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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
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이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
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끊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 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나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 가 그러하듯이


* 바람벽 : 집안의 안벽
* 때글은 :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절은
* 쉬이고 : 잠시 머무르게 하고, 쉬게하고
* 앞대 : 평안도를 벗어난 남쪽지방, 멀리 해변가
* 개포 :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 이즈막하야 :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은, 이슥한 시간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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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소홍섭 2009.12.04 12:19

    백석의 처지와 정황은 매우 슬프고,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다고 토로한다.
    좁은 방에 누워 희미한 불빛, 서글픈 느낌을 자아내는
    방의 차갑고 흰 벽을 쳐다보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보고 있다.
    어렵게 살아가는 늙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설령 삶이 힘이 들지라도 좌절하기보다는
    여타의 다른 사람들이나 시인들도 그러했듯이
    가장 귀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하늘이 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다.

  • ?
    소홍섭 2010.07.19 17:06
    1930년대는 한국문학사에 첫 르네상스라 할 연대라 한다.걸출한 작가와 시인이 그때 다 나왔으니
    정지용,이상,김기림,백석,임화,서정주,김영랑,박용철,김유정,이태준,박태원,김남천,한설야...
    일제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가 바뀌는 유화적인 상황에서 우리나라 모더니즘이 꽃 피울수 있었던 듯.
    이상이나 김유정은 당대 몰이해속에 불행한 삶을 감당해야 했지만
    문학사 안에 최고의 아방가르드로 찬사를 받고 살아 남아..
    언제나 현실을 가로질러 먼저 가는 자들은 외롭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럽지만
    예술가의 천형으로 받아 들여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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