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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중촌(中村) : 본래 대망천(큰망내) 마을의 일부였다. 대흥리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중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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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약간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배운 작가 김홍도는 조선시대의 풍속화가였습니다.
서민들의 일상 생활을 그린 그의 그림을 봐도 그렇고… 사실은 고상한 낭만이나 우아한 예술성은 기대하지 않았죠.
하지만 그를 알아가면서 느꼈던 것은 이 땅의 화가들 중에서 김홍도 만큼의 여유와 풍류를
가진 예술가가 정말 드물다는 것이었죠.
화가 김홍도. 그는 가슴에 신선을 품고 살았습니다.
1745년 영조 21년에 평범한 중인 가정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김홍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집안 어느 누구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재적 능력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인지,
10대부터 그의 능력은 인정을 받았답니다.
지난 회에 소개해 드렸던 화가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스무살이 되기 전에 도화원의 화가가 되었지요.
그의 평생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강세황에게 배운 것은 그림 뿐이 아니었습니다.
김홍도를 크게 아끼던 강세황은 그에게 시와 글도 가르쳤으니까요.
덕분에 김홍도는 여느 중인 출신의 화가들과 다르게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자신의 그림 곁에 쓰기도 했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그림 곁에 글을 써놓는 것이 진정한 문인의 풍류라 여겼거든요.
영화 “취화선”에도 글을 쓰지 못해 천대받은 장승업이 화를 내는 장면을 기억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주변인들의 말에 따르면 김홍도는 눈이 맑고 키가 훤칠한데다, 용모가 빼어났다고 해요.
그리고 그가 쓰는 글이나 시를 보면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신선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거문고 연주도 수준급이었다고 하니,
김홍도는 화가라기 보다는 소위 예술인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드네요.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김홍도는 조선 최고의 화가로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진행되는 그림 사업에는 그가 우두머리가 되었고,
왕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도 몇번이나 책임자로 활동하게 되죠.
게다가 중인으로서는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벼슬길에 오르기까지 하는 데요,
첫번째 부임지가 바로 스승 강세황과 함께 근무하는 장원서였습니다.
그곳은 궁중의 화초나 과실나무들을 관리하는 곳이었으니 화가출신 관리가 일하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겠죠?
그가 마흔 다섯살이었을 즈음에는 정조의 지시로 영남지방을 두루 다니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산하를 그리는 훈련을 한 후에 그는 일본 쓰시마 섬으로 가서 지도를 그려옵니다.
그리고 중국에도 다녀오면서 외국의 사정을 왕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화가로서, 조선의 백성으로서 참으로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만간에 화가 김홍도의 독특한 인생경험이 영화로 제작될 것이라고 하니, 자못 기대가 되네요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김홍도가 그린 것은 풍속화만이 아니랍니다.
아래에서 소개해드리는 것처럼 그의 그림 중에는 꽃과 나무, 동물 등을 그린 정물화와 금강산 등을 그린 산수화,
건축물이나 궁중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재연하는 그림, 삼강오륜 같은 책에 들어가는 삽화
그리고 절에서 다루어지는 불교화까지 실로 그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그림에 손을 듯합니다.
그의 그림들 모두 많은 이들의 요청에 의해 그려진 것이니 그의 인기를 가히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렇게 많은 그림 주문을 통해 김홍도가 돈을 많이 벌었을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처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신선을 품고 살았던 사람인지라 돈이나 명예를 쫓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벼슬보다 더 좋은 자연 속의 삶>, <소나무 아래서 이야기 나누기> 등의 작품을 그리면서
삶에 대한 자신의 인생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그림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흔 살의 나이에 죽을 때까지 화가 김홍도는 세상의 물욕이나 권력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여유와 낭만을 즐기며, 그리고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천하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 깊은 심사 자주 거문고 줄에 담아보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남아도 해가 될 뿐이며 / 부귀의 지극함도 거짓되고 수고로우니
어찌 산 속 고요한 밤 향 피우고 앉아 / 소나무 소리 들음만하리요

춤추는 아이 (1778)


