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준 제4시집 『형식을 벗는 이 깨달음이 있다』 <작품해설>
‘생태사회’를 찾아 떠나는 구원의 여정
- ‘섬’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송용구
(시인.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1
“환경과 인간을 고려치 못한 과학문명의 이기! 돈이 행세하는 세상. 돈에 노예가 되버린 사람들…. 그런 세상을 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만큼 인성이 죽고 자연은 황폐해 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내게, 시란 위로의 동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 박성준 시인의 「自序」중에서
박성준의 제3시집 『바람개비가 돈다』에 연이어 그의 4번째 시집의 해설을 맡게 되어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필자가 인정하는 것은 박성준의 시는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돈’이 지배하는 물신주의 사회에서 ‘인성은 죽고 자연은 황폐해졌다’는 시인의 고백은 T. S. Eliot의 「황무지」를 연상시킨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얘기했던 엘리어트는 타락한 문명사회에 대한 절망적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구원의 출구를 찾고 있다. 엘리어트의 기독교 신앙은 문학의 얼굴로 ‘변용’되어 구원을 찾아 실존의 항해를 떠났다. 제3시집에서 보여주었던 박성준의 기독교 신앙은 여전히 이번 시집에서도 향기를 잃지 않는다. 그 신앙의 향기는 문학의 빛깔로 ‘변용’되어 이상향인 에덴의 ‘섬’을 찾아 구원의 돛을 올린다.
“모두가 인생의 모습일 진데 더 자유를 열망하고 영혼의 참 기쁨을 위해서는 어쩜 잘못된 세상을 부정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부분, 부분 내 삶이 지독히 아파지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제 사람하나 만나고 싶어 내 안의 언어들을 밖에 놓는다.
시든 영혼에 반짝임을 놓고 싶다. 병들고, 혹은 어두우며, 주관을 잃은….
일상을 넘고 싶다. 시를 향한 사랑은 본시 하나의 불꽃이든가. 내 정성과 느낌을 다한 마음으로 하루내 눈부시고 싶다. (중략) 하늘이 높아져 있음인가. 하늘 한 자락 끌어다 놓고 거기 누군가와 차 한 잔 마시며 얘기하고 싶다. 가을의 창을 여는 또 한 사람, 그대를 위하여 …. 더 밝은 세상을 보아야 겠다. 소망 하나 두어야 겠다.”
- 박성준 시인의 「自序」중에서
박성준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하늘 한 자락’을 지상의 세계로 끌어 당겨 ‘더 밝은 세상’을 열어보려는 ‘소망 하나’를 품고 있다. 그에게서 이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인생의 방식은 무엇일까? 시를 쓰는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죽음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요, 구원의 ‘섬’을 향한 실존의 여정이다.
박성준 시인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구원의 ‘섬’은 어떤 세계일까? 이제부터 그의 작품들을 하나씩 소개하면서 ‘섬’의 베일을 벗겨 보자.
2.
자서(自序)에서 느낄 수 있었듯이, 시인이 타고 있는 배는 자연과 사람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낙원을 향해 이미 항해를 시작하였다. 이 세상은 속물근성, 갈등, 반목, 다툼, 사기, 침탈, 억압, 살상이 득실거리는 타락의 바다이다. 시인은 이 세상을 타락한 바다로 인식하고 있다. 바다의 한 가운데로 내던져진 시인은 창작의 붓으로 노를 저어 자신의 고향인 ‘섬’으로 되돌아가려고 몸부림 친다.
보들레르는 시인을 천상에서 유배된 ‘알바트로스’라고 불렀다. 순수한 빛과 아름다운 향기가 마르지 않는 ‘고향’에서 추방된 시인이 다시 ‘고향’을 찾아 귀향의 길을 떠나는 것은 본능이 아닐까? 박성준은 사람과 자연이 가족처럼 어울려 지내던 에덴 동산 같은 ‘섬’을 향해 ‘영혼’의 ‘불을 지피’고 있다. 눈동자에 그리움의 ‘불을 지피’고 ‘불타는 태양’을 향해 알바트로스처럼 비상하는 시인이여!
자꾸만 일렁이는 그리움의 빛깔로
갈수록 시간은 안으로 타는데
쉽지 않았다. 맑은 눈빛 들어 혼자 이기는 일이란
아무도 오지 않는 쓸쓸한 길로
버둥이고
비틀대며
외진 난 파도를 앓는다
아픔 반, 눈물 범벅
다시
영혼에 불을 지피리라
쪽빛 바다를 향해 길을 열리라
불타는 태양을 위하여 눈을 들었다
- 「섬」중에서
박성준이 다다르고자 하는 ‘섬’은 자연의 생명력을 만끽할 수 있는 세계이다. 기술문명과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과는 엄연히 다른 세계이다. ‘처진 비애, 악다구니, 숱한 한숨/ 다시 욕망. 아픔. 고통. 분노./ 빗나간 性, 관념적 모순, 물질만능적 세태, 부패’를 뛰어 넘는 세계이다(시 「밤」 참조). 기술과 물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연조차도 망가져가고 있지만 시인은 자연의 순수함을 회복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일깨우고 생명의 소중함을 선포한다. 선견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줌으로써 독자들의 의식을 각성시켜 그들과 함께 순수한 자연의 세계를 회복해나가려고 한다. 이런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 박성준은 끊엄없이 독자들에게 ‘섬’의 아름다운 빛깔을 보여주고, ‘섬’의 순결한 향기를 전해준다. 사람과 자연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구원의 ‘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박성준은 시를 통해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노래해준다.
