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트머스 압화(押花)
주홍빛 캡슐 두 개가 손바닥에 놓인다. 캡슐은 움켜쥐면 미끄러질 듯 매끈하기만 하다. 나는 흡족해진다.
야이든 무엇이든 보기에 산뜻해야 마음이 끌리는 법이다. 더욱이 맘에 드는 것은, 그 표면에 아무런 글씨나 표시가 없다는 점이다. 약에 관해 내가
기억하는 내용은 별로 없다. 다만 체내의 티로신인지 하는 성분에 작용하도록 개발된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라는 것밖에는. 하나 더 기억해둘 게
있다면, 똑같은 모양의 약이라도 모두 동일한 시험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중에는 외국에서 들여온 백혈병 치료제도 일부 섞여 있다고
했다. 숨이 가빠지면서 가슴께가 뻐근해진다. 나는 알지 못한다. 캡슐 안에 정확히 어떤 성분이 들어가 있는지, 진짜 그 신약인지 아닌지, 다시
말해 위험부담이 있는지 어떤지 하는 것도 하지만 구태여 알고 싶지 않다. 설령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다. 당장 그것들을 삼켜야 하는 것이다.
재촉하듯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사복차림의 안경 쓴 의사와 하얀 가운의 여자가 침대 옆구리에 다가와 있다. 나는 그들에게 여유 있게
미소지어 보인다. 그리고 단숨에 알약을 털어 넣고 한입 가득 물을 문다. 목젖이 커다란 알사탕 삼키듯 열리고 물과 함께 약이 넘어간다. 마치
알록달록 상표 없는 사탕을 먹는 기분이다. 그것을 먹고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기분이다.
간혹 구토증세가 있거나 열이 날 수
있습니다. 또 어지럽거나 다양한 통증이 올 수 있습니다. 시험 전에 들었던 약의 부작용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두려움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기우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물론 전에는 이번처럼 신약시험은 아니었다. 대개 기존의 약을 본뜬
카피약이었고 부작용이 적었는지 별탈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심 실망스러웠다. 피보험자는, 말하자면 일종의 리트머스인 셈이지요. 피에 녹아 있는
성분으로 약효과를 알려주니까요. 그 말을 늘 기억하곤 했었다. 그래서 때로 붉게 때로 파랗게 변하는 리트머스 종이처럼 약기운을 남김없이 빨아들여
보란 듯이 반응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언제나 잠에서 덜 깬 듯 멍한 머릿속과 둔한 살덩이를 깨우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혹시 약의 부작용으로
어지럼증에 시달리거나 몸을 가누지 못한다면? 하지만 걱정할 게 없었다. 여기는 병원이었다. 누구보다 시험실 사람들이 곧바로 달여와 줄 것이다.
삐끗 열린 문으로 저만치 스테이션의 모습과 그 주위에 배치된 침대들과 거의 앉은 자세로 시트를 덮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편히 눕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나 역시 약이 잘 내려가도록 얌전히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방문이 닫히고 말소리며 발걸음 소리도 멀어지자, 병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 들리는 거라곤 휴대폰 버튼 누르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구석 침대를 흘낏 바라본다. 갓 파마를 한 듯 구불거리는
머리카락과 곧게 뻗은 콧대와 갸름한 뺨,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여자애였다.
여자애는 초면이 아니었다. 여기서 벌써 여러 번
마주쳤고 어젯밤부터 한 방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애는 자신을 알아보는 것 마저 원치 않는 듯, 여전히 못마땅한 눈치였다. 지금껏 서로 말을
나눈 적이 없는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한순간 나는 공교롭게도 여자애와 눈이 마주친다. 곱지 않은 눈빛은 이쪽을 경계하는 것 같고 또 어딘가
시무룩해 보이기도 한다. 오늘 시험이 내키지 않는 걸까. 이번에는 사실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 다른 때보다 보수가 훨씬 높은데도 사람이 적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임상시험을 전혀 거치지 않는 신약이어서 부담이 된 탓이었다. 게다가 백혈병 약은 소화제나 감기약처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 시험에 관해 들은 바로는, 급한 환자에게 약을 나눠줄 수도 잇지만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먼저 건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또 건강한 사람이라도 남자만 뽑을 예정이었으나 워낙 인원이 부족해서 여자도 포함시켰다고 했다. 그러나 두 차례 건강검진에서
탈락자가 나오면서 여자 쪽에서 남은 것은 여자애와 나뿐이었다. 병실에 여럿이 있던 때가 복잡해도 한결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에게 침대
6개가 놓인 방은 너무 넓었다. 이렇게 둘만 있으니 옆사람에게 신경이 쓰이고 말없이 있기가 거북스러워진다. 그나마 여자애가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금방 약을 먹었으니 아직 이렇다 할 느낌은 없다. 줄곧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른해진다. 하품이
쏟아지면서 형광등 빛이 눈에 가득 맺힌다. 지하라서 그런지 저 위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 적요하게 느껴진다. 집에 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해가 나든 비가 오든, 모두가 딴 세상의 일처럼 나와 무관하게 흘러갔다. 블라인드 내린 방안에는 형광등
불빛만 가득했다.