위의 그림 뿐 아니라 김홍도가 그려낸 <풍속화첩>에는
“논갈이”, “대장간”, “고기잡이”, “빨래터” 등 일상 생활을 재미나게 그려낸 그림들이 있습니다.
북, 장구, 피리, 해금등의 가락에 맞추어 소년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네요.
다소 투박하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듯한 선의 터치가 등장하는 인물들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씨름도 (1778)


이 그림은 김홍도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꼽히고 있죠.
단오날 즈음 씨름판이 벌어진 광경을 반시계 방향의 재미있는 구성으로 그려내었습니다.
특별히 더욱 독특한 것은 다들 씨름에 집중하면서 둥글게 모여있는 데
왼쪽 아래에서 씨름에는 관심이 없는 듯 등을 돌리고 있는 엿장수 아이의 등장입니다.
여기에 그의 재치가 숨어있는 것이죠.

서당도 (1778)


혼이 나서 눈물을 훔치는 아이를 가운데 두고 다른 아이들은 까르르 웃고 있네요.
예전에는 오로지 양반만이 글을 깨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당에는 양반의 아이들만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홍도의 서당도는 모여있는 아이들의 더벅머리나 행색을 보니 중인계급의 서당인 듯 합니다.
아마 영정조 시대의 서당은 중인들에게도 열려 있었나 봅니다.
이렇듯 변화하는 사회상을 김홍도는 재치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소나무 아래 생황을 부는 어린 신선 (1779)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소나무 곁에서 새깃털 옷을 입은 어린 신선이 생황이라는 우리의 민속 악기를 불고 있습니다.
지긋이 눈을 감고 악기를 불고 있는 그의 모습에는 고요하면서도 처연합니다.
눈으로 소나무의 줄기를 따라가보세요. 어디쯤에 용의 머리가 숨어 있답니다.

시녀도 (1781)


임금님의 초상까지, 초상화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김홍도.
그가 그린 초상화 중 하나이지만 궁의 시녀를 그려낸 것이 재미있네요.
뭉뚝하게 표현된 시작된 붓의 터치가 날렵하게 마무리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맑고 투명한 색상의 선들은 그림 속 주인공의 아름다운 특성을 대변하고 있는 데요,
아마 시녀가 아니라 선녀를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나비 (1782)


찔레꽃을 찾아 모여든 나비들의 모습을 부채에 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풍속화가로 다루어지고 있는 김홍도이지만 위와 같은 정물화에도 상당한 기량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스승 강세황은 이 부채 그림을 보고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나비가루가 손에 묻을 듯하니 사람의 솜씨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빼앗았다. ”

단원도 (1784)


그림의 제목이 김홍도의 호를 사용한 것처럼 위의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생활의 한 단면을 그려낸 것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그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불러 놓고 김홍도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위에 적힌 시는 그의 친구가 지은 것이구요.
나무가 많은 집에서 친구들과 시를 읊고 악기를 연주하는 그의 풍류가 부럽게 느껴집니다.
조금만 더 여유를 부릴 수 있다면 이런 낭만도 가질 수 있지 않나 싶네요.

명경대 (1788)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과 비견되고 있는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인 명경대.
그 또한 금강산 관광 후에 이 그림을 그렸는 데요.
정선이 실제로 경치를 마주하고 나서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그림을 그린 것에 비해
김홍도는 자신의 감상보다는 실제의 모습을 중시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과장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린 금강산은 실로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죽서루 (1788)


이 그림도 김홍도가 금강산을 그린 <금강사군첩> 중 한 장면입니다.
지도를 그린 것처럼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 약간은 건조해 보이기도 합니다.
가로 43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의 작은 그림이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끼고 여유롭게 세워져 있는
죽서루의 모습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작은 비단에 그려진 그림 속 풍경은 매우 넓고 깊습니다.

