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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88]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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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7월 초 한국 정부는 나에게 귀국 제안을 했었다. 솔직히 한국으로 오고 싶었지만 일본서도 할 일이 태산이었다.

나 혼자 결정하고 실행에 옮길 사안이 아니었다. 일본 프로레슬링계 의견도 들어 봐야 했고, 경기 스케줄이 꽉 잡혀 있어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나를 비롯해 안토니오 이노키·자이안트 바바 등이 맹활약한 일본 프로레슬링은 폭발적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내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떠나 버리면 레슬링 흥행에 찬물을 끼얹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까닭 때문에 귀국할 수 없었지만 한국 정부는 나의 귀국을 원했다. 당시는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귀국 후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면서 왜 정부가 나의 귀국을 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는 국민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태평양전쟁 후인 1950~1960년대 초반 스승이 거구의 미국 선수들을 쓰러뜨리며 패전 후 일본인의 미국 콤플렉스를 후련하게 씻어 줬다. 한국 정부도 나에게 스승과 같은 구실을 기대했던 것 같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정부는 나의 경기를 보여 줌으로써 국민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은 61년 12월 KBS TV(서울텔레비전방송국)가 개국한 데 이어 64년 12월 TBC-TV(동양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가 서울과 부산에 개국하면서 흑백 TV 방송 시대를 맞았다. 본격적 방송국 개국과 함께 그 방송에 걸맞는 스타가 필요했던 성싶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한국과 일본의 상징적 스타로 나를 지목했다. 당시는 한국과 일본의 외교적 막후 교섭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마도 이렇게 맞물린 외교적 정세와 또 국내 상황을 고려해 나의 귀국을 원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렇다고 내가 한·일 수교 시나리오의 한 조연급 배우처럼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시대적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쩔 수 없이 숙명처럼 그 길을 가야 하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군 핵심 인사들은 나에게 "일본서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해 달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내가 일본서 경기하더라도 조국 한국을 잊지 말고 차별과 설움 속에 지내는 재일교포들에게 용기를 복돋워 주기를 바란다는 부탁도 했다.
 
일본 정부도 내가 귀국해서 한국과 일본의 레슬링 가교 역을 맡았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였다. 당시 나의 한국 귀국에는 오노 반보쿠가 막후에서 도움을 줬다.

 

오노는 57년 일본프로레슬링 2대 커미셔너 자리에 앉은, 스승의 후견인이었다. 오노가 없었다면 스승이 일본프로레슬링을 부활시킬 수 있었을까 할 정도로 그는 스승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자민당 부총재였던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수차례 한국을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오노는 특히 63년 12월 16일 한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전날인 15일 스승이 사망했다. 스승은 사망 전 오노에게 "함께 한국에 가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자"라는 말을 수차례 했다.

 

스승은 오노의 한국 방문 때 한·일 국교 정상화와 남북 통일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 스승이 15일 저녁 급작스럽게 사망함으로써 오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 우익의 대표적 인사로 치부됐던 오노이지만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대단히 노력했던 친한파 정치인이었다. 스승 사후 오노는 나에게 "오오키 긴타로(김일)가 한국민에게 프로레슬링을 보여 주는 것도 한·일 국교 수립에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이 국교만 수립되면 비행기 타고 2시간이면 오갈 수 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고 현실이었다. 마침내 65년 국교가 수립되면서 난 JAL 비행기에 몸을 실고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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