해를 본 적이 거의 없다고요? 만나는 친구도 없다고요?
나는 언젠가 받은 메일을 생각한다. 흰곰, 그가 놀랍다는
듯 내게 되묻던 말을 생각한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무슨 전문치료를 받아보라는 식의 이야기까지 늘어놓았지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얼굴만 보지 못했을 뿐 그와는 숱하게 메일을 주고받았다. 좀 심각한 게 탈이긴 해도 그는 내가 던진 몇 마디,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그런
얘기도 용케 기억해 주었다. 세계 곳곳의 꽃시계를 구경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덕분이었다. 며칠 전에도 그는 꽃시계 사진을 보내왔다. 긴
시계침이 흰 꽃으로 된 숫자판을 가리키고 연녹색 둥근 테두리 한쪽에 붉은 꽃이 흰 십자가를 장식하고 있는, 제네바라는 도시에 있는 거였다.
그는 남다른 데가 있긴 했다. 작년 초, 검색 사이트에 임상시험에 묻는 글이 떠올랐을 때 내가 선심쓰듯 답변을 띄운 적이 있었다.
하루에도 십여 통씩 메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건 그 일이 있고 나서였다. 내용이라는 게 똑같았다.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얼마나
벌 수 있는지, 하는. 그런데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왜 그런 일을 합니까? 내가 어리둥절한 채로 발견한 것은 흰곰이라는 닉네임이었다. 곰,
그것도 흰곰이라는 이름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좁은 방안에 웃음소리가 멎었을 때, 나는 한여름 동물원의 갑갑한 우리 안에서 종일 제자리걸음하던
커다란 덩치를 기억해냈다. 그 모습처럼 질문 또한 아둔한 것이었다.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남을 걱정해 주는 듯한 말투도 우습게
느껴졌다. 답장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수신함에는 그의 글이 안부를 묻듯 기다렸다. 이따금 나는 흰곰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동물원에서 본 그 모습뿐이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흰곰의 비좁은 우리 안이나 내가 있는 곳이나 비슷할 것 같았다.
그곳
작은 원룸에서 벗어날 일은 거의 없었다. 흰곰이 되묻던 대로, 정말이지 누군가 만나러 나갈 일도 해를 쳐다볼 일도 없었다. 가끔 병원에
나온다거나 갑자기 식료품이나 휴지가 떨어질 때 외에는 바쁠 것 없으니 벽시계 하나면 충분했다. 아침마다 10분 간격으로 나를 깨웠던 2개의
자명종 시계들과 출근길에 시간을 확인하던 손목시계는 제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하루하루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통과해
어디론가 사라졌고, 어쩌다 생각난 듯 나는 손톱과 발톱을 잘랐다. 누런빛의 각질이 날카로운 날 끝에서 아무 고통 없이 떨어져 나와 종이쪽 위에
흩어졌다. 나는 그것들을 잠시 쳐다보다가 휴지통에 쏟아버렸다. 그리고 아무 특별한 것이 없는, 그러나 더없이 평화로운 나날에 감사했다. 그
지나친 평화로운 때문이었을까. 몸이 자꾸만 불어났다. 딱히 먹은 것도 없이 몸속에 무엇인가 들어차고 있었다. 내가 낭비한 것이라곤 남아도는
시간뿐이었다. 뜯어낸 달력과 함께 선선히 사라진 줄 알았던 나날들이 몸 안에 쌓여 가는 걸까. 그 형체 없는 덩어리가 어느 틈에 골수와 신경을
점령해 촉수를 내리고, 감각 없는 세포처럼 서서히 굳게 만드는 걸까. 그래서 팔다리마저 주인의 말에 잘 복종하지 않는 걸까.
답답한 맘을
풀어보려는 듯, 때로 나는 리모컨을 잡고 부지런히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저스트 지비팅(Just Visiting)'이라는
영화의 몇몇 장면이었다. 도시 한복판에 떨어져 좌충우돌하는 기사와 하인을 재빨리 뒤로 돌려보낸 다음, 꼼짝 않고 앉아 화면을 지켜보았다. 은으로
만든 잔마다 포도주가 채워지고 풍성한 음식들이 가득한 연회장과 한껏 분위기 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일순간 연회장은 늘어진 거미줄과
먼지에 뒤덮여 갔다. 사람들도 낡은 석고사 같은 형체로 변해 점점 갈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듯 생생했다.