봄맞아 지저귀는 까치 (1796)


봄에 핀 복숭아꽃 주변에서 까치들이 모여 지저귀고 있는 모습입니다.
맑고 깨끗한 색과 선을 사용하여 여백의 공간을 충분히 살리고, 그리 많지 않은 수의 까치와 북숭아 나뭇가지들을 그려낸 것이
신선과도 같은 그의 심성을 잘 표현한 듯 합니다.
이 그림처럼 그의 마음 속에는 물욕이나 권력욕과 같은 무언가를 가득 채우기 보다는 적당히 비워 있었습니다.

★오원 장승업★

“그림에 취한 신선”이란 뜻의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 을 여러분은 아직도 기억하실 거에요.
실제 인물보다 더 리얼한 연기를 해준 배우 최민식 덕분에 강렬하게 다시 태어난 화가 장승업. 이번 주에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기량이 뛰어났다는 평을 듣고 있는
화가 장승업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영화에서 소개되었던 것처럼 장승업의 생애의 시작과 끝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홍수와 흉년, 돌림병 그리고 민란으로 인해 혼란했던 조선 시대의 말기에, 고아로 태어나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가 한양에서 머슴으로 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의 인생 초기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한 양반의 도움으로 그림과 글을 공부하게 되죠.
남달리 그림에 조예가 깊었던 문인 이응헌은 일개 종이파는 집의 일꾼이었던
장승업의 재주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고, 그를 자기의 집으로 데려와 그림과 글을 가르칩니다.
주인이 소장한 휼륭한 그림을 보면서 솜씨를 익혔지만, 무엇보다도 타고난 천재적 소질과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귀신 같은 눈썰미는 장승업을 금새 장안에 유명한 화가로 만듭니다.
만약 장승업이 그림으로 돈을 벌고자 하였다면 그는 금방 부자가 되었을 겁니다.
그에게 그림 부탁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과 마차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그에게는 그림 자체가 그의 인생이었기에 결코 돈과 명예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술동이를 이고 나타나 그림을 청하면 금새 붓을 들기도 했다죠.
장승업은 술을 목숨처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림 값으로 받은 돈은 죄다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 데 사용하고, 또 돈이 얼마나 들어왔는 지는 계산하지도 않았구요.
주막에 돈이 떨어졌다고 하면 "나에게 술대접이나 할 따름이지, 돈은 물어서 무엇 하느냐" 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 주막에서 그림을 그린 적도 많았답니다. 게다가 그는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늘상 미인을 옆에 두고 그림을 그렸구요.
한 번은 그의 그림에 반한 고종 황제가 장승업을 궁에 불러들여 병풍 그림을 그리도록 주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답답한 궁중 생활이 싫고, 술을 먹고 싶다는 생각에 장승업은 궁궐을 탈출하였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말이죠. 그리고 그 때마다 주막에서 술을 먹다가 잡혀왔구요. 장승업은 벌을 받아야 했지만,
그를 아끼는 민영환의 간청으로 간신히 그의 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라는 왕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병풍은 완성되지 못했답니다.
그렇듯 한군데에 속박되길 싫어하는 장승업이었기에 결혼을 해도 남들과 같은 단란한 가정생활을 꾸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흔이 넘어 결혼을 하고도 하룻밤을 보낸 후 부인을 남겨둔 채 또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한 여자의 남편이기보다는 화가였던 장승업의 가슴에는 이성으로도,
사회적 도덕관념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그림에 대한 강한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그의 손을 빌려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들을 만큼 장승업이 그리는 산수화, 인물화, 동물화 등은 어느 것 하나 빠지는 분야가 없었습니다.
책을 만 권 읽어야 올바른 그림이 나온다며 그림 속에 선비의 고매한 정신을 담고자 하였던
당시의 사대부들과 장승업의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그는 아름다움 속에 무언가를 담기 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아름다움이란 그 자체 만으로도 예술가에게는 진리나 신과 같은 절대적 가치가 될 수 있었으
까요.
특히 김홍도의 신선도를 보면서 장승업은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그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사람의 생사는 뜬 구름과 같은 것이오.
그러니 어디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지 요란스럽게 앓는다, 죽는다, 혹은 장사를 지낸다, 번거롭게 할 필요가 무에 있겠소?” 라며 말하던 것처럼
어느 날 문득 장승업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졌습니다.
죽었다고 말하기도 뭣한 장승업의 사라짐을 두고, 그과 친구로 지내던 일본기자는 “그가 신이 되어 갔다”고 말하였습니다.

