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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석정(石井) : 본래 석교와 동정 두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석정리로 하였으나 그후 1947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시 석정마을로 독립되었으며 마을이 골짜기 안에 있어 한때는 “골안”이라 불렀고 암석위로 흐르는 물이 거울같이 맑다는 뜻에서 석정(石井)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마을명을 “참우골”이라 불리어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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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와 박씨가 주류를 이루는 우리 마을,
내 어릴 때의 기억으로 김씨나 박씨들은 한 집 건너 옆에 옆에
일가붙이들이 모여 살았고 이들 씨족들은 집안 행사라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 일처럼 힘을 합하면서 돈독한 우애를 자랑하며 살았다.
가끔 자기들끼리 분란이 생겨 다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서로 도와 가면서 사이좋게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이 김씨 박씨 외에 몇 몇 소수의 다른 성씨들도 있었는데 우리 집도 여기에 해당됐다.

우리 집의 원래 고향은 녹동을 지나면 나오는 도덕면 내에 있는 장전이라는
마을이었는데 할아버지 대에 금산으로 들어오셨다.
상당히 뼈대있는 양반의 후예였는데 선대의 잘못으로 일가가 풍비박산이 나고
그래서 살기가 막막해진 총각시절의 할아버지는 어찌어찌 해서 금산까지 머슴을 살러
오시게 되었단다.
머슴을 살면서 섬사람들에게 잘 보였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똑똑한 금산 처자를 만나서
혼인을 하고 금산하고도 석정이라는 마을에 정착을 하셨단다.

할아버지는 위로 형님 한 분과 아래로 여동생 한 명을 두셨는데 형님은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가시고 여동생은 육지에 있는 방촌이라는 곳의 군수 며느님으로 출가를 하셨다.
고모 할머니는 내가 객지에 나오기 전까지 그 먼데서도 당신의 부모님제사에는 꼭
참석을 하셨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할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고 작은아버지에게
들은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함구하셨는데
미루어 가슴아픈 사연이나 말못할 무슨 곡절이 있지 않았나 싶다.
특히 일본으로 돈 벌러 가신 뒤 딱 한 번 돈과 함께 소식이 온 뒤로 연락이 끊긴
형님을 오랫동안 기다리셨는데 할아버지 말년에는 제사를 지내야 할텐데
날짜를 몰라서 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할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표현을 아끼셔서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분은 아니셨지만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분이셨다.
우리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언니나 나는 할아버지 등에서 컸다고 한다.
워낙 부지런하셔서 일하시기 바쁜 할머니보다는 훨씬 아기를 잘 돌보고
또 똥오줌 같은 것도 더럽다 아니하시고 잘 처리 하셔서
아기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고 한다.
40 여 년도 더 전 남자 여자의 역할이 지금보다 훨씬 엄격하고 시부모들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 자식도 아니고 손녀들을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하지 않고
바쁜 며느리를 위해 등에 붙이고 다니셨던 할아버지는 시대를 앞선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나싶다.
불을 때서 밥을 하던 그 때, 며느리 밥하라고 나뭇단을 갖다 주셨는데 나무가 찌꺼기라
불때기가 힘들겠다 싶으면 "불은 내가 때 줄 테니까 너는 반찬이나 만들어라" 하셨단다.
젊은 며느리가 밥하는 넓지 않는 부엌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불을 때는 일은
다른 사람들 시선을 생각한다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불 때 가면서 바쁘게
반찬 만들어야 하는 며느리를 위해서 보통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무시할 줄도 아셨다.
생선을 손질한다거나 고기를 손질하는 번거로운 일들은 어김없이
할아버지 손을 거쳐서 손질이 되어 요리만 하면 될 수 있게 장만을 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꽤 크도록 그런 일은 원래 남자들이 하는 걸로 알았다.
아주 가끔은 요리도 직접 하셨는데 할아버지께 직접 잡아오셔서 손수 끓여 주신
복어국은 지금도 어디에서도 그 맛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맛이 좋았다.

내가 자라오면서 할아버지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는
"우리 자부가 최고다" 라는 말이었다.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할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단골 멘트였는데
일찍 혼자 되어 다른 대로 출가하지 않고 손자 손녀들 열심히 키우는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을 할아버지는 직접 대놓고 하지 못하고 그렇게 표현하셨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그런 마음 씀씀이는 며느리에게도 충분히 전해져서 너무 일찍 사별하는
바람에 남편 복은 없었지만 시아부지 사랑은 원 없이 받았다고 회고하는
며느리를 두게 되셨다
심지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 엄마 꿈에 할아버지가 보이는 날은
잘 먹을 일이 생긴다니 더 말해 무엇하랴......

