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무등기우회에서 오는 8월 1일에 고향인 금산에 모여 수담을 나누기로 했다는
내용은 위 자유게시판 '공지'의 『금산에서 바둑대회를(1)』에 자세히 올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홍보는 계속하여야 함에도) 꼬리 글이 길어져 찾아오시는데 불편함이 있을 것
같아 이 방을 새로 만들었으니 틈나는 대로 들르셔서 바둑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무등기우회에서 오는 8월 1일에 고향인 금산에 모여 수담을 나누기로 했다는
내용은 위 자유게시판 '공지'의 『금산에서 바둑대회를(1)』에 자세히 올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홍보는 계속하여야 함에도) 꼬리 글이 길어져 찾아오시는데 불편함이 있을 것
같아 이 방을 새로 만들었으니 틈나는 대로 들르셔서 바둑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2. 이창호의 군대시절
“이창호 훈병, 군화끈도 맬 줄 모르나!”
“으이구, 내 팔자야. 내 이래는 몬 산다.”
밤늦도록 불이 밝혀진 훈련소 내무반.
조교 한명이 연방 눈을 비벼 가며 군화에 바늘을 집어넣고 있다. 가끔씩 “앗, 따거”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바느질 솜씨는 그다지 신통치 않은 모양. 그래도 얼굴 표정만은 진지하기 그지없어, 명품 수제화를 만드는 구두 장인의 그것에 비할 만하다.
한밤중이 돼서야 조교는 자신의 완성된 작품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는 씁쓰레한 ‘썩소’로 변해 갔다. 조교는 군화를 한쪽에 던져 놓고는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어제 아침의 일이 영화처럼 떠올랐다.
육군 신병 훈련장.
“집합!” 소리와 함께 훈련병들은 바람에 눈썹을 날려 가며 모여들었다. 빨간 모자를 푹 눌러 쓴 조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뒤로 번호’를 붙였다. 그런데 머릿수가 하나 모자란다. “번호 다시!”를 외쳐 봤지만 역시 하나가 부족. 조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또 이창호인가!”
때는 1996년. 한국 바둑의 국보에게 병역상의 혜택을 주느니 마느니 시끄러웠지만 결국 이창호 9단은 공익근무요원이 되어 한 달간의 의무적인 병영훈련을 받게 됐다.
바둑판 위에서는 천하를 울리는 이창호지만, 훈련소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우형(愚形·어리석은 모양) 중의 우형인 ‘빈삼각’에 가까웠다.
남들 다 집합할 때 이창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그때까지도 내무반에서 군화끈을 매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이창호를 부르러 온 조교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창호 훈병! 아직 신발끈도 맬 줄 모르나!”
“실은… 제가 운동화만 신어 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구한 날 이러고 있으니 애가 탄 것은 조교 쪽이다. 을러도 보고 겁도 줘 보고 사정도 해 봤지만 애초에 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국 바둑의 국보를 함부로 다룰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기로 한 것이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조교의 입에서 피식 소리가 나왔다. 밤이 늦도록 자신이 한 일은 바로 이창호의 군화에 똑딱이 단추를 다는 것이었다. 군화끈을 못 매 만날 집합에 늦는 이창호를 위해 그가 생각해 낸 것은 끈 대신 똑딱이 단추가 달린 군화. 이렇게 하여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훈련병을 위한 조교표 똑딱이 군화가 탄생한 것이다.
잠시 후 조교의 코고는 소리가 막사에 울려 퍼졌다.
그날 밤, 그는 단잠을 잤다.
역시 사람들은 타고난 저마다의 재주가 따로 있다는 말쌈!!!!!!
오는 사람 절대로 막지 않은 저희 모임으로서는
아주 반가운 소식입니다.
바둑으로서 고향을 생각하고 정을 나누고자 하는
아주 작은 대회이지만
이 대회가 밀알이 될지는 두고 볼 터!
저에게 연락주시면 자세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일척'님이 누구신지를 몰라 저의 연락처 남깁니다.
김철용(010-4604-4991)
3. 엄살꾼 조훈현
혼잣말로 남 들으라는 듯 “졌네~다 죽었네”
조훈현의 젊은 시절 대국 모습.
한국 프로기사 중 최고의 엄살꾼은 누구일까? 놀라지 마시라.
바로 ‘영원한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이다. 그 이외의 엄살파들은 사실상 조훈현 추종자 내지는 아류라고 봐도 무방하다.
요즘이야 많이 나아졌지만 50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는 바둑계 최고의 엄살꾼이었다. 바둑을 두는 내내 “졌네, 졌어!” “다 죽었네!” “쯧, 더 둬야 하나!” 따위의 혼잣말을 남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데, 이게 상대방으로서는 미칠 노릇인 것이다.
실제로 당시 대국장에 들어가 보면 그 유명한 ‘조훈현의 혼잣말’을 어렵지 않게 구경할 수 있었다. 아무리 조훈현이라고 해도 시종일관 중얼거리는 것은 아니고, 바둑판을 골똘히 들여다보다가 느닷없이 뭐라 뭐라 하는데, 한국기원 관계자들조차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것은 조훈현의 혼잣말은 한국말도 일본말도 아닌 ‘짬뽕 언어’라는 점. 지금이야 방송인보다 더 우리말을 잘하는 조훈현이지만, 원래 그는 우리말보다 일본말이 익숙한 사람이다. 초등학생 때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나 군 입대 전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탓이다. 30대까지만 해도 어눌한 우리말은 조훈현의 상징이자 콤플렉스였다.
어쨌든 그의 대국 중 중얼거림은 기분에 따라 우리말에 일본말이 끼이거나 일본말에 우리말이 섞였으며, 두개가 혼용될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남행열차>와 같은 유행가 가사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조훈현의 중얼거림을 동반한 엄살은 워낙 유명해서,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사는 없었다. 그가 “졌네, 졌어!” 하면 ‘내가 졌다는 얘기인가 보군!’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조훈현의 중얼거림은 기사들에게 환영 받을 일은 아니었다. 당대의 1인자가 구시렁대는 것을 대놓고 뭐라 할 사람은 없었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995년 요다의 귀마개 사건이다. 지금은 사라진 동양증권배 결승전에서 조훈현과 일본의 ‘바둑 사무라이’ 요다 노리모토 9단이 맞붙었다. 그런데 첫판을 패한 요다가 두 번째 대국에서 큼직한 귀마개를 하고 나온 것이다. 대선배에게 뭐라 말은 못하겠고, 귀마개로 나름 시위를 한 것. 그러나 결과는 두 번째 판도 요다의 패배였다.
사족 하나.
바둑을 좋아하는 필자도 당대 최고의 우상이었던 조훈현의 기풍을 흠모하다 못해 그의 혼잣말 습관을 따라 배우고 말았다. 요즘도 가끔씩 무슨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외계어에 가까운 혼잣말을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도대체 뭔 소리야” 하고 눈치를 주지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걸 어떡해!
4. 장강의 앞 물결은 뒷 물결에 밀려나고
(젊은 조남철, 아스피린 씹으며 대국장으로…)
때는 1949년 9월. 서울 저동 조선기원에서 제2회 전국프로바둑선수권전이 열렸다.
이 대회에 대해서는 배경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일본에서 돌아온 한국 프로기사 1호 조남철은 우리나라에 현대바둑을 보급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었다. 당시 바둑계는 양분되어 있었으니, 순장바둑(1940년대까지 많이 둔 우리 고유의 바둑. 현행 바둑은 일본식 바둑이다)을 주로 두던 노장파와 조남철을 위시한 소장파가 그것이다.
노국수들은 경성기원에, 소장파는 조남철이 운영하던 조선기원에 주로 모였다. 노국수들이 보기에 조남철은 한낱 혈기방장한 애송이로 보였을 터. 겉으로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양쪽은 서로 바둑판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대회는 바로 이런 민감한 시기에 열렸다. 노국수들과 젊은 기사들이 골고루 참여해 그럴듯한 신구의 조화가 꾸려졌다.
그런데 대회당일 문제가 생겼다. 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조남철이 그만 펄펄 끓는 열에 쓰러지고 만 것. 그렇다고 여기서 소장파의 간판스타가 불참한다면 노국수 진영의 승리는 불을 보듯 뻔했다. 조남철은 의사 친구가 가져다준 아스피린을 삼키며 대회장으로 향했다.
노국수들은 노국수들대로 조남철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민중식이란 노국수의 성적이 좋자 슬금슬금 다른 국수들이 그에게 일부러 져주는 ‘밀어주기’가 시작됐다. 오늘날의 승부조작인 셈이다. 결국 조남철과 민중식이 결승에서 만났다. 민중식은 전승, 조남철은 1패를 안고 있었다.
민중식은 호주가로 유명했다. 대국이 시작되자 소주병을 꺼내더니 큰 컵에 콸콸콸! 따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술이 없으면 수가 안 보여”라며 조남철을 스윽 넘겨보았다. 일종의 기싸움이었다.
술 대신 조남철은 아스피린을 씹으며 필사적으로 대국에 임했다. 온몸이 열로 펄펄 끓고 머리가 어질어질해 당장이라도 자리를 펴고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버텼다.
이리하여 첫판의 승자는 조남철.
두 사람은 각각 1패씩을 안게 돼 최종 대국으로 승부를 내야 했다. 그 상황에서 도저히 더 이상 바둑을 둘 수 없을 지경이 된 조남철이 결승전을 하루 연기해 줄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노국수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뻔했다. ‘맛이 간’ 조남철한테도 졌는데 ‘멀쩡한’ 조남철과 둔다면 결과는 뻔한 것 아닌가.
결국 조남철은 민중식과 최후의 승부를 겨루게 됐다. 결과는 이번에도 조남철의 승리. 비록 한판의 바둑이었지만, 이날 승리로 조선기원은 경성기원을 제치고 완연한 우위에 서게 됐다. 장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에 밀려나고 있었다.
5. 애견가 조훈현
“日 유학시절 스승이 선물한 ‘벵케이’가 그립다!”
조훈현 9단은 애견가로 유명하다. 그것도 자그마한 애완견이 아니라 어지간히 ‘한덩치’ 하는 놈들을 좋아한다.
조훈현과 개의 인연은 일본 유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훈현은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프로바둑계의 원로 세고에 겐사쿠 9단의 내제자가 된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한 살. 거의 할아버지나 다름없는 노스승의 집에 제자라고는 덜렁 조훈현 하나뿐이었으니, 어린 조훈현이 느꼈을 적적함과 외로움은 오죽했을까. 실제로 당시 세고에 9단의 넓은 저택에는 세고에와 그의 수발을 들어주는 며느리, 그리고 조훈현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이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들어왔다. 집 떠난 어린 제자의 외로움과 심심함을 달래 주기 위한 스승의 배려였다. ‘일본 진돗개’ 쯤으로 보면 되는 아키다종으로 이름은 ‘벵케이’라고 했다.
