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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신금(新錦) : 본 마을은 원래 금진에 속하였으며 산모퉁이를 끼고 도는 곳에 위치한다하여 “샛감도리”라 부르다가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새신(新)자를 붙여 신금(新錦)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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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고향 신금에 대한 나의 역사시대는 6살쯤인 1968년 언저리다. 그때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다고 집집마다 전기 공사를 했었는데 공사장 주위를 또래들과 맴돌며 전기선이나 하얀 소자 등을 얻어 장난감삼아 놀았었다. 물론 그 때 처음으로 전기를 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 금진 초입에 사설 발전소가 있어서 밤이 되면 통통통 소리가 나면서 마을 여기 저기 백열등이 간당간당 빛났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집집마다 처마밑에 스피커가 달려있었는데 그 작은 상자안에서 사람들 소리가 나는 것이 무척 신기했었다. 아마도 동각에서 각 집으로 퍼진 네트웍 시스템이 아니었나 싶은데 가수들의 노래와 이장님의 '에..또..머시 어짱께 어째불시요'하는 방송이 자주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으로 치면 훌륭한 케이블 방송이었던 셈인데 그때는 금진, 신금, 화섬을 아울렀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전기가 들오자 테레비라는 괴물도 첨 들어왔는데 금진에 먼저 들어왔다. 이발소, 그 때는 이발하러 금진으로 다녔는데 이쁘장한 '가리이발'은 40원이었던 기억이 나는데 빡빡이 백두는 얼마였는지 기억에 없다. 설이나 추석 아니면 가리이발은 꿈에도 못꿨고 신금 우촌 동명이성 할아버지한테 줄서서 바리깡으로 빡빡 밀었다. 그 이발소를 지나 오른쪽 점빵집에 테레비가 첨 들어왔는데 나보다 두세살 위 동네 누나, 형들을 따라 테레비를 구경간 기억이 나지만 무슨 화면을 봤던 기억은 없고 누군가의 무등을 타고 창문너머 뭔가를 보려고 머리를 쭈뼛거렸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어느날 그러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나의 친구였던 '에스'가 동네 밭에 뿌려둔 쥐약을 먹고 개같이 죽어서 엄마와 울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이후 난 애완동물을 절대로 키우지 않는다. 사람과 정들고 못보는 것도 에도로운데 하물며 개한테까지 머할라고.

  그러다 우리 신금에도 드디어 테레비 두 대가 들어왔다. 그때는 설이나 추석이면 동네 어른들이 집집마다 돌며 3박 4일로 농악놀이를 했고, 다른 마을로 농악대가 원정도 갔었는데 그보다 더 부왕끓는 축제가 태국,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와 벌이는 국가대표 축구 경기와 말로는 다 못하는 김일 선수의 레슬링이었다. 어느 초겨울 비오던 날, 비닐로 씌워 마당에 꺼내 놓은 테레비에서 16문킥으로 유명한 자이안트바바(?)의 비수에 찔려 김일 선수의 이마에 피가 낭자했을 때 동네 어른들은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며 '저 놈 죽이라'고 소리쳤고, 드디어 우리의 김일 선수 가공할 박치기로 자이안트바바를 꼬꾸라트리면 동네가 떠나갈듯 이리뛰고 저리 뛰었다. 그 비를 쫄딱 맞았지만 아무도 집에 가지 않았다. 축구 경기도 마찬가지였는데 '찼다 찼다 차범근, 김진국 센타링, 떴다떴다 김재한 헤딩 슛골인'노래를 입에 달고 살았다.

  7살 어느 모내기 철, 그날은 지금은 연소에서 사는 나의 누이 최안자 선수가 학교에서 빵을 타오는 날이었다. 일초라도 일찍 빵을 얻어먹으려 감도리까지 나가서 누나를 기다리던 나는 나보다 두 살 위 배철민 형, 한 살 위 한용호 형, 김춘동 형과 리어카를 타고 놀았다. 처음에는 철민 형이 운전을 했는데 나중에 춘동 형이 자기가 한다고 우겨서 그렇게 했는데 아뿔싸~ 운전미숙으로 그만 감도리 신작로 옆 모래사장으로 리어카가 구르고 말았다. 앞에 타고 있던 철민, 용호 형은 잽싸게 뛰어내려 안다쳤지만 뒤에 퍼질러 앉아있던 나는 이마에서 선혈이 낭자했다. 겁나게 울었던 기억, 중학교 다니던, 지금은 녹동에서 사시는 나의 셋째 형 최석기 선수께서 교복을 입은 채로 날 들쳐 업고 금진으로 헉헉 거리며 뛰었던 기억, 의사선생님께서 장정 대여섯을 동원해 나를 붙들어 매고 마취도 없이 맨 살을 꿰메자 젖먹던 힘까지 쏟아 단말마의 비명처럼 '개새끼들아'를 외쳤던 기억이 눈앞에 알싸하다. 그 날 이후 난 3개의 눈썹과 밤바의 기쓰를 소시적 고향이 달아준 훈장처럼 달고 살아왔다.

  철민 형은 25년 전쯤 녹동에서 자주 본 이후 아직 못봤다. 용호 형은 서울에서 건설업으로 반열에 오른것 같고, 춘동 형은 고향을 지키며 신금의 온갖 대소사를 묵묵히 감당한다는 훈훈한 소리를 성길 형에게서 전해들었다. 이 기회에 춘동 형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춘동 성~~~~나 보기시. 팽전에 아부지 산소갈 때 한 번 역부로 자네 집에 갔는디 개들만 겁나게 짖어쌌고 사람이 없어서 그냥 왔네. 담에 산소가면 꼭 들림세. 춘동성~~말 나온 짐에 우리 집 옆에 살던 추일이는 어디서 머한시롬 잘 산당가.안부나 전해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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