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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81]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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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쿠자는 왜 스승 역도산을 찔렀을까? 1963년 12월 8일 발생했던 이 사건은 43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미스터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같다. 우선 이 사건의 의혹의 핵심은 사소한 시비 끝에 찌른 우발적 사건인지, 아니면 각본에 의한 사전 계획된 사건인지 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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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작고 후 제자들은 각기 다른 기구의 세계 챔피언이 되면서 세계 레슬링계의 왕좌에 우뚝 섰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안토니오 이노키·자이언트 바바·나·요시무라.


 
외형상 이 사건은 스승이 화장실에서 야쿠자와 시비가 붙어 발생했던 우발적 사고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순히 우발적 사건으로 치부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았던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사건과 관련, 되도록이면 말을 아꼈다.

스승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사람이었기에 불필요한 추측성 발언을 했을 경우 괜한 오해와 억측을 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 난 미국에 있어서 사건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의 전반적 상황에 대해선 잘 몰랐다.
 
그러나 미국서 귀국한 후 일본서 다시 레슬링 선수 생활을 하면서 스승과 관계 있던 사람들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다. 지난 시절 스승의 삶을 본 것과 또 미국서 귀국한 후 스승의 죽음에 대해 들었던 얘기를 종합해서 밝히고자 한다.
 
스승의 죽음과 관련, 당시 내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김일! 역도산이 왜 죽었다고 생각하나"였다. 또 "역도산 죽음은 우발적 사고였는가, 아니면 사전 계획된 것이라 보는가"로서 내 견해를 묻는 것이었지만 참 답변하기가 곤란했다. 이런 질문을 한 것은 그들도 의혹을 갖고 있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난 스승 사건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우발적 사고였지만 언젠가 발생할 잠재적 폭탄을 지녔던 사건이다." 이는 스승과 야쿠자 관계, 그리고 한·일, 남·북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내린 결론이다.
 
1950년대 말부터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이 한창 흥행 가도를 달리면서 야쿠자들은 세력 확산을 위해 물고 물리는 접전을 벌여 왔다. 당시 야쿠자들이 가장 군침을 흘린 것은 프로레슬링이었다. 야쿠자들이 레슬링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레슬링이란 경기가 사나이들 간의 힘과 기술을 겨루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야쿠자들은 스승과 제휴하지 않고는 프로레슬링에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일본 레슬링 흥행과 판도를 좌지우지했던 인물이 스승이다. 그러나 스승은 야쿠자를 벌레 보듯 싫어했다. 스승이 좋아했던 야쿠자는 재일교포들이 주축이 된 동성회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동성회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동성회 오야붕 정건영(일본명 마치이 히사유키)과 절친했다.
 
스승과 정건영은 1923년 돼지띠 동갑이다. 대화할 때면 서로가 욕을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스승은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방 흥행에는 정건영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또 오사카·교토 등 관서 지방의 레슬링 흥행에는 그 지역의 밤을 지배하는 야마구치구미와 관계를 맺었다. 야마구치구미 오야붕은 다오카 가즈오(田岡一雄)였다. 다오카는 정건영과 의형제를 맺었고, 그 덕분에 야마구치구미는 도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흥미롭게도 스승이 이들과 제휴한 후 프로레슬링은 더욱 흥행 가도를 달렸다. 당시 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사업과 인기 유지에는 야쿠자계뿐만 아니라 정계의 유력자가 필요했다. 집권 자민당의 우익 정객 오노 반보쿠를 프로레슬링협회 커미셔너로 앞장세웠던 것도 이 때문이다. 스승은 또 우익의 선봉격 고타마 요시오(兒玉譽士雄)를 깍듯이 모셨다. 말하자면 스승은 야쿠자계의 정건영·다오카, 정계의 오노·고타마와 절친했다.
 
이런 얽히고설킨 인간 관계는 레슬링 흥행에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스승에게는 훗날의 화를 자초한 셈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다른 조직이 어떻게 하겠는가? 도쿄에는 스미요시가이(住吉會)가 실질적으로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승은 그 스미요시가이 조직원의 칼에 찔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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