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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신양(新陽) : 마을의 지형이 마치 고기잡는 그물처럼 생겼다하여 “발막금 또는 전막금(箭幕金)”이라 부르다가 새로 양지 바른 곳에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신양(新陽)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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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아버지 1년간의 기록 일기장 한 권을 발견하고 열어 보았다




그 중에서

4월 12일~15일 4일간의 기록이다

일기 서두에 "아버지 애상을  회상하며"로 시작하여

18장을 써내려 가셨다

"나는 아버지 가시고 한달 5일이 지난 오늘 슬픔 감정을 억누르며 회상한다."며 마무리되었다

내용을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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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2일 2005.06.30 16:48
    아버지 애상을 회상하며

    1964년4월 12일

    어제 숙모님께서 고향에서 전화가 왔다고
    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부친께서 12,3일 전에 집에 갔을때는
    그렇게 대단하시지 않고 위가 아프시는지
    밥을 좀 못 잡수시는것 뿐이었는데, 앞이 캄캄하다.
    혹시나 하는 예감이 머리에 든다.
    며칠을 두고 꿈 자리가 험하고 험하더니 이상하구나.

    꿈에 큰어머니들이 흰옷을 입고 계신것도 보았고
    형용할수 없는 험한 꿈들이 잠을 못이루게 하더니,
    어제는 이런 비보에 접하고 말았다.
    설마하고 광주에서 현민친우와 같이 아마도 광주로 모시게 될것이라고
    모시고 오시면 고생해 달란 부탁까지 하고 7시 10분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상한 예감, 실끝같은 희망속에서 아버지께서 혹시나 어떠실까
    그제까지 병원에 입원 하셨을까
    혹시 오늘 광주로 가실까 하면서 광주가는 차가 보일적마다 내다보고 하였다.

    버스는 녹동에 닿았다.
    준화동생 집에 들리니 아버지께서 어제 저녁 10시에 급서거 하셨다는 비보다.
    아 실망이다. 앞이 캄캄하다.
    정신없는 생각으로 2시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거짓말 같았다.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회오리 바람같은 이상한 예감!
    설래는 내마음을 바로 잡을수가 없었다.
    아버지 드릴려고 광주에서 사과를 샀다.
    그도 현민 벗이 돈을 1000원 주어서다.


    이상하다.
    내눈으로 보기전에는 전혀 터무니 없는 소리려니하고 자위까지 하면서
    그 말을 믿으려고 생각지 않았다.
    바로 엊그제 내가 집에서 왔는데 이게 어떻게 된일이냐?
    가슴이 뛴다. 마음은 걷잡을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해야 옳단 말이냐.
    나에게는 형제간이 많다. 귀여운 동생 고사리 같은 동생들이 한참 자란다.

    배에 몸을 실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급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나를 동정한다.
    고향에 연락선이 나를 실어다 주어서 바로 내렸다.
    아 슬픈 일이다. 동생들이 나를 마중나왔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나는 어쩌란 말이냐.
    아직까지 눈물이 나지 않는다.

    조금더 걸어 갔을때 내집에 흰옷들이 있었고, 흰 천막들이 처 있었다.
    지금까지의 감정은 말랐다.
    집에서 30미터 떨어진 곳에 갔을때 누나와 동생들이 상복을 입고 나왔다.
    우리 형제는 서로 부등켜 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비오듯한 눈물이 끝일줄 모르고 앞이 보이지 않게 쏟아진다.
    누나에 몸을 간신이 의탁하고 방에 들어섰다.
    연발.. 이것이 왠일이냐, 눈물바다 5형제 5남매, 동네사람,...
    큰 아버지 내분, 숙부님, 큰 어머니, 형수님, 사촌형님,동생들....

    온 집안 사람들의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는 장손이다.
    11일 저녁 8시에 돌아가셨다니
    12일 현재 3시까지 누나와 누이는 그리고 내 아내는
    얼마나 울었는지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목이 컬컬하다.
    그런데 또 내가 왔으니 명색이 장남이라고 임종시에도 못보고 그 마음이 오직하랴
    그래 저래 이 슬픔 속에서 또 내가 나타났으니 얼마나들 울었는지 ...

    숙부님은 나보다 슬프게 아버지 두상을 붙안고 나를 보라 하셨다.
    나는 차마 볼수가 없어 비명에 찬 소리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이 형용 할 수 없는 심정.
    사람이 당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을 글로서 표현하려니
    어떻게 나의 슬픔 마음을 표현 할 수 있으랴.

    나는 일찍이 슬픈일을 당해 보지 않은체 넉넉치 못한 가정이나마
    남부럽지 않게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살아서 눈물을 모르고 살았다.
    남이 슬퍼서 울때면 나는 속으로 어쩌면 저렇게 눈물이 나올까 하고,
    의심까지 하였던 나다.
    그러나 막상 환경이 이처럼 비극이 나의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아 갔다.

