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비극과 희극의 쌍곡선인 것 같다. 내가 세계 챔피언에 오른 것이 기쁨이었다면, 스승 역도산이 칼에 찔린 것은 비극이었다.
스승은 8일(1963년 12월) 저녁 야쿠자 칼에 찔렸고, 난 다음날 세계 챔피언이 됐으니 어떻게 하루 차로 그런 쌍곡선이 그려질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마치 신이 조선인이었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시기해 갈라놓은 것 같았다.
미국에서 스승이 칼에 찔린 후 수술이 잘됐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지만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스승은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을 종종 했다. 스승이 조선인이었던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스승은 "시한폭탄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늘 불안하게 살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당시 도쿄스포츠는 내가 챔피언이 된 사실을 내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했다. 스승은 그 기사를 보면서 상당히 기뻐했다고 한다. 한 동문은 뒤에 그 신문을 본 스승이 내 사진에 실망(?)했다고 전해 주었다. 난 챔피언이 됐지만 웃지 않고 무표정한 상태에서 팔만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을 본 스승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 자식 챔피언 됐으면 환하게 웃으며 사진 찍지 않고 이게 뭐야"라고 말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스승은 직접적 표현은 안했지만 내가 세계 챔피언에 오르기를 갈망했다. 난 그 챔피언 벨트를 스승에게 바치고 싶었지만 오히려 스승이 칼에 찔렸다는 소리만을 들어야 했다. 세계 챔피언이 됐지만 기쁨은 그만큼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난 스승이 칼에 찔린 후 누가 어떻게 병 수발을 했는지 잘 모른다. 미국서 내가 기껏 할 수 있었던 것은 리키스포츠센터에 전화를 걸어 동문들에게 스승의 몸 상태를 체크하는 것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괜찮다"라고 했다. 다행히 칼에 찔린 지 이틀 뒤 스승의 의식이 완전 회복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11일 전화 걸었을 때는 미음 등을 섭취하고 병원에서 레슬링 흥행을 위한 대책 회의도 가졌다고 했다. 난 스승에게 챔피언이 된 사실을 전하지 못했다. 스승은 신문을 보고 내가 챔피언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봐도 당시 사진은 뭐가 그리 불만이 있었는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하기야 내가 웃으며 찍을 수도 없었다. 스승이 칼에 찔렸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고 링에 올랐는데 뭐가 그리 좋다고 웃으며 찍겠는가.
스승은 "이 자식 귀국하면 웃고 사진 찍는 방법을 가르쳐 줘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스승은 그런 말을 하면서 그만큼 내가 챔피언이 된 것에 대해 흐뭇해 했다.
스승이 그런 얘기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제서야 난 스승이 괜찮다는 생각을 했고, 비로소 챔피언의 기쁨을 만끽했다. 내가 챔피언이 됐다는 소문은 교포 사회로 순식간에 퍼졌다. 특히 교포들뿐만 아니라 미국인들도 나의 박치기에 대해 연일 관심을 보였다.
박치기로 세계 챔피언이 된 레슬러, 그의 머리는 돌보다 더 단단하다며 나를 추켜세웠다. 미국 선수들은 나의 박치기에 본격 대비하는 것 같았다. 일부 과격한 선수들은 "머리가 아무리 단단해도 사람이 돌보다 더 단단할 수 없다. 언젠가 내게 걸리면 머리를 산산조각 내겠다"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난 그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 "할 테면 하라"는 식으로 맞받아쳤다.
63년 12월 15일 저녁 10시께(일본 시간) 미스터 모터 집에 도쿄서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모터는 충격을 받은 듯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불렀다. 떨리는 목소리로 "놀라지 마라, 역도산이 죽었다"라고 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