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005년 4월3일 제 62회) '불멸의 이순신(不滅의 李舜臣)' 에서 우리 거금도의 조선시대 지명인 "절이도" 가 나옵니다.
못들으셨다구요.
일본 장수가 옥포해전에서 패한 후 도망갈 때 해설자 분께서 일본 장수 '도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도도 장수가 후일 다시 이순신 장군과 해전을 펼친다는 내용. 그 부분에 23전 23승의 연승 신화의 한 축에 속해있는 '절이도해전' 이 나온답니다.
혹시 재방송을 볼 기회가 있으시면 도도 장수가 도망갈 때 나오는 해설자 분의 음성을 자세히 들어보시구요,
그 '절이도' 가 우리 거금도 고향이라고 아는 체를 하시기 바랍니다. ^^
제가 이글을 쓴 이유는 2003년 8월에 "절이도 해전을 아시나요" 라는 글을 올린게 있었는데,
당시엔 "불멸의 이순신" 을 하지 않았기에 제 혼자 만의 관심으로 끝나 버리지 않았을까 하고 재차 강조하기 위해 글을 남깁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시면 옥포해전 설명과 및 노량해전<==이부분에서 절이도해전에 대한 상세설명이 나오니 빼먹지 마시고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순신의 리더십(24) - 8. 노량해전 [절이도해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8. 노량해전 노량해전을 관음포 해전이라고도 부른다. 실제 해전은 남해도 북단의 노량리(남해대교 위치)의 서남쪽 포구인 관음포에서 행하여졌기 때문이다.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치러진 마지막 해전으로서 이순신이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7년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조·명 연합 함대에 의한 일본수군과의 대접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수군장수 등자룡(鄧子龍)도 전사하였지만, 연합함대의 실질적인 전투지휘와 200여척의 적 전선을 격침시킨 전과는 제3대 3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다. 그러면 노량해전 이전의 해전상황을 먼저 살펴본 다음 노량해전의 하이라이트를 제시하려고 한다. 원균이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해역의 제해권을 일본수군에게 빼앗긴 다음의 첫 승전이 바로 명량해전이었으나, 초대 3도 수군통제사때 같은 강력한 전진기지를 한산도에 설치할 수가 없었다. 이미 이 곳은 적의 소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서에서 동으로 단계적 작전해역을 넓혀가면서 남해의 제해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이순신은 1597년 10월 29일, 보화도(또는 고하도라고 함 : 목포와 화원반도 사이의 섬)에 수군기지를 설치하고 멀리 진도까지의 460 킬로미터나 되는 광역 연안방어를 하면서 수군의 재건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108일 만에 29척의 전선을 신조함으로써 42척 규모의 함대를 재건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42척의 전선 승조원이 8천여 명이나 소요되는데 이들에 대한 동원·관리가 그 당시 얼마나 어려웠겠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남해의 최서측방이 확보되자 1598년 2월 18일 이순신은 고금도(완도군 고금면)로 전진기지를 재이동 설치하였다. 이 곳에서 일본군 장수 고니시(小西行長)가 위치한 예교(순천군 해룡면)까지는 무려 280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조·일 7년전쟁이 종식된 다음 14개월 후에 조정에서 파악한 3도 수군의 함선수가 82척이었다고 하니, 노량해전 당시에 참전한 이순신 함대의 전선수인 85척의 기록과 일치한다. 1척은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수군에게 빌려준 것이 분멸 당했고, 2척은 전후에 사용불가로 폐선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이순신은 재취임후 불과 5년 미만의 짧은 기간중 전 국토가 적에게 유린당한 상황하에서 모두 43척의 전선을 신조한 기적을 이룩한 것이다. 이리하여 보화도와 고금도 기지에서 재건된 이순신의 3도 수군은 그 당시의 각 함대별 척수는 알 수 없지만, 전선 85척, 협선 85척, 승조원 16,865명의 규모로 급성장 한 것이다. 명나라 수군을 진린(陣璘) 도독이 이끌고 고금도에 당도한 것은 1598년 7월 16일이었다. 함정세력은 사선(승조원 100명) 25척, 호선(승조원 30명) 77척, 비해선 17척, 잔선 9척, 도합 128척의 대함대였다. 그 당시 진린은 너무도 성격이 포악하고 위세가 당당하여 조정에서 아무도 그의 횡포를 거역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유성룡은 그의 징비록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임금이 청파들까지 전라도로 내려가는 진린의 군사가 노끈으로 찰방(察訪)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같이 앉았던 대신들에게 말하되, 아깝게도 이순신의 군사마저도 또 패하겠구나. 