으로 알려져 있는 테뫼식 산성이며 이가운데서도 산복식 산성의 유형에 속하고, 평면형태는 삼태기형이다.
독치성의 축성법은 협축식인데 체성은 경사면을 석비레층이나 혹은 암반 위까지 파서 기초를 자연적으로 튼튼하게 한 후에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곧바로 벽석을 쌓아 올렸다. 체성의 벽석은 길이 20-100cm, 두께 10-30cm 정도의 할석을 이용하고 있는데 대체로 길이 30-60cm, 두께 15-30cm 크기의 석재가 많다. 체서으이 외벽을 보호하기 위해 기저부에서 몇 단의 벽석 높이까지 점토와 잡석들로 비스듬히 다짐한 층이 내외벽에서 확인되었다. 경사변 지역을 수평 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리고 있는데 이는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즉 경사면 지역을 경사면과 평행하게 성벽을 쌓는다면 결국 경사면 아래쪽으로 모든 성돌의 하중이 모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경사면 아래쪽의 성돌은 결국 위에서 내려오는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붕괴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성벽의 하중이 아래쪽으로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성벽을 수평 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벽의 하중을 골고루 분산시켜 성벽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지는 동문과 북문 등 2곳에서 확인되었다.
문지의 형태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백제시대 산성으로 밝혀진 검단산성과 고락산성처럼 외벽이 곡선을 그리고 내벽은 거의 직각을 이루어 평면형태가 동일하다. 특히 독치성에서는 치가 확인되었다. 치가 위치한 곳은 성벽과 능선이 교차하는 가장 높은 지점이다. 북서쪽 모서리부분과 북동쪽 모서리 부분이 바로 능선과 교차하는 곳인데 이곳에 사각형으로 돌출되어 치가 형성되어 있다. 서쪽의 치는 성벽이 한 눈에 들어와 이곳을 방어하는데 유리하다. 동문지와 연결된 치는 능선의 정상부를 막고 있으며, 체성의 곡성부에 덧대어서 방형으로 축조하였다. 동문을 보호하는 적대와 같은 역할과 북벽을 방어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던 치로 보인다.
이 지역의 백제산성 가운데 처음으로 치가 확인되어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치의 규모는 길이 4.5m, 너비 6.4m 정도이다. 출토유물은 삼국시대 토기편(고배편, 계편, 구연부편, 동체부편), 분청사기편 평기와편(등문양은 격자문, 선문, 송석문, 무문) 등이다. 기와의 분할면은 전면을 반듯이 자르고 내.외면을 다시 다듬은 것들이 있다. 기와의 내면은 두가지 형식으로 구분되는데 수키와는 포목흔이 일괄적으로 확인되고, 암키와는 포목흔과 승문(섶문양)이 함께 보인다.
이처럼 기와의 내면에 포목흔이 아니라 승문이 있는 경우는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 산성들에서 예외 없이 출토되고 있는 특징적인 유물이다. 독치성은 백제 후기에 처음으로 쌓았던 산성이다.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아 이지역이 통일신라에 흡수되면서 국경의 의미가 상실되자 산성의 기능도 다한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독치성은 백제시대의 산성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고흥 백치성

1.문화재명; 고흥 백치성
2.지정별:전라남도 기념물 제 208호
3.소재지:고흥군 도화면 신호리 산 29.30일대
4.지정면적:22,511평방미터
5.시 대: 백제시대
6.관리단체: 고흥군
7.신청인:고흥군수
8.조사자:최인선,김희태
9.지정사유