벵케이는 조훈현의 유일한 친구였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청소한 뒤 벵케이와 30분 정도 산책을 하는 시간은 하루 중 조훈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시간은 흘러 1972년 3월. 조훈현은 징집영장을 손에 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벵케이와 헤어지던 당시를 조훈현은 이렇게 회상했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선생님 댁을 나오는 순간, 벵케이는 어떤 예감이 들었는지 무척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신음 소리만 냈다.”
알려져 있듯 조훈현이 귀국한 지 4개월 만에 스승 세고에 9단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랜 벗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에 자극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아끼던 제자의 귀향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유라는 설도 있었다. 실제로 세고에는 유서에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데려와 대성시켜 주기 바란다!’는 내용을 남겼다. 어쨌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일본 바둑계로서는 날벼락과 같은 충격이었다.
스승의 부고가 날아온 지 두 달 뒤 벵케이 마저 죽었다는 소식이 조훈현에게 전해졌다. 자신을 키워 준 주인들이 잇달아 곁을 떠나자 식음을 전폐하더니 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뒷얘기였다. 조훈현은 벵케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벵케이도 스승처럼 자살을 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조훈현은 기회만 되면 개를 길렀다. 그래도 조훈현은 “벵케이 만한 놈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어딘가, 기억조차 아련한 첫사랑의 고백처럼….
6. 김인의 굴욕
“한국서 1인자 넘보는데 일본서 연구생 하라고?”
‘순수토종’ ‘된장바둑’으로 불렸던 서봉수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바둑계는 일본 유학파의 세상이었다. 1호 프로기사 조남철을 시작으로 김인·윤기현·하찬석·조훈현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선진바둑을 배워 온 인물들이 1인자의 계보를 이어 갔다.
조남철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현대바둑 보급을 시작한 지 18년 뒤인 1962년, 김인은 일본으로 홀홀히 떠나게 된다. 이때 김인의 나이 스물. 이미 한국에서 프로 4단의 신분이었다.
일본으로 떠나는 김인에게 조남철은 자신의 스승 기타니 미노루 9단 앞으로 쓴 소개장을 쥐어 주었다. 일본 최대의 바둑 도장에서 수학한다면 한국 바둑도 장족의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당시 자신의 1인자 자리를 끊임없이 노리던 김인에게 소개장을 써 준 것에서 조남철의 대인배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김인의 굴욕은 엉뚱한 데서 시작됐으니….
일본으로 간 김인은 먼 친척에게 몸을 의탁했다. 바둑을 모르는 친척은 연줄을 동원해 이웃에 사는 프로기사를 연결시켜 주었다. 고스기라는 인물로, 그도 김인과 마찬가지로 4단이었다. 고스기는 김인이 프로 4단이라는 말에 피식 웃었다. ‘어디 감히 한국 4단을 일본 4단과 비교하느냐’는 투였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거만하게 말했다.
“지인의 부탁이고 하니 내 특별히 힘을 써서 일본기원 원생으로 넣어 주리다. 열심히 하면 초단으로 입단도 할 수 있겠지.”
김인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한국에서 1인자를 넘보던 자신에게 프로 인정은 커녕 연구생이 되라니….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그제야 김인은 조남철이 써 준 소개장이 생각났다. 친척에게 보여 줬더니 “이걸 왜 이제야 내놓느냐!”며 바로 기타니의 기원으로 데리고 갔다. 애제자의 소개장을 본 기타니는 김인을 즉각 제자로 받아들여 주었다.
당시 일본 바둑계에서 기타니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김인은 간단한 시험기를 거쳐 바로 일본 프로 3단 자격을 부여 받았다. 일부 일본 기사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후 김인이 승단대회를 비롯해 각종 기전에서 맹위를 떨치자 쑥 들어가고 말았다.
언론에서는 김인, 오타케 히데오, 린 하이펑의 이름을 따서 향후 ‘긴죽린(竹林)’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김인에게 “원생으로 넣어 주마!”고 선심(?)을 썼던 고스기 4단은 이후 김인의 승승장구 소식을 접할 때마다 쥐구멍을 찾았다는 후문이다.
고군분투하시는 김회장님!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서로가 소통이 이루어질때
좋은 글도 마음에서 나오는 법인데....
혼자서 이방을 지키느라 마음고생이 큽니다.
방안에 촛불이 계속 켜저있으면 지니가는 길손이라도
찾아와 여숙을 묻다가 가겠지요.
언젠가는 이 방에 인기척이 나고
기침소리가 들려오는 날이 분명있을겁니다.
수담(手談)의 향기는 고독에서 옵니다.
무소뿔처럼 혼자가는 즐거움이 락도가 아닐련지요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가다 발자국 남기고 갑니다.
7. 백두산 대국
“천지가 발 아래…공안 눈치 보며 혼신의 힘 다해 대국”
이번에는 한국 바둑사에 길이 남을 저 유명한 백두산 대국 이야기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 9월.
대회 창설 때부터 파격적인 상금을 내걸며 눈길을 끌었던 ‘기성전’측은 2회 대회를 맞아 ‘뭘 하면 좀 더 튀어 보일까?’ 하고 고민한 끝에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백두산 대국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금이야 남녀노소 누구나 여행사만 따라가면 가 볼 수 있는 곳이지만, 그때는 백두산 호랑이가 천지를 활보하던 시대(?)가 아니던가.
여하튼 한국기원에서는 기성 타이틀 보유자 조훈현 9단, 도전자 유창혁 4단과 함께 김인 9단, 장수영 8단, 이창호 4단, 차민수 4단 등으로 초호화 선수단을 구성했다.
서울을 떠나 6시간 30분 만에 연길에 도착한 일행은 1박 후 새벽부터 다시 버스로 6시간을 달린 후에야 백두산에 다다를 수 있었다. 천지호텔에 도착한 대국자들은 한복으로 갈아입은 뒤 백두산 정상 천지로 향했다. 침묵의 바다와 같은 고대의 신비, 천지가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조훈현과 유창혁이 바둑판을 마주하고 앉는 순간, 사단이 벌어졌다. 초록색 복장에 ‘공안’이란 붉은 글씨를 어깨에 두른 중국 경찰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북한 측의 항의와 중국 외교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며 “돌은 한개도 놓을 수 없다!”는 게 아닌가.
이튿날 새벽 재도전 끝에 가까스로 기념촬영에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일행의 필름을 모조리 압수해 가 버렸다. 안내원이 “백두산에서는 태극기와 비디오 촬영만 금지된 것 아니냐?”며 항의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중국바둑협회가 보내온 초청장을 보여 주었지만 역시 통하지 않았다. 공안의 말은 곧 법이었다. 독자 여러분이 보시는 사진은 ‘천지 분서갱유’ 속에서 운 좋게 생존한 몇 장 되지 않는 귀한 사진 중의 하나다. 일설에 의하면 김인 9단이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양말 속에 필름을 감추었다고 한다.(위에서 설명한 사진을 게제하지 못한 점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제2기 기성전 도전1국은 8수만에 무승부 처리(8수면 두기 시작하자마자 그만둔 것이다)됐다. 천지에서 쫓겨나다시피 내려온 선수단은 천지호텔에서 도전기 2국을 두었다. 비록 천지에서 불쾌한 경험이 있었지만, 조훈현과 유창혁은 혼신의 힘을 다해 대국에 임했다.
이후 도전기 3국을 연길에서 두려다가 또다시 공안에게 저지당한 선수단은 결국 베이징으로 장소를 옮겨 3국을 두어야 했다. 한마디로 고생이 첩첩이었던 백두산 대국이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 선수단을 이끈 안내원의 말은 참가했던 기사들 사이에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우리 중국 사람도 모릅니다.”
무적님 ! 아니, 김철용님 !
바둑에 대한 강의 잘 읽고 있으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덕분에 바둑에 대한 관심도 생겼구요........
많이 알려 주셨습니다만 ,
이사람의 궁금증이 해결돼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고자 합니다.
바둑의 창시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해서 세상에 보급 되었는지가 궁금 합니다.
그리고, 서양 보다는 동양에서 더 선호 하는것 같은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수고 스럽겠습니다만, 부탁 좀 드릴께요.
관심 가져 주신 목계님에게 감사드립니다.
- 먼저 바둑의 창시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바둑을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하는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아무도 모른다!”입니다. 그러나 바둑의 발상지는 중국이라는 것이 우리의 통념입니다.
이하는 바둑의 유래에 대하여 인터넷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의 고전 《박물지(博物誌)》에 '요조위기 단주선지(堯造圍棋 丹朱善之)' 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를 근거로 하면, 기원전 2300년 전 요왕이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치기 위해 바둑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또 《설문(說文)》에는 기원전 2200년경 순왕이 어리석은 아들에게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다고 나오며,
《중흥서(中興書)》에는 '요순이교우자야(堯舜以敎愚子也)'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도 요왕이 단주(丹朱)에게 바둑을 가르쳤고 단주(丹朱)가 바둑을 꽤 잘 두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들의 내용이 정확한 역사적인 사실을 확정해 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거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되겠지요.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우리의 신화와 다를것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이러한 문헌들이 쓰여질 당시에 중국에서 바둑이 두어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 천문관측 도구로서 바둑이 발명되었다는 설과, 이 두 가지를 설을 함께 설명해주는 우칭위엔설이 있는데 우칭위엔은 요순(堯舜)임금이 아들들에게 천문을 연구하는 도구로써 바둑을 가르쳤다고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이후의 참고할 만한 문헌을 몇 개 추가하겠습니다.
《논어(論語)》에는 以奕爲爲之猶賢乎己 (바둑 두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예교(藝敎)》,《박혁론(博奕論)》,《오잡조(五雜俎)》 등의 문헌에는 한위(漢魏) 나라 이전의 바둑판은 17×17로(路)였다고 적혀 있는데 실제로 이런 바둑판이 고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19×19로(路) 바둑판이 쓰이게 된 것은 당나라(唐) 때부터라고 합니다.
어쨌든 바둑은 지금의 중국지역에서 발상하여 당시에 상당히 보급이 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바둑이 두어졌다는 문헌적인 기록은 삼국사기입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百濟本紀)' 개로왕조(蓋鹵王條)에 승려 도림(道琳)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는 인터넷을 검색하면 알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다음은 바둑이 서양보다 동양에서 성행한 이유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바둑과 장기가 동양에서 성행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서양에서는 ‘체스’라는 것이 성행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저는 체스를 배워 볼 기회가 없어 아직까지 체스를 모릅니다.
제가 체스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바둑과 체스의 상관관계’ 혹은 ‘장기와 체스의 상관관계’를 나름대로(서투르게나마) 정리해 보겠지만 아예 체스를 모르니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이 바둑과 체스에 대해서 인터넷에 연구논문도 여러 편 게재되어 있으니 직접 검토하여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8. 포토타임
“바둑 두는 사진 공식 촬영시간 놓치면 ‘말짱 도루묵’”
필자가 <월간바둑> 초짜 기자 시절의 이야기다. 하루는 사진기자 선배가 구시렁대며 담배를 빨아대고 있었다. 사연인즉 이랬다.