마법의 힘도 기나긴 시간도 그 짧은 순간의 흔적마저 어쩌지 못했다.
투명한 유리 속 표본처럼 혹은 잘 보존된 압화(押花)처럼, 앨범의
묵은 갈피 속에서 꽃시계는 변함없이 같은 시간을 가리켰다. 신선한 아침이 저만치 넘어가고 정오의 햇살이 머리 위로 다가오는 11시 40분.
세상은 그림자 하나 없이 온통 밝은 빛으로 넘쳐났다. 나는 막 B의 손에 이끌려 바이킹을 타고 내려온 참이었다. 이마에 뺨에는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있고 손에는 녹아내리는 딸기 아이스크림콘이 들려 있다. 조금 놀라고 멍한 표정이지만 앳되고 생기 있어 보인다. 그 옆에서 B가 심각한
얼굴로 누군가 안겨준 노란 풍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잡고 있다. 사무실에 컴퓨터 수리하러 오던 때와 달리 양복차림이다. 급히 사 입은 듯한
양복에 넥타이를 바짝 맨 어색한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함께 즐거워하는 듯 그 옆에서 꽃시계는 색색의 팬지꽃을 활짝 피웠다. 그것은 어느
화창한 일요일, 놀이공원 꽃 축제에 놀러 갔던 나와 B의 시간이었다.
요란한 음악소리에 병실의 공기가 후닥닥 깨어났다. 나는 얼떨결에
구석 침대의 여자애를 쳐다본다. 최신가요인 듯한 댄스풍의 음악이 멎자 속삭이는 말소리가 이어진다.
안 돼. 지금은 좀 바빠. 굉장한
일이거든……. 수입도 괜찮고. 내가 원래 그런 것 하나는 잘 알아내잖아.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조용한 탓에 작은 목소리도 또렷하기만
했다. 수입 어쩌고 하는 걸 보면 여기 일을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 굉장한 일이라니, 상대에게 구태여 알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새 여자애
얼굴에는 시무룩한 기운이 가시고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자랑하듯이 높아지는 음성에 슬며시 우스워졌다. 여자애가 갑자기 이쪽을 쳐다본 것은
그때였다. 웃음기 싹 가신 표정에 나는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멎는 것을 느낀다.
아이, 재수 없어! 아냐, 신경 쓰지 마. 다음
주말? 어디라고? 알았어. 이번 일 끝나면 놀라갈 수 있을 거야.
때마침 방문이 열리면서 여자애의 음성도 멎었다. 의사와 채혈기구를 든
여자가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먼저 여자애에게다가가 혈압과 맥박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방금 전의 말이
떠나가지 않았다. 아이, 재수 없어. 재수 없어…….
그 소리가 내게 들어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꼭 맞는 소리 같았다.
그때6년씩이나 다니던 렌터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잘못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애당초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물건을
안기는 재주란 내게 없었는지 모른다.
사무실 근처에 임대로 나온 가게를 구경삼아 들러본 것이 발단이었다. 그곳은 두어 평 남짓한 액세서리
상점이었다. 오가며 가게를 기웃거리던 나는 어느새 낮은 권리금과 생소하기만 한 그 일에 맘이 끌렸다. 지하상가의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전화 한
통으로 차를 예약해 주고 나면 방금 내뱉은 말소리가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울리다가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가슴 언저리에 까닭 모를 통증이
지나갔다. 말로 하자면 남해고 지리산이고 가보지 않은 데가 없지만 내가 본 것은 언제나 사진 속의 모습뿐이었다. B의 처지도 다를 게 없었다.
그는 공휴일에도 거래처의 에이에스 호출에 응해야 했고 어쩌다 시간이 나도 번갈아 병원을 들락거리는 노부모 수발에 쉽게 짬이 나지 않았다. 그가
원룸으로 찾아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B와의 여행이 처음 몇 번 이외에는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젠 여행이라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 전하에 대고 즐거운 척 높은 음성으로 여행지의 이름을 외치는 것 또한 내키지 않았다. 출근도 미루고 자리에서
뒤척이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나는 몸을 일으켜 책상서랍을 뒤졌다. 서랍에는 회사에서 받아온 할인티켓이 소중한 물건처럼 간직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미련 없이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작심한 사람처럼 나는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을 털어 가게를 잡았다. 그리고 그 좁은 공간에
들어앉아 종일 광을 내고 공들여 진열을 했다. 자주 색이 변하는 금도금과 쉽게 떨어지는 모조 큐빅과 진주알 때문에 쉴 틈이 나지 않았다. 당분간
B를 만나지 못해도 어쩔수 없다고 여기며 분주하게 여러 달을 보냈을 때였다. 손길은 나날이 더뎌져 갔다. 모퉁이만 돌아가도 손님들이 웅성대는
데에 비해 가게는 조용하기만 했다. 자리가 좋지 않기 때문인지 운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유리 진열장에서 귀한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던 목걸이와 머리핀은 하루가 다르게 광택을 잃어갔다. 손님 들지 않는 가게를 지키고 있을 때면 줄기차게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글쎄, 네 사주에 고독수가 들었다더라. 나는 오래 전 어머니가 했던 얘기가 들어맞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밀린 월세 때문에 가게 한쪽을 내주며
버텨보려고 했지만 오래 견딜 수는 없었다. 결국 남은 물건을 헐값에 넘기고 힘없이 돌아오던 날이었다. 어디선가 말 한 마디가 날아왔다. 재수
없는 년!