    이때의 심정으로는
    온 세상의 권력 세계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권력과
    온 천하 세계를 다 살 수 있는 재벌가가 되라고 해도 아버지와는 바꾸지 않겠다.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하고 동생들은 저마다 소리치면 슬픔?ㅓㅓ을 비명한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는 양복을 벗고 한복 바지 저고리를 입고
    두루마기는 한쪽 어깨는 끼지 않은체 한쪽 소매만 팔을 끼었다.
    부모상을 당하며 죄인이 되는고로 남의 눈에 보기 싫게 보이라는 것이라 한다.
    조문하려 오는 손님이 오면
    꼬마동생까지 5형제는 곡을 하고 절2배 반자리 하도록 곡을 끝내고 인사를 한다.

    백부님은 나 몰래 눈물을 흘리고 눈물을 닦고 한다.
    어린 조카인 우리에게 눈물을 슬픈 빛을 안보이기 위해서이다.
    중주님 세분도 백부님과 한결같이 슬픔 표정속에서
    눈물을 나몰래 흘리고 닦으시고 하신다.
    큰 아버지들 께서는 나를 한없이 위로하신다.

    오늘이면 광주에 입원 수속까지 밟고 택시까지 준비 해 두었는데도
    이렇게 갑자기 그랬으니 운명이라 어찌 할 수 없다 하신다.
    저마다 입달린 사람이면 운명이라 할 수 없구나 하신다.

    나도 운명론자를 ??ㅠㅠ한자라고 경멸해 왔지만
    이때처럼 그 운명이란 두 글자가 듣기 싫고 진저리 몸서리친지 모르겠다.
    아 운명 이것도 운명이란 말이냐.
    좀더 빨리 서들었드라면 살으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 그 운명이 얄밉다.
    뭣 때문에 운명이라 하는가,
    생 사람을 죽여 놓고도 운명이라 하는가 하며
    터무니 없는 반항도 하고 몸부림 쳐본다만 소용없는 일이다.

    아버지께서는 임종시 끊임없이 손을 휘두르며 나를 찾으시드라고 하신다.
    그런 말 들을적마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다.
    가슴이 쓰려 미어 지는것 같다.
    왜 이다지도 내 마음이 괴로울까.

    둘째 동생 덕화군의 슬픔이란 말할수 없다.
    슬픔은 자식된 도리로써 다 같겠지만 덕화만은 슬픔이 나와 다를 것이다.
    명년에는 장가 보네기로 한 동생이니 말이다.

    세째동생 도화는 정신없이 소리치며 뒤궁글어 댄다.
    남아로써 막둥이는 소리없는 눈물만 흐른다.
    그 어린동생을 처다 볼적마다 새삼스래 눈물이 쏟아진다.


    이렇게 눈물을 많이 흘리려고 어려서부터 한번도 눈물이 없었으니
    인제 그 눈물이 다 나오는가 보다.
    아버지께서는 임종시 나를 찾으며 손을 흔들다가 가셨다.

    나는 장손 아들이지만 끝내 아들 노릇을 못하고 말았다.
    나를 위해서 고생하시던 아버님을 생각할때 또 다시 가슴이 뛰고 서러운 분노는 복 바친다.
    12,3일 전에 나는 하숙집을 나와 자취를 한다고 아버지께 괴로움을 끼쳐 드렸다.
    나는 세상에 막 나오면서 부터 아버지 인생이 끝날때 까지 괴로움을 끼쳐 드렸다.
    생각하면 한없이 불효 자식인 나다.
    가슴이 미어진다. ??어진다.
    나는 그때 집에 갔을적에 알아서 병원에 입원 못 시킨것이 한없이 후회스럽고 죄만 스럽다.

    이제 나는 어쩐단 말이냐,
    어머니는 목이 메일 정도로 슬피우신다.
    내 아내는 아버지 임종시 내가 없어서 그 슬픔속에서도 얼마나 허전했을까.

    어린 꼬마 동생 6살짜리 여식은 세상모르고 놀고 있다.
    국민하교 2학년, 5학년짜리는 다소 무엇을 아는 모양이다.
    손자를 그렇게 귀엽게 하시고 자랑하시더니 인제는 손자도 못보게 되셨다.
    국이는 참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국 엄마도 마찬가지다.
    시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한다고 소문이 났던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없으니 복이 없는 며느리다.
    나는 내 아내에게 미안한 감이 이만저만 아니다.