백치성은 천등산(해발550미터)에서 비종산(해발447.6미터)으로 연결되는 능선의 중간부분인 해발 207.6미터의 당치 정상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능선의 중턱까지 막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평면형태는 남북방향으로 말각장방형에 가깝다. 특히 지리적으로 백치성에서 북쪽의 독치성(기념물제208호)과 남서쪽의 오치 음성(기념물 제 210호)이 육안으로 관찰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백치성의 총둘레느 444미터이며 단곽으로 된 석성이다. 체성의 축성은 바닥을 생토면까지 파서 정지하고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일부에서는 잔돌과 점토를 혼합하여 바닥다짐을 한 곳도 있다. 체성의 외벽은 크기가 일정한 석재를 사용하여 상부까지 올라가며 허튼층쌓기로 축성하였다. 일부 체성 통과면의 경사가 급한 곳은 수평쌓기의 수법도 보이고 있다. 사용된 석재는 부정형 할석으로 그 평면이 사다리꼴과 역삼각형,오각형의 3가지로 비교적 면이 바른쪽을 바깥으로 하여 축성하였다.내벽은 외벽에 비해 사용된 석재는 비슷하지만 축성방법에 있어서 성돌의 바깥면이 고르지 못하며 성돌사이 공간의 채움이 부족하다. 한편 내부 채움석은 외벽과 수평을 이루며 성돌을 서로 엇갈리게 쌓아 올렸다.
체성과 관련된 시설물은 확인이 되지 않고 있으며, 내부에서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4개소있다. 수습유물은 기와류가 대부분인데, 격자문,선문, 무문,복합문,등의 평기와 편이다. 백치성의 입지와 축성법,출토유물 등의 양상은 독치성과 남양리산성등과 거의 유사하여 백제시대에 초축된 성으로 보인다.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지 않아 이 지역이 통일신라에 흡수되면서 국경의 의미가 상실되자 산성의 기능도 다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백치성은 독치성,남양리산성과 함께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산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그흥 오치 음성

1.문화재명:고흥 오치 음성
2.지정별:전라남도 기념물 제 210호
3.소재지:고흥군 도화면 신호리 산 178-2,178-3번지
4.지정면적:434,487평방미터
5.관리단체:고흥군
6.신청인:고흥군수
7.조사자:최인선, 김희태
8.지정사유

음성에 대한 문헌기록은 거의 없지만, 주변에 고려시대의 도화현 치소(신호리 동백마을로 추정)가 있어 도화면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된다. <조선보물 고적조사자료>에는 신호리 오치 국유림에 있는 성을 '둘레 1200-1300칸, 석축이며 성벽은 골짜기 유역을 둘러싸고 있는데 대부분 붕괴되었고 주민들은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목장성에 대한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1,200-1,300문의 규모는 약 2,172-2,353M에달하는 대규모 성으로 고흥반도에 소재한 성 가운데 가장 크다. 이 성은 고흥 도화면 신호리와 포두면 봉림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555M의 천등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의 끝자락 해발 389.5M정도의 산마루서 동쪽으로 산중턱까지 내려가는 포곡식 산성이다.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방형이다. 체성은 내외협축과 내탁을 병행하여 축조되었는데, 계곡을 막고있는 동벽을 제외한 나머지는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총 둘레는 2,642M이며, 단곽의 석축성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성의 북서쪽 정상에서 북쪽으로 독치성(전라남도 기념물 208호)과 백치성(전라남도 기념물 제209호), 남서쪽으로는 거금도[절이도]가 관찰된다. 관련 시설로는 서.남.동쪽의 체성에서 문지 3개소가 확인이 되었다. 서문지는 해발 389.5M의 북서쪽 정상에서 남쪽으로 260M 거리에 위치하는데, 너비는 6M이다. 남문지는 해발 339M의 남동쪽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28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데 바닥면은 평탄면을 이루고 있고, 너비가 10.3M로 중앙에는 폐쇄석으로 막혀있다. 북벽 너비는 9.8M이고, 잔존높이는 1.5M이다. 동문지는 해발 339M의 남동쪽 봉우리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498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너비는 3.8M이다. 그리고 우물지도 확인된다.
체성의 축성기법은 서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체성은 석비례층과 같은 단단한 바닥 위에 토석을 다져서 바닥을 정지한 후 수평쌓기의 방법으로 축조하였는데, 일부는 어떠한 형식을 보이지 않고 막쌓기를 하였다. 내부 채움석은 부정형 할석으로 채웠으며, 내벽은 2-3단으로 석축하여 마무리하였다.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부정형의 할석과 판석형 석재가 사용되었는데, 체성의 하부는 30-60cmX12-35cm정도이며, 상부는 15-30cmX10-20cm 정도이다. 그리고 기단의 보강시설이나 기단부를 설치하지 않고 곧바로 1단부터 쌓았다. 서벽은 성의 북서쪽 해발 389.5m의 산정부에서 해발 335m 고지상을 지나 남서쪽 해발 344.5m의 우마장산 산정부까지 연결되는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서벽의 바깥쪽은 북서쪽 산정부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우마장산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있고 두 능선의 사이에는 여러개의 골이 합해져서 '물맞는골'로 이어진다.
산의 능선과 서문지를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경사가 심하다. 동벽구간은 포곡식 산성에서 계곡부를 막고 있는 곳으로서 서쪽산정부쪽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북벽은 성의 북서쪽 해발 389.5m의 산정부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수습유물은 회청색이나 경질토기와 적갈색으리 연질토기 동체부 등의 토기류, 분청사기편, 격자문 암키와와 복합문 암키와 등의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음성은 입지, 축성법, 수습유물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축성한 것을 보이는 2,642m에 달하는 대규모 포곡식 산성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고흥 옥하리 곰솔