프로기사의 대국(對局) 사진은 공식 촬영 시간이 정해져 있다. 대국 개시 직후 10여분, 점심식사(이때는 바둑이 중단된다) 후 대국이 속개될 때 5분, 그리고 대국이 끝나고 복기를 할 때다. 복기를 하지 않을 경우 횟수는 2회로 줄어든다. 간혹 김희중 9단, 서능욱 9단 같은 속기파끼리 만나 “점심식사 전에 얼른 두어 끝내 버리자”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점심시간 없이 바둑을 둘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사진을 찍을 기회는 한 번밖에 없다.
그날 선배는 오전 10시 대국 시작 시각에 맞춰 카메라를 들고 대국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카메라에 눈을 바짝 대고 대국자가 착점(돌을 놓는 것)하기만을 기다렸다. 원체 움직임이 없는 대국 사진인지라 팔이라도 뻗는 모습을 담아야 그나마 그림이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따라 흑을 쥔 대국자가 도통 착점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빈 바둑판을 5분가량 뚫어지게 노려보더니, 나중에는 아예 눈까지 감고 명상에 빠져 버렸다. 첫수가 놓이지 않으니 상대방도 바둑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결국 선배는 10분 동안 눈알 빠지도록 카메라만 들여다보다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두 사람의 사진 몇 장만을 찍고선 대국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선배는 “이건 명백히 나를 물먹이겠다는 행위”라며 분개했다.
사실 프로기사에게 사진 촬영은 불편한 일이다. 기자의 직업정신은 인정하지만, 셔터 소리와 펑펑 터지는 플래시는 분명 대국에 지장을 준다. 하물며 결승전이나 도전기와 같이 큰 판에서는 평소 사진 촬영에 너그러운 대국자들도 신경이 꽤 날카로워진다.
일본의 경우는 우리나라보다 좀 더 엄격한 편이었다. 대국을 시작하기 전 5분 정도만 포토타임을 준다. 이때엔 대국자들도 취재진이 해달라는 대로 포즈를 취해 준다. 하지만 대국이 시작되면 모든 카메라는 방 밖으로 퇴출이다. 복기 때까지 그 누구도 대국장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수 없다.
십 수 년 전 일본에 취재를 갔던 필자도 쓴 경험이 있다. 대국 시간을 깜빡 잊고 있다가 부랴부랴 대국장에 도착하니 포토타임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서둘러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포토타임이 끝났다!”며 일본기원 직원이 무서운 얼굴로 등을 떠밀었다. 외국에서 취재를 온 기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최악의 사례는 대국 개시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리는 경우다. 나갔다가 포토타임 10분이 지나면 그제야 슬그머니 들어오는데, 이건 사진에 찍히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반항이다. 기자의 입장에서는, 지금 생각해도 참 얄미운 사람들이다.
9. 기인 서봉수
“어차피 저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데요!”
요즘이야 국제기전이 많지만,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바둑계는 한·중·일 각국이 자기 우물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았다. 그 가운데서도 우열은 있었으니, 현대바둑의 종주국이라 할 일본이 실력으로나 인프라로나 위세를 떨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말 국제대회가 생기고 세계 바둑의 변방 취급을 받던 한국이 우승을 휩쓸면서 대역전극이 펼쳐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때는 프로는 고사하고 아마추어 국제교류전조차 희귀했다. 국제교류라고 해 봐야 일본 정도인데 그나마 1965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 전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여하튼 1965년 12월 한·일 대학생 교류전이 생겼고, 이듬해는 고교생 교류전으로 확대됐다. 한·일 고교생 교류전이 대박을 내자 손가락을 빨고 있던 대만에서 즉각 ‘콜’이 들어왔다. 2회 대회부터는 “우리도 끼워 달라!”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그리하여 2회 대회는 한·중·일 동양3국 고교생 대회로 확대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는 ‘물 건너가면 무조건 이겨야 하는’ 불꽃 애국의 시대. 한국바둑의 대부 조남철의 특명을 받은 제자 김수영 5단이 고교생 선수 훈련을 위한 ‘조교’로 임명받았다.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하늘같은 프로의 ‘특훈 마사지’를 받은 학생들의 기량은 일취월장, 첫 대회만 패했을 뿐 5년 내리 우승을 차지했다. 결국 “한국 고교생들 너무 강하무니다!”며 일본이 슬그머니 빠지면서 대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동양3국 고교생 대회 당시의 에피소드 한 토막.
대만에서 대회가 열렸을 때의 일로 당시 한국팀에는 서봉수가 끼어 있었다.
대회 일정이 비는 날 3국 고교생들은 버스 한대를 빌려 단체관광에 나섰다. 요즘이야 단속의 대상이지만 관광버스란 것이 본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노래방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는 한국뿐 아니라 대만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한명씩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순번이 돌고 돌아 서봉수 차례가 됐다. “나는 노래 못한다!”며 버티던 서봉수를 다른 학생들이 좌시할 리 없다. 결국 질질 끌려 나가다시피 해 마이크를 잡은 서봉수.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입을 뗐다.
“맛을 보고 맛을 아는 X표 간장~.”
한국 학생들이 배를 잡고 뒤집어지는 모습을 대만·일본 학생들은 멀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CM송을 다 부르고 제자리로 돌아온 서봉수에게 조남철 단장이 “이놈아, 그것도 노래라고 불렀냐?” 했다. 그러자 서봉수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어차피 저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데요, 뭐.”
과연 기인은 떡잎부터 기인스러웠던 것이다.
10. 반상의 구도자 이강일
“내가 만난 최고의 기사(棋士)”
필자는 10년 이상 프로기사들을 옆집 아저씨 보듯 하며 살았다. 팬들은 알 수 없는 그들의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었다. 프로기사들도 사람이니 바둑판을 떠나면 보통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고고한 학자풍의 기사가 있는가 하면 장사꾼 느낌이 드는 기사도 있다.
그 가운데 “당신이 본 최고의 기사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고(故) 이강일 5단을 꼽는다. 여기서 ‘기사’란 승부사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기도(棋道) 정신’이 충만하고 한눈에 척 보기에도 기사의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다.
이강일 5단은 2007년 세상을 떴다. 2004년 프로기사직을 은퇴했으니, 바둑계를 떠난 지 3년 만이었다. 1921년생으로 은퇴 당시 나이는 여든넷. 한국기원 소속 202명 프로기사 중 최고령 기사였다. 1959년에 입단해 정확히 45년간 프로기사로 활동했다. 입단 동기는 윤기현 전 9단이었다.
평생 타이틀은커녕 본선 무대 한번 시원하게 올라 본 적이 없었다. 초단에서 2단 올라가는 데 7년, 3단에서 4단이 7년, 4단에서 5단이 되기까지는 무려 14년이나 걸렸다. 실력으로 말하자면 요즘 아마추어 강자보다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평생 프로기사로서의 자부심과 품위를 지키려 노력한 양반이었다. 한국기원 직원들 사이에서는 “프로기사 모범상이 있다면 무조건 이강일 사범님이 수상자”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강일 5단의 트레이드마크는 기보용지였다. 요즘은 컴퓨터에서 마우스로 수순을 쿡쿡 찍어 프린트하면 그만이지만, 그때만 해도 기보용지에 빨간 펜(흰돌), 파란 펜(흑돌)으로 동그라미를 그려서 기보를 만들었다.
그는 대국이 있는 날 오후면 어김없이 한국기원 사무실에 들러 “기보용지 한 장만 주게!” 하고 요청하고는 했다. 오래 두고 쓰시라고 한권을 드리면 “한 장이면 되네.” 하고 마다했다. 그러고는 사무실 구석 소파에 앉아 기보용지에 손수 그날의 대국을 꼬박꼬박 기록하는 것이었다. 물론 열이면 열 모두 진 바둑이었다. 지팡이를 옆에 놓아 둔 채 종이컵에 담긴 티백 녹차를 마시며 묵묵히 기보를 작성하는 이강일 5단의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이강일 5단에게는 자연스럽게 ‘반상의 구도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꽤 세월이 흘렀지만, 필자는 아직도 가끔씩 이강일 5단의 생전 모습을 떠올린다. 아무리 프로라고 해도 승리의 영예와 고액 상금만이 바둑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늘 패했지만, 그래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이강일 5단은 훌륭한 프로기사였다.
지금 이 순간도 고인은 저승 어딘가에서 자신의 기보를 하나하나 그리고 있지 않을까.
(내일부터 5일 연휴가 시작되어 나도 당분간 컴이 없는 곳에서 생활해야 하니 여기도 당연히 쉰다)
11. 조남철과 김인
“선배가 올려놓은 우승 상금 후배가 차지”
요즘이야 국제기전 우승상금이 수억 원에 달하고 국내기전도 메이저급의 경우 수천만 원에서 억대에 이르는 시대지만, 예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기전의 우승상금이 이렇게 높아진 것은 1990년대 국제기전이 생기면서, 대기업의 후원이 이루어지면서부터라고 보면 된다.
그 이전만 해도 기전은 신문사들이 자사의 이름을 걸고 개최하는 것이 대세였고, 상금과 대국료라고 해 봐야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신문사가 무슨 돈이 있겠는가?)
1950년대 최고의 기전은 <동아일보>가 주최한 국수전이었다. 우리나라 기전의 원조가 바로 이 국수전이다. 지금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수’라는 타이틀의 무게감만큼은 살아 있다. 아무튼, 초창기 국수전의 우승상금은 고작 5,000원이었다. 이 금액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우승자가 여기저기 우승 턱 몇 번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는 수준이었다.
우리나라 프로바둑의 여명기는 조남철 무적함대의 시절이었고, 조남철은 1회부터 9회까지 국수전 우승을 싹쓸이했다. 당시 조남철의 철옹성을 넘볼 자는 없었다. 한데 국수전의 우승상금이 적기도 하거니와 매년 동결이라는 점에 대해 수혜자인 조남철로서는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신문사의 인상 의지도 없었지만, 프로기사들 사이에서 “우승상금 올려 봐야 좋은 건 조남철 뿐”이라는 인식도 팽배했다.
어지간한 조남철도 화가 났던지 드디어 7회 대회를 마치고는 반기를 들고 나왔다. 우승상금을 올려달라고 신문사측에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결국 동아일보사는 8회 대회부터 우승상금을 10배 인상해 5만원으로 하기로 했다. 당시 조남철의 회고는 이렇다.
“내가 요구한 우승상금 액수는 20배인 10만원이었다. 신문사측은 당장 그렇게 올릴 수는 없으니, 우선 2년간 5만원으로 하고, 10회부터 10만원으로 올려 주겠다고 했다.”