    저녁에는 어버지 시신 옆에서 꼬박 눈을 붙혀볼 사이도 없이 뜬 눈으로 새웠다.
    백부님께서도 가시지 않고 어제 저녁에도 큰 형님이랑 한숨도 못 주무셨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말을 안했지만 어제 저녁 나는 아버지께서 임종시 나는 광주 극장안에 있었다.
    보고 싶은 얼굴 영화를 감상하러 갔다.
    이 사실을 세상이 안다면 비웃을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마땅이 임종시 자리에 있어야 할 장남인 내가 극장에가 있었으니 하늘도 노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교통상으로 단일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 한이다.
    목포에 있었다는 것이 잘못된 일이다.

    금산병원에 9일간이나 입원하고 계실때도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신다.
    나에게 걱정을 끼쳐 주고 싶지 않으려는 거룩한 마음씨에서다.
    나는 아버지의 이러한 거룩하신 마음씨를 전해 들을적마다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것 같다.
    차라리 그런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를 위로한다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거룩하신 마음씨를 치하하고 평소부터 남에게 거짓이 없으셨고,
    나쁜일은 손톱만큼이라도 하기 싫어한 아버지의 마음씨를 전해 들을적마다 내 마음이 괴롭다.
    아버지는 나에게 소식 전하지 못하게 하시다가
    끝내 장남인 내 손목 한 번 잡아 보지 못한체 저 세상으로 가셨다.

    장례식은 4일장으로 정하셨다 하신다.
    동네 사람들이 3일장 권유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께서 단하루라도 더 동생을 보고 싶다고
    하루를 연기하셨다고 하신다.

    12일 저녁 91세 되시는 할머니를 찾았다.
    6형제 자식이 티하나 없이 정답게 살다가
    다섯째 아들이신 나의 아버지께서 저 세상으로 갔으니
    할머니 마음은 얼마나 슬프고 괴로우랴 싶어 할머니를 위로 할 겸 큰댁에 갔다.

    나는 나올려는 울음을 참다 참다 못해 할머니를 잡고 구슬같은 눈물 방울을 연방 떨어뜨렸다.
    그 구슬같은 눈물이 할머니께서도 떨어진다.
    백발이신 할머님의 슬픔은 오직 할까.
    할머니에게는 죄송한 말씀같지만 동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차라니 할머니하고 바꾸었더라면 좋았을걸 한다.
    할머니께서도 하느님도 무정하시지 나는 잡아가지않고 젊은 사람만 잡아 가신다고 원망하신다.

    51세의 젊은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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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3일 2005.06.30 16:50
    4월 13일

    뜬눈으로 밤을 샌 체 아침햇살 동녁 하늘은 어제보다 더한 슬픔을 우리형제에게 가져다 준다.
    오늘이 저 세상으로 가신지 3일째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마냥 우리형제는 울기 시작했다.
    제일 모리 누나 그리고 내 아내는 목이 메여 이제는 울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어린동생들은 어떻게 하고 가십니까, 불쌍하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
    우리동생 어떻게 하실렵니까.. 연발한다

    남동생들은 얼마나 울었는지 기운이 제대로 나지 않은 모양이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은 난다.
    구슬같은 눈물을 모았더라면 얼마나 많았을까.

    눈물 주머니가 얼마나 크기에 이렇게 많이 나올까 하고 나는 생리적인 조건의 신체의 신기함을 느꼈다.
    내일이면 인제 아주 지하에 모시게 된다.
    아침부터 조문객이 쉴새 없이 찾아든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우리 남형제는 곡을한다.
    슬픔 감정이 이런것이란 것을 알았다.
    눈물을 흘리고 울 수 있는 환경에 처한 사람은 이제부터 한결 다시한번 생각해 볼것을 마음 먹엇다.

    외숙님이 오셨다.
    통곡을 하며 우신다.
    자형이라도 부모처럼 항상 생각하시든 삼촌이시기에 슬프실거라고 생각했다.
    항상 지날때 자형과 무엇을 의논하고 하시던 삼촌께서 믿고 믿던 자형마저
    저세상분이 되고 말았으니 과연 슬프리라.
    삼촌께서 곡으 끝나고 우리 어린 조카들과 인사를 하며
    이것이 왠 일이냐며 또 우신다.
    우리는 다같이 그자리에서 눈물의 바다 끝일줄 모르는 통곡속에서 비애에 흐느껴 울었다.
    이것이 왠일이냐
    나는 이 말씀을 지금 아버지 가신지 한달하고도 5일째 되도록 귀에 쟁쟁이 들린다.
    객지에 가셨다가 하도 오고 싶어서 오셨다는 것이다. 영감이 있기 때문이다.

