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의 일기
2004년 마지막 날
재광금산면 향우회 총무의 자격으로
언뜻 들었던 금발회(거금도발전협의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직장의 점심회식도 불참하고 종무식이 끝나자마자 금산을 향했다.
녹동에서 거금도 연도교 공사를 위해 세워진 구조물울 보며
머지 않아 시작될 육지인으로서의 기대와 변화를 그리며
도착한 금산면사무소 회의실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들
서울에서 부산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바쁜 일정에서도 2일간의 시간을 내어
고향의 발전을 위해 협의해보자는 모임에 참여한 그 정성들에
우선은 찬사를 보내며 덕담도 나누고 반가움의 인사도 나누었는데
상임 부회장?의 주재로 몇 시간의 회의 진행
식사 시간도 넘긴 채 계속된 난상회의
처음 회칙을 대하는 다른 향우회 임원들과
회칙대로라면 참석하지 않아야할 이상한 임원들!
모두가 무엇인가 엇박자로 나가며
회장?이 불참하였다는 큰 공백은 메꿀 수가 없어인지
현재 구성된 금발회 불용론으로 진행되었다.
향우회원들은 동참자로서 고향에서 필요한 사항의 도우미로서 존재해야지
지금처럼 고향의 어르신들보다 앞서서 추진함은 주객이 전도되었고
다른 다툼의 근원지가될 것이며 또 다른 속내가 보임에
발기인들의 의도야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지만 논쟁의 불씨가 되기 전에
금발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서울 향우들의 발언과 나의 견해가 일치되어
서울향우가 중심이된 향우회 연합회의 기능을 갖는 다른 협의체가 있어야 한다는
희망사항으로 결론을 내리며 끝난 회의를 뒤로하고
재경금산면향우회장인 신촌의 정민, 부회장인 동촌의 승남, 석정의 복식, 월포의 장열
국민학교 동창들과 몇 십 년 만에 함께한 시간들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고 월포에서 잠을 이룰 때까지
너와 나가 아닌 우리로 남은 시간을 즐겼다.
2005년의 첫째 날
그래도 나의 습관 탓인지 취기와 피로 속에서도 아침 여섯시 반경에
잠을 깨어 화장실, 세면을 마치고 준비한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새해 해돋이를 보기위해 일행을 억지로 깨웠다.
청석의 해안도로에는 미리서 나와 기다리고 있는 차량과 인파들
반가운 얼굴들과 서로가 나눈 덕담에는 오랫만에 아무런 욕심이
내재하지 않은 순수 그 자체였으며
구름이 낄 것이라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청명하다.
바람이 부는 탓에 작은 구름이 이따금 지나지만
멀리 바다위로 장엄한 새해는 떠오르고
너와 나가 아닌 우리로서
고향사람이든지 외지인이든지 모두가 비는 소망 이루시길
빌어보며 새해에는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아침식사를 금산면 번영회에서 준비한 떡국으로 마치고
적대봉을 올랐다
10년이 지나서야 찾아본 적대봉!
많은 감회 속에서 고향사람들의 노력으로 잘 다듬어진 등산로와
[정해생] 형님들의 노고로 세워진 돌탑도 보며 50여분 오르다 보니
우리 일행은 어느듯 정상에 섰다
봉수대에서 멀리 천관산, 팔영산을 향해 소리도 쳐보고
금당도, 충도, 평일도, 생일도, 초도로 이어지는 다도해 굽어보며
호연지기도 생각하노라니
금산면기관단체장 주관으로 적대봉에 시산제를 올렸다
최연장자(81세)로 오신 옥룡의 송송학 부친님이 서투른 말씨로
면민의 평화와 나라의 안녕을 빌고
우리도 절을 올린 뒤 하산하고 있는 중에 점심까지 함께하고 헤어지자고
핸드폰이 울렸다
공식적?인 행사를 점심으로 마친 우리는 고향발전을 위해서는 향우들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다는 번영회장님의 말을 음미하며 금산을 떠났다.
녹동에서 우리 동창들과 헤어지기 싫었지만 사는 방법이 다른 나는
정민이가 마련한 김을 선물로 받으며 다음에 만나자고 안녕하고
봉암의 처갓집에서 김장을 하고 있었던 마누라를 김치와 함께 넉살 좋게 싣고
직장의 숙직 근무를 위해 나주로 향했다
2005년 1월 2일
숙직근무하고 귀가한 나는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장하느라고 쭈그리고 이틀을 보냈다는 우리 마누라
허리도 아프고 어쩐다고 하는 말을 묵살하고 피로를 풀기 위해서는
가벼운 등산이 좋다고 억지로 꼬여서 무등산의 새인봉, 중머리재.
증심사로 이어지는 두시간 반의 산행. 그리고 동동주에 머릿고기로
배를 채우고 목욕탕을 다녀와 가벼운 소주한 잔 마치니
딸네미가 오늘이 우리도 잊고 있는
“아빠 엄마의 결혼기념일”이란다. 이하 줄임
2004년 마지막 날
재광금산면 향우회 총무의 자격으로
언뜻 들었던 금발회(거금도발전협의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직장의 점심회식도 불참하고 종무식이 끝나자마자 금산을 향했다.