5,000원에서 10만원은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인상. 이런 인상안을 신문사가 조건부로나마 받아들인 것은 당연히 조남철의 강력한 투쟁 때문이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국수 타이틀을 반납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여하튼 조남철의 뜻대로 10회 대회부터는 우승상금이 10만원으로 인상됐다. 그러나 인생사 한치 앞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조남철의 국수 우승행진은 9회 대회로 종지부를 찍고, 후배 김인이 덜컥 10회 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상금 10만원을 가져간 것이다. 이후 김인은 15회까지 국수전 6연패를 하게 된다. 조남철이 애써 쒀 놓은 죽을 후배가 잘 차려 먹은 셈이었다.
(주) : “조남철이 애써 쒀 놓은 죽을 후배가 잘 차려 먹은 셈이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저 무적이는 “조남철이 고속도로를 닦았고, 그 고속도로를 김인이 신나게 드라이브했다!”고 표현한 바 있는데, 그렇게 표현한 데에는 ‘한국바둑의 개척자가 조남철이고 그 뒤를 김인이 이어나갔다’는 의미였습니다.)
12. ‘조-서’ 시대
‘타도 조훈현’ 외친 서봉수의 필살기
1970~80년대 한국 바둑계는 ‘조-서’의 시대였다. 조훈현과 서봉수가 용호상박의 대결을 펼치며 장장 15년 가까이 바둑계를 쥐락펴락했던 것이다.
물론 말이 좋아 조-서 시대지, 내막을 들여다보면 엄연히 조훈현의 시대였다. 다만 그 적수가 사실상 서봉수 한 명뿐이었고 실제로 조훈현이 절정을 누리는 순간마다 등장해 흠집을 낸 것도 서봉수였기에 ‘조-서 시대’로 통하는 것이다.
여하튼 1980년 7월, 서봉수는 풀세트 접전 끝에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명인 타이틀을 조훈현에게 내주고 만다. 이 명인위를 쟁취하면서 조훈현은 한국 바둑사에 전무후무한 전관왕(우승 싹쓸이)에 등극하게 된다. 이것은 이후 이창호도 이룩하지 못한 전설적인 위업이었다.
몇 달 뒤인 12월, 서봉수는 제15기 왕위전 도전자가 되어 다시금 조훈현과 바둑판을 마주하고 앉는다. 그리고 세상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흉내바둑. 그렇다. 서봉수가 ‘타도 조훈현’을 외치며 들고 나온 전법은 흉내바둑이었다.
흉내바둑은 말 그대로 상대가 둔 수를 그대로 따라 두는 것이다. 그러다 더 이상 따라 둘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는 순간 흉내바둑을 풀어 버리고 제 갈 길을 가는 수법이다. 상대방으로서는 얄밉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흉내바둑의 원조는 1950~60년대 일본의 후지사와 호사이라는 인물이다. 그가 흉내바둑을 창안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쨌든 프로대회에서, 그것도 오랜 기간에 걸쳐 시도한 최초의(어쩌면 유일한) 기사였다.
서봉수의 흉내바둑은 놀랍게도 먹혀들었다. 조훈현을 상대로 백번 필승(흉내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후수인 백을 들어야 함)을 기록하며 4승 3패로 왕위 쟁취에 성공한 것이다. 이것으로 조훈현 천하는 6개월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조훈현의 적수는 역시 서봉수’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물론 그날 이후 서봉수의 흉내바둑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유인즉슨 “조훈현을 상대로는 어떤 작전이든 한 번밖에 통하지 않는다!”였다. 흉내바둑에 허를 찔린 조훈현이 대처법을 연구해 두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 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백이 흑이 두는 대로 흉내바둑을 두면 어떻게 될까. 또 반대로 흑이 첫수를 바둑판 정 가운데인 ‘천원’에 둔 뒤 이후 백이 두는 대로 흉내바둑을 두면 무조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재미있는 상상이지만 미안하게도 상상만 하시길. 바둑이 그렇게 단순한 게임일 리 없다. 흉내바둑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13. 차민수의 무용담
“갱단의 주유소 습격…이단 옆차기로 해결”
이번의 반상야사의 주인공은 왕년의 인기 드라마 <올인>의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했던 프로기사 차민수씨이다. 그는 프로기사로 출발했지만 미국에서는 세계적인 포커 갬블러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바둑계의 이런저런 인연으로 그를 만나 보니 ‘남자는 이런 맛이 있어야지!’ 하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눈에서는 광채가 번뜩이고 입을 열면 자신감이 넘쳤다. 그와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방전됐던 내 자신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넘치는 에너지를 나눠 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차민수의 젊은 시절 무용담 한 토막.
군 복무를 마친 청년 차민수는 혈혈단신 미국으로 떠난다. 1976년이었고, 프로기사 초단의 신분이었다. 차민수의 미국 생활은 거칠고 외로웠다. 바둑은 빵 값을 버는 데 아무 쓸모가 없었다. 차민수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눈에 딱 봐도 수상한 차 한대가 들어왔다. 멕시칸으로 보이는 사람 세 명이 타고 있었다. 이놈들(이런 표현을 써서 조금 미안하지만)은 주유를 하는 중에도 차에 시동을 끄지 않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유가 끝나자 운전석에 앉은 녀석이 돈을 내는 척하다가 곧바로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차민수가 누구인가? 이미 놈들의 뻔한 수를 읽고 있던 차민수는 일행 중 한 놈의 목덜미를 잡아 차 밖으로 빼내서는 시멘트 바닥에 던져 버렸다. 나이프를 뽑으려는 녀석을 쓰러뜨리고는 “칼을 뽑는 순간 넌 죽는다!”고 으르렁거렸다.
놈들은 꼬리를 말고 슬금슬금 사라졌다. 여기까지가 1막.
일주일 후 놈들이 다시 주유소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야밤에 수십 명이 몰려왔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의 원조는 차민수였는지도 모른다.
차민수와 수십 명의 건달패가 주유소 앞 공터에 마주 섰다.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고 여긴 차민수는 두말하지 않고 옆의 느티나무 가지를 이단 옆차기로 강타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나무가 뿌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두목으로 보이는 놈이 물었다.
“아 유 브루스 리(Are you Bruce Lee)?”
‘브루스 리’는 무술 고수 이소룡의 영어 이름이다. 이날 이후 차민수와 건달패는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전해진다. 허접스러운 건달패로 보였던 이들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세계에서는 알아주는 카사블랑카 갱단이었다고.
이런 차민수가 쿵후 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인터뷰 사진을 찍기 위해 차민수와 함께 도장을 찾아 쿵후를 시연했었다. 당시 쉰을 넘긴 나이였음에도 그는 상당히 경쾌하고 힘찬 움직임을 보여 줬던 기억이 난다.
그나저나 쓸데없는 상상 하나. 만약 그날 주유소 느티나무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14. 한·중 친선대회
『이승만 대통령께서 “내 앞에서 한판 둬 보게”』
때는 바야흐로 1954년. 한국 바둑의 개척자이자 최강자였던 조남철은 사단법인 한국기원 출범을 기념해 원대한 계획을 세웠으니, 바로 최초의 국제바둑대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그 첫 출발은 한·중 친선바둑대회였다. 여기서의 중국은 대만을 가리킨다. 6·25전쟁을 치른 우리에게 중국은 불구대천지 원수일 뿐이었다.
첫 대회는 이듬해 2월에 대만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대회 날을 못 박아 놓고 선수 선발전을 치렀다. 총 12명이 선발전에 참가해 조남철·김봉선·민영현·장국원이 발탁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대표 바둑선수단 탄생이었다.
이제 문제는 돈!
돈이 없는 것은 아닌데, 환전이 걸림돌이었다. 당시엔 외화가 너무나 귀해 환전을 하기 위해서는 무려 대통령의 사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기원의 이사장은 장경근이란 인물로, 자유당 서열 3인자였다. 장경근의 ‘빽’으로 일단 이승만 대통령을 경무대(청와대)에서 ‘알현’하기로 했다.
조남철은 고민했다. 달러가 금보다 귀한 시절이었다. 외국에 나가 바둑을 두고 오기 위해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가 대통령한테 욕이나 잔뜩 얻어먹고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우려됐다. 접견실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조남철 일행 앞에 허연 머리의 이승만 대통령이 나타났다.
“자네들이 바둑을 잘 둔다며? 어디 내 앞에서 한판 둬 보게.”
조남철과 김봉선은 부랴부랴 바둑판 앞에 앉았다. 대통령의 요구는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무조건 한 시간 이내로 바둑을 끝내자고 미리 짜 놓았다. 바둑 한판을 관전하고 난 이대통령이 물었다.
“그런데 자네들은 어찌하여 왜놈 바둑을 두고 있는가?”
미리 흑백 8개씩의 돌을 놓고 대국을 시작하는 우리 고유의 순장바둑이 아닌, 빈 바둑판에서 시작하는 일본식 바둑을 두느냐는 책망이었다. 조남철 일행의 등짝에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간 뼈도 못 추릴 터.
조남철은 “원래 바둑이 창시되었을 때에는 반상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두었습니다. 훗날 변형이 되어 순장바둑으로 전해졌을 뿐입니다”라며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대통령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순장바둑으로 한판 더 둬 보게.”
이렇게 하여 조남철과 김봉선은 계획에도 없던 바둑을 두 판이나 두어야 했다.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흐뭇한 표정의 대통령이 말했다.
“이왕 가는 것이니 꼭 이기고 돌아오게나.”
안채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가는 대통령의 뒤를 장경근이 따랐다. 잠시 후 나온 장경근은 종이 한 장을 조남철 일행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종이에는 만년필로 휘갈겨 쓴 두글자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可晩(가만·이승만 대통령의 결제를 뜻함)’.
15. 우칭위엔(오청원)의 ‘신포석’
“제한시간 24시간·14차례 중단…명인 슈사이를 고민에 빠뜨렸다!”
바둑사에 명장면으로 꼽히는 옛 역사 한 토막.
때는 바야흐로 1932년, 세상도 시끄러웠지만 일본 바둑계도 발칵 뒤집히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그 중심에는 두 명의 젊은 천재기사가 있었다. 중국에서 날아와 일본에서 활동한, 훗날 ‘살아 있는 기성’으로 추앙받게 되는 우칭위엔(오청원)과 조남철의 스승인 기타니 미노루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두 사람은 소위 ‘쿵짝’이 잘 맞았다. 바둑판을 싸 들고 온천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더니 ‘신포석’이라는 걸 들고 나와 바둑계를 뒤집어 놓았다. 소목·외목·고목으로 대표되는 지금까지의 포석 이론을 뒤엎고 화점, 3·3, 천원 등 사실상 금기시돼 온 포석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들이 공저로 내놓은 <신포석법>이란 책은 당시 바둑팬들 사이에서 성경처럼 읽혔다.