    건너방에서는 상여를 만들고, 또 갓방에서는 상복을 만들고 야단들이다.
    이 슬픔속에서도 술주정꾼은 술취하여 떠들어 댄다.
    갑계원들도 왔고 모든 촌 사람은 다와서 슬픈 애도의 뜻을 표하고 조위한다.

    그래도 백부님은 눈물을 닦으시고 나를 위로하신다
    순천서 형님이 오셨다. 유화형님도 아버지를 붙잡고 대성통곡한다.
    그 많은 사촌간 형들이 눈이 퉁퉁 붓도록 우셧다.
    이렇게 사이좋은 우리집안은
    이런 기회에 더욱더 의좋은 형제가 된다는것을 약속해 주었다.

    목포시청 산업과에서 조위전보까지 보내주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울고 대성 통곡을 해도 슬픔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오고 많다.
    슬픔이란 가실줄 알았더니 날이가고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하다.
    큰 누나는 밤새컷 울고 며느리도 운다.
    이렇게 슬프고 분하고 마음둘곳 없고 마음 갈피를 잡을수 없는일이 어디 또 있으랴 싶었다.

    아직 젊으시고 한참 활동력 강하실때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자식된 우리는 슬픔을 말로 표현해 무엇하며 글로다 다 표현 할수 있으랴 싶었다.

    아버지 친우들은 항상 아버지더러 이제 제일 편하고 장례가 좋을거라고
    약주를 잡수시고 오실적마다 우리가 있으며 기쁘시다는 듯이 이야기하시고 하시더니
    그 좋으시다는 장례가 결국은 이것으로 끝이 났으니 어이하랴.

    인제는 마치 자식들과 살만하고 평화한 가정속에서 행복의 꽃이 필거라고 자신을 자졌더니
    오히려 슬픔 선물을 가져다 주었으니 세상을 원망하랴.
    아 이슬픔 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인제는 누구를 보고 아버지라 부른단 말아냐.

    나는 아버지 사랑을 받았으니 괜찮다만 어린 병아리 같은 동생들이 불쌍하다.
    얼굴을 쳐다보고만 해도 가슴이 메인다.
    벌써 얼굴에는 눈물이 주루르 흐른다.
    여섯살 여식동생은 아버지가 잠잔다고 한다. 이 얼마나 천진한 소리냐.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또 눈물이 나온다.
    다같이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울었다.
    서로 쳐다 볼 수 없는 입장이다.
    눈을 뜨고 보면 눈물
    저녁에는 사위네들과 다같이 마당 멍석위에서 자지 않고 놀자고 한다.
    그렇게 연 사흘간이나 온 집안이 인파때문에 돌아들 사이가 없더니 저녁쯤에야 가족들 뿐이다.
    오늘 저녁도 백부님께서는 집에 다들 계신다.

    사위네들은 이틈 사이에도 장난이 벌어져 야단들이다.
    하도 우스운지 나에게도 잠깐 머리를 돌리고 구경하고 웃을 수 있었다.
    울음속에 웃음이라더니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였다.

    내 아내는 옆에서 피곤하였던지 잠이 들었다.
    어린 국이는 젖을 송아지마냥 고개를 파묻고 젖을 빨고 있다.
    아버지 시신에서 냄새가 독하게 풍긴다. 그래도 그 냄새가 역겹게 느껴지지 않고 방에서 있었다.

    낮에는 아버지 친우들께서 전부오셔서 아버지 앞에 술잔을 올리고
    우리와 인사를 주고 받으며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버지 친우들을 대하니 그 슬픔 더욱 간절하다.
    다만 아버지가 불쌍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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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4일 2005.06.30 16:51
    4월 14일

    저녁에 뜬 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해서 우리들의 얼굴은 수척해만 간다.
    오늘은 아침에 유해를 관으로 모신다.

    인제는 아버지 얼굴도 마지막이다 하는것을 생각할때 기가 막히고 앞이 캄캄하다.
    우리형제 아버지 형제 우리들의 사촌형들은 서로 울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온통 슬픔속에 쌓이고 말았다. 피눈물 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목격하는 사람은 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눈물이 아니 나올 수 없는 입장이리라.
    어린동생들의 얼굴,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 볼적마다 그대로 마주바라 볼 수 없는 실정이다.
    서로 쳐다 보며 눈물이 흐른다. 눈물 눈물... 과연 눈물이 무엇이랴 싶었다.

    아침 식사를 겨우하고 오늘은 상복을 저마다 다 입었다.
    고사리 같이 자라는 어린 동생들이 상복을 입고 있는것을 볼때
    이것이 무슨 일이야 싶어 슬픔 감정은 또 한번 솟구친다.
    상복을 입었을때의 감정이란 세상이 이런 것이랴 싶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낳으셨고 어머니는 우리를 길으셨다.
    따져 놓고 보면 별것 아닌 사이라면 별로 신통할것이 없는데도
    한분이 세상을 뜨시니 그 뒤에 슬픔이 따르기는 무려 수십 수백 사람이다.