녹동에서 거금도 연도교 공사를 위해 세워진 구조물울 보며
머지 않아 시작될 육지인으로서의 기대와 변화를 그리며
도착한 금산면사무소 회의실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들
서울에서 부산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바쁜 일정에서도 2일간의 시간을 내어
고향의 발전을 위해 협의해보자는 모임에 참여한 그 정성들에
우선은 찬사를 보내며 덕담도 나누고 반가움의 인사도 나누었는데
상임 부회장?의 주재로 몇 시간의 회의 진행
식사 시간도 넘긴 채 계속된 난상회의
처음 회칙을 대하는 다른 향우회 임원들과
회칙대로라면 참석하지 않아야할 이상한 임원들!
모두가 무엇인가 엇박자로 나가며
회장?이 불참하였다는 큰 공백은 메꿀 수가 없어인지
현재 구성된 금발회 불용론으로 진행되었다.
향우회원들은 동참자로서 고향에서 필요한 사항의 도우미로서 존재해야지
지금처럼 고향의 어르신들보다 앞서서 추진함은 주객이 전도되었고
다른 다툼의 근원지가될 것이며 또 다른 속내가 보임에
발기인들의 의도야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지만 논쟁의 불씨가 되기 전에
금발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서울 향우들의 발언과 나의 견해가 일치되어
서울향우가 중심이된 향우회 연합회의 기능을 갖는 다른 협의체가 있어야 한다는
희망사항으로 결론을 내리며 끝난 회의를 뒤로하고
재경금산면향우회장인 신촌의 정민, 부회장인 동촌의 승남, 석정의 복식, 월포의 장열
국민학교 동창들과 몇 십 년 만에 함께한 시간들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고 월포에서 잠을 이룰 때까지
너와 나가 아닌 우리로 남은 시간을 즐겼다.
2005년의 첫째 날
그래도 나의 습관 탓인지 취기와 피로 속에서도 아침 여섯시 반경에
잠을 깨어 화장실, 세면을 마치고 준비한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새해 해돋이를 보기위해 일행을 억지로 깨웠다.
청석의 해안도로에는 미리서 나와 기다리고 있는 차량과 인파들
반가운 얼굴들과 서로가 나눈 덕담에는 오랫만에 아무런 욕심이
내재하지 않은 순수 그 자체였으며
구름이 낄 것이라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청명하다.
바람이 부는 탓에 작은 구름이 이따금 지나지만
멀리 바다위로 장엄한 새해는 떠오르고
너와 나가 아닌 우리로서
고향사람이든지 외지인이든지 모두가 비는 소망 이루시길
빌어보며 새해에는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아침식사를 금산면 번영회에서 준비한 떡국으로 마치고
적대봉을 올랐다
10년이 지나서야 찾아본 적대봉!
많은 감회 속에서 고향사람들의 노력으로 잘 다듬어진 등산로와
[정해생] 형님들의 노고로 세워진 돌탑도 보며 50여분 오르다 보니
우리 일행은 어느듯 정상에 섰다
봉수대에서 멀리 천관산, 팔영산을 향해 소리도 쳐보고
금당도, 충도, 평일도, 생일도, 초도로 이어지는 다도해 굽어보며
호연지기도 생각하노라니
금산면기관단체장 주관으로 적대봉에 시산제를 올렸다
최연장자(81세)로 오신 옥룡의 송송학 부친님이 서투른 말씨로
면민의 평화와 나라의 안녕을 빌고
우리도 절을 올린 뒤 하산하고 있는 중에 점심까지 함께하고 헤어지자고
핸드폰이 울렸다
공식적?인 행사를 점심으로 마친 우리는 고향발전을 위해서는 향우들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다는 번영회장님의 말을 음미하며 금산을 떠났다.
녹동에서 우리 동창들과 헤어지기 싫었지만 사는 방법이 다른 나는
정민이가 마련한 김을 선물로 받으며 다음에 만나자고 안녕하고
봉암의 처갓집에서 김장을 하고 있었던 마누라를 김치와 함께 넉살 좋게 싣고
직장의 숙직 근무를 위해 나주로 향했다
2005년 1월 2일
숙직근무하고 귀가한 나는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장하느라고 쭈그리고 이틀을 보냈다는 우리 마누라
허리도 아프고 어쩐다고 하는 말을 묵살하고 피로를 풀기 위해서는
가벼운 등산이 좋다고 억지로 꼬여서 무등산의 새인봉, 중머리재.
증심사로 이어지는 두시간 반의 산행. 그리고 동동주에 머릿고기로
배를 채우고 목욕탕을 다녀와 가벼운 소주한 잔 마치니
딸네미가 오늘이 우리도 잊고 있는
“아빠 엄마의 결혼기념일”이란다. 이하 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