손주들을 사랑하지 않는 조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만은 우리 할아버지는 이 부분에서도 각별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그때까지 할아버지에게 맞았다거나 큰 소리로 야단을 맞은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
손자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항상 Yes였다.
무엇을 요구하거나 무슨 부탁을 해도 거절하는 법이 없고 "오냐 알았다" 였다.
그래서 할아버지하고 함께 한 추억들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춥고 긴 겨울 날 방안 화로에서 떡을 구워서 빙 둘러앉아 있는 우리 형제들 입에
한 입 한 입 넣어 주시던 일, 떡이 구워지기를 기다리며 다음 떡 먹을 순서를 얘기하며
할아버지 얘기를 듣던 나날들(제사가 많았던 우리집에는 떡이 있을 때가 많았다)
소먹일 물을 끓이고 난 장작불에 구워 주신 고구마를 얼굴에 온통 검정 칠 해 가며
먹던 일이며 소 먹이러 가셨다가 따오시던 산딸기까지 할아버지가 주신 것들은
맛없는 것이 없었다.

손주들의 컨디션이 안 좋다 싶으면 할아버지만의 비법을 처방하셨는데 그것은
단밥이라는 음식이었다.
엉겅퀴뿌리와 보리쌀을 넣고 푹 달였는데 식혜처럼 단맛이 났다.
다른 사람손을 빌리지 않고 할아버지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단밥을 먹고 나면
소변이 매우 맑아지고 몸이 거뜬해졌다.
단밥이 먹고 싶으면 "할아버지 나 오줌이 노래" 이 말만해도 할아버지는 열 일을 젖혀두고
꼴망태를 메고 엉겅퀴 뿌리를 캐러 나가셨다.
이것은 사시사철 변함이 없었으니 다섯 명이나 되는 손주들 단밥 해 대시느라
논과 밭가의 엉겅퀴 뿌리들이 수난을 당해야 했다.

동생들이 태어나고 엄마 옆에서 밀려난 나와 내 남동생의 잠자리는
할아버지의 옆자리가  되었다.
할아버지를 가운데 두고 나는 오른쪽에 남동생은 왼쪽에서 잠을 잤다.
잠버릇이 사납고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어린 시절, 나와 내 남동생의 발은
할아버지 얼굴에 가 있기 일쑤였고 거기에 축구 배구 권투까지 다 동원되었을 테니
할아버지의 고달픔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싫은 기색 없이 내침도 없이 내 잠자리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할아버지의 오른쪽 옆자리였다.
겨울날 자꾸만 차 버리는 이불을 덮어 준 사람도 잔병치레가 잦아서 자주 아팠던
내 머리에 물수건을 올려 준 사람도 아프기만 하면 자꾸 토하는 버릇이 있었던
나의 지저분한 토한 오물 뒤처리도
일에 지쳐서 곤하게 자는 며느리 깨울까 봐 며느리 시키지 않고 손수 해 주셨다.
그래서 나 역시 아버지 복은 없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할아버지가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행복한 손녀가 될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은 지금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만나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난 인사를 하게 하고 할아버지에게 못다했던 친절을 베풀고 싶은 순한 마음이
되게 한다.