    나는 이제 다시 영영 아버지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꼬마 동생들은 아버지 계시지 않은 설음이 지금부터 시작된다.
    누구를 보며 어버지라 부르면 누구에게 어리광을 부리랴 싶을때 앞이 캄캄하다.
    지금 우리형제는 상복차림을 하고있다.
    어린 우리에게 상복을 입히게한 하느님이 원망스럽다.
    세상도 고르지 못하다.

    세상사람이 죽으라고 손가락질한 악한 사람은 오래 살고,
    아버지 같이 양심적이고 선량한 인간에게는 오래 살지 못하게 한 원인이 어데 있으랴 싶어
    원인을 규명해 보고 싶었다.
    슬픔 슬픔 이 외에 슬픔이 또 다신들 있을까

    이제는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신다.
    숙부님은 비명통곡 하신다. 흐느껴 우신다.
    잔을 올려 절하며 그대로 업드려 일어나지를 못하신다.
    형제간의 정이란 무서운 것인가 싶었다.

    나도 내 아내와 집안에서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잔을 올리고 향을 피워 절하여 올렸다.
    누나며 어머니 동생 형수님 큰어머니들 백부님 관을 붙들고 우신다.
    이러한 슬픔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싶었다.

    12당군은 관을 붙들고 장송곡을 부르며 부락 놀이터로 아버지 유해를 모신다.

    놀이터에 아버지 유해를 모시고 조문객을 끊임없이 맞이 하였다.
    이렇게 슬픈 장면 이러한 슬픔은 일찍이 우리 부락이 생긴 이래로 처음이로 한다.
    죽어 계신 아버지 앞에 "제물"로 잔치를 하였다.
    우리는 서로 붙들고 마지막 가신 아버지를보며 통곡한다.
    나는 꼬마동생 평화를 붙들고 실컷울었다.

    목이 메일 정도로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목에서 피가 나도록 울고 통곡해도 시원치 않았다.
    백부님을 붙들고 울었다.

    이와같은 슬픔 장면을 목격한 조문객 부락민들은
    너나 할것 없이 눈마다 눈물의 강을 이루었다.
    다들 슬퍼한다.
    진심으로 불쌍한 아버지를 위하여 그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운다.
    나는 또 중부님을 붙들고 울었다.
    이제는 눈물 눈물 얼굴에는 온통 눈마다 눈이 부었다.
    우리형제 사촌형제 까지도 너나 할것없이 슬피운다.
    조문객들은 이와같이 심지어는 사촌누이 형제까지도 슬피우는 광경을 보고 놀라 쓰리라.
    이런 통에도 우리 집안의 사이좋은 의좋은 집안이란것을 단단히 과시했다.
    동네를 마지막 인사할때는 이제 또 마지막이랴 싶어

    앞을 분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 바치는 설음속에 울고 말았다.
    한없이 슬프고 한없이 괴롭고 끝없이 불쌍하신 아버지다.

    마지막 지하에 모시려 할때의 감정은 또 어떠했으랴.
    시간이 가고 장소 환경이 바꿔짐에 따라 슬픔은 가실줄 모르고 되살아 난다.
    나는 지하에 모실때 소리높이 외치며 울었다. 대성통곡하엿다.
    울어도 울어도 시원치 않다. 바로 슬픔이란 이런것인가 싶었다.....

    마지막 모시고 집에 왔다.

    마땅이 아버지께서 계셔야 할 집에는 텅빈 집이다.
    속모를 어린 동생들만 있었다.
    철없는 동생들 쳐다 볼때마다 솟구치는 감정, 슬픔! 말을 해서 무엇하랴.
    오후에는 고흥에서 소엽이 동생이 왔다. 형제간은 다 찾아온 셈이다.

    상체는 백부님 형님들이 전부다 골라서 차고 우리는 빚하나 없이 해 주었다.
    어린 조카들에게 빚이 있으면 안된다는 백부님의 말씀이다.
    형제간 백부님들의 은혜 끝없이 감사하였다.
    아버지 형제간이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상체는 6만원 정도, 소비란 말할수 없이 많았다.
    집안에는 된장 간장 밖에 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한다.