1.문화재명:고흥 옥하리 곰솔
2.지정별:전라남도 기념물 제 211호
3.소재지:전남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 145-8
4.토지소유자:사유
5.지정면적:1,210평방미터
6.수량:1주
7.신청인:고흥군수
8.조사자:김종홍, 정태연
9.지정사유

곰솔은 해송, 숫솔, 흑송, 완솔, 남송이라고도 하며 영어로 Japanese, black pine, 학명은 Pinus thunbergii Parlatore이다. 소나무과(Pinaceae:전 세계에 7속 200여종이 주로 북반구에 분포하고 교목또는관목의 상록 침엽수) 소나무속(Pinus:북아프리카, 서인도, 말레이시아 북부 북반구에 100여종이 분포)으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 해안가에 주로 분포하며 수피는 흑갈색 동아는 회백색 잎은 단지 위에 2개씩 나며 길이 9-14cm,폭 1.5mm,소나무 잎에 비래 굵다. 옥하리 곰솔은 흉고직경(DBH) 127-130cm, 근원직경 190-200cm 나무높이 (H) 14m, 수관폭 24-26m의 크기이고 수령은 약 300년 이상으로 보인다. 홍양현 읍성 (전라남도 기념물 제 30호)의 사면에 독립수인 노고수가 주위의 사방림으로 식재된 20여 그루의 곰솔과 함께분포하고 하상에는 멀구슬나무, 옻나무, 예덕, 산초나무, 밤나무, 마삭줄, 담쟁이덩굴, 억새 등이 함께 혼효되어 있다.
이 노거수 바로 밑에 100여년 전 영광군수를 지낸 김정태가 취송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오늘에 관리되고 있으며 이정자를 지을 때 이 노고수 주변을 침식한 듯 보였으며 경사면에 위치한 이노거수의 활력도나 군도 I(단독으로 생육한 상태)에 해당한다. <고흥군의 문화유적>이나 <고흥군마을유래지>(1991)를 통한 홍양현 읍성의 형성시기나 취송정의 건립시기 등을 추정해 볼 때 수령이 약 300년 이내로 보여 지며 이미 천연기념물 지정이 되어 있는 제주시 곰솔(160호), 익산 산오리 곰솔(188호), 무안 망운면 곰솔(269호), 부산 수영동 곰솔(270호)과 비교하여도 크기나 수형, 주변경관 등이 뛰어나고 노거수로서, 유존자원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사료된다. 고흥 옥하리(흥양읍성)의 곰솔(해송)은 취송정 후면에 버티고 있는 노거수로서 읍성의 사면 경관을 돋보이게 하며 가락종친회관인 현종재가 있어 관리 보호되고 있다. 이들 관리자들 또한 문화재로의 지정을 희망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근원의 발달이나 지하고의 상태로 보아 포합수 형태로 상관되며 상처부위에 대한 외과수술이 이루어졌으나 최근 태풍으로 인한 국소적인 상처부위와 고사지, 쇠약지에 대한 외과적 조치와 활력도의 증진을 위한 조치가 요구된다. 곰솔은 우리나라 경기도 북위370도15분와 강원도 북위 37도(경북 울진) 이남의 해안에 분포하고 해안선을 따라 대상을 이루어 분포하고 있어 희귀성, 고유성을 지닌 노거수로 자연사적 학술적 가치는 물론 유전자원으로 보존 가치가 충분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된다.