황학산초가 그린 가을강의 모습을 본뜬 그림 (1879)


황학산초란 중국 원나라의 유명한 화가인 왕몽의 호입니다.
장승업은 그가 그린 그림을 무척 좋아했고, 또 본뜨기를 즐겨 했습니다.
하지만 왕몽 그림의 특징은 배우되, 장승업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살아난 그림으로 그려내었지요.
그림 속 산과 나무 그리고 강의 구도가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구요,
강 위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을 생기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호취도 (1880)

우리나라에 있는 매 그림 중에서 가장 완벽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귀신이 그의 손을 빌려 그린 것 같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뜻 보아서는 호방한 필치로 일시에 그린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매의 깃털 하나 하나부터 나무결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매서운 매의 눈초리와 날렵한 몸짓이 화가가 얼마나 많은 정열을 쏟아 부었는 지 짐작케 하고 있구요.

세 사람이 시간을 묻는 모습 (1890)


이 그림의 내용은 세 사람이 모여서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 밭이 될 때마다 나뭇가지를 하나씩 놓아 두었는 데
지금 그 나뭇가지가 열 개가 되었다” 며 나이 자랑을 하고 있는 중 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나이의 노인인 듯한데요, 그런 노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구름이 내려다 보이는 산 위입니다.
아마도 장승업이 그린 이 세 사람은 신선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 신선들은 그가 꿈꾸는 또 다른 자신일 것입니다.

솔바람 소리와 폭포 (1890)


그림 중앙에 세 그루의 소나무가 기품있게 서 있고, 그 위로는 폭포가 떨어지면서 안개가 계곡에 가득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위의 그림은 작아서 잘 안보이시겠지만 소나무 아래에 두 남자가 부채질을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져 있답니다. 한가로운 여름날의 조선 산수의 정취가 화면 가득히 담겨 있습니다.

귀거래도 (1890)


이 그림은 중국 진나라 때의 시인 도연명이 왕의 부름을 받고도 80일 만에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에서 평생을 은거하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그린 것입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했습니다.
그런 사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던 장승업은 세상사를 초탈한 도연명을 바라고 그리워하며, 가슴 속 바램을 그린 것이겠죠.

대나무와 닭 (1890)


장승업의 그림에는 조선땅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닭이 많이 등장합니다.
당시에 닭은 귀신이나 질병 같은 악한 기운을 쫓아낸다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그림으로 많이 그려졌습니다.
장승업은 문인화의 주된 소재인 대나무는 잘 그리지 않았는 데요,
여기에선 눈부신 장닭의 품위를 높이려는 듯 배경의 장식으로 운치있게 그려져 있네요.

붉은 매화와 흰 매화 병풍 (1890)


매화 나무의 한 둥치만을 클로즈업 해서 화려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10폭짜리 병풍입니다.
위에선 오른쪽 4폭 만을 보여드리는 것이구요.
매화는 차가운 바람을 이기고, 피어나는 세 벗이라 하여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라 불리고 있습니다.
장승업이 어려운 사회상을 바라보며, 어떻게든지 조선이 이 역경을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을 보이고 있는 듯 하네요.

오동나무를 닦고 있는 모습 (1890)


장승업은 중국에서 전해오는 고사를 그림의 소재로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위의 그림도 그 중 하나입니다. 중국의 한 학자였던 예찬이란 사람이 있었는 데요,
그는 결벽증이 무척 심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찾아온 손님이 무심코 뱉은 침이 오동나무에 묻었는 데요,
손님이 돌아가자 마자 예찬은 시동을 시켜 그 것을 닦도록 했다고 하네요.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여덟 마리의 말 (1890)


많은 학자들이 말하기를 그림으로 그리기가 가장 어려운 동물은 말과 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늘상 보아온 동물이라서 조금만 잘못 그려도 금방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이거든요.
위의 그림은 어떠세요? 말에게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자세가 한 그림 속에 모두 담겨 있네요.
잘 보이시지 않겠지만 네 명 중 맨 앞 사람의 어깨 위에는 매가 한 마리가 있답니다. 이제 막 매사냥을 떠나려는 것 같네요.