    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어찌하나
    저녁에는 백부님들 하고 형제간이 모여 우리 살아갈 길을 의논하고 계신다.
    결론이 나는 직장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어린 동생들은 고향에 두고 나만 직장으로 가다니
    안된다 같이 고향에서 고생하자며 나는 안 간다고 주장하였다.
    덕화 동생도 미안하고 더구나 어린 동생들만 있으니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직장을 사퇴하고 고향에 온다고 주장하였으나 형제간이 굳이 말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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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5일 2005.06.30 16:52
    4월 15일

    다음날은 현민군이 광주에서 한사코 왔다. 친우로서의 우정을 지킨다.
    나는 다만 미안 할 뿐이다.
    돈도 형수에게 타쓰는 처지에 광주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참으로 미안한 마음 이만저만 아니다.조기 3건까지 손수 만들어서 .

    삼오까지 큰 형님께서 자리를 비지 않고 끝까지 계셨다.
    형님의 성의를 언제나 보답하랴.
    형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고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다.
    형제간의 우애을 살리려고 집안을 화목하게 만들려고 애쓰신 분이다.

    삼오를 마치고
    하루를 더 집에서 쉬고 막상 고향을 떠나 목포에 올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머니, 어린동생들은 두고 나만 편히 살수 있는 곳으로 가려니 양심은 나를 막는다.
    그러나 오늘의 슬픔만으로는 세상을 살수 없는 것이다.
    굳은 각오와 의리로 인생을 새 출발하자 하면서
    평화호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멀어져간 고향 산천
    거기에는 갖은 슬픔과 비극의 시를 뿌린체 그 발자취만 나를 슬프게 한다.
    참으로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이제 모든것을 나의 손으로 옮아가고 꾸려 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우리형제간 어미니께서도 마찬가지다.
    지금부터 슬픔과 눈물 속에서 새 인생을 설계하며 인생을 꾸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아버지 가시고 한달 5일이 지난 오늘 슬픔 감정을 억누르며 회상한다.








  • ?
    명종아 2005.06.30 17:02
    너무 길어 타이핑 할 엄두를 못했는데...
    명종이가 타이핑해 주었다
    명종아 ! 수고했다
    잘모르는 글씨는 ..ㅓㅓ 걍 넘어갔다


    6월이라..6월 일기 중에서 몇개 추가해본다
  • ?
    6월 5일 2005.06.30 17:18
    6월 5일

    6월 3일부터 서울지구 비상 계험령이 내렸다. 정부는 자뭇 불안하다.
    가난한 나라에서 가난해지기 마련이다.
    한국의 학생 한국의 젊은이들은 불안한 세대의 주인공들이다.
    처음부터 불안속에 태어나서 불안속에서 죽어야 할지 의문이다.
    언제나 정부는 안정이 될찌. 신문은 뉴스도 데모로 뒤덮고,
    각지방마다 학생 데모가 일어난다.
    우리는 말못한 벙어리다.
    한달 기껏해야 4,000원 짜리 입에 풀칠을 하려고 그대로 말 못한 벙어리처럼
    살아야하는 벙어리, 냉가슴이다.
    배고픈사람에게는 정의도 무엇도 없다. 그대로 벙어리가 되란 말인가.
    한심한 일이다. 이대로 한숨만 쉰다.
    이나라 장래는 어떻게 되려나.
  • ?
    6월 25일 2005.06.30 17:20
    6월 25일

    공무원들 기다리던 봉급날이다.
    이날은 즐겁다기 보다는 외상값을 정리하기에 바쁜날이다.
    외상값도 다 갑지 못하는 마음. 괴로운 날이다.
    기다리고 바라던날에 마음이 괴롭다면 어떻게 되란 말인가.
    생활 보장이란 사회적인 문제다.
    마음을 바로잡고 국가 공복이 되어 충실히 근무할수 있게 하려면 생활보장 먼저 지켜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여 일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심스러운 사회 썩어빠진 공무원들 마음. 모두다 마찬가지다.
  • ?
    6월 30일 2005.06.30 17:21

    6월 30일

    6월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이면 7월1일.
    달이가고 또 새로운 달을 맞이 하려는 오늘 지난달의 흐름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했던가 .
    발견한것도 없고,
    진실을 다 바쳐 해 본 일도 없다.

    헛된 고역 그지없는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 속에서 마음을 허비 하였다.
    이런 허무와 무상을 되씹고 있다는 것은 나의 퇴보를 의미하는것이다.
    전진하지 못하고 퇴보한다는 것은 이내 사는 것만 못하다.
    6월의 퇴보를 거울로 비쳐보고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하자.

    내일이면 맞이할 7월은 좀더 보람있기를 마음속 약속하면서
    그지없는 6월의 마지막 시간을 서산에 보내다.
    6월 30일 저녁 외로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저녁 식사를 하고 삼학도에 산보를 하였다.
    무덥고 텁텁한 방에 있다가 바닷 바람을 마시니 한결 마음이 상쾌하다.
    오후에는 비가 좀 왔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으면서도 오지 않는다.

