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면장님의 아버님 碑 錦隱魯公慶相紀績碑 금은노공경상기적비
公(공)의 아호는 石塘(석당)이고 자는 君明(군명)이며 함평노씨(咸平魯氏) 시조 穆(목)의 7세손인 고려조 충신으로 正尹上護軍(정윤상호군)의 벼슬을 지낸 翰林公(한림공)파 무열공 岳隱愼(악은신)의 21대 후손으로 父慶相(부경상)과 母진주蘇氏에서 2남으로 1921년 음 3월21일 본면 어전리 760번지 동촌에서 출생하여 1995년 7월27일 유명을 달리하신 公은 금산면 제 7대 면장(1962년 3월~1970년9월)을 역임하셨다. 공은 일찍이 남다른 지혜와 총명을 겸비하고 한학에 입문하여 유년7세에 사자소학을 독송하는 탁월함을 보였고 특히 효심이 출중하여 삼강오륜의 도리를 다하고 가정적으로는 선친의 훈육에 따라 근면과 성실함을 익히고 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을 실천하였고 사회적으로는 25년간의 공직생활중 목민의 청백리로서 본면 발전과 면민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신 봉사자이로다. 인자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공은 넉넉하지 못한 가정생활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1937년 함평군 鶴橋(학다리) 공림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유학의 길에서 낙향하여 부친의 생업에 조력하던 중 1942년 향리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약관의 나이에 洞里區長(동리구장)에 피선되어 國恥(국치)의 일제치하에서 고통받은 里民(리민)들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애환을 함께 해결코져 노력하였던 바 공의 치적을 높이 평가한 면에서 서기로 임용 면장에 취임하니 후일 본면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큰 공적을 쌓게 하였도다. 특히 공의 공직기간은 조국해방과 함께 한국전쟁의 폐허와 정치혁명 그리고 조국 근대화 과정 등 격동과 혼란의 시대속에 자칫 사회적 손실이 있었던 시기에 公 특유의 저돌적 추진력으로 후학들이 공의 업적을 사모하고 표상으로 삼고자함에 빗돌을 새운다. 公은 교육의 목표는 백년대계라 하여 금산중학교 전신인 금산학원을 설립하여 많은 석학들을 배출할 수 있는 산실을 만들었고 지금의 금산종합고등학교가 설립된 기반이 되었으며 산성장학회를 설립 운영하면서 장학회장으로서 많은 장학금을 수여하였으며 본면의 교육수준과 향학열을 올리는 단초가 되었다. 본면의 경제적 부흥을 위해서는 동부권과 서부권을 잇는 관내 단일 일주도를 개설함이 최우선이라 판단하고 지역주민들과 협의에 들어갔으나 반대하는 세력들이 너무 많았다. 좁은 섬에서 무슨 넓은 도로가 필요하는냐가 주요 문제였다 公은 새벽부터 발목에 이슬을 묻히며 각 마을을 방문하면서 반대가 심한 지주분들을 직접 설득하여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던 금산면 일주도로를 개통시키므로 면민들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고 公은 신작로 토목공사를 하면서 면민들을 취로사업에 참여시키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것은 도로건설의 명분과 주민소득을 증대시키는 실리를 동시에 추진한 행정처리 능력으로 높이 평가 받았다. 또한 본면이 도서 지역인 관계로 해상교통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고 농수산물의 물류이동과 차량승객 수송으로 경제적 생산활동에 일대혁신을 이루면서 본면에 광주까지 운행하는 직행버스를 취항시켜 면민들의 도시권 1일 생활로 문화교류를 확충 의식향상 및 소득증대 사업을 날로 번창 시켰도다. 1968년 본면 최고의 사업이었고 공의 생애에 있어서도 각별한 영광이었던 농어촌 전기 전화가설 도입사업의 성공적 완수는 공께서 추진위원장으로 활약한 면면들이 훌륭하였기에 가능한 일로 물론 본면 출신 김일 프로 레슬링 챔피언의 적극적이니 지원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대륙지역보다 먼저 전력의 혜택을 받은 것은 공께서 가가호호를 손수 방문하는 등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휘한 결과로써 공의 지극한 정성이 하염없이 깃들어 있도다. 公은 1965년 음3월27일 부친이 별세하자 스스로 불효자라하여 3년 상복을 자초하여 매일같이 참배하였고 3년상이 지난후에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외부 출타시에는 반드시묘소에 참배하여 고인이 되신 부모님을 살아계시는 부모님 모시듯 하였으니 효심이 지극한 효자였고 효를 찾는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니 효행의 상징이 아닐수 없도다. 公은 1966년 여름날 동리 아동의 부주의로 기름 화재가 발생하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인명을 구조하고자 화염속으로 뛰어들어 전신화상을 입고 수개월을 병상에서 요양해야하는 위기도 있었으나 전 면민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건강을 회복하니 공은 이웃과 면민들의 후원을 감흥하여 면민 봉사에 더욱더 열정을 다하였도다. 公은 효의 근본은 禮라고 하셨고 항상 어르신을 만나면 원근을 구분치 않고 인경아친人敬我親의 禮를 다하니 지역 향리들의 칭송이 그칠줄 몰랐다. 이런정신으로 본면 노인회관 건립에 있어 당연 앞장섰고 문화유산인 송광암 전기사업에도 솔선하여 추진하니 관계기관에서 적극 협력하였다. 노년에는 고흥 문화원 이사 향토사 연구원으로 고흥군 전통 가꾸기 사업에 참여했고 고희에는 終而復始(종이복시)의 충정으로 함평노씨 대종회 회장으로서 현조3위 사당인 거평사 전남나주 문평동 월리소재를 복원 신축완공함으로써 종족후손들에게 있어 영원히 추앙받은 숭모의 조상으로 남게 되었다. 公은 1940년 11월 慶州李氏 月今과 결혼하여 맹숙 관숙 완숙 윤숙 연숙 5남과 정심 정순 2녀를 두었다. 이제 공은 저 세상에서도 본면의 발전을 위해서 활약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公이 태어난 용두산 下 자락 이곳에 전 면민들의 뜻으로 감히 금석(金石)에 각인하나니 公이 이룬 공적은 본면의 薰香(훈향)이 되어 후세들의 가슴을 적시는 雨露(우로)가 되고 굳굳한 길잡이가 되어서 遺芳千歲(유방천세)하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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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剛魯士熱情家 석강노사열정가 금강석처럼 굳센 용맹을 지닌 노면장은 면민을 위한 행정의 실천가이며 지극정성을 다한 정열가요 塘照炳然泛月明 당조병연범월명 넒은 연못에 비치는 청아한 달빛처럼 고고히 솟아오르는 둥근달로 깨끗하고 지혜로운 개척자의 인물이요 面域洙鄕開設貢 면역수향개설공 면지역의 중흥을 위해 학교설립 도로개설 철부선 버스도입 전기가설로 이땅에 광명의 빛을 준 선각자요 長期公僕錦山曨 장기공복금산롱(*曨[롱] 먼동이 트다, 해돋다) 최장 면장 재임중 개발사업을 위하여 충성을 다해 지역사회를 일신케하니 금산의 해돋움 같은 인물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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