왠지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어쩌면 그것은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또 어쩌면 얼마 전 내게 꽂히던 B의
음성인지도.
넌 참 되는 일이 없다. 하긴, 나도 그렇지만……. 아니, 그러니까 하는 얘긴데, 너라도 잘 돼야지 직장은 왜 그만뒀니.
그대로 붙어 있었으면 퇴직금 까먹을 일도 없었을 텐데.
되는 일 없다는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B의
모습은 영 서먹하기만 했다. 전에 렌터카 회사에서 성과급 받았을 때 자기 일처럼 좋아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멀찍이 식탁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그에게서 불안한 기색마저 엿보였다. 혹시 내게서 어떤 불길한 기운이라도 옮을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다시금 어머니의 말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마, 너 태어나면서부터였지? 아버지 병원이 잘못되지 않았냐. 아버지가 사업 벌이느라고 그리 되긴 했지만……. 내가 태어난 게 잘못이라는 건지
아버지가 사업 벌인 게 잘못이라는 건지, 정확히 누구에 대한 원망인지 알 수 없지만 어머니는 틈만 나면 그 소리를 했었다. 갑자기 흙먼지를
뒤집어쓴 듯 더럽고 참담한 기분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누구의 잘못인지 알 수 없었다. 낙담하고 맥빠진 얼굴로 말없이 현관을 나서던
B의 뒷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목덜미 아래 굽어진 어깨와 잔뜩 눌린 듯 납작한 뒷머리, 낯설고 추레한 형상이었다. 예전에 컴퓨터 수리를 의뢰할
때면 시원스레 대답하고 곧바로 달려오던 그 씩씩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차마 내뱉지 못한 소리가 가슴속에서 울렸다. 가버려, 가버리면
되잖아. 내가 되는 일 없어서, 그래서 너까지 안 풀리는 거니.
나는 얼른 자세를 바로잡는다. 금방 마주친 것은 날렵한 안경 너머의
눈길이다. 의사는 침대 발치에서 나를 훑어보더니 청진기를 귀에 꽂고 다가섰다. 그이 질문에 따라 나는 가슴 박동이 빠르게 느껴진다는 것과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팔뚝에 밴드가 감기고 피가 뽑혀 나오기 시작한다. 내 눈에 그것은 피라기보다 검붉고 걸쭉한 즙처럼 보인다.
나는 자줏빛 수액을 지닌 작은 식물을 생각한다. 어느 먼 바닷가 바위에서 자란다는 리트머스이끼를 생각한다. 거기서 짜낸 즙을 종이에 묻혀
소변검사를 하고 건강상태를 판단하듯, 사람들은 내 몸에서 뽑아낸 혈액으로 약 성분이 얼마나 흡수되었는지 알아낼 것이다. 오늘은 무슨 반응이
있을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그 동안 시험에서 밋밋하게 넘어갔던 것을 보면 약도 약이지만 내 체질이 별다른 데가 있는 듯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슴이 뛰면서 무언가 사방으로 번지는 느낌이 어쩐지 다른 것 같다. 시험관 가득 피가 뽑아진 후, 의사가 묻는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영문도 모르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가에 엷은 미소가 스친다. 어제 최종검진에서 그에게 주의를 받았던 나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는다.
그러나 과장이 개별면담을 하고 있다는 말에 다시 긴장이 되었다. 과장이 따로 부른 적도 없거니와 여자애는 그 일과 무관해 보였기 때문이다.
