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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51]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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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역도산은 가끔 나를 자신의 승용차 캐딜락에 태운 후 동경 시부야로 갔다. 그곳엔 스승의 꿈이 실현되는 한 전당이 세워지고 있었다. 일명 '리키 스포츠 팰리스'였다. 스승의 일본식 발음은 리키도잔이었다. 리키에 스포츠 팰리스를 붙여 리키 스포츠 팰리스로 이름이 지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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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키 스포츠 팰리스는 나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곳이다.
 1961년 레슬링 연습을 마치고 나오면서 입구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곳에는 지금 일본의 대형 부동산 회사가 들어서 있다



스승은 프로레슬링을 하면서 부와 명예를 움켜쥐었다. 스승은 그 가운데 전 재산을 퍼부어 이곳에 스승만의 왕국을 세우고자 했다. 지금이야 흔한 것이 스포츠 타운이다. 동네마다 한두 군데 있지 않은가? 스포츠 팰리스 설계는 전문가가 맡았지만 스승은 팰리스에 어떤 시설이 들어설 것인가에 대해 일일이 다 설명해 줬다.
 
난 처음에는 스승이 무모한 공사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국가와 자치단체에서 이런 것을 세워도 운영이 부담스러울 텐데 자비를 털어 공사를 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스승은 생각보다 자금이 더 소요되자 은행 융자까지 받았다.
 
스승은 이곳에 일본 최대의 프로레슬링 도장을 세워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나와 안토니오 이노키·자이언트 바바·맘모스 스즈키 등에게도 공사 현장에 가서 일을 도와 주도록 했다. 우린 졸지에 노가다(인부)가 되었다. 낮엔 이곳에서 일을 하고, 밤엔 레슬링 연습을 병행했다.
 
스승은 제자들이 직접 삽을 뜨게 한 후 이곳에 애착을 갖도록 했다. 리키 스포츠 팰리스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스승은 벽돌이 하나하나 쌓여 가는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흐뭇해 했다.
 
프로레슬링이 한창 흥행가도를 달렸던 1961년 6월쯤 스승은 마침내 그 꿈을 실현시켰다. 동경 시부야 언덕에 프로레슬링의 전당 리키 스포츠 팰리스가 완성돼 들어선 것이다. 시공 후 1년 5개월 만이다. 당시 돈으로 15억 엔이 투자됐다. 지상 9층·지하 1층으로 당시로선 최대 규모였다.
 
스승이 이곳에 어떤 시설물을 입점시켰는지를 보면 세상의 흐름을 읽는 탁월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 것이다. 1층에는 볼링장과 스낵바가 있었다. 2층에는 레스토랑·다방·레슬링 도장, 3~5층은 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상설 경기장을 갖췄다. 이곳에선 주말이면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렸다.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시설물이었다.
 
4층에는 보디빌딩 연습장과 스승의 사무실이 있었다. 6~7층에는 차밍스쿨과 여자 보디빌딩 연습장까지 갖췄다. 이른바 오늘날 유행하는 스포츠 센터였다. 스승이 완성했던 스포츠 센터는 지금 한국의 스포츠 센터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규모 면에서는 요즘보다 더 컸다.
 
완공식은 대단했다. 일본 정·재계 인사와 스포츠 스타·연예인·문화계 인사등 15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뿐만 아니다. 리키 스포츠 팰리스의 완성과 거의 동시에 스승은 동경 아카사카에 지상 6층 지하 1층의 고급 맨션 리키 아파트를 완성하고 전용 수영장까지 개장했다.
 
리키 팰리스 완성으로 스승의 입지는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스승의 가치가 한 단계 오를수록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스승의 일거수 일투족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러면서 야쿠자들이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당대의 레슬링 영웅인 스승이 스포츠 센터를 건립했지만 야쿠자들이 이런 대형 스포츠 센터를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야쿠자들이 스승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야쿠자들은 스승과 손잡고 싶어 했지만 스승은 거절했다. 스승은 생리적으로 야쿠자들을 싫어했다. 땀 흘리지 않고 남의 등을 처먹는 야비한 자들로 여겼다. 스승과 야쿠자 간의 전쟁은 잉태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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