내 기억에서 가장 명확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날이다.
1976년 봄 그 때 우리 집은 본 채를 신축공사 하던 중이었다.
집 짓는 데 필요한 목재를 구입하려고 아침밥을 일찍 드신 할아버지는 두루마기와
중절모를 쓰시고 외출 준비를 하셨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고 나서 목재 구입할 돈 10만원을
주머니에 챙기시는 할아버지,
마침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려고 옆에 서 있던 나는
할아버지에게 돈을 한번만 세어 보자고 졸랐다.
배 시간이 다 되어 가는 데 할아버지는 알았다 하시며 주머니에 넣으셨던
돈 뭉치를 나에게 주셨다.
그 당시 흔하게 통용되던 1000원 짜리 지폐로 100장인 돈 뭉치,
나는 침을 묻혀 가며 열심히 돈을 세었다. 하지만 그 시절 초등학교 6학년 짜리가
얼마나 돈을 세어 보았겠는가?
작은 손으로 100장을 세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돈은 돈대로 옆으로 삐어져 나오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어렵게 다 세고 나니까 99장이었다.
"할아버지 틀리네 한 번만 더 세 보자." 또 한 번 떼를 쓰는 철없는 손녀,
할아버지는 웃으시며 "그래 그럼 한 번 만 더 세 봐라."
나는 다시 열심히 침을 묻혀서 돈을 셌다.
사이 시간은 자꾸 흐르고 그래도 할아버지는 재촉하지 않고 서서 끝까지 기다려 주셨다.
기분 좋게 100장으로 돈이 딱 맞아떨어지고  
그제야 "할아버지 맞네."하며 돈을 건네주는 손녀,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기분 좋게 웃어주시고 나서 부리나케 배를 타러 출발하셨다.
그것이 할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날 할아버지는 목재를 사 가지고 오시다 일어난 경운기 사고로 인해 저녁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셨다. 그래서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날 아침에 있었던 일은 내가 어른이 된 뒤에도 두고두고
가슴에 사무치는 부분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빨리 빨리를 입에 달고 살다가 문득 떠올리는
그날의 일은 나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고 반성을 하게 한다.
밤에 몇 번이나 세 봐서 10만원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시면서도 돈을 세어 보고 싶어 하는
손녀의 마을을 읽으시고 그 바쁘고 여유 없은 시간에 돈을 셀  기회를 그것도 2번씩이나 주시고
끝없이 느껴졌을 긴 시간을 재촉 한 마디 없이 기다려 주셨던
할아버지를 생각 하노라며 잠시잠깐을 못 기다리는 내 마음의 여유 없음에,
새삼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큰사랑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가 그렇게 넘치도록 사랑을 받았던 사실이 눈물이 나게 감사하고 그런 소중한 기억들이
내 안에서 재산이 되어 나로 하여금 자긍심을 갖게 한다.

부드럽고 자상했지만 사는데 악착스럽지 못했던 할아버지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고향을 떠나 낯 선 타향에서 정착하기가 어디 그렇게 쉬웠겠는가?
섬 특유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외지인에게 더러더러 가혹할 때가  있다.
씨족이 중심이 되어 있는 마을에서 타성을 쓰는 외지인이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일가를 이루고 살림을 장만하여 살기까지 겪은 고초와 사연들은
아마 책을 엮고도 남았으리라......
다행히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반쪽을 만나서 남부럽지 않은 일가를 이루었지만
평생을 그리워했을 고향과 돌아오지 않는 형님과 너무 일찍 떠나 버려
한이 되어 버린 아들까지......
할아버지는 어떻게 보면 한으로 점철된 인생이 될 수도 있었을 자기 앞의 생에
화를 내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순응하면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보듬어 안았다.
조건 없이 베푸신 사랑으로 주위를 따뜻하고 푸근하게 하셨던 할아버지는
그래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살아 생전 할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몹시 사랑했다.
술을 사오는 사람이 제일 반갑다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말로 나타내지 못했던 고향과 부모님과 가슴에 묻어 버린 형님과 아들......
그리운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외로움......
살아가는 사이사이 만나는 삶의 무게와 고비들로 몹시 힘들고 고단했을 할아버지에게
너무나 절실한 위안거리가 필요했을테고 그래서
아마도 이 두 친구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반의 후예답게 지조 있고 절도 있게 이것들을 즐길 줄 알았다.
담배는 절약 정신이 남달랐던 할머니의 구박의 대상이 되었지만  
소주大병을 안 떨어 뜨릴 정도로 즐기셨던 술은 반주 삼아 워낙 기분 좋게 마셨고
술로 실수를 하는 일이 없어서 좋은 주도의 본보기가 되셨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서도 금산에서 약 17~18년 정도를 더 계시다가
약 10여년 전에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바다 건너 고향 땅 근처에
영원한 안식처를 구하셨다.
이제는 고향의 품에서 무거운 짐 다 벗어 던지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계실  
할아버지를 그리며 생전에 베풀어 주셨던 할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고  
그런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살다가 힘이 들 때면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가 있다.
내 좋은 날의 큰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정 깊었던 나의 할아버지......
한없는 사랑으로 보듬어 주셨던 할아버지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립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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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앗싸! 태양 2004.07.01 17:20
    언니글을 읽다 문뜩,
    우리 할아버지의 삶이란?
    좁은 부엌에서 생솔 가지를 태우는 것처럼
    숨막히고, 더디고, 눈물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하는 생각을 했네
    특히나, 집안이 몰락하고, 형과는 생이별을 하고,
    생때같은 자식을 앞세웠던, 굴곡많은 삶이
    더욱 그러하셨으리라...