고흥 관리 탑상골 곰술

1.문화재명:고흥관리탑상골 곰솔
2.지정별:전라남도 기념물 제212호
3.소재지:전남 고흥군 도양읍 관리 991외(2필지)
4.토지소유자:사유
5.수량:1주
6.지정면적:3,845평방미터
7.신청인:고흥군수
8.조사자:김종홍, 정태연
9.지정사유

곰솔은 해송, 숫솔, 흑송, 완솔, 남송이라고도 하며 영어로 Japanese, black pine, 학명은 Pinus thunbergii Parlatore이다. 소나무과(Pinaceae:전 세계에 7속 200여종이 주로 북반구에 분포하고 교목또는관목의 상록 침엽수) 소나무속(Pinus:북아프리카, 서인도, 말레이시아 북부 북반구에 100여종이 분포)으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 해안가에 주로 분포하며 수피는 흑갈색 동아는 회백색 잎은 단지 위에 2개씩 나며 길이 9-14cm,폭 1.5mm,소나무 잎에 비래 굵다. 관리 탑상골 곰솔은 흉고직경 150-156cm, 근원직경 191-195cm, 나무높이 18-20m, 수관폭 24-31m 키기호 수령 약 300년 이상으로 보인다.
관리 탑상골의 곰솔은 도양읍 관리 수동마을의 수호신으로 당제를 모시는 기도처이기도 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양목장 감독관이 주둔하는 관청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관리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 기념식수로 2주를 심어 1주는 고사하고 현재 1주가 보호 관리되어 있으며 이곳을 탑상골이라 한다. 인근 4개 마을이 정월 대보름 당제를 모시는 곳이기도 하다.
이 나무가 위치한 지역의 자연경관이 뛰어나며 역사성, 마을의 전통성 유지, 지역주민의 관심 등을 종합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고흥 관리 탑상골의 곰솔은 우리나라 곰솔 분포역의 학술적 가치를 입증하는 노거수로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이는 어느 곰솔보다도 그 수형이나 보존상태, 관리체제 등이 우수하고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그 경관도 수려하다. 기념식수라고 하는데 곰솔의 원식생의 잔존식생으로 존재하는 독립수로서 노거수인 것으로 사료된다. 학술적 가치는 물론 유전자원 보전 측면에서 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있다.


고흥 금사리 은행나무

1.문화재명: 고흥 금사리 은행나무
2.지정별:전라남도 기념물 제 213호
3.소재지: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770-1(잡종지)외(2필지)
4.토지소유자:공유,사유
5.수량:1주
6.지정면적: 463평방미터
7.신청인:고흥군수
8.조사자: 김종홍,정태연
9.지정사유

은행나무는 공손수라고도 하며 영어로 Maidenhair tree이다. 학명은 Ginkgo biloba Linne이다. 은행나무과(동아시아 1속 1종이 분포하는 낙엽교목) 은행나무속(세계에 1종 중국이 원산으로 우리나라에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온 낙엽 교목)으로 노거수는 키 60미터이상 지름 4미터 이상 자라며 관상용 열매는 식용과 약용으로 널리 쓰인다. 금사리 은행나무는 흉고직경(가슴높이 직경) 290-300센티미터 근원직경 315-320센티, 나무높이 14-15m, 수관폭 22-29m의 크기이며 수령은 약 500년 이상으로 보인다. 이곳은 조선시대 사도진이 있었던 곳인데 사도진 설치(1491년, 성종 22년) 당시 심었다고 전해지며 사도마을 입향년도가 1300년경으로 추정된다. 매년 섣달그믐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당이기도 하여 마을의 역사성이나 나무의 희귀성으로 보아 그 가치가 크다고 사료된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로 은해나무(제 30, 59, 64, 76, 84, 90, 167, 175, 223, 225, 300, 301, 302, 303, 304, 320호)가 지정되어 있는 곳이 16개소이며 이 중 전남의 벌교 은행나무(천연기념 제 19호), 화순 이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 303호)와 비교하여 노거수의 수세와 크기 그 관리상태 등이 뒤지지 않으며, 노거수 내에 새로운 나무 발달이 포합수 형태로 함께 자라고 있어 그 나무 형태가 특이한 점 등 역사성, 전설적, 문화적 가치 등이 크다.


