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역도산은 개를 좋아했다. 특히 스승의 애정이 유별났던 개는 썰매 끄는 개와 구조견으로 알려진 시베리안 허스키종이었다. '주인을 썰매로 모셔다 드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순종하고 용기 있는 이 개는 덩치가 컸고 근엄(?)했다. 스승은 식구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은 절대로 주지 않을 만큼 이 개에게 애정을 쏟았다. 남들이 함부로 하면 "말 못하는 개라고 그렇게 대하느냐"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스승은 휴가를 가면 반드시 개를 데리고 다녔다. 또 가끔 레슬링 경기장에도 개를 데리고 갔다.
나도 스승 못지않게 개를 참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집에는 진돗개 한 마리가 있었다. 어느 날 순사가 우리 집을 지나치다 진돗개를 보고는 공출을 별미로 빼앗아 갔다. 그 개는 다음날 아침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도망쳐 왔다. 순사는 다시 개를 찾으러 집에 왔다. 난 겁에 질린 채 그 진돗개를 넘겨 주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끌려가는 개의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 나의 거금도 자택에는 이 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난 아마도 그때 그 개를 지켜 주지 못했던 것이 가슴에 상처처럼 남아 있었고, 그래서 시베리안 허스키를 더욱 좋아했던 것 같다. 그 개도 나를 잘 따랐다.
어느날 해가 질 무렵 난 스승에게 "개와 함께 산책 갔다 오겠다"라고 허락을 받은 후 시베리안 허스키 두 마리를 데리고 도쿄 아카사카 쪽을 걷고 있었다. 그때 나를 알아본 여성팬 두 명이 차 한 잔 하자고 졸랐지만 거절했다. 그렇게 응하다 보면 안 좋은 소문만 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팬들은 막무가내였다. 단 1분도 좋으니 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너무 거절해도 모양새가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전봇대에 개 두 마리를 묶은 후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 팬들에게 사인을 해 준 후 10여 분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보니 전봇대만 있을 뿐 개는 없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개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일본선 시베리안 허스키가 구하기도 쉽지 않고 잘 볼 수도 없는 고품질 개여서 누군가 훔쳐 간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도둑이 훔쳐 가면 눈치 채고 크게 으르렁거렸을 것인데 짖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쨌든 개를 잃어 버렸고, 이젠 '스승에게 죽었구나'는 생각만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탄로 날 것인데 더 이상 숨길 수도 없었다. 개를 잃어 버렸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맥이 풀린 채 스승 댁에 갔다.
대문을 열고 정원에 있는 시베리안 허스키 집 쪽을 무심결에 쳐다보았다. 순간 그 개가 나를 보고 짖고 있었다. 마치 나를 비웃듯 쳐다보며 짖었다. 난 그런 개의 시선(?)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오로지 집으로 돌아와 준 그 개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나도 모르게 인사까지 했다.
정원사에게 다가가 물어 보니 "시베리안 허스키 두 마리가 대문 앞에서 짖어 문을 열어 줬다"라고 말할 뿐이다. "스승이 시베리안 허스키가 혼자서 집에 온 사실을 아는가" 물었더니 정원사는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시베리안 허스키는 역시 똑똑한 개였다. 자신이 전봇대에 묶여 있는 것이 싫어 집으로 찾아간 것이다. 자신들을 내버려 두고 여성팬들과 차를 마신 나를 질투라도 했었나.
개 사건은 이렇게 나만 아는 사건으로만 남아 있다. 따지고 보면 이 사건의 원인은 여성팬으로 인해 발생했다. 프로레슬러로서 유명세를 타면서 호의를 베풀겠다고 다가오는 여성팬들이 워낙 많았다. 때문에 나를 괴롭힌 악소문이 있었다. 여자 관계였다. <계속>
일간스포츠 | 2006.06.07 08:37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