저러한 진린이 군중과 같이 있으면 견제를 당하고 의견이 서로 틀려서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우리 군사들을 학대할 것이다. 어찌 순신의 군사가 안 패하겠는가 했더니 모두들 그렇다고 하고 서로 탄식할 따름이었다.」 참으로 한심한 약소민족의 아픔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오히려 명나라 수군의 행정·작전권까지 위임받아 지휘하는 놀라운 리더십의 성과를 과시하였다. 진린이 이순신과 함께 근무하면서 이순신의 용병술은 물론 인격에 감동·감화되어 연합함대의 상호지원과 신뢰가 매우 돈독해짐으로써 때로는 적극적으로 해전에 가담하지 않고 방관하거나 작전을 방해·저지한 적도 있었지만, 마지막 예교해전과 노량해전에서는 명나라 수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끝까지 일본수군을 추격하는 등 전의를 약간 보인 것이다. 이는 오로지 이순신과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던 바 진린은 「공은 과연 작은 나라 사람이 아니라, 중국에 가면 나보다 더 높은 벼슬을 할 것이다」라고 이순신을 극구 찬양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때 고금도의 조선수군 기지로부터 약 140킬로미터 멀리 동쪽해안의 예교에는 일본군 장수 고니시(小西行長)가 거느리는 15,000여명이 주둔하고 있으며, 척당 300여명의 승조원을 가진 대형선 80여척이 주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이순신은 입수하고 있었다. 명나라 수군이 도착한지 2일째 되는 1598년 7월 18일, 드디어 적함대 100여척이 금당도(고금도와 거금도 중간의 섬)로 침범해 온다는 급보에 접하고서 이순신은 전함대에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한 다음 그날 밤에 길목인 금당도로 전진 결진하여 그 곳에서 경야했다.
그러나 이때 명나라 수군은 합세하지 않고 안전해역에서 후행하면서 관전하는 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7월 19일 새벽에 일본함대는 거금도(절이도)와 녹도(소록도 근처) 사이로 뚫고서 금당도로 나오는지라 이순신 함대와 거금도 북방해역에서 해상 요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난중일기의 이 당시 부분이 망실되었고 이충무공 전서에도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천병(명나라 수군)을 모욕하는 일은 황제를 모욕한다는 취지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킴), 선조 수정실록(선조 31년 8월)에 보면 이순신 함대가 이를 요격하여 적선 50여척을 분멸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따라서 나머지 50여척도 대파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순신자령수군(舜臣自領水軍 :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돌입적중 발화포(突入賊中 發火砲 : 일본함대 속으로 돌진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소오십여척 적축환(燒五十餘隻 賊逐還 : 50여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때 진린은 구경만 하고 있다가 전과가 욕심이 나서 이순신에게 와서 협박을 함에 할 수 없이 적의 목벤 것 40개를 진린에게 넘겨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국의 원군(援軍)이 참전하지도 않고 소국의 전과를 탈취해도 천군(天軍)으로 대접받는 판이었다.이 해전을 절이도(거금도)해전이라 하는데 , 망국적인 사대·왕조사가들이 왜곡 집필한 「이충무공전서」에 이 사실이 누락되어 있어 간과하기 쉽지만, 당시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을 배후 지원세력으로 업고서 명량대첩의 전훈을 되살리면서, 원균의 하극상에 의해 실패한 장문포·영등포해전의 쓰라림을 생각할 때, 결코 허술하게 대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군 피해없이 적함 50척을 수장시킨 대전과가 정확하고 정직하게 공식문서에 기록·반영되지 않았음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튼 이 해전의 성과로 이순신 함대는 고금도에서 거금도까지 지배해역을 확대함으로써 고흥반도 이서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이때 분멸한 적전선 50척과 대파 내지 반파된 적전선 50척에 탑승한 적군을 산정하면 16,000여명이 된다. 물론 아군은 함선 손실은 없었지만, 전사상자가 30여명이 발생한 것으로 나와있다. 이 해전이 격전이었으며 엄청난 적군의 인명손실이 있었기에 사실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1795년에 윤행님(尹行恁)이 편찬한 「이충무공 전서」에는 녹도만호 이여송이 진린에게 적전선 6척과 수급 69개를 상납한 사실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봐 거금도 앞 바다가 적의 시체로 가득찼던 것이 틀림없다.