고흥대강리의 느티나무

1.문화재명:고흥대강리의 느티나무
2.지정별:전라남도 기념물 제 214호
3.소재지:전남 고흥군 동강면 대강리 276(잡종지)
4.토지소유자:공유
5.수량:2주
6.지정면적:202평방미터
7.신청인:고흥군수
8.조사자:김종홍, 정태연
9.지정사유

느티나무(괴목, 정자나무)는 영어로 영 Zelkova tree라 하며 학명은 Zelkova serrata(Thunberg) Makino이다. 느릅나무과(Ulmaceae:주로 북반구에 약 15속 200종 우리나라에는 5속 17종이 관목 또는 교목 형태로 분포) 느티나무속(Zelkova spach:동부와 서부 아시아에 수종이 분포하고 우리나라에는 1종 1변종이 자라고 있음)식물로 평안남도, 함경남도, 이남의 마을 부근 산기슭과 산골짜기에 흔히 자라는 낙엽 교목이다.
대강리 느티나무는 2주인데, 큰 나무(A목)는 흉고직경 230-235cm, 근원직경 348-352cm, 나무높이 12-13m, 수관폭 21-27m 크기로 수령은 약 400년 이상으로 보인다. 또 한 그루(B목)는 흉고직경 185-190cm, 근원직경 213-217cm, 나무높이 12m, 수관폭 22-24m 크기이다. 이곳 느티나무는 당산목으로 신묘 양측에 위치한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전 대강면 소재지 마을로 사동, 사서, 두산, 평촌 4개 마을에서 당산제를 모시는 곳으로 전설어린 역사성과 전통성을 간직하고 있다.
대강천변에서 나무 주위를 석축으로 쌓아 보호 관리되고 있어 생육환경 적응 상태 불량하고 B목은 태풍 피해로 가지가 잘려져 제거된 상태로 있었으나 <마을 유래지>를 통한 입향 연도로 미루어 약 400년 수령으로 상관되었으며 노거수로서 보호할 만하다고 사료된다. 대강면의 소재지 마을의 당산목으로서 역사성과 당산제를 모시기 위한 신묘 설치의 당제문화의 특이성 등을 미루어 보아 학술적 가치가 있다.



발췌:고흥군청>게시판에서..

  • profile
    "전라도 城=고흥 금산 목장성"


    전라도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금산 목장성. 이 성은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어전리와 석정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일명 ‘절이도 목장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의 이름은 조선시대 ‘거금도’의 옛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 사진/ 한 석(사진작가·고흥군청 문화관광과)
    ‘형극의 땅’소록도를 앞에 둔 고흥 녹동항에서 금산(錦山·거금도)으로 가는 철선(鐵船)에 올랐다. 뱃머리에 부서지는 초겨울의 파도소리가 귓바퀴를 파고 들었다. 마치 현악기의 선율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한 착각을 일게 했다. 경쾌했다. 간간히 살갛을 핥퀴고 돌아가는 바닷바람이 정겹기까지 했다. 조선 초 군마(軍馬) 사육장으로써 역사의 현장을 간직하고 있는 금산 목장성(牧場城·전라남도 기념물 제206호)을 찾아가는 답사자의 마음은 솜털처럼 가벼웠다. 철선은 20여분 만에 금산항에 닿았다. 초행 답사자를 위해 ‘절이도 토박이’신광주씨(57·고흥군의회 의장)와 신상신 금산면장이 길잡이로 나서 목장성을 안내했다. 성(城)을 찾아가는 길은 전형적인 시골길이었다. 돌덩이에 걸려 뒤우뚱거리는 취재차량이 몇 번 멈춰서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 城 연혁 및 위치

    목장성은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의 어전리와 석정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속칭 ‘절이도 목장성’이라고도 불리는 성명(城名)은 조선시대 ‘거금도’의 옛 지명에서 연유된 것이다.