사건은 명인 슈사이와 우칭위엔의 대국에서 일어났다. 슈사이는 구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당시 나이는 51세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슈사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포석에 대해 비판적인 대립각을 세웠다. 이때 신세대 대표 우칭위엔은 21세였다.
대국은 1932년 10월, 도쿄의 한 여관에서 열렸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기조차 한 대국 규칙이 적용됐다. 각자 사용할 수 있는 제한시간은 무려 24시간. 제한시간이 워낙 길어 바둑은 여러 날에 걸쳐 둬야 했다. 따라서 누군가 중간에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해야 하는데, 그 권리는 명인에게만 있었다. 우칭위엔으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 대국은 엄청난 화제가 됐다. 대국 자체도 화젯거리였지만 우칭위엔이 명인을 상대로 첫수 3·삼, 다음 화점, 그리고 바둑판 한가운데 점인 천원에 두는 신포석법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명인으로 상징되는 전통에 대한 반항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중일전쟁 중이라 민감한 상황.
명인의 제자들이 “명인에 대한 예가 아니다!”라며 흥분했고 심지어 우칭위엔의 집에 돌이 날아들기도 했다. 이 바둑은 무려 이듬해 1월이 되어서야 끝났다. 중간에 중단된 횟수만 14차례였다. 결과는 명인의 2집반 승. 이것으로 신구 1라운드는 구세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후 1937년 슈사이 명인은 자기 바둑 가문에서만 써 온 ‘혼인보(본인방)’ 명칭을 마이니치신문사에 양도했고, 신문사는 ‘혼인보전’을 개최함으로써 일본바둑은 현대기전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첫 혼인보전에서는 기타니 미노루가 우승했고, 이어 슈사이 대 기타니의 대국이 벌어졌다. 이 대국을 지켜보며 쓴 소설이 <명인>이다. 저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다.
16. 바둑계의 보헤미안
“루이나이웨이·장주주 부부 중국서 새 출발”
루이나이웨이(芮乃偉)·장주주(江鑄久) 부부가 중국으로 돌아간다. 1999년에 왔으니 만 12년 8개월이란 세월을 한국에서 보낸 것이다.
이들 부부가 우리나라 바둑계에 끼친 영향은 크다. 재미있는 일도 제법 많았다. 무엇보다 루이나이웨이 덕분에 한국 여자프로바둑이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다. 남자바둑은 이창호·조훈현·유창혁 등이 펄펄 날아다니며 세계 1위를 구가했지만, 루이 9단이 우리나라에 올 때만 해도 여자바둑은 중국·일본에게 한수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사연이 많다. 한국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은 그야말로 고행길이었다. 바둑판을 짊어진 보헤미안이 따로 없었다.
루이 9단은 중국 상하이가 고향이다. 열 살 때 바둑돌을 처음 쥐었는데, 곧바로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냈다. 평소에는 수줍은 미소를 짓지만, 바둑판 앞에만 앉으면 남자기사들을 펑펑 메다꽂는 괴력을 과시했다. 그녀의 이름 뒤에는 늘 ‘철녀’ ‘마녀’와 같은 무시무시한 별명이 따라다녔다.
비운의 사건은 1987년 중국 산샤에서 열린 중·일 대항전 기간 동안에 터졌다. 루이는 별생각 없이 일본 남자기사 방에서 연습대국을 뒀다. 워낙 바둑 두는 일을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한 일이었지만, 중국 지도부가 발칵 뒤집혔다. 규율 위반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1990년 고국을 떠나 일본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일본은 루이를 외면했다. 세계 최강의 여자프로기사라는 점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 것이다. 일본 기사들에 비해 기량이 월등한 그녀를 받아들였다가는 여자기전의 태반을 그녀가 독식할 것이 뻔했다. 루이는 공식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다.
남편 장주주는 중국 산시성 출신이다. 문화혁명 와중에 아버지가 반동분자로 몰려 집안이 오지로 쫓겨났지만, 장주주는 바둑에 재능을 발휘하며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1984년 중·일 슈퍼대항전(이때만 해도 한국은 끼워 주지도 않았다)에서 일본 기사들에게 5연승을 거두며 대륙을 열광시켰다.
2년 뒤 미국으로 건너간 장주주는 사기를 당하게 되고, 동병상련의 아픔이 있는 루이를 만나 결혼에 골인한다. 미국에서 아마추어들에게 레슨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이들은 프로기사이자 갬블러인 차민수 초단을 만나 마침내 미지의 땅인 한국행을 감행하게 된다.
이들의 구구절절한 인생사는 2003년 <우리 집은 어디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첫째 권은 루이나이웨이, 둘째권은 장주주의 이야기를 담았다.
두 사람은 중국으로 돌아가 바둑인생 3라운드를 시작한다. 루이는 국가대표팀에 들어가고, 장주주는 아내의 고향인 상하이에서 부부의 이름을 딴 ‘장·루이 바둑교실’을 운영할 계획이다.
17. 바둑 느는 비결
“명국 10개를 외우면 1급이 된다는데…”
‘명국 10개를 외우면 1급이 된다’는 설이 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의 희망은 자나 깨나 실력이 느는 것이리라. 바둑 실력을 늘리기 위해 화장실에 앉아 변비가 오도록 사활집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프로기사들의 명국을 손에 들고 바둑판 앞에 앉아 밤을 홀딱 새우는 일도 경험하게 된다. ‘생각하지 말고 빨리 둬라’ ‘복기를 해라’ 등 고수들의 조언을 수첩에 적어 놓고 실천도 해 보지만 작심삼일. 바둑 실력은 늘 제자리걸음이다.
필자 역시 ‘바둑 느는 비결’에 대해 숱하게 들어 봤다. 개중에는 하품이 나올 만큼 평범한 것도 있었지만, 때로는 눈이 반짝 뜨일 정도로 마음이 동하는 것도 없지 않았다. 이번호에는 바둑 실력이 쑥쑥 는다는 바둑계의 두 가지 속설을 소개한다.
첫째는 ‘명국 10개를 외우면 1급이 된다!’는 설이다. 실제로 이 방법으로 단기간에 1급이 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방법은 한동안 유행해, 많은 사람들이 명국 10개 외우기에 도전했다. 필자 역시 시험해 봤는데 ‘과연’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무릎을 친 것은 이 방법이 유용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직접 시도해 본 바 ‘명국 10개를 외우면 1급이 된다!’가 아니라 ‘1급이 아니면 명국 10개를 외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첫 수부터 자잘한 끝내기까지 암기를 하는 일(순서만이 아니라 수의 의미까지 이해해야 한다)은 상당한 기력을 지니지 않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작업인 것이다. “그래도 한번 해 보겠다”라는 사람이 있다면 도전해 보시길. 공부 방법에도 궁합이 있을 테니….
둘째는 ‘기리 족보’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왕년에 전국아마추어바둑대회에 출전해 입상을 했던, 그러니까 실력이 검증된 한 아마추어 강자가 창안해 낸 방법이다. ‘기리 족보’란 화투의 ‘섯다 족보’와 비슷한 개념. 즉 바둑을 둘 때 상대방보다 끗발이 높은 수를 내놓으라는 얘기다.
창안자는 고수들의 기보를 면밀히 연구하여(주로 우칭위엔 9단의 기보였다고 한다) ‘붙이면 젖혀라’ ‘맞끊으면 뻗어라’ ‘두점머리는 두들겨라’ ‘모자는 날 일자로 벗어라’ 등 12개의 족보를 만들었다. 이래 놓고 상대방이 어떤 수를 둬 오면 그 수의 족보 순위를 파악한 뒤 그보다 높은 족보의 수를 내면 된다는 것이다. 창안자는 당시 바둑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의 제자 중에는 프로가 된 인물도 있었다고.
그러나 모든 세상일에 왕도가 어디 있겠는가. 바둑이 늘기 위해서는 바둑을 열심히, 많이 둬 보는 수밖에 없다. 골프책 1,000권을 독파한들 스윙 한번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실력 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바둑을 더 많이 사랑하세요. 사랑의 힘이 고수를 만듭니다.”
18. 대국료의 유래
“상금은 알겠는데 ‘대국료’는 대체 무엇이냐?”
‘원칙적으로’ 프로기사의 수입은 대회(기전)에 나가 받는 상금과 대국료다. 여기서 굳이 ‘원칙적’을 강조한 이유는 사실 상금과 대국료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 프로기사는 손으로 꼽아야 하고, 대부분은 그 외의 수입으로 먹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수입이라 함은 기원이나 바둑교실 운영, 지도사범 출강, 개인 레슨, 저서 집필, 방송 출연, 인터넷 해설 등이 될 것이다.
상금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대국료’는 무엇이냐고 궁금해 하는 분들이 계실 듯하다. 이름으로 보아 대국을 하면 돈을 준다는 것인데…. 그 말이 정답이다.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이기 때문에 공식기전에 나가 바둑을 두면 기본적으로 돈을 지급하도록 돼 있다. 일종의 출연료 개념으로 보면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기사에게 대국료라는 것을 지급했을까?
때는 까마득한 194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에 제2기 프로바둑선수권대회가 열렸다. 1기 대회를 무사히 치르고 2기 대회를 준비하던 조남철은 조금 색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대회를 치르고 나면 자동적으로 기보가 남게 되는데, 이것을 그대로 사장시켜야 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던 것이다.
조남철은 일본처럼 우리나라 신문에도 바둑 해설란을 만들고 싶었다. 연일 신문사 문턱을 넘었지만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기껏 선심을 쓴다는 소리가 “광고비는 안 받고 실어 주겠소!”라는 수준이었으니….
그러던 어느 날 쥐구멍에 볕이 들었다. 연합신문이 창간하면서 바둑란을 신설하기로 한 것이다. 신문사는 기보와 조남철의 해설을 싣는 대가로 소정의 게재료를 지불하기로 했다.
대회가 열렸고 조남철은 성심을 다해 원고를 썼다. 얼마 되지 않는 원고료는 쪼개서 대회에 참가한 노국수(원로기사)들에게 1,000원씩 나눠 줬다.
“내가 돈 받고 바둑을 두는 사람인 줄 알아!”라던 노국수들도 은근 즐거워하는 눈치였다고 조남철은 훗날 회고했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채셨는지. 그렇다. 바로 이때 조남철이 노국수들에게 용돈 드리듯 지급한 1,000원이 오늘날 대국료의 효시인 것이다.
무탈하게 관행처럼 이어져 온 대국료는 요즘에 이르러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듯한 느낌이다. 2000년대 들어 바둑이 ‘스포츠’로 급변신을 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이겨도 주고 져도 주는 대국료는 스포츠에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목소리가 컸다.