    삼학도의 저녁 바람은 나의 외로운 마음을 바람결에 씻어 버려 준다.
    심호흡을 몇번이고 하면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명동 빈민촌 골목길로 발을 옮겼다.

    이곳에는 아주 가난에 지친 사람들이 판잣집 한 두간 방에서 생활을 하는 곳이다.
    먹는날이 일하는 날,쉬는 날 보다 적다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모인 곳이다.
    과연 저녁 식사때의 이 골목은 가난이 몸서리치게 드러나 보인다.

    가난한 골목 어떤 오두막집에서는 부부간의 정다운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행복이란 이런것인가 싶었다.
    목마른 그리움이 나의 전신을 육박한다. 밤마다 그리움속에서 몸부림 친다.
    사람,그리움.... 이것은 인생에 있어 가장 귀하고 없어서는 안된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인생이란 마른 나무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사랑이 그립다.
    한 길가에 앉아.... 오고가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몇이나 되는가 세다 세다가 그만 지처 버릴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죽동 큰 길가에서 그들의 표정을 더듬어 본다.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에 같은 사람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제 각기 바쁜 일 있어 저렇게 오고 가겠지.

    그 중에는 배가 불러 소화 작용으로 거닐은 사람도 있을께고
    어떤 사람은 전당포에 무엇을 잡히려가는 사람도 있을게다.
    일일이 헤아리자면 한이 없다.
    우선 이 두가지만 보더라도 얼마나 대조적인가.
    한사람은 배가 불러  또 한사람은 끼니가 없어 옷을 잡히고
    전당포 천대빚 얼굴을 감추고 살야만 하니
    하늘과 땅 차이가 드러나 보인다.

    같은 민족 같은 민주주의란 생활의 원칙아래 인간의 권리와 의무의 원칙 아래
    이처럼 대조적이란 역시나 모순이다.
    이사회는 모순 덩어리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모순에서 태어나 모순으로 살다가 모순에서 죽어 간다.
    사람의 생활이 이래서야 20세기의 문명을 자랑하고
    자유를 찾는 민주주의를 자랑하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생산을 목적으로한다지만
    어디 믿고 살겠는가 말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목적이 무시되어 가지고 어찌 산다고들 하겠는가.
    이렇게 굶주리고 허덕인 이런 궁팍한 사회에서도 정신 교육이랍시고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먹지 않고 ......성심껏 빠지지 않고  다닌다고 해서 배가 부를 수 있는가 말이다.
    이러한 허수아비적인 정신교육이 오늘의 비참한 사회 가난한 사회로 만들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인구는 기아급수적으로 늘고 땅은 좁고 공업은 발달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란 말이냐.
    자급자족 생활을 못하는마당에 거리에는 술집이 너무도 많다.
    사회가 혼탁하면 할수록 술 주정뱅이가 많다.
    소비품만 늘고 있다. 어떻게하면 잘 살수 있을고.







  • ?
    일기장 사진 2005.07.01 13:34
    ..
  • ?
    사진 3 2005.07.01 13:35

    .
  • ?
    이미지 2005.07.01 13:52

                                                                 대장 부리바                                                        율  부리너                         
  • ?
    2005.07.01 14:04
    슬픈 애도의 장면이 전체여서
    아버님이 보셨다는
    대장 부리바의 이미지 컷 한장면으로
    마무리 짓는다
  • ?
    진 국 2005.07.01 14:07
    할아버지 아버지 두 분 다 지금은 우리 곁에 안 계시지만
    40년전  그 날로 돌아 가 봤어요.......

    표정이 영~ 거시기해서  올려보그만요

    "창준이랑께라"~~~~
    "할아버지께서 날 알아 볼랑가요?" ~~~~~~




      진 창준이랑께라 ~~~~~     안    녕  !!!   ^^*^^



  • ?
    지수기 2005.07.05 09:50
    이른 아침부터 다운 받을게 있어서 컴퓨터
    켰다가 한번 들어와 봤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짐정리 하가가 발견한 아버지의 일기장
    정리하다말고 일기장 읽어 내려가며 한염없이 울었었는데
    이아침 가슴이 너무도 메이게 아프네

    아버지의 모든거 존경스러웠지만
    아버지로서도 어쩔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경제적으로 너무도 무책임 하셨던 분
    쌀이 떨어져도 나몰라라 하시며 책을 읽으시던분
    남 고무신 신을때 꽃신 신고 다니셨다던 엄마가
    손이 거북이 등처럼 되도록 고생하시는 그런 엄마를 뒤로하고
    넥타이에 양복 쫙 빼입고 나가시는 아버지
    오빠 난 지금도 엄마 손을보면 가슴이 아퍼
    오빠는 모르겠지만
    내머리속에 기억되는 아버지는 항상 원망이었는데...