괴석 위에 선 닭 (1896)


황량한 배경이 겨울로 느껴지는 것처럼, 장승업의 말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늙어서 힘이 없는 듯, 닭의 털색조차 바랜 듯하네요. 다른 암탉들도 거느리지 못한 채 기이한 암석 위에
홀로 외롭게 서있는 늙은 장닭의 모습에 장승업은 늙고 지친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습니다.

 






조선에는 단원 김홍도, 오원 장승업과 더불어 '3원 화가'리우는 화가가 있습니다.
호를 혜원으로 사용하는 신윤복이 그 사람이죠. 조선을 대표하는 풍속화로 인정받고 있는
화가 신윤복. 그의 그림에는 한국인의 정서가 매우 솔직하면서도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쉽게 볼 수 없었던 은밀한 생활까지도 익살스럽게 그려낸 그의 그림에는 또 다른 우리네 인생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신윤복의 일생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그림이 언제 그려졌는지도 알 수가 없구요.
중인계급으로 알려진 화가들에 대해서는 글을 쓰는 선비나 양반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그들의 그림들만 전해질 뿐 화가의 일생에 관한 자료들은 거의 남아있질 않는 거죠.
조선의 화가들이 그림을 즐기는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네들의 사회에 발을 딛고 있었다면
부와 명성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었을겁니다.
그러나 신윤복은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당시 화단의 이단아로 불릴 만했던 신윤복의 출신은 지극히 전형적인 화가의 집안에서였습니다.
그의 증조부에서부터 아버지, 삼촌 등 가족들이 화원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거죠.
하지만 어려서부터 시작했던 그의 실력은 크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신윤복은 김홍도와 동시대에 활동하였으며 둘 다 풍속화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자주 비교가 됩니다.
그러나 김홍도가 왕의 총애를 받을 만큼 명성이 있던 반면 신윤복은 스스로 품위있다고 생각하는
양반들이 보기에도 민망한 속화(俗畵)들을 잘 그렸습니다.
그래서 도화서라는 화가들을 관리하는 관청에서 일을 하다가 쫓겨나기까지 하게 되죠.
김홍도가 서민의 놀이나 일상 생활을 재치있고 건전하게 그려낸 데 비해, 신윤복은 한량이나 기생들 간의 유희와 남녀간의 풍속을 날카로우면서도 적나라하게 그렸습니다.
또한 그는 조선 여인들의 섬세한 감정들과 아름다운 자태를 그림 속에 잘 표현하였는 데요.
아마도 여인의 심리를 잘 이해한 것 같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어서 감정이입이 가능해졌을 때
비로소 진실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 대상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말입니다.
특히 그가 그린 <미인도>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련된 선과 대담한 색채의 사용 또한 많은 이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구요.
그가 원해서였는 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윤복은 관직이나 권력과는 상관없이 서민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도 산수화를 그렸지만 그의 진가를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화려한 색채의 풍속화입니다.
특히 서민들의 해학을 품고 한량들의 유희나 남녀간의 애정을 소재로 하는 그림들을 주로 그렸지요.
품위있는 양반들이 기생들을 희롱하는 모습이나 성적인 부분을 내용으로 하는 신윤복의 화첩은 당시에나 지금도 많은 이들이 뒤로 돌아앉아 훔쳐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조선이 유교와 선비 중심의 사회였지만 일반 평민들이나 양반들 모두 똑같은 인간이기에
세속적 욕정을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양반들은 딱딱한 표정과 꼿꼿한 자세로 그 것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신윤복은 그런 양반님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서민들과 함께 비웃어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림 속에서 주변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인물로 자기자신을 등장시킨 것이죠.
어쩌면 신윤복은 그 어떤 비판가들 보다 더 날카로운 도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질서와 도덕이 무너지고 사치와 향락 풍조가 만연해지는 조선후기의 사회를 그림으로 고발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선과 거짓을 경멸하며 적나라하리만큼 솔직한 인생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이겠죠.
그래서 체면차리기 좋아하는 어떤 이들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말입니다.