의사의 뒷모습을 좇아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냉장고와 각종 기계가 즐비하게 놓인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갔고 여러 번 모퉁이를
돌았다. 생각할 수록 그 일이 맘에 걸렸다. 어제 저녁 입원하기 직전에 들은 소리가 있었다. 여기 규정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렇게 몸관리를
못하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거였다. 몸관리라면 나도 할 말은 있었다. 그 흔한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했고 하루에 밥 두 끼는 귀찮아도 꼭
챙겨먹는 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전에는 몸무게가 적게 나가 걱정이었지만 이제는 그 반대였다. 그것은 밥의 양이나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연필로 뭔가 체크하는 과장의 얼굴을 숨죽이고 지켜본다. 아마도 검진 결과인 것 같았다. 그는 방에 들어서는 나를
한번 쳐다 봤을 뿐 거기에만 집중하고 있다. 일에 매달린 사람 특유의 다소 비정한 느낌을 주는 표정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지 물어보려다가
그만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오늘의 시험일 것이다. 그 외의 것, 이를테면 내 안의 사소한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이윽고 과장이 눈길을 돌린다.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을 듯 이쪽을 탐색하는 눈빛에 나도 모르게 움찔거린다.
앞으로 일 키로만 더
나가면 과체중이에요. 거기다가 혈압, 맥박수치도 갈수록 낮아지고……. 이런 몸으로 시험할 수 있겠어요?
그의 이마 주름이 순간 깊게
파였다.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분명 불만에 찬 목소리였다. 아까 눈길도 주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인 듯했다.
나는 힐끗 몸을 내려다본다.
환자복의 헐렁한 목둘레 안으로 시선이 쏠린다. 가슴팍 아패 골을 이룬 희멀건 살집이 보인다. 나와는 아무 관계 없는 물체처럼 보이는, 그러나
엄연히 나의 일부인 그 몰골을 감추려는 듯 나는 몸을 오그린다. 어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편히 있을 곳은 문이 이중으로
잠기고 빈틈없이 블라인드가 내려진 공간이다. 그곳이야말로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할 일 없는, 세상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조심해야 했다. 어느 틈엔가 팔다리에 멍자국이 나는가 하면 커피잔을 엎지르거나 들고 있던 그릇과 음식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귀가 울리는 증세는 자연히 가라앉았지만 그런 사소한 일들이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갑자기 B에게서 날아온 기별에 놀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직장
그만두고 외항선을 탔다는 짤막한 이야기만 남기고, 나를 비웃듯 아무 소식이 오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나는 이따금 커다란 집 벌레를 떠올렸다.
하루에 겨우 몇 발자국씩만 움직이고 계속 그런 식으로 간다면, 팔과 다리는 점점 퇴화되어 마침내 한 덩어리의 기이한 벌레가 될 것 같았다.
그의 질문에 나는 순순히 대답한다. 하루 두 번의 식사, 포만감이 들 정도로. 운동의 거의 하지 않음.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약간 기분이 누그러진 듯 보였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하루에 얼마나 걷느냐는 물음이 이어졌다.
집안엣 조금씩 움직이긴 하지만…….
그럼, 아예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나는 얼굴을 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보나마나 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바보같이 사실대로 말하다니, 막막해진다. 과장은 이제 여자애처럼 젊고 싱싱한 이들을 찾을
테고 결국엔 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 병원에 나와 사례비나마 벌 수 있는 쪽이 행운이었을 것이다. 그 행운마저 사라지려 하고
있다.
나로서는 정말 어렵게 잡은 행운이었다. 가게 집어지치우고 이곳저곳 이력서를 내보았지만 정작 써주는 곳은 없었고 병원마다 기웃거려도
여자 지원자를 뽑는 곳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첫날, 나는 중요한 면접을 치르는 사람처럼 긴장했었다. 이름도 생소한 임상실험실이라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복도를 해맸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검진 항목에 들어 있지 않는 귀를 내보인 것도, 그래서 결국 아무 이사이 없다는
진단을 받은 것도.
의외의 광고를 발견하던 그날도 귓속에서는 윙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머리를 흔드는 소리에 찌푸린 얼굴로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내내 켜놓은 컴퓨터 화면에 뭔가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병원연구소에서 낸 광고였다. 만 19~45세, 과거 병력이 없고 현재
약을 복용하고 있지 않는 건강한 자, 라는 글귀 아래 무상으로 건강검진을 받는다고 되어 있었다. 남자는 뽑는다는 게 아쉬웠지만 어쨌든 반가운
일이었다. 찾다 보면 나를 필요로 하는 곳도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난방도 제대로 하고 걸핏하면 나가버리는 형광등도 바로 갈아 끼울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무슨 이유로 귀가 자꾸 먹먹해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감싸고 있노라면 그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그것은 때때로 먼 하늘에서 날아와 닫힌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는 비행기의 소음과 비슷했다. 또 몇 번인가 전화기에서 울려나오던
소리와도 닮아 있었다. 벨소리에 전화기를 들고 여보세요, 하고 서너 번 외칠동안 저쪽에서는 말 대신 주위의 소음만 웅웅거렸다. 어딘가 높은
천장에 부딪혀 나는 소리 같았다. 그곳 한 귀퉁이에서 신호를 보낸 누군가를 부르느라 음성이 갈라질 즈음, 전화는 끊어져 버리곤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공항과 항구 선착장을 떠올렸다. 한 장의 엽서가 도착한 것은 그 얼마 뒤였다. 머리에 관을 쓴 엘리자베스 여왕이 인쇄된 우표에는 검은
스탬프가 찍혀 있고 그 뒷면에 급하게 흘려 쓴 글씨는 분명 B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지낸 지 얼마나 되었죠?
