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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77]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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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WWA(세계레슬링협회) 태그 세계 챔피언이 됐다. 프로레슬링 입문 6년 만이다. 홈 링의 이점을 안고 싸운 랩 마스터 콤비를 가슴속까지 후련해지는 박치기로 녹다운시킨 후 승자가 됐다.

 

심판이 나와 미스터 모터의 팔을 들고 승리를 선언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동포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날 교포들은 기대했던 것보다 몇 십 배 이상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관람했고, 그래서 더욱 진한 감동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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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세계 챔피언이 된 후 연승 행진을 계속했다.
"타이틀을 따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란 말이 있듯
그 챔피언 벨트를 지키기 위해 미국에서 극한 상황과 악조건을 이겨 내야만 했다.
196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나는데 챔피언 방어에 성공했지만 얼굴이 피범벅이 됐다.

 

 

한국과 일본인은 하나였다. 누군가 경기장 구석에서 애국가를 선창하자 다같이 따라 불렀다. 또 일본 교포들도 자신들 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렀다. 미국 땅에서의 설움과 차별적 대우를 나의 우승으로 달랬던 것이다.
 
심판이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채워 줬다. 다시 한 번 경기장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혹독한 훈련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교포들의 함성을 뒤로 하고 링에서 내려왔다. 교포들은 라커로 들어가는 나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교포들은 나를 초대해 파티를 열겠다고 했다. 후원인을 자처했던 이춘성은 내가 챔피언 벨트를 따면 이미 파티를 열 것을 교민 단체와 협의해 놓았다.
 
라커로 돌아온 난 당장 스승 역도산이 걱정됐다. 라커에선 국제 전화를 걸 수도 없어 짐을 챙긴 뒤 모터 선배 집으로 향했다. 동경 시부야에 있는 스승 체육관(리키스포츠타운)으로 전화를 걸었다. 동문들에게 내가 태그 챔피언 벨트를 땄다는 소식을 들려줬다. 그들은 "정말 축하한다"며 "스승도 그 소식을 들으면 반가워하실 거"라면서 스승에게 전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축하 인사가 중요하지 않았다. 스승의 몸이 어떠한지 궁금했다. 스승의 몸 상태에 대해 물었다. 스승이 산노병원에서 수술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병원에서 수술까지 할 정도면 굉장히 상처가 심했는가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술은 잘됐고,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귀국하라"는 말을 했다. 난 스승과 통화하고 싶었지만 수술 직후라 여의치 못했다.
 
그날 밤 교포들이 파티를 열어 주는 곳으로 향하면서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스승에게 먼저 챔피언 벨트를 땄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는데 통화하지 못했던 것이 영 개운치 않았다.
 
파티에 참석한 후 그날 밤 늦게 모터 선배집에 도착했다. 일본 기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도쿄스포츠 레슬링 담당 기자와 통화했다. 그는 "스승이 칼에 찔려 마음이 아프겠지만 수술이 잘됐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고 얘기하면서 세계 챔피언에 오른 것을 축하해 줬다.

 

그는 스승의 상태에 대해 "왼쪽 아래 복부가 두 군데 파열됐으나 결코 치명상은 아니다"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와 우승 관련 인터뷰를 했다. 나의 우승 소식은 일본 전역에 알려졌다.
 
그 다음날 아침 일본 방송 기자들이 모터 선배집으로 달려왔다. 그들도 나를 인터뷰했다. 미국 언론도 한 동양인 레슬러가 박치기로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난 기자들과 인터뷰한 후 신문과 방송에 그 사실이 보도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진짜 세계 챔피언이란 사실을 실감했다.
 
난 당장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챔피언 벨트를 땄다고 횡하니 일본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은 매너가 아니었다. WWA와는 내가 세계 챔피언이 되면 12월 18일 경기를 한 번 더 치르기로 약속돼 있었다. 그 경기는 1963년의 마지막 경기였다. 그 경기를 끝낸 후 일본으로 돌아가 스승에게 챔피언 벨트를 바치고 싶었다.
 
그러나 뭔지 모르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꿈을 꾸면 스승이 벼락에서 떨어지거나 나의 손을 놓는 것이었다. 9월 7일 일본을 떠날 때 스승의 쓸쓸했던 눈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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