1598년 7월 19일 치러진 거금도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명군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서진중이던 100척 규모의 적함대를 거의 괴멸시키는 대전과를 수립함으로써 적의 요새지인 예교(광양만)까지는 못미치지만 고흥반도까지는 완전 장악하고, 이제 계속 동진하여 여수반도를 끼고 있는 순천만과 남해도의 서측방 광양만을 장악하면 전라도 수역을 확보할 수 있게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나라 수군을 동원하여 연합작전을 펴 일본의 요새진지인 예교(관음포) 앞 포구에 주박하고 있는 100여척의 함선을 분멸시키면, 고니찌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될 것이고 왕년의 한산도 전진기지를 재탈환 확보함으로써 경상도 해역까지 망라하는 광활한 남해의 제해권을 쥘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순신은 골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예교 공격을 위한 결정적 시기만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사실을 간파한 진린이 사전에 방해공작으로 가로막는지라, 이에 이순신은 여러번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통분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엉뚱한 처방을 내린 선조의 작태가 더욱 한심하다. 내용인즉 명군 경략(총사령관격)에게 건의하여 진린을 육장으로 전임시키고 수군 유격장 계금으로 하여금 명나라 수군과 조선수군을 통합 지휘토록 함으로써 수륙합공으로 예교를 점령하자는 고육지책을 구상한 것이다. 이 소식이 진린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대노하여 이순신에게 호통을 쳤다. 결국 진린에게 약점만 잡힌 선조는 이 조처를 시행치 못하고 없었던 것으로 하였다. 명나라 수군이 144척의 함대에 5,000여명을 거느리고 고금도에 도착했지만, 이순신 함대에서 군량을 공급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싸움은 하지 않으면서 민폐만 끼치는 애물단지가 된 이유는 한마디로 개별 함선의 규모나 성능이 너무도 왜소하여 조선과 일본전선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린은 2개월 가까이 무위도식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절이도해전 때와 같이 탈공보고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명나라 안찰사 왕사기가 현장을 다녀간 다음 진린의 실상을 천황에게 보고했기 때문에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천장(天將)으로서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조선수군이 출전을 하지 않아야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예고출전 계획은 조정에 보고되어 명나라에도 정식으로 통보되었던 바, 진린은 더 이상 이 작전을 기피하거나 출전방해의 약은 꾀를 부리지 못하게 되었다. 조·명 연합수군은 9월 15일 고금도를 출항하여 금당도와 거금도 남단을 통과한 다음 고흥반도 남쪽과 마주보는 외나로도에서 2일간 머물면서 전투준비를 했다. 이때 양칙의 함대세력을 보면 이순신 함대가 전선 85척, 협선 85척, 합계 170척, 진린 함대가 사선 25척, 호선 77척, 기타 26척으로 129척이었다. 고니시의 일본군기지인 예교를 수륙합공으로 포위 섬멸하려는 조·명 연합함대의 출전과 때를 같이하여 명나라 육군제독 유정(劉정)이 1만 5천명을 거느리고 예교 북쪽에 와서 진을 쳤던 것이다. 만일 이 작전이 성공적으로 실행만 됐다면 고니시는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목상 조·명 연합수군이 9월 20일, 21일, 22일, 10월 2일, 3일, 4일 등 6회에 걸쳐 해상공격을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육군은 해전을 관망하고 뒷짐만 지고 있었다. 선조실록(31년 10월 12일)에 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다음과 같은 통탄할만한 글이 있다. 「초3일 수군은 밀물을 타고 혈전을 하였다. 수군이 발사한 대포탄이 고니시의 방에 명중하자, 몹시 놀란 왜인들은 모두 동변으로 나갔다. 만일 서변에서 육군이 쳐들어갔다면, 성은 함락되었을 것이다........ 왜성을 점령할 호기인데도 유정은 수수방관만 했다....... 