    하지만, 그 많은 아픔을 가슴에 묻고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손주들의 기억속에 남겨진 할아버지를
    너무나 오래 잊고 살았다는 생각에
    죄송스러움 뿐이네

    하루에도 몇 번씩 기후변덕을 보이는
    내 자신을 돌아보며(못된 나만 그런가!)
    부끄런 내면을 비추는 거울을 오늘은 꺼내 보게 되었네.

    울동네에
    김씨 그리고 박씨가 있어서(그 밖에 오, 황, 한 등 나름의 소장파)
    선남선녀가 특히 많고 인심 좋고 기타등등...
    그나마 외지인이셨던 할아버지가
    금산에 정착을 하셨고,
    우리들의 고향이 될 수 있었을꺼야.

    이제 고향과 함께하는 추억만들기에
    성씨비율에 따른 숫자가(김앤박)
    턱없이 모자라는데...
    단지, 그러한 아쉬움만 극복된다면
    또 다시 우리들은 거금도 닷컴에
    정착하게 될텐데...
    -유씨 성-












      [08][12][10]
  • ?
    울산댁 2004.07.01 18:40
    우연히 알게 된 또 다른 고향,
    거금도 닷컴
    거리상으로 너무 멀어서 항상 멀게만
    느껴졌던 고향이 갑자기
    시공을 초월해서
    저에게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이런 고향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참 고마운 사람들이 있어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무럭무럭 솟구치고
    보이지 않는 데서 이런 수고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문득 고향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하였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놀이판이 있으면 신나게
    놀아주는 것이 놀이판을 만든 사람에
    대한 최고의 선물.....

    그래서 부족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뜻밖의 호응에 힘입어 애초에
    짧게 몇 편을 올리고 사라지려는
    계획이 자꾸만 덜미를 잡히네요.....
    동네 까페가 번창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구요..

    길고 두서 없는 글 읽어 주신 분들께
    고마운 마음 전하며
    눈으로만 지나가는 행인들의 참여를
    부탁합니다..
    여태까지 소수의 입장에서 쓰는
    소수의 이야기가 물결을 이루었다면
    이제는 다수의 입장에서
    펼쳐지는 다수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를 기대합니다..

    고향을 그리고 석정을 위해
    까페의 활성화를 위해
    가슴에 담겨 있는 이야기 보따리 하나씩
    풀어 놔 봅시다..

    해 보니까 생각보다 재미도
    쏠쏠 하더군요..
    더구나 우리 동네에는 아주 유능한
    악사가 있어 글을 올린
    보람이 기대이상이라는 것을
    경험자로서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고향사랑 멀리 갈 것 없습니다..
    내가 올린 한 편의 글이
    또 다른 고향을 윤기 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장마철 모두의 건강을 기원하며...

    울산에서....      [09][09][10]
  • ?
    큰 언니 2004.07.01 19:32
    불확실한 미래에 희망을 걸고......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는 내모습에서 애써 그리움으로 번져오는
    어린시절의 영상 ....
    잊고 살았나 싶다.
    아니 늘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다만 , 끄집어 내놓고 애기하지 않았을 뿐이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따뜻함으로
    가슴안에 살아 있다.
    그리움 애잔함 미안함.....
    표현할수 없는 그런것들이 마음 한구석을 적셔올때
    웬지 모를 서글픔이 목젖을 타고 꺼이 꺼이 토해져 오기도 하고
    때론 희망의 불씨를 내게 심어주기도 한다.
    어린시절 가족의 울타리속에서 배워온 "인내는 쓰되 그 열매는 달다."
    지금도 내 생활전선에 는 그 글귀를 거울삼아 중년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다.
    자야!
    멋진 글 계속 올리거라 . 파이팅!
      [01][01][01]
  • ?
    앗싸! 태양 2004.07.01 20:03
    앗싸!!!
    드디어 우리 네자매가 다 모였네!
    큰형부의 베아트리체요, 많은 펜들의 구원의 여인상이요,
    조카들의 신사임당(일명 유사임당)큰언니가 떴습니다.
    우리 동생들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면,
    정말 동생들을 사랑해주기 위해 태어난 큰언니입니다.
    함께 쇼핑이라도 할라치면 8년이라는 나이차도
    미모로 극복하고 때로는 제가 언니로 오인됩니다.(억울하게도)
    "7불출같이 자랑이 심하다고요"
    -큰언니의 참여가 너무 좋아서요.
    파란많은 가족사에서
    우리 형제들의 방패막이가 되었던(눈물 감추며)
    "큰언니 사랑합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0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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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만 2004.07.01 22:48
    머라 표현하기 힘든.... 감동입니다.
    장편 소설같네요...
    자매들의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무한 나로써는
    조부님의 사랑이 정말 대단하셨다는 말 밖에 ....