그리하여 요즘에는 기전들이 천편일률적인 대국료 대신 상금을 확대하는 추세다. 이길수록 많은 돈을 가져가지만, 지면 그대로 짐을 싸야 한다. 갈수록 냉혹해지는 프로의 세상이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분명 사람들이 다녀는 가시는데
흔적을 남기시지 않으니 누구신지를 몰라 인사를 드릴 수가 없구나!
“10년간의 교단 내려와 섬마을에서 묘수풀이 지도”
불세출의 바둑천재 이세돌은 막내아들의 기재를 처음 알아본 아버지 이수오씨의 작품이다. 한국 바둑 부동의 1인자 이세돌 9단의 공식 스승은 권갑용 8단이지만, 사실 이세돌이란 불세출의 바둑천재를 빚어낸 인물은 그의 아버지 이수오씨(1998년 작고)다.
이씨는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광주교대를 졸업하고 10년가량 교편을 잡았던 그는 막내 이세돌이 태어나자 전남 신안 비금도로 이사했다. 그리고 농사를 지어 생계를 해결했다. 이세돌의 회고에 따르면 이씨는 농사보다는 학자나 선비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농사일을 하느라 새까맣게 타고 주름이 늘어, 이세돌을 데리고 다니면 할아버지와 손자로 보일 정도였지만 이씨의 막내 사랑은 끔찍했다.
일찌감치 막내아들의 기재를 알아본 아버지(아마추어 5단 수준의 기력이었다고 함)는 넉넉지 않은 섬 살림이었지만 힘을 다해 바둑을 가르쳤다. 주로 실전대국과 사활문제 풀이가 이씨의 지도방식이었다.
이씨는 농사일을 나가면서 바둑판 네 귀퉁이에 묘수풀이 문제를 냈다. 일을 하다가 ‘이놈이 다 풀었겠다!’ 싶으면 돌아와 검사하는 식이었다. 이세돌은 “못 다 푼 것은 괜찮았지만 틀리면 혼이 났다.”고 회고한다. 빨리 푸는 것보다 정확하게 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이세돌은 초등학교 1학년 때에 전국어린이대회 을조에 나가 우승을 했다. 2학년이 되자 갑조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섬마을 천재소년의 명성이 우렁우렁했다.
대회 출전을 위해 도회지로 나갈 때면 이씨는 아들이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 주었다. 모든 비용이 다 아버지의 빚이었다는 사실은 이세돌이 크고 나서야 알게 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회에 나간 이세돌은 첫판에서 져 탈락하고 말았다. 우승후보가 예선에서 떨어져 버린 것이다. 후딱후딱 두다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결과였다.
아버지 눈치를 보고 있는 막내아들에게 이씨는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초코파이를 주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이세돌에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을 때 맞더라도 먹고 맞아야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곧 매를 맞을 생각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이세돌은 초코파이를 다 먹어 치웠다. 아들이 먹고 나자 아버지는 매를 들었다. 이세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한테 눈물 나게 맞았다”고 기억한다. 져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지 않은 데 대한 벌이었다.
이세돌은 지금도 아버지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우리 막둥이 타이틀 하나 따는 거 보고 가야지!” 했던 아버지였지만, 결국 아버지는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큰 대국을 앞두면 이세돌은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적어도 이세돌다운 바둑을 두자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저세상의 아버지도 틀림없이 기뻐할 테니까.
25번 글에 의하면 이세돌의 아버지는 이세돌이 타이틀을 따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98년에 작고하셨다고 한다.
그럼 이세돌은 몇 년도에 첫 타이틀을 획득했을까?
기사 정보에 의하면 이세돌은
2000년에 제5기 박카스배 우승으로 첫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이어서 제8기 배달왕전 우승,
32연승의 대기록 작성(역대 3위) 등의 활약으로
그 해의 바둑문화상 최우수기사상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20. 우주류의 창시자 다케미야
“바둑판의 중앙 ‘우주’에 대형주택 짓는 솜씨란…!”
‘다케미야 마사키’라는 일본 프로기사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삭발을 하고 나타나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다 늦은 나이에 승부욕을 다지기 위해서는 아닐 테고, 아마도 젊어서부터 듬성듬성했던 머리숱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서였을 것이다. 1951년생이니 올해로 어느덧 61세. 환갑을 지나 노기사 반열에 올랐지만, 다케미야에게도 눈부신 전성기가 있었다.
오다케 히데오, 고바야시 고이치 등 일본 바둑계를 풍미했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다케미야 역시 기타니 미노루 9단의 내제자였다. 내제자라 함은 스승의 집에서 먹고 자며 도제방식으로 수련을 하는 제자를 말한다. 일종의 기숙학원생인 셈이다.
다케미야도 동문들과 마찬가지로 기타니 도장을 빛낸 인물이다. 전성기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니 상당히 폭이 넓다. 1976년 일본 최고(最古)의 기전 ‘본인방’ 타이틀을 획득하며 이름을 날렸고, 1980년대 말에는 세계 최초의 국제기전인 후지쯔배에서 1·2회 대회를 모두 우승했다.
하지만 다케미야가 다른 스타 기사들보다 더욱 큰 인기를 끈 이유는 이런 성적 때문이 아니다. 그가 창안해서 세계로 퍼뜨린 ‘우주류’라는 기풍 덕이다. 도대체 어떤 기풍이기에 우주류라는 광활하면서도 심오한 이름이 붙었을까.
다케미야는 중앙을 중시했다(그것도 과도할 정도로). 이에 세상에서 ‘가장 감탄을 잘하는’ 일본인들이 바둑판의 중앙을 우주로 비유하고, 중앙을 중시하는 다케미야의 기풍을 우주류라 명명한 것이다.
남들이 열심히 귀의 실리를 탐하고 있을 때, 묵묵히 세력을 쌓아 놓은 뒤 막판에 이르러 중앙에 손바닥이 척 들어가고도 남을 대형 주택단지를 건설하는 다케미야의 솜씨는 과연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멋이 있었다.
그렇다고 중앙에 집을 내주기 싫어 뛰어들기라도 하면, 그동안 묵묵히 쌓아 놓은 두터운 세력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다케미야의 중앙은 우주라기보다는 거미줄에 가까웠다. 실제로 기사 중에는 중앙의 큰 집이 배 아파 뛰어들었다가 대마가 몰살한 경우도 왕왕 있었다.
다케미야의 우주류는 프로보다는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기원에 가 보면 너도 나도 화점포석에 중앙으로 진출하는 우주류를 흉내 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다케미야의 우주류는 라이벌 기사들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실 우주류라는 기풍 자체가 꽤 낭만주의적인 구석이 있어, 치열한 승부세계에서 장기 집권할 만한 ‘류’는 아니었던 것이다. 한물간 스타일이 돼 버렸지만 우주류를 떠올리면 마치 7080세대의 노래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든다.
21. K 9단과 주전자
“바지도 제대로 꿰지 못한 채 문 앞에 쓰러져…”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7년의 일이다.
당시는 이창호 천하였고, 스승 조훈현과 눈만 떴다 하면 도전기를 벌이던 시기였다. 이야기의 배경은 전남 광양제철소. 제철소의 기우회가 제31기 왕위전 도전기를 유치해 대국자인 이창호·조훈현 사제와 몇 명의 프로기사, 한국기원 관계자 등이 제철소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지방의 애기가들은 평소 흠모하던 프로기사를 직접 만나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만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이창호·조훈현은 최고의 프로기사들이고 도전기의 주인공인 만큼 스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원로기사인 K 9단의 인기 역시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올드팬 사이에서는 K 9단의 인기가 두 주인공을 압도할 정도였다. 게다가 K 9단은 소문난 호주가. 이런 그를 지방의 애기가들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기우회원들은 대국이 끝난 저녁, K 9단과 서울 일행에게 상다리가 휘어지는 남도 정통 한정식과 함께 술을 대접했다. K 9단의 고향 역시 남도지방인지라, 그와 애기가들은 향우회라도 벌이는 기분으로 배가 터지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먹고 마셨다. 밤이 이슥해 잔치는 파하고, 서울에서 내려간 일행은 벌겋게 취한 채 숙소인 광양제철소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로비에 매실주부터 고급 양주에 이르기까지 각종 술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프로기사들 중 주당이 많다는 소문을 들은 기우회측의 배려(?)였다.
다음날. 상경을 위해 집합하기로 한 오전 9시가 되었건만 K 9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국기원 직원이 K 9단의 방으로 인터폰을 하니 그제야 일어난 듯 잠긴 목소리로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곧 나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20분이 지나도 K 9단은 감감무소식. 로비에 있던 한국기원 직원 한명이 결국 마스터키를 받아 K 9단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것이 웬 변고인가. 바지도 제대로 꿰지 못한 K 9단이 문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사건의 재구성은 이렇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잠이 든 K 9단은 아침 9시에 직원의 전화를 받고 깨어났다. 바지를 입다가 목이 말랐던 그는 테이블 위의 주전자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셨고, 잠시 후 쓰러져 버린 것이었다. K 9단이 애주가라는 소문을 들은 기우회에서 친절하게도 주전자에 지방 특산 소주를 담아 놓았던 것.
이리하여 결국 K 9단은 한국기원 직원의 등에 업혀 공항으로 가야 했다는, 참으로 황당하면서도 웃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 탄생하게 되었다.
(옮긴이 주 : 이야기의 주인공인 K 9단은 김인 선생님이신 것 같다)
22. 조남철과 기인
“일본에 바둑 배우러 와서 스승 집 잡일이나 하느냐”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인 고(故) 조남철 9단이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야기.
그가 당시 10대였으니 1930년대 후반쯤 될 것이다.
조남철은 스승 기타니 미노루 9단의 집에서 숙식하며 공부하는, 이른바 ‘내제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제자’라 하면 뭔가 대단한 것 같지만 엄밀히 말해 ‘제자’와 ‘일꾼’을 합쳐 놓은 것으로 보면 된다. 무술영화에서 제자가 스승에게 무술을 배우기 위해 부지런히 물을 긷고 나무도 해 와야 하는 것처럼.
하루는 웬 노인 한명이 스승의 집을 불쑥 찾아왔다. 몰골이 초췌한데다 온몸에서 술냄새마저 풍겼다. 요즘으로 치면 노숙자 신세를 간신히 면한 수준이었다.
기타니 사부는 그 노인을 귀빈으로 모셨다. 이름이 도리 나베지로라는 노인은 기타니의 어릴 적 바둑스승이라고 했다. 정식 프로기사도 아니었지만 기타니 사부는 잠자리며 술이며 음식이며 그야말로 극진하게 노인을 대접했다. 나중에 들으니 도리 노인은 매년 한차례씩 옛 제자 집을 방문해 보름이고 한 달이고 쉬었다 간다고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기타니 사부의 부인 미하루 여사와 도리 노인이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조남철이 지나가자 미하루 여사가 미소를 띠며 조남철을 칭찬했다.