때마침 사천에서 명군이 패전했다는 통보를 받은 유정이 정신이 혼미하여 퇴군하였으니 통곡할 일이다.」 9월 19일 연합함대는 예교 입구의 유도에 도착하여 결진하고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연합함대가 예교에 대한 6차에 걸친 공격작전 가운데 가장 격렬한 전투는 10월 2일과 3일이었는데, 이때 명군은 썰물을 모르고서 지체하다 좌초된 배 23척을 포함하여 사선 19척과 호선 20척을 잃었다. 따라서 이때 최소한도 병력 2,300여명도 몰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수군은 약 360명의 전사상자가 났지만, 적선 30여척을 당파·분멸하고 11척을 나포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교작전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1598년 8월 18일 도요도미는 61세를 일기로 급사했음이 뒤늦게 조선주둔 일본군에게 알려짐으로써,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안전하게 귀국할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교굥격이야말로 적장 고니시를 생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명군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이순신은 일단 10월 9일 고금도로 귀환한 다음, 예교 기지를 완전 섬멸·소탕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면서 고니시 일당의 해상도주로를 봉쇄해 놓고서 사로잡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때 명나라 수군사령관 진린은 고니시의 부하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고는 고니시의 구원 요청 전령선이 해상봉쇄망을 뚫고 남해로 갈 수 있도록 몰래 눈감아 주었다. 이 전령선이 고성의 다지바나(立花統虎), 사천의 시마쓰(曷津義弘), 남해의 소요(安義智) 등 왜장에게 알려지자 고니시를 구출하기 위해 11월 18일 드디어 수군 6만여명이 300여척으로 된 함대를 이끌고 노량으로 쳐들어 온 것이었다. 이순신은 지체없이 봉쇄망을 일단 풀고 출격준비를 갖추면서 명수군 지휘관 진린과 협조했으나, 그는 일본수군과 이미 내통한 바 있는지라 협력을 거부했다. 이순신은 그의 제지를 단호히 뿌리치고 편범불반(片帆不返)의 정신으로 단독 출격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진린은 당황한 나머지 할 수 없이 이순신 함대의 꽁무니를 따라 나섰다. 이순신 함대가 노량 못미쳐 남해도 서북단 포구인 관음포 앞 바다에 도착한 것이 1598년 11월 18일 밤 10시경이었다. 이순신은 얼마전의 절이도 해전에서 대패하여 함정세력이 반감된 명수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의 죽도 뒷편에 일단 대기토록 했다. 또 다시 5킬로미터 후방에서 해전의 보조공격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 이순신 함대의 전선은 85척이었으나, 명수군은 허약한 폐잔선 63척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판옥선 2척을 명나라 도독 진린과 부총병 등자룡의 지휘함으로 쓰도록 빌려 주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11월 19일 새벽에 혼자 갑판으로 나와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하늘에 축원을 올렸다. 의미심장한 기도였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이미 적함 3백여척은 새벽 4시경 노량해협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예교포구의 적함 다수와 합세한 적은 이순신 함대의 주공과 진린 함대의 조공으로 협격을 당한지 4시간 동안 사상 최대의 혈전을 벌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명수군도 등자룡이 전사한 것으로 봐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순신은 시종일관 선두에서 연합함대를 진두 지휘했다. 좁은 해협에 약 500척의 피아 함선이 치열한 접전을 4시간이나 계속하는 동안 연합함대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순간 이순신과 등자룡이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적함은 200여척이 격침·분멸되고, 100여척은 손상을 입고 겨우 남해도 남쪽으로 빠져나가 도망쳤던 것이다. 