맑은 물 풀벌레 울음으로 귀를 씻는다
(…)
까만 밤이 나를 두른다
이 밤, 바람은 창을 흔들며 날 부르게 하고
별빛은 뜰에 내려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하게 하리라
빛이 오고 있다
눈 시리도록 빛이 오고 있다
- 「산골에서」
‘맑은 물 풀벌레 울음으로 귀를 씻는다’는 시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의사는 ‘자연’이다. ‘별빛이 뜰에 내려와’ 시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사람이 걸어가야 할 갱생의 길이 자연 속에서 열린다는 것을 노래함으로써 박성준은 ‘섬’을 향한 희망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려고 한다. 자연에 귀의하는 것이 진정한 자아를 찾는 길임을 그의 시 「해맑은 얼굴이 있어」에서 확인해보자.
싱그럽고 구김이 없는 봄날 같았다
반짝이는 눈물빛으로
고운
신선함이 가득하였다
그 빛살이 나를 쏘아
덜컹 가슴이 열리고, 훤히
급소가 노출되었다
아침 이슬이 가득 찬
오지 협곡의 자연모양
톡톡 튀어 오르고 번지는
가식 없는 이름으로 두둥실 어깨춤을 추리라
바람에
때묻잖은 비취의 바다가 파닥인다
혼자된 섬이
산뜻하게 무늬를 놓고 있다
- 「해맑은 얼굴이 있어」
작고한 시인 박두진이 「인간밀림」에서 ‘구릿빛 번들대는 적나의 사나이’로 되돌아갔듯이, 박성준 또한 모든 독자들에게 ‘자연에 귀의’할 것을 호소한다. 따라서 그가 지향하는 ‘섬’은 ‘자연에의 귀의’를 상징하는 객관적 상관물이기도 하다. 이와 동시에 '섬’은 혼탁한 물질문명의 세계로부터 ‘혼자됨’을 선택한 시인의 고독한 자아를 나타내고 있다. ‘섬’은 물신주의(物神主義)와 속물근성에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자유, 독립, 해방을 선언하는 시인의 정신적 공간이자 구원의 공간이다.
3
시인이 비판하고 있는 이 세상은 풍요, 윤택, 편리, 쾌락, 이익만을 추구하는 속물근성의 땅이다. 물신숭배(物神崇拜)의 메니아들이 엮어내는 타락의 동네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성준의 시 「다손길 소묘」는 구멍 뚫린 도덕의 빈 자리를 스케치하고 있다.
자정도 훠 훨씬 지난
하늘에 초롱한 별들만 찬란한 시 시간쯤
목청 큰 한 사내와
깔깔대는 철없는 여인의 가슴팍이
벌름벌름 한 시간여 창밖에 질벅이면서
고 곤한 잠을 말똥대게 하더니
이 이른 아침
생선장사의 외침을 시발로
쉬 쉬임없이 호객 하는 마이크 소리가
IMF를 밑반찬 삼아
다 당연하다는 듯 소음공해를 놓고 있다
골목 한복판에 또아릴 튼 자가용
아무렇게나
누 눈치 접은 쓰레기들
버려진, 말짱한 삶의 가구들
비애의 念(념)이 혈맥에 찬다
부분적으로 도덕이 집 나간 풍경이다
더러는 양심을 헐값에 방임한 즈 증거다
법과 질서가 퇴출 당한 후
공중도덕의 부재 속에 휘 휘청이는 흔적들
답답한 속이 터질 것 같다
미 미칠 것 같다
- 「다손길 소묘」전문
‘도덕이 집 나갔다’는 시인의 기발한 표현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시행(詩行)을 읽어갈수록 ‘도덕’의 붕괴는 곧 생태계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메시지가 점점 더 뚜렷해진다. 본래 ‘생태(eco)’란 말은 희랍어의 ‘oikos(집)’에서 유래되었다. 이 원어의 뜻에 따르면, 생태계는 거대한 ‘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집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을 가족이라고 한다면 ‘생태계’라는 집에서 거주하는 가족은 당연히 사람과 자연이다. 좀더 세분화한다면, 사람들과 물과 공기와 흙과 동물과 식물이 ‘생태계’의 한 가족이된다.
사람들의 관계가 돈, 물질, 상품의 잣대로만 형성된다면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물질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돈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척도에 따라 사람끼리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가 형성된다면 자연도 이용의 도구로 전락하여 도미노 현상처럼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지금 우리는 ‘도덕’이 ‘집’을 빠져 나가면서 ‘집’조차도 무너지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박성준 시인은 위의 시 「다손길 소묘」에서 물질적 탐욕과 속물근성이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까지도 파괴한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더욱 격앙된 목소리로 거대한 ‘집’이 무너져가는 불행을 고발한다.