“조선에서 온 조군인데, 참 착하고 일도 잘 한답니다. 제가 집안일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나! 하물며 하늘같은 스승의 사모님이 외부인 앞에서 하는 칭찬은 조남철의 마음을 한껏 달뜨게 만들었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미하루 여사가 자리를 뜨자 도리 노인이 조남철을 손짓해 불렀다. 그런데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도리 노인은 대뜸 조남철에게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이놈아, 내 말을 귀담아듣도록 해라. 네가 조선에서 일본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뭐냐. 기껏 스승 집에서 잡일이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닐 터. 바둑을 열심히 배워 성공하고자 함이 아니냐. 지금 당장 사모님에게 칭찬을 듣는 것이 귀에는 달지 모르나 네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다. 정신 차리거라!”
귀찮은 알코올 중독자쯤으로 여기며 ‘언제나 돌아가려나?’ 싶었던 노인에게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은 조남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볐다. 방으로 돌아온 조남철은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부끄러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조남철은 ‘무조건 바둑에 미치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절치부심 노력한 끝에 6개월 만에 프로 입단에 성공했으니 도리 노인은 조남철에게 큰 은인이었던 것이다. 역시 사람은 외모로 판단할 게 아니다.
23. 김성룡 해설가
『“이 바둑은 끝났어요!”에 제대로 당했다.』
바둑을 두는 사람 고유의 스타일을 두고 ‘기풍’이라고 한다. 요즘 축구처럼 ‘닥공(닥치고 공격)’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수비 위주의 기풍을 지닌 기사도 있고, 두터움을 선호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발바닥에 땀나도록 집만 찾아 뛰어다니는 사람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프로기사들이 해설을 하는 데도 ‘풍’이 있다는 것. 바둑판에서의 풍과 카메라 앞에서의 기풍이 제법 일치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예를 들어 조훈현 9단의 해설은 한마디로 말해 ‘날아다니는’ 해설이다(바둑이랑 똑같다고 보면 된다). 텔레비전에서는 어느 정도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바둑판을 앞에 놓고 관전 기자에게 해설을 할 때는 그야말로 F1 스포츠카가 달리듯이 한다.
때문에 한때 기력이 약한 기자들은 조훈현 9단의 해설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거는 이렇게 되고” “저거는 이렇게 되는데” “이건 알지?” 하고 휘리릭 바둑판 위에 돌을 늘어놓았다가 싹 치워 버리니 미처 수를 이해하지 못한 기자의 등에는 땀이 줄줄 흐를 수밖에. “어어어…” 하는 사이에 “됐지? 그럼 나는 간다!” 하고 벌떡 일어서 버리는 조훈현 9단의 등을 바라보는 일은 공포에 가까웠다.
필자는 김성룡 9단의 해설을 잊을 수 없다. 바둑TV 최고의 인기 해설가로 10년 가까이 군림하고 있는 김성룡 9단의 해설은 매우 재미있다. 개인적으로는 바둑 해설에 ‘개그’를 도입한 최초의 프로기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김 9단 해설의 진미는 ‘단호함’에 있다. 예를 들어 다른 해설자들이 “아, 이런 수가 있었나요. 이건 흑에게 손해 같은데요?” 정도로 표현한다면, 김 9단은 “으아, 이건 흑이 망했어요. 바둑 끝났어요!”에 이른다. ‘단호함’이라기보다는 ‘과장’에 가깝다.
필자는 김성룡 9단의 이 ‘바둑 끝났어요!’에 당한 눈물겨운 피해자 중 한명이다. 한때 한국바둑리그 취재를 담당했던 필자는 매주 사나흘씩은 밤마다 한국바둑리그 관련 기사를 써야 했다. 대부분 한국바둑리그의 텔레비전 해설이나 인터넷 생중계 해설을 보며 바둑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사를 작성해 송고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바둑리그의 주 해설자는 김성룡 9단이었고, 필자는 싫든 좋든 김 9단의 해설에 의존해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매일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필자로서는 바둑이 일찍 끝나기만을 기대하는 나날이었다. 야구에 비유해 연장에 연장을 가는 반집 싸움이라도 벌어지는 날은 최악이었다.
그런데 김 9단의 해설은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바둑 중반도 되기 전에 “이 바둑은 끝났어요. 무조건 흑이 이깁니다!” 식으로 잘라 말해 주니 얼마나 좋은가. 필자는 일찌감치 흑이 이기는 구도로 기사 얼개를 잡아 놓은 뒤 마음속으로 ‘김성룡 9단 만세!’를 외치며 사람들과 시원하게 생맥주를 마시러 나갔던 것이다. 한 시간쯤 목을 축인 뒤 돌아와 보니, 이것이 웬일인가? 바둑은 어느새 역전이 되어 백이 이긴 것이 아닌가. 김성룡 9단의 해설만 찰떡같이 믿고 있다가 역전이 되고 보니 하늘이 방금 전에 마신 맥주 색깔처럼 노래져 왔다. 시계를 보니 마감시간까지 불과 10여분. 필자는 팔이 여덟 개 달린 문어처럼 키보드를 두드리며(기사를 완전히 새로 써야 했다) 김 9단을 원망해야 했다.
이런 일은 이후로도 몇 번이나 반복이 되었고 결국 필자는 김 9단의 해설을 ‘믿지는 않지만 매우 즐기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뭐니 뭐니 해도 재미있는 해설만큼은 김 9단이 최고니까.
24. 덤
“우리나라가 시작한 ‘6집 반’ 제도 대세”
바둑에는 ‘덤’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덤’ 말이다. ‘덤’에는 ‘공짜’라는 이미지가 배어 있다. 제값어치 외에 조금 더 얹어 주는 게 ‘덤’이니까. 하지만 바둑에서의 ‘덤’은 공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바둑에 있어 덤의 역사는 손익계산의 처절한 스토리가 배어 있다.
‘바둑삼국’인 한·중·일이 각각 조금씩 다른 덤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일단 대세는 ‘6집 반’으로 보인다. 삼국 중 바둑 후발주자인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시행한 6집 반의 덤 제도가 가장 합리적인 방안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대국을 할 때는 백이 흑으로부터 덤 6집 반을 받게 된다. 이 이야기는 흑이 백보다 7집을 더 남겨야 반집(7-6.5)차로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6집을 이겨도 흑은 백에게 6집 반을 덤으로 주어야 하기 때문에 반집을 패하게 된다.
바둑사에 덤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원래 바둑에는 덤이란 것이 없었다. 반집은 말할 것도 없다(반집은 가상의 집이다). 그저 상수 또는 연장자가 백을 들고 바둑을 두었고, 집수가 같으면 무승부로 결론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로 넘어와 프로제도와 기전이 생기고, 상금이 걸리면서 승패를 분명히 갈라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무승부가 되면 재대국을 치러야 했는데 일일이 이런 일을 하다간 대회 일정이 엿가락처럼 늘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40년 일본 본인방전에서 최초로 4집의 덤 제도를 도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반집’의 개념은 없었다. 그러다 1974년 본인방전에서 5집 반이 채택됐다.
반집의 개념을 도입한 사연도 재미있다. 4집의 덤 제도 시절에는 무승부일 경우 재대국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프로기사들은 재대국을 하면 또 한 번 대국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두 번이나 무승부가 나온 대국이 발생했다. 이를 수상히 여겨 일본기원이 조사에 나선 결과 두 기사가 사전에 담합을 한 것이 드러났다. 재대국료를 노린 짜고 두기 바둑이었던 것이다. 엄중한 경고를 내린 뒤 세 번째 재대국이 벌어졌는데, 이번에도 무승부가 나오고 말았다. 대국자들이 최선을 다해 대국에 임했음에도 공교롭게 무승부가 나온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일본 바둑계에서 꽤 유명한 사건이다.
이후 1998년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덤 6집반 제도를 도입한 이래 많은 국내외 기전들이 너도나도 6집반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덤은 세월이 가면서 줄지 않고 늘어나고 있을까. 그것은 바둑의 기술이 날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흑이 먼저 두어 얻는 어드밴티지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프로기사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의 덤이 공정한지?’가 늘 끊이지 않는 화젯거리다. 마치 ‘마징가Z와 태권V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와도 같다. 아직까지 정답이 나왔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25. ‘괴물’ 후지사와 슈코
“나는 1년에 네판만 이긴다!”
일본바둑계의 거인 후지사와 슈코 9단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 2009년 5월8일. 향년 83세였다.
후지사와 슈코는 바둑사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는 한·중·일 바둑계를 통틀어 가장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인물이었다. 영어로 표현하면 ‘언터처블(Untouchable)’이 바로 후지사와 슈코였다. 오죽하면 생전 그의 별명이 ‘괴물 슈코’였을까!
그의 삶은 바둑·술·도박으로 채워졌다. 젊어서부터 두주불사였던 후지사와는 술에 취한 상태로 텔레비전 생방송에 출연해 사고를 친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 조훈현 9단의 실전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내가 다른 것은 다 훈현이에게 가르쳤는데, 술만은 못 가르쳤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경륜과 경마로 재산을 탕진해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명인전·천원전·기성전 등 일본 최고의 기전에서 다수 우승했다. 그것도 1회 대회만 골라 우승해 ‘1기의 사나이’로 불렸다. 이 중에서도 우승상금이 가장 많은 기성전은 6년이나 연속 우승했다. 당시 후지사와가 남긴 “나는 1년에 네 판만 이긴다!”는 말은 그의 어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다른 바둑은 다 져도 기성전 도전기(7판 4승제)에서 네 판만 이겨 우승하면 ‘1년 농사’ 다 짓는다는 뜻이었다. 그가 악착같이 1기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빚쟁이에게 쪼들려 상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일본 유학시절.
어린 조훈현은 후지사와에게 바둑을 배웠다. 세고에 겐사쿠 9단이 정식 스승이었지만, 원로기사인 세고에 9단은 조훈현을 앉혀 놓고 조곤조곤 바둑을 가르치는 타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대 최강자 중 한명이었던 후지사와는 조훈현을 위해 수많은 연습바둑을 둬 주었다. 번뜩이는 감각과 번개 같은 수읽기 능력을 지닌 조훈현의 기재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속기예찬론자였던 후지사와는 싸구려 접는 바둑판을 가져다 놓고 조훈현과 속기로 내기 바둑을 두었다. 조훈현이 지면 어김없이 후지사와의 어깨를 주물러야 했다.
후지사와가 조훈현에게 좋은 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훈현이 주변의 권유에 휘말려 다른 프로기사와 100엔짜리 내기 바둑을 뒀다가 스승 세고에 9단의 노여움을 사 파문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스승 집에서 쫓겨난 조훈현은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지내다가 간신히 용서를 빌고 스승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내기 바둑을 열렬히 꼬드긴 사람이 바로 후지사와였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짱짱한 기력을 과시했던 후지사와는 67세의 나이에 왕좌전에서 우승했다. 한·중·일을 통틀어 최고령 우승기록으로 아직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은퇴 후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아마추어 단증을 발행하다가 일본기원으로부터 제명을 당하기도 했다. 하여튼 하고 싶은 일은 다하고 살았던 기인이었다.