기방무사 (妓房無事) (1805)


방안에서 남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당황한 듯 하죠?
아마도 방 안의 여인은 기생의 몸종이고, 방안의 남자는 기생을 찾아왔다가 그녀의 몸종과 사랑을 나누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갑자기 기생이 들어오니 사내는 이불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린 듯 하구요. 혜원의 춘화 중에는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이불을 덮지 않은 채 벌거벗은 사내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있답니다.

단오풍정(端午風情) (1805)

신윤복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죠.
단오날에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며 놀던 조선 시대 여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놀이의 이유는 악귀를 물리치고자 하는 액땜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는 소년들은 절간의 젊은 스님들 같은 데요, 그 모습이 익살스럽습니다.


무녀신무(巫女神舞) (1805)


일반 집에서 굿을 하고 있는 풍경입니다.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 무당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빌고 있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혜원은 이렇게 흥미롭고 이색적인 생활의 풍경을 화폭에 담길 즐겨하였지요.
그래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기녀, 무녀 들입니다. 여기서도 기녀의 붉은 의상은 우리의 시선을
기녀에게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쌍검대무(雙劍對舞) (1805)


한 가운데서 긴 칼을 들고 춤을 추는 무녀를 중심으로 악단과 양반, 기녀들이 둘러 앉아 있습니다.
주변의 푸른 빛들과는 대조적으로 무녀의 치마는 붉은 색이네요.
덕분에 시선이 무녀들에게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역동적으로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보니 얼마나 현란하게
춤을 추는 지 알 것 같아요.


연당의 여인 (1805)


평론가들에게 신윤복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입니다.
연꽃이 활짝 핀 연못 을 바라보며 여인의 모습을 시원하면서도 운치있게 그려내었습니다.
생황을 불려는 듯 한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담뱃대를 든 채 툇마루에 앉아 있는
이 여인은 은퇴한 기생인 퇴기인 듯 합니다. 순간의 모습을 잘 포착하여 깔끔하게 화면에 담아낸
혜원의 솜씨가 놀랍습니다.


월야밀회(月夜密會) (1805)


달빛만 고요한 한 밤중에 인적 드문 길의 후미진 담장 밑에서 한상의 남녀가 깊은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남자는 차림새로 보아 관청의 무관인 듯 하고, 그 남자의 여인은 기생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만남을 한 켠에서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이들의 만남을 주선해준 사람인 듯 하구요.
담장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화가의 시선이 재미있습니다.


월하정인(月下情人) (1805)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양반인 듯 잘 차려 입은 남자가 초롱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는 것 같네요.
여자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조금은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구요.
배경은 간략히 묘사되어 있지만 대신 이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미루어 짐작되는 그네들의 감정은
온 화폭이 모자라는 듯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왼쪽 담에는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라고 씌여 있습니다.


주사거배(酒肆擧盃) (1805)

주막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취객들과 주모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그러나 여느 주막과는 다르게 주변의 기와집과 마당 안의 매화도 보이는 것이 양반들을 상대하기에도
손색없는 꽤 반듯한 집 같아 보입니다.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들도 선비와 양반들인 듯 하구요.
매우 일상적인 조선시대의 한 생활상입니다.


주유청강(舟遊淸江) (1805)

특별히 하는 일없이 유희나 즐기며 세월을 죽이고 있는 선비들을 한량이라고 하죠.
그 한량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나왔습니다. 조선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화면 위쪽에는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 데 흰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아든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청금상련(聽琴賞蓮) (1805)

연못가에서 세 남자가 기생을 데리고 유희를 즐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옛 선비들은 기생들과 즐기는 놀이도 양반들이 지녀야 할 풍류로 생각하였기에, 당당하면서도 자신감 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기녀들의 옷맵시나 선비들의 옷매무새, 가야금, 우아한 정원의 나무들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잘 알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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