몇 차례
헛기침만 하던 과장이 입을 열었다. 똑바로 쳐다보는 진지한 눈초리에 나는 2년 반쯤이라고 들릴 듯 말 듯 대꾸한다. 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글씨를 휘갈겨 쓰며 중얼거린다. 히키코…….나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과장을 바라본다. 히키코모리, 전에 분명 들은 적 있는 얘기였다. 그랬다.
바로 그 물음이었다.
해를 본 적이 거의 없다고요? 만나는 친구도 없다고요? 그렇군요……. 요즘엔 댁 같은 사람을 히키코모리라고
한답니다. 그게 뭐냐고요? 흔히 말하는 방콕족이나 귀차니스트 같은 거죠.
흰곰, 그는 친절하게도 설명을 곁들였다.
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란 틀어박히다라는 의미이며 누구도 만나지 않고 방안에만 틀어 박혀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른 말로 은둔형
외톨이라고도 한다. 또 국내 몇몇 병원에 전문치료 코너도 있다. 내용이야 어떻든 그는 틈틈이 이런저런 얘기를 남겼다. 이를테면 중국에서 지금도
매혈이 성행하는 이유는 건강한 사람만이 피를 팔 수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라든지, 사람의 몸에는 호흡과 심박, 수면, 각성 등을 조절하는
생체시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 주기는 하루 정도로 밤낮의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는 그보다 길어진다는 사실이 6개월간의 임상연구에서 밝혀졌다든지,
혹은 파란 꽃을 싱싱하게 피우는 장미를 750만 달러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인 끝에 개발했으며 그것을 직접 보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든지. 그는
마치 내 맘속을 들여다보듯 궁금증을 풀어주곤 했다. 간혹 오래 전부터 흰곰을 알고 지낸 듯 착각이 드는 건 그래서인지 몰랐다.
그렇긴
해도 히키코모리라는 말이 거북스러웠던 건 사실이었다. 그가 처음에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던 일도 생각났다. 그러나 그는 그때처럼 별뜻
없이 말을 던졌을 뿐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닌 듯했다. 또 아주 엉뚱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단지 나로서는 히키코모리니 하는 말이 탐탁치가
않았다. 그렇게 불러서 유행어를 만들어내고 공연히 병자로 취급하려는 심사로 여겨졌던 것이다.
나는 믿겨지지 않는다. 흰곰이 내게 별명
붙이듯 했던, 그리고 그저 희한한 소리로 넘겼던 그 말을 과장이 입에 올리다니. 히키코모리 전문치료 코너가 있다는 얘기도 사실이었나 보다. 무슨
별명을 선고받은 듯 당혹스럽다.
과장이 목소리를 낮추어 차분한 어조로 설명한다. 다만 그 징후가 보인다는 것이며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위해서는 오랜 기간 관찰이 필요하다고. 이상하게도 과장은 밝은 얼굴이다. 그는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의 턱 살집이 출렁이듯
움직인다.
좋아용. 어쨌든 검진을 통과했으니, 그대로 진행합시다.
그가 단번에 시원스레 말한다. 뜻밖의 반응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곳에서 밀려나는 최악의 사태도 오지 않았고, 거기까지는 아니라도 그가 검진 결과를 들이대며 강하게 경고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쉽게 넘어갈 리 없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떻든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지금처럼 계속 일할 수 있다면 나를 히키코모리라고
부르는 것쯤 상관 없었다.
병실에 들어서자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기대앉는다.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과장 앞에서 지나치게 긴장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방금 들은 얘기 때문이었다. 내가 면담을 마치고 몸을 조아렸을 때, 과장이 몇 마디 말을 던졌다. 곧 시작될 새로운 시험에
준해, 외국에서처럼 장기간 이루어지는 시험에 관해.
