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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80]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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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역도산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확인하기 위해 일본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 스승의 제자로서 동문 중 한 명은 나에게 말했다. "넌 보증인이 죽었다. 일본으로 올 수 없다. 한국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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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생전에 챔피언 벨트를 바치지 못했다. 스승이 타계한 후 2개월 만에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스승 동상 앞에 챔피언 벨트를 바쳤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다. 스승의 특명에 의해 세계 챔피언이 됐다면 당연히 "당장 귀국해 장례식에 참석하라"고 했을 법한데 오히려 날 외면했다.
 
그는 절친했던 동문이다. 누가 내게서 전화가 오면 그렇게 전해 주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왜 그랬을까? 스승의 작고와 연계해 추측도 해 봤다. 난 '그들이 나와 스승을 버렸구나'란 생각을 했다. '스승이 별세하자마자 이렇게 180도 바뀔 수 있다니'라는 생각에 심한 배신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다른 일본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나를 동문이 아닌 조선인으로 대했구나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스승 출생에 대해 말이 많았지만 스승이 출생을 숨기고 살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이해하게 됐다. 스승은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일본인이 된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가장 듣고 싶었던 한마디가 있었다. "김일! 나도 너와 같은 조선인이다." 난 언젠가 그 말을 할 것으로 믿고 그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스승은 이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영영 눈을 감은 것이다.
 
내가 스승에게 들었던 유일한 조선말이 있다. 프로레슬링 순회 장소인 나가타에서 있었던 일이다. 조선의 음식 얘기를 하다가 스승 후원자였던 한 일본인이 나아게 "조선 요리에 기쿄(도라지) 뿌리를 절인 것이 있다. 기쿄 알지"라고 묻는 것이었다. 난 "'기쿄'가 뭔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화장실에서 스승과 마주쳤다. 그때 스승은 "야, 기쿄를 몰라? 도라지를 말하는 거야"라고 말한 후 나갔다.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유일한 조선어가 도라지였다.
 
남북의 차이가 있다고 하나 스승은 나에게 한민족으로서 아마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스승은 일본어를 공부할 것을 엄하게 가르쳤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시간을 질문받았다. 그때 15분을 '추코훈'이라고 발음했다. 실제로는 주고훈이라 해야 했다. 일본어도 못 배웠느냐고 스승의 손이 날아 왔다. 그만큼 스승은 애착을 갖고 나를 대했고, 나를 미국으로 보낸 것도 같은 핏줄이 통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러내 놓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동문들 중에는 내가 먼저 미국에 가서 세계 챔피언 벨트를 딴 것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했을 것이다. 스승이 작고하자마자 나를 외면한 것은 그 감정이 그대로 묻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도 해 봤다.
 
"일본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말에 졸지에 국제 미아로 전락했다. 한국과 일본이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이 보증을 서 줬기 때문이다. 미국에 가는 데도 스승의 보증이 필요했다. 미국 비자를 발급받고 활동하는 데도 스승의 보증이 절대적이었다. 그렇다면 보증이 없다는 것은 일본에 간들 다시 밀항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닌가.
 
스승이 타계하고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해 분노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술은 좋아하지 않는다. 경기와 연습이 끝나면 가볍게 맥주만 마실 뿐이다. 그때 난 술독에 빠졌다. 술로써 마음의 상처를 치유했고, 달랬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때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난 원래 빡빡머리가 아니다. 그 일이 발단이 돼 심한 심적 고통을 겪으면서 머리카락이 빠졌다. 빡빡머리가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던 이유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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