    나 어릴적에 자고 있으면 술냄새 풀풀 풍기며
    내 볼에 입맞춤 해주고 가시던 아버지
    내가 깨어있었다는걸 아셨을까?
    여름에 빨간 샌들 사다가 고사리 같은 내손에 턱하니 안겨주시던 아버지
    어디 멀리라도 가시면 엄마 선물에 내 선물까지도
    잊지않고 사다주시던 아버지
    아들들 대학 못보내도 하나뿐인딸 꼭 대학 보내시겠다던 아버지
    내가 다 커서도 손이 예쁘다며 내손을 자주 들여다보며 어루만져주시던 아버지
    돌아가신 후로도 내 꿈속에만 가끔씩 나타나시고
    살아생전처럼 내손을 어루만지시며 안스러워 하시던 아버지
    .........

    항상 원망으로 다가 왔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오빠 오늘은 한없이 한없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네

    ㅎㅎ 눈물난다
    아빠 우리에게 힘을 주세요
    그리고 요즘은 왜 꿈속에 나만나러 안와?
    이젠 아버지에 대한 원망 다 지우고
    아버지께서 주신 크신 사랑만 기억할께요
  • ?
    또... 2005.07.05 10:44
    커피한잔 마시고 또왔다
    이삐고 사랑스런 동생 명종아
    잘 지내니?
    작은엄마는 어떠시니?
    가까운 곳에 작은 아버지 모셨다만
    마음만 있지 찾아가 뵈지진 않는구나
    미안해
    딸이 없어도 딸 이상으로 애교덩어리인
    니가 있어서 작은 엄마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단다
    힘내서 잘 살아보자~~bye

    오빠 우리 이쁜 창준이 얼굴이 사라져버리고 배꼽만 보여
  • ?
    진 국 2005.07.05 16:33

    아무리 슬픈 현실도,

    아픈 고생도,

    애끊는 이별도,

    남에게는 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당사자들에게도

    한낱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날의 일기도,

    훗날의 전기도,

    치열했던 전쟁도,

    유구한 역사도,

    다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한다.

    <피천득>


    * 아버지 일기는 28세 젊은 시절 일상의 기록이지 뭐
    *모든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치 말라
    *(위에서 피천득 아저씨의 이야기처럼 받아 드리렴)
    *사진이랑  다  배꼽만 보이네  들어가서 함 봐야겠다
    *좋은 시간 보내라
    *하고 싶은 일, 배우고 싶은거 다해라. 열중해서 해라.



  • ?
    진 국 2005.07.05 16:55
    워메 ~
    비 떨어지네
    우산도 없는디...

    가만있자~
    다행이다
    기다릴까
    설레인다

    어느 우산 속으로 들어가 볼까ㅎㅎㅎㅎㅎㅎ



  • ?
    김학주 2005.07.08 22:58
    아들냄이 잘났네
    아빠는 안달문것 같은디
    누굴닮믄겨
    그놈 클때까장 쬐칸 고상좀 하것네
    그래도 이쁘제~~~~

    다읽어보느라 시간좀걸리네
    아버지 하면 생각나는것이 넘많아서 말이여
    그래도 남몰래 흐르는 눈물도 있을것인디 ~
    가슴이 찡 하네그랴

    잘해야 겠다고 생각 하지만 그리 쉬운것도 아니네~~~~~

  • ?
    영미 2005.07.09 11:14
    오빠 작은아버지 일기장이 마치 옛날 고서를 읽는 느낌이 드네.
    일기내용을 보면서 아버지 생각, 작은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
    한참 잊고 지내왔었는데 오늘  비때문인지 더욱 그립다.
  • ?
    진 국 2005.07.14 10:11
    학주여
    어쩨 요세 두문불출이네
    영미도
    신양 카페에 첫 출근인것 같은디... 자주 보드라고  잉~

    일기장을 읽어본께
    나이 28에
    5남 5녀 한 집안의 장남
    자나 깨나 객지에서 집 걱정
    비가 오면 논두렁에 물 걱정
    비가 안오면  가믐에 타 들어가는 농토 걱정
    공무원 박봉으로 돈 벌어 가난을 물리칠 수 없고
    집안을 이르킬 수 없으니 사업구상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다짐하며 독서에 열중하고
    사람들을 두루 널리 알아야 한다고 사교에 힘쓰고
    영화를 좋아해 극장에 자주 간 이야기
    현실에 모순, 모순의 발견......
    이런 애기들

    일기장 뒤에
    금전 출납부가있는데 지출 내역을 보니
    우표 4원 극장 30원 이발 40원 향우회비 400원 ....
    그 당시 화폐 가치를 알 수 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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