진린 도독의 보고에도 그 전과를 비슷하게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적선 100척은 나포하고, 200척을 불태웠으며, 참수는 500급, 생금 180여명, 익사자는 물위에 떠오르지 않아 알 수가 없고, 이순신이 죽었다.」 진린의 보고에서 100척 나포는 믿기 어려우나, 나머지는 비슷한 전과보고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유성룡의 초본 징비록에도 순신진격 대파지(舜臣進擊 大破之) 분적선 이백여척(焚賊船 二百餘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노량해전의 경과를 6하 원칙에 따라 집약·종합해본다. 노량해전 종합 노량해전에서 아쉬운 것은 명군이 처음부터 이순신 함대와 긴밀한 협조를 했더라면 고니시를 놓치지 않고 생포하든지 수장시킬 수 있었을 것인데, 거금도(절이도) 해전에서 대패한 콤플렉스가 있어 노량해전에서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마지막 추격전에서 이순신을 사망케 하고 도주하는 적함 100여척을 사로잡거나 수장시키지 못한 점이다. 이 해전에서 의외로 명나라 수군이 피해가 적은 것은 참전보다는 관전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창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고 유언을 남기면서까지 이순신은 새벽에 기도한데로 적을 무찔러 유한 없는 원수를 갚겠다는 결의를 명군에게 전하였다. 그래서 그날 싸움은 아침 8시에 대세가 판가름 났지만, 이순신 함대는 정오까지 계속 잔적을 소탕하기 위해 추격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만일 명나라 수군이 중간지점에서 매복했다 해상요격을 했더라면, 사상 최대의 마지막 전과를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후일 숙종대왕이 현충사 제문에 쓴 다음 한마디는 이순신의 우리 민족에 대한 죽음의 가치를 단적으로 표현한 최고의 말씀이다. 살신순절 고유차언(殺身殉節 古有此言 : 절개에 죽는단 말은 옛부터 있지만), 망신국활 시견사인(亡身國活 始見斯人 :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조·일 7년전쟁을 통하여 쟁취한 이순신 함대의 8대 해전을 비롯한 주요 해전에서의 총전과는 적의 대·소함선 당파, 격침, 분멸, 노획한 것이 모두 935척이고, 살상, 수장시킨 적 병원의 수는 12만 6천여명으로 추정·산출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확인된 아군의 손실은 전선망실 3척, 전사상자 1,022명으로 집계된다. 사상 유례없는 해전의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지상전에서 거의 전패함으로써 결국 조·일 7년전쟁은 일본군의 자진철퇴로 1592년 4월 13일 발발하여 1598년 11월 24일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면 1832년에 마지막 해전의 격진지에 세워진 관음포 유허비(遺墟碑)의 비문을 여기에 소개한다. 전쟁과 평화 양면성을 이 시에서 재음미한다. 남쪽 바다에 해는 빛나고 한바다 물결은 아득한데 바람 걷고 풍랑은 잔잔하여 고래 악어들 깊이 숨었네 마을에 집들은 즐비한데 아낙네와 아이들은 오손도손 밭 갈아 농사짓고 누에치니 전쟁을 모르고 평화를 누리네 그 누구의 은혜던가 우리 충무 그리나니 우뚝하고 장하도다 평화로운 우리 나라 그분의 덕이로다 천하무적 거북선이 크게 이겨 공훈 떨치고 명량에서 갑옷 씻으니 옥포에서 봉화가 꺼졌네 둥실 둥실 만척 배로 압록강에 군량 실어 임금 수례 도로 돌려 종묘 안정 시켰다니 공훈을 만세에 끼쳐 놓고 임의 몸은 가셨는가 길이길이 백성을 편케 하니 만백성 다같이 눈물짓네 재앙 쫓고 복을 낳아 바다 목을 막았도다 큰 물결은 지금도 아득한데 무심한 별빛만 반짝이네 몸을 바쳐 인을 이룩하신 임의 혼령 굽어 보시는데 영원토록 임의 공렬 비에 새겨 전하노라 내용 출처 : 이순신의 리더쉽(저자 李 善 浩) 본문중에서.. 한국시사문제연구소 http://www.kiocis.co.kr/ps.
불멸의 이순신이 시작할때 해주는 타이틀 자막 맨 첫부분 쌍대환도(雙大環刀)에 각인한 시구 중에 '一揮掃蕩' 이라는 부분이 보입니다.
그 전체 시구를 아래에 소개해 드립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쌍대환도(雙大環刀)에 각인한 시구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석자 칼로 하늘에 다짐하니 산과 물의 빛이 떠는도다)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한번 휩쓸제, 핏물이 산과 물에 얼룩지리라) - 李 舜 臣 -
▼충무공 이순신 전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