    그 당시...
    시대적 배경에서는 하기 힘든 일들이었을 텐데..
    퍽이나 앞서가신 분이셨구나 싶네요..

    올려놓은 글 마다 ..
    잠시나마,
    고향 길을 뛰어다니는 그런 상상을 하곤 합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를 우리들의 만남이
    "거금도"란 한분의 열성이 이다지 아름다운 추억들을
    끄집어 낼수있다는게 참으로,
    대단한 힘이란걸 다시금 느낍니다.
    우리들의 고향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는데 일조를 하고 계시는
    모든 님들.....

    장마가 시작되는 무더운 여름....
    건강들 하십시요...

    자매님들의 사랑전선이 무탈하시길 빌며....

      [01][01][01]
  • ?
    앗싸! 태양 2004.07.02 08:41
    에고 에고!!!
    이(뮤직 사태)를 어쩐다(xx8)
    울동네 정식인사(악사)가 있는데 낙하산이 왔네
    뮤직만은 참아주심 어쩔까요?
    제가 '하늘땅 별땅'에 진짜 어울리는 글을 담에 꼭 실을 께요.

    형모오빠 !
    그러니까 자주자주 들어와서 출결확인을 해줘야지!!!

    학만님!
    뮤직은 하늘만큼 땅만큼 고맙고요, 감사하고요.
    하지만 우리가 내용중심으로 음악을 나름대로 전문가가
    깔고 있씀다. (머리조아리고 양해를 구함다.)
    뮤직의 성은을 거둬 주심을...

    석정과 신정의 동맹관계(신석우호)에 추호의
    흔들림이 없기를 당부드리며
    답글 정말로 감사합니다.


      [08][12][10]
  • ?
    울산에서.. 2004.07.02 09:12
    같이 사는 사람으로 부터
    너무 사적인 글을 올린게 아니냐는
    태클을 당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더군요..
    더구나 쓰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제가 읽어 봐도
    숨이 차더이다..

    하지만
    너무 일찍 황망히 가신 바람에
    그렇게 좋아 하시던
    약주 한병 담배 한보루 사 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
    이렇게
    그리움에 사무친 사조부가를 !!
    부르게 되었나 봅니다.......


    답글 올려 주신 학만님..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들의 조부모님들은 모두의
    조부모님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에
    저의 추억을 아낌없이 나누어 드립니다..
    다음세대에게 할아버지들은
    이런분들이었음을 ..
    알려 주시는데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말을 꺼내기가 조금은
    조심스럽네요..
    올려주신 음악은 정말로
    고맙고 소중하지만
    약간 더
    조용한 음악이었으면
    부족한 글이 좀 더 살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09][09][10]
  • ?
    오형모 2004.07.02 15:06
    DJ 閻羅
    음악~Q!
         [01][01][01]
  • ?
    앗싸! 태양 2004.07.02 15:20
    마음속 깊은 곳으로
    눈물처럼 흘러 내리는 음악입니다.
    이러니까 두 번 울게 되잖아요.
    이약땜시 울고, 음악땜시 울고
    하여튼 그래...

      [08][12][10]
  • ?
    울산에서.. 2004.07.02 16:24
    형모오빠!!
    어디 갔다 인자 왔어??

    오빠가 이렇게 반가울 줄
    내 진정 또 몰랐네..
    ~~음악....죽인다.......

    - 내맘에 쏙 들어!!!-

    *이렇게 좋은 음악을 제목도 모르고
    들으려니까 미안해지네..
    내가 음악에 워낙 문외한이라서......