    목장성은 거금도의 등뼈 역할을 하고 있는 적대봉(해발 592.2m)과 용두봉(해발 418.6m)의 중간 계곡을 형성하는 부분과 두 봉우리가 연결되는 능선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고, 섬을 중간으로 나눈 남북방향으로 축성됐다. 체성은 완만한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 부분의 서쪽 사면 끝자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해안선까지 이어진다.

    이 목장성은 ‘조선왕조실록’ 세조 12년(1466) 2월 기축(17일) 조에 “전라도의 점마별감 박식이 아뢰기를, ‘흥양 절이도는 주위가 270리인데,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말 8백여 필을 방목할 수 있다. 청컨데 회령포, 금갑도, 돌산, 남도포, 어란포 등 여러 포구의 선군으로서 목장을 수축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성종 1년(1470) 1월 계미(4일) 조에는 “사복시 제조가 각지에서 기르는 마소(牛馬)의 원래 숫자와 현재 잃어버린 숫자를 알외다…. 흥양의 도양곶이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666두였는데 고실이 136두, 유실이 5두이며, 절이도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364두였다”라고 적고있다.

    이와함께 ‘시증동국여지승람’ 제40권 흥양현 산천조엔 “절이도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으니, 둘레가 1백리요, 목장이 있다”고 나타나 있으며, ‘호남읍지’(1895년)의 흥양목장지사례에는 “절이도는 동서 30리이고 남북 10리이며 둘레는 100리이다. 관문으로부터 거리는 녹도진까지 10리이고 수로(水路)로 30리이다. 민호는 180호이며 방목을 한다”는 기록을 통해서 목장성의 연혁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 세조 12년(1466) 전라도 점마별감 박식의 주청에 의하여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해 약 800여 필의 말을 기를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다. 실제로 1470년에는 364필의 말을 방목하는 등 절이도 목장은 조선 전기에 중요한 목장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 城 규모 및 현상

    이 성은 중간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축조된 차단성 즉, 장성(長城)이며 내외 협측의 석축성이다. 체성의 길이는 섬 북쪽의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제외 하고도 4천652m에 이른다.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이다.

    체성의 축조 방법은 내벽의 경우 먼저 바닥에 잡석을 깔고 그 위로 너비 30~80cm, 두께 20~60cm 크기의 부정형 할석으로 80cm까지는 성돌의 열이 맞지 않게 막쌓기를 하였다. 그 위로 너비 30~50cm, 두께 15~30cm의 판석형 석재를 사용하여 열을 맞추었다.

    그리고 비교적 성돌의 정연한 면을 바깥쪽으로 하여 성벽의 전체 면이 고르게 축조하였다.

    이에 비해 외벽은 3단의 계단식으로 축성되었다. 1단은 수직으로 80cm 올라가서 내측으로 80cm 들어간다. 2단은 80cm 올라가서 내측으로 40cm 들어가고, 3단은 다시 120cm 올라간다.

    조선시대 수 백마리의 군마(軍馬)들이 뛰어 놀았을 금산 목장성. 지금은 발길 조차 뜸해 잡초에 묻혀있다. 전남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목장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흔치 않은 성으로써 그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2004년 12월 01일 00시 00분 입력
    글/ 김선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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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흥반도의 유물 부장풍습 고흥반도의 지석묘에서는 홍도나 석검의 부장율이 매우 높은데, 특히 홍도와 같은 짧은 목이 달린 단지형토기는 전남지역에서도 고흥반도 지석묘의 특징 중 하나이다, 완형으로 출토된 것은 보성강유역에서 2점이 알려져 있을 뿐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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