가가린이 본 지구는 푸르디 푸르렀으나
모리마보루가 하늘에서 보니 물빛이 변하고 있었다
그 뒤 관측된 아랄해는 깨알만 했다
생태계가 깨졌다
폐공엔 강관이 녹슬고 있다
유류저장고 인근엔 기름오염으로 농작물이 자라지 않는다
쓰레기들-매캐한 냄세가 코를 찌르고
지하수가 썩어들고 있다
배부른 자
가진 자는 무감각하다
흙에 살며 낮게 엎드린 사람들
그들은
직면한 현실
극한의 지하수 오염을 걱정하고 있다
- 「고발」 전문
이 시는 ‘생태시’의 모델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박성준은 생태계가 깨지는 것을 사실적으로 고발할 뿐만 아니라 생명의 네트워크(그물망)을 붕괴시킨 원인을 찾아 고발하고 있다. 그 원인은 ‘배부른 자’와 ‘가진 자’가 배고픈 자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사회구조의 모순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착취를 정당화하고 빼앗김을 묵인하는 사회의 위계질서는 자연환경을 오염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물질적 도구로 이용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조차도 타락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시인 리젤로테 촌스가 ‘생태계’라는 집을 무너뜨리는 원인은 사람의 ‘탐욕’임을 여과없이 ‘고발’하였듯이, 박성준 시인도 ‘탐욕’에서 비롯된 ‘무감각’이 자연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병인(病因)임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부당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시간, 임금,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람이 자연의 생명력을 착취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오염된 물, 공기, 흙으로부터 가장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빈곤층의 사람들이다. 박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흙에 살며 낮게 엎드린 사람들’이다. 가령, 물이 오염되어 수돗물조차도 ‘페놀’이 섞인 페수로 변해버린다면, 사람들은 식수를 구하기 위해 수퍼마켓의 생수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식수의 오염에 원인을 제공한 자본가, 기업주, 공장주는 버젓이 한 트럭 안에 생수 수백병을 실어 나를 여유가 있지만 ‘낮게 엎드린 사람들’은 젖먹이 아이에게 먹일 ‘우유 탈 물’조차 ‘못 구해 쩔쩔매’다가 ‘짐승처럼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용락의 시에서처럼 박성준 시인도 ‘마실 물’을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하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질타하였다고 평하고 싶다{김용락의 시 「대구의 페놀 수돗물」 과 박성준의 시 「고발」을 비교해볼 것. 김용락 시집 『기차소리가 듣고 싶다』(창작과비평사) 참조}.
4
박성준의 시는 현실의 위기상황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문학적 저항의 과정을 통해 구원의 안식처인 ‘섬’에 도달하고자 한다. 시 「하얀 축제」에서 ‘섬’의 구체적 형상을 만나보자.
축제였어요
살가운 바람의 춤과 내면의 휘파람 소리
백야의 뜰에 출렁이는 빛의 숨결
축제였어요
훨훨 영혼이 날갯짓하는
다 드러낸 나신의
벽, 틀, 선 없는 자유의 갈망으로 찬
모닥불로 일렁이는 시간의
빨갛게 익은 이야기로
오직 존재하는 느낌뿐인 삶을 휘날리며 가는
축제였어요
우리 영혼이 맑고 밝은 시간
마음 연 만큼은.
- 「하얀 축제」전문
박성준이 꿈꾸는 ‘섬’은 사람과 사람의 대립이 해소되고 자연과 사람의 불화가 해소되어 모든 ‘벽, 틀, 선’이 소리없이 무너지고 지워지는 진정한 통합의 세계이다. 이 통합의 세계에서 사람과 자연은 ‘빛의 숨결’ 속에 하나로 녹아들어 상생(相生)의 ‘축제’를 향유한다. 박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섬’은 사람과 자연이 동등한 파트너가 되어 살기 좋은 마을을 형성하는 ‘에코토피아’이다. 시인의 정신적 공간이자 구원의 세계였던 ‘섬’은 ‘생태사회’ 또는 ‘생태학적 낙원’의 얼굴로서 마지막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제4시집에서 시인이 줄곧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님’, ‘그대’, ‘너’의 실체는 누구인가? 이들은 시인과 함께 ‘생태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모든 동반자를 뜻한다. ‘님’은 하느님일 수도 있고, 어머니가 될 수도 있으며, 첫 사랑의 여인이 될 수도 있다. 형제, 자매, 친구, 동료도 될 수 있다. 인정에 밝고, 사랑이 충만하며, 신의로 가득찬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님’이 될 수 있다.
작품 해설을보니 좀 이해가 되는군요
님의 시집을 보며 무슨 뜻일까?
그 깊은뜻을 다 헤아릴수 없었는데
이제 조금 보이는듯 합니다
이해하며 읽으니 마음에 더 와닿는군요
..하늘 한자락을 지상의 세계로 끌어당겨
더 밝은 세상을 열어보려는 멋진소망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