속이 울렁거리면서 오싹 추워지기 시작한다. 구석 침대의 여자애도 휴대폰으로 떠들던
때와는 영 다른 모습이다. 간간이 낯을 찡그리다가 이제는 울상을 하고 있다. 약을 받아들고 한동안 주저하더니 그것을 삼킨 것을 후회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여자애가 삼킨 것이 신약이고 내가 먹은 것은 다른 종류였을까.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다. 모두 신약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약의 부작용에 대한 얘기가 떠오른다. 빈혈, 근육통, 두통, 발열, 구토……. 언뜻 들었던 백혈병 증세와 비슷해서 마치 그 병에 걸린
기분이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여긱서 그나마 환영받는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일 것이다. 약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것. 아버지의
병원이 문을 닫은 뒤에 유일하게 남은 것이 약장이었다. 붉은 옻칠이 된 약장을 열면 가위와 붕대가 담긴 철제그릇과 청진기, 프레파라트 유리판이
든 나무상자 같은 것이 놓여 있었고 깨진 무릎에 바르는 하얀 가루약이며 용도를 알 수 없는 알약들이 유리병속에서 알록달록한 빛을 발했다. 나는
유리병 속의 약들을 꺼내 살펴보기도 하고 속이 빈 캡슐을 호기심에 삼켜보기도 했다. 그 광경은 일찍이 내게서 약에 대한 공포심을 지워버렸을
것이다. 지매 약이든, 백혈병 약이든, 거기에 몸이 반응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것은 태엽 풀린 듯 늘어진 머릿속과 살덩이를 팽팽히
조이고, 매순간 맥박이 뛰고 피돌기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분명히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일이다.
급기야 멀미가 나는가 싶더니
일시에 팽 도는 느낌이다. 차멀미 증세보다는 심해서 이런 게 뱃멀미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나간다. 배라면 놀이공원의 바이킹 외에는 타본 적이
없지만 흡사 그때처럼 사방이 흔들리고 이러저리 팽개쳐지는 것 같다. 불쑥 몸이 들려져 형광등 불빛 가까이 다가갔다고 느낀 순간, 저쪽에서
여자애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조난신호를 보내듯 힘겹게 호출 버튼을 누르더니 침대 아래로 떨어져 내려 구역질을 해댄다. 속이 뒤집어지고 뭔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몸도 심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나는 아직 괜찮다고 생각한다. 배를 타고 멀리 나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주
멀리,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곧 도착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노버, 리스본, 지브롤터, 바하마……. 틈틈이 지도를 펴놓고 나는
항구의 이름을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단 한 장의 엽서 어디에도 없던, 연락 못하고 떠나서 미안하다는 그의 목소리가 잔잔한 파도에 밀려와 귓가에
찰랑거렸다. 그는 지금 커다란 배를 타고 있다고 했다. 참치 떼를 따라 이동중이라고 했다.
가물대는 머릿속에 먼 나라의 항구와 배를
떠올리자 늘 그랬듯 한 장면이 되살아난다. 아침부터 하는 일 없이 티비 화면을 쳐다보던 어느 일요일, 그리고 내 옆에 멀거니 앉아 벚꽃 흐드러진
남해도로와 그 위를 달려가는 마라톤 선수들을 지켜보던 B. 그를 문득 돌아본 것은 그의 한숨소리 때문이었다.
저 사람들은 폼나게
달리기라도 하지만, 나 같은 인간은 맨날 그 손바닥이야. 월급 제때 나오는 거 다행으로 알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밖에 말야.……그래도 찾아보면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어느 날 보란 듯이 나타나는 거야. 그러니까 줄넘기든 뭐든 세계 신기록을 세우는 거지.
말 끝에 그는
하룻밤 사이에 거뭇해진 턱을 문지르며 싱거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고도 어딘가 머쓱했는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남해를 보니까
생각나는 게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전함이 뭔지 알아? 거북선이라고? 아냐, 그건 판옥선이야. 모양은 거북선과 비슷한데 배 위에 덮개나 뾰족한
돌기가 없고 망루 같은 게 있지. 참, 그때는 노를 위아래로 저었대. 옆으로 저으면 공격을 받았을 때 노가 부러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
그때 나는 그를 쳐다보며 감탄했던 것 같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그의 맘속에는 진작부터 어떤 계획이 자리잡고 있었는지
몰랐다. 어느 날 누군가 새우잡이배나 참치잡이배를 타고 떠났다가 돌아왔다는, 그런 흔한 얘기가 아닌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는지 몰랐다. 줄넘기나
물구나무서기 같은 재주 하나로 대륙을 횡단해 마침내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처럼, 지금쯤 어떤 기록에 도전하고 있는지 몰랐다. 갑판에 기대서서 그
동안 방문한 나라와 도시를 손가락으로 꼽으면서 하루하루 기록을 더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없는 듯 지내다가 별안간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초라하지 않았다. 쇠잔해 보이는 굽은 어깨와 무엇인가 뭉텅 빠져나간 듯 납작한 뒷머리, 그 비루한 형상을 다시 보게 될 일
없으리라. 그 어디서든 언제든 다시 볼 일 없으리라. 그런데 그가 돌아오면 15킬로그램이나 불어난 나를 쉽게 알아볼 수 있을까.