    그래서 얘긴데..
    다음에는 음악제목도 같이 올려주면
    안~되~까???
        [09][09][10]
  • ?
    고양시에서 동생.. 2004.07.04 18:24
    누님!!

    할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생각나게
    해주어서 고마우이..

    술과 담배 심부름을 꼭 밤에 갔었는데..
    지금은 없지만 동네 입구에 있는 가게에
    가는 길이 왜 그렇게 멀고 무서웠는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데..
    안가겠다고 때쓰면 감춰놓으신 사탕도 주시고
    대신 누님들도 보내셨지...

    할아버지는 무척 낚시를 좋아하셨어
    농한기에는 보름에서 한달씩 제주도 남단까지
    무동력선에 돛을 달으시고 낚시를 다니셨어..
    태풍이나 바람이 심하면 인근 섬에 오르시고..
    잡은 고기들은 깨긋이 손질하여 말리시어
    가져오셨지..
    한 번은 나도 따라 간다고 졸랐는데..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셔서 얼마나 서운해었는지..
    지금은 할아버지의 깊은 속 뜻을 알것같은데...

    그때가 무척 그립씀니다 할아버지...

    석정카페에 우리형제들 너무 주름잡아서
    조용한 방문자로 남을려고 했는데..
    응원가 지원이 필요한것 같아 몇자 적씀니다..
    누님들과 동생들 건강하길..



      [01][01][01]
  • ?
    앗싸! 태양 2004.07.04 23:28
    다들 봤지요.
    우리 오빠 맞잖아!!!
    얼굴 잘생기고 맘 좋고, 나처럼 무게는 조금 여유가 있어도...

    오빠, 너무 반갑다.
    우리 애들이 6월 26일 서울가서
    많은 추억을 보듬고 왔어(경복궁, 전쟁기념관 등)
    나보다 외삼촌(오빠)를 더 좋아하는 거 있지
    찍어 준 사진도 너무 잘 나왔어
    그날밤 늦도록 우리 아이들이
    창욱이 이야기 하느라고
    밤늦은 시간에야 겨우 잠이 들었어
    아이들 이야기 듣다보니
    창욱이가 눈에 아삼삼하더라.
    특히, 외삼촌을 좋아하는
    작은애가 역시 외삼촌은 좋은 사람이래!!
    창욱이도 외삼촌 같다나 뭐래나!
    고마워요.

    울산언니랑
    할아버지 이야기 중에서 낚시 얘기를 못 쓴 것을
    무척 아쉬워 했는데, 형제라 맘이 통했나!
    추억을 만들고 보듬는 만큼 부자가 되니까
    열심히 참여해서 좋은 기억 간직 하자구요.
    오빠는 따스한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부자인 사람이잖아
    오빠가 있어서 좋고,
    감사하고, 고마워요.


      [08][12][10]
  • ?
    예쁜 하영 2004.07.11 15:26
    (h13)(h6)(h14)
    증조 할아버지 얘기를 들으니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집니다.
    "할아버지 보고싶어요!"

  • ?
    이쁜서영이 2004.07.11 15:30
    할아버지 얘기는 너무 슬퍼요..(h10)
    할아버지가 보고싶고 ...(h7)
    그때의 모습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보고싶고

    (xx16)(xx16)(xx16)해요(xx3)
  • ?
    김병옥 2004.10.26 10:46
    고난은
    어머니는 강하게 만들지만
    남자도 더 성숙시킨다는 말이
    자네 할아버지에게 어울리는 말인 것 같네.

    그리고
    할아버지가 페미니스트라기 보다는
    가족애가 유달리 깊으신 할아버지가 아니였을까 싶네
    할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외롭게 그리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측은한 며느리의 입장에서 어떤 경우에서나 배려할려고 노력했으리라 이해되며
    즉, 며느리(전체 여성이 아닌)를 어여삐여기고 사랑스러워 하는 것을 페미니스트라고 하기보다는
    마지막 경운기 사고시에도 가족을 위해 눈을 쉽게 감고 쉽지 않았았을 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손녀를 사랑하고 며느리를 아끼며
    먼저 간 아들을 대신해서 집안의 가장으로써 역할을 다 할려고 하는
    남자였지 아니였을까 싶네

    또 하나는
    "어린 목동의 고뇌"에서
    소를 잃어 버리고 집에 와서
    소가 헤엄을 쳐서 육지로 가 버릴까봐 잠을 못이루엇다는
    표현은 너무 재미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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