그의 3년 기일을 맞으니 새록새록 거인에 대한 추억이 돋는다. 100년이 지나도 후지사와 같은 기사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바둑사에서 ‘괴물’은 후지사와 슈코 한사람을 위한 이름일 테니까.
26. 고(故) 전영선 7단
『한평생 술과 바둑을 사랑한 ‘쌍권총’』
1990년대 중반쯤의 일이다. 프로기사들과 한국기원 사무국 직원들이 “우리가 남이가!” 하며 의기투합해 야유회를 떠났다. 화창한 날씨에 300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잔디밭에서 운동을 하고, 술판을 벌이며 한나절 신나게 놀았다. 축구경기를 하다가 유창혁 9단이 직원의 발에 걷어채어 크게 나가떨어진 사고도 있었는데, 넘어진 유 9단보다 하얗게 질린 어떤 직원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한데 야유회에 한자리 낀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다 우연히 한구석에 앉아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는 중년남자를 보게 됐다. 안주도 없이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기계적으로 입에 털어 넣는 그에게서 묘한 매력과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한참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는데,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돌아보고는 손짓을 했다.
우물쭈물 다가가니 그가 새 종이컵을 내밀고는 소주를 따라 주었다(그것도 거의 가득!). 인상을 찌푸리며 간신히 목으로 넘겼더니 그제야 그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술 좀 하는구먼!
그의 이름은 전영선.
이창호 9단의 어릴 적 스승으로 유명한 프로기사였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창호의 스승으로서보다는 한평생 술과 바둑을 사랑했던, 호탕하고 인간적인 성품의 기인으로 기억한다.
이창호의 스승은 조훈현으로 알려져 있고, 그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훈현 9단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전영선 7단의 제자였다. 즉 이창호 바둑의 기초는 전영선이 닦아 놓은 것이었다.
제자를 두지 않겠다는 조훈현을 오래도록 설득해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이게 만든 것도 전영선이었다.
전주 출신인 전영선은 동향의 어린 제자 이창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사람들은 전영선이 전주에 살면서 이창호를 가르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창호를 가르치던 시기에 전영선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영선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꼬박꼬박 전주로 내려가 이창호를 지도했다.
이창호의 기풍이 스승들과 사뭇 다르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조훈현의 발 빠른 포석은 물론 몸싸움, 잔 수에 능한 전영선과 거의 대극점에 서 있는 스타일이다. 참고, 기다리고, 끝내기에서 뒤집는 이창호의 바둑은 도무지 스승들로부터 배운 것이라 여기기 어려울 정도다.
“내가 평생 마신 소주병은 수영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 호언했던 전영선은 실제로 하루 평균 2.5병의 소주를 마신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2년 진로배 세계대회가 생기자 “무조건 본선 시드는 날 줘야 한다!”라는 말도 했다. 물론 농담이다.
젊은 시절, 뒷주머니에 늘 소주 두병을 꽂고 다닌다고 해서 ‘쌍권총’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전영선은 결국 술로 인해 2002년 2월,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투병으로 뼈만 남은 앙상한 몸, 복수가 찬 상태로도 마지막까지 인터넷에서 아마추어 팬들을 상대로 지도대국을 두었다는 전영선. 10년이 훌쩍 흘렀지만, 아직도 바둑계 인사들의 술자리에서는 그에 대한 추억과 회고가 끊이지 않는다.
저승에도 기원이 있다면, 먼 훗날 그와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마시며 바둑 한수 배우고 싶다.
27. 당대 1인자 가운데 누가 가장 셀까?
“바둑기술 발전으로 나중에 나온 사람이 유리”
세계 바둑사상 누가 가장 강한가?
이 물음은 ‘마징가Z가 세냐, 태권V가 세냐?’와 같은 지극히 유아스러운 발상이지만, 사실 이 의문은 바둑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수그러든 적이 없다.
몇 년 전 엄청나게 팔려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어린이바둑교실까지 융성하게 만들어 준 일본 애니메이션 <고스트 바둑왕>도 ‘헤이안 시대의 1인자와 현대의 명인이 바둑을 두면 누가 이길까?’라는 테마를 깔고 있었다.
사실 한시대의 반상을 평정한 인물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이세돌의 계보(일명 국수의 계보)가 있고,
일본은 우칭위엔-사카다-린하이펑-조치훈-고바야시 고이치 등등이 있다.
중국은 녜웨이핑-마샤오춘-구리 등을 꼽을 수 있을 듯.
1988년 최초의 세계바둑대회인 후지쯔배와 응씨배가 생기면서 ‘누가 제일 세냐?’에 대한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세계대회에서 1등한 사람이 최고’라는 데 누가 불만이 있으랴. 하지만 ‘응씨배 우승자와 후지쯔배 우승자 중 누가 더 세냐?’라고 묻는다면 또 어려워진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최초의 1인자’에 등극한 우칭위엔은 천재성과 어마어마한 노력이 합체해 만들어진 진정한 거인이었다. 1930년대 초강자들을 ‘치수고치기 10번기’로 모조리 격파한 신화를 남겼다. 무술영화에나 나올 법한 ‘도장깨기’를 연상하게 만드는 위대한 장면이다.
우칭위엔 시대를 이어받은 사카다 에이오는 깊은 수읽기를 바탕으로 한 전투와 타개로 한 시대를 휘어잡았다. 상대의 집을 하도 잘 도려내 얻은 별명이 ‘면도날’.
훗날 면도날이 먹혀들지 않을 정도로 살집이 두툼한 바둑을 두었던 린하이펑에게 1인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이러한 일본 바둑사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난 인물은 조치훈이었다. 1983년 일본의 3대 타이틀인 기성·명인·본인방전을 모조리 우승해 ‘대삼관’을 달성했다. 자학에 가까운 수읽기에서 우러난 ‘조치훈류’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 바둑 붐의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시 조훈현과 이창호 사제가 최고다. 조훈현은 천재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한 빠른 포석과 전투능력으로 당대의 기사들을 줄줄이 때려눕혔다.
그런데 이로 인해 웃지 못 할 비화가 등장하게 되니 바로 천재 조훈현이 계산과 끝내기에 약하다는 것. 이유인즉 워낙 다른 기사들과 실력 차이가 나다 보니 중간에 끝나는 불계승이 많았고, 계가를 하더라도 정밀한 계산에 의존하지 않고 감각만으로 충분히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기에 계산과 끝내기를 단련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조훈현이 ‘계산과 끝내기’의 달인(오죽하면 별명이 ‘神算’이겠는가!)인 제자 이창호에게 허무하게 발목을 잡힌 것도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당대의 1인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바둑을 두면 누가 가장 셀까. 그동안 다수의 프로기사, 한국기원 관계자, 아마추어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결과 “나중에 나온 사람이 이길 것”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유는 바둑의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조차 “이런 곡은 사람이 연주할 수 없다!”라고 단언한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지금은 프로 연주자라면 누구나 별 어려움 없이 연주하고 있다는 점과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현재의 무명 초단이 옛 명인의 대마를 때려잡고 이긴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바둑의 ‘기술’만을 놓고 내린 것이다. 천재성과 노력, 기풍 등의 요인을 기준으로 한다면 역시 ‘둬 봐야 안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칭위엔·조훈현·조치훈·이창호·이세돌이 지닌 바둑적 감각과 천재성을 누가 저울질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마징가Z와 태권V처럼, ‘누가 가장 바둑이 셀까?’는 역시 호사가들의 영원한 입방아거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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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연재할 글은 바둑평론가 양형모님께서 2011년 4월 25일부터 2012년 6월 18일까지 1년이 넘는 동안 <농민신문>에 ‘반상야사’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을 발췌하여 띄어쓰기와 맞춤법 및 문장부호 등을 아주 조금 편집한 내용입니다.
어차피 우리야 ‘바둑 수’로서는 프로기사들을 따라갈 수 없으므로 바둑 수 외의 것들로 그들과 같이 호흡을 해 보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1. 조남철과 도사
“사흘 굶어 담 안 넘는 사람 없다”
국수전 9연패 등 1950~60년대 무적시대를 구가하며 한국 바둑의 초석을 다진 조남철 9단. 그는 ‘걸어다니는 바둑 법전’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조치훈 9단의 그의 조카다.
한국 바둑의 개척자이자 프로기사 1호인 조남철 9단(2006년 작고)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한국기원의 효시라 할 한성기원을 세운 조남철은 머리도 식힐 겸 종종 전남 구례 화엄사를 찾고는 했다. 불교신자는 아니었지만 조남철은 절집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스님들과의 친분도 두터웠다. 조남철의 절집 휴양은 말년까지 이어져 ‘좀 쉬고 싶다’ 싶으면 훌쩍 서울을 떠나 절에 머물곤 했다.
어쨌든 한성기원을 잠시 내려놓고 화엄사에 내려가 있던 조남철에게 한 도사가 나타났다. 이름은 이원영이라 했다. 이원영은 조남철을 지긋이 살펴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자네, 공부 좀 했구먼.”
“무슨 공부요?”
“기 공부 말일세. 자네한테서 제법 진기가 느껴지는구먼.”
조남철은 “그럴 리가요!”하다가 내심 무릎을 쳤다. 일본 유학시절의 경험이 떠올랐던 것이다. 스승 기타니 미노루 9단은 평소 참선을 좋아해 제자들에게 참선법을 지도하곤 했다.
기타니식 참선법의 요령은 대충 이렇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머리 꼭대기 위에 뜨거운 날달걀 하나가 놓여 있다고 상상한다. 잠시 후 날달걀이 ‘툭’하고 깨진다. 달걀물이 천천히 머리끝부터 몸으로 흘러내린다. 그 흐름을 따라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이원영이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당장 조남철에게 “나를 따라 나서라”고 종용했다.
“내가 특별히 자네한테만 진짜 공부를 시켜 줄 테니 함께 가세.”
이원영을 따라 도착한 곳은 전북 임실 한 마을의 야산자락.
이원영은 “새로운 몸을 만들려면 삼복더위에 49일은 꼬박 도를 닦아야 한다.”며 조남철을 방에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밥을 제대로 넣어 주더니 조금씩 양이 줄어들었다. 급기야 사흘째는 아예 물밖에 주지 않았다. 단식이었다. 이 단식 사흘 만에 조남철은 완전 무너지고 말았다. 이원영 몰래 방을 빠져나간 조남철은 광에서 삶은 고구마 몇 개를 발견하고는 걸신들린 듯 그 자리에서 먹어 치웠다.
훗날, 조남철은 이렇게 회고했다.
“기의 실체는 깨닫지 못했지만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안 넘는 사람 없다’는 속담이 진리라는 것만큼은 확연히 깨쳤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