가는테
안경을 쓴 의사 얼굴이 가까이 들어온다. 나는 새삼 주변을 둘러본다. 벽과 천장과 형광등, 같은 모습이지만 오랜만에 병실에 돌아온 듯 새로워
보인다. 땀에 젖은 몸이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가뿐하다. 한참 울컥거리며 들볶인 것도 헛수고는 아닌듯 싶다. 약효과를 제대로 봤는지,
비정상적인 세포의 증식을 막아준다는 말처럼 몸안에 몹쓸 암세포처럼 들어차 있던 살덩어리가 모두 꺼져버린 것 같다. 나는 잠깐 여자애를 바라본다.
주사를 맞고 머리카락을 흩뜨린 채 잠든 모습이 곤해 보인다. 약 먹은 것을 다 토해냈으니 사례비도 얼마 받지 못하고 고생만 한 셈이다. 여행이고
뭐고 재수 없는 일일 것이다.
순간 식은땀 밴 머리카락이 귀 뒤로 넘겨진다. 귓불을 스치는 푸근한 감촉에 나는 눈을 감는다. 언뜻 B가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일이 기억났지만 지금은 누구의 손길이라도 상관없었다. 체온계가 귓구멍을 파고들자 간지럼 때문에 오늘따라 몸이 뒤틀린다.
의사는 그런 나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안경을 고쳐 쓰고 눈금을 확인한다. 지금의 그는 몸관리 운운하면서 주의를 주던 모습과는 달라 보인다.
그는 체온이 정상으로 떨어졌다고 말한다. 거의 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구토증세를 일으켰다면서 내 팔에 꼼꼼하게 혈압계를 채운다. 팔뚝이 바짝
조여지면서 터질 듯한 팽만감이 손끝과 어깨와 가슴으로 퍼져나간다. 가쁜 숨결이 입에서 새어나오고 뿌듯한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과장님한테
다음 실험 얘기 들었죠? 가능하면 곧 시작할 모양이던데…….
혈압계 튜브에서 바람 빠지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본다. 어떻게 과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되어버렸는지 알 수 없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00일이나 입원해야 한다는 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번 건강검진을 통과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대답 없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한다.
정말 볼
만하겠어요, 모든 걸 공개한다니.
무심한 어조였지만 과장이 말한 시험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다. 나는 과장의 얘기를 떠올린다.
주위에서 벌써부터 관심을 보인다고. 그게 그런 의미였던가. 그런데 공개라면 시험 내용을 외부에, 그러니까 신문이나 방송 같은 데에 알린다는 뜻일
것이다. 확 끼치는 찬 기운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
그는 두 차례 더 투약이 있을 거라면서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 애쓴다. 그러자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나주에 자세한 설명이 있을 거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쾌활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군내 최초의 임상연구라!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닌가요? 병원측이나 환자나 특종거리를 찾는
쪽이나.
그의 싱긋 웃음과 함께 방문은 닫혀버렸다. 한동안 얼빠진 듯 앉아 있던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린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과장이 말한 새로운 시험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특종기사에 오르내리는 일쯤 그리 중요치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집안에
박혀 있는 오랜 습관에서 벗어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날마다 해를 바라보고 날씨를 관찰하고 약속시간을 잡게 될지 모른다. 사실 지금으로서는
100일이아니라 1,000일 동안의 시험이라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무슨 기록 세우듯 한다고 해도 좋았다.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잠에서 깨어난 여자애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다. 좋은 일이야. 나 또한 말없이
대답한다.
어느덧 이곳은 집처럼 편안했고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가 잠든 모양을 지켜보기도 하고, 깊은 잠을 깨우려는
듯 조명을 비추거나 몸 곳곳에 반응을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확대경 너머 속속들이 들여다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저 안쪽에서 무언가를,
마치 굳어버린 실핏줄처럼 박혀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지 모른다. 나는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품안 깊숙이 넣어둔 물건을 찾는 듯 가슴팍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어디선가 낡은 시계침 하나가 바야흐로 삐걱이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주정안
2004년 <곤드나와>로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2년 <네펜데스의 집>으로 21세기문학 신인상
당선
작가는 자신이 의사의 실험 대상이 되어,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고 본 작품을 완성하여 발표하였습니다.
평론가로부터 호평을 받은 작품으로,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 발견하고, 스크랩하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