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글은 영월 책 박물관 박대헌 관장님의 서천군에서 '마량진, 한국최초 성서 전래지' 세미나 발표문입니다. 본문중에 거금도에 관한 내용이 있어 본문전체를 게재했습니다. 중간 8번 주제에 거금도 내용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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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 관장은 지난 7월 29일 충남 서천군에서 "마량진, 한국최초 성서 전래지"란 주제로 서천군 문화관광 개발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 하였다.
발표문 요지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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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 전래지
- 서천군 문화관광 개발을 위한 세미나 -
장소 : 서천군 서면 도둔감리교회
일자 : 2003년 7월 29일
주최 : 서천군 기독교연합회
후원 : 서천군
박대헌
일러두기
1. 용어 및 해설
(1) 한글을 위주로 사용하였으나 서명, 인명, 지명 등 고유명사나 외국어는 괄호에 넣었다.
(2) 국적을 알 수 없는 외국어 또는 그 음가를 알 수 없는 단어는 원어를 그대로 수록하고 그 번역문 또는 음역을 괄호에 넣었다.
(3)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였다.
(4) 연대는 서기로, 월력은 양력을 사용하였으나 부득이 음력을 사용할 경우에는 괄호에 그 표시를 넣었다.
(5) 조선조부터 1949년 이전의 국호는 편의상 조선으로 통일하였다.
2. 약물
(1) 잡지․신문 등을 포함한 동양서의 제목은 『 』로, 잡지․신문 등의 기사 및 논문은 「 」로 표시하였다.
(2) 잡지․신문․지도 등을 포함한 서양서의 제목은 한글번역문을 사용하였으나, 처음에 한하여 원문을 이탤릭체로 괄호에 넣었다. 잡지․신문의 기사․지도 및 논문은 「 」로 표시하였다.
(3) 지명 또는 특별한 사항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는 ‘ ’로 표시하였다.
(4) 본문중 인용 부분은 “ ”로 표시한 경우도 있다.
*** 본 논문에 실린 모든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영월책박물관(관장 박대헌)에 있으며, 사전 승낙 없이는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박대헌(朴大憲)
영월책박물관장.
저서로 『西洋人이 본 朝鮮』(壺山房, 1996),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열화당, 1999)이 있으며, 이 두 책은 제37회와 제40회 한국출판문화상을 각각 수상했다.
영월책박물관 설립과 국민독서운동 함양의 공으로 제8회 독서문화상을 받았다.
영월책박물관 / 강원도 영월군 서면 광전리 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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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Ⅰ. 우리나라와 서양 교류의 태동
1. 아랍문헌에 나타난 신라(9세기 중엽~1154년)
2. 뤼브뤼크의 동방여행(1253년)
3. 마르코 폴로의 동방여행(1271~1295년)
4. 마르티니오의 『중국신지도첩』(1655년)
Ⅱ.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
1. 최초 조선 방문 서양인 세스페데스 신부(1593년)
2. 최초 조선 귀화 서양인 벨테브레(1626년)
3. 제주에 표류한 하멜과 그 일행 36명(1653년)
4. 라 페루즈의 동해안 탐사(1787년)
5. 브로턴의 남해안 탐사(1797년)
6. 리라호와 알세스트호의 서해안 탐사(1816년)
7. 최초 조선 방문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1832년)
8. 사마랑호의 남해안 탐사(1845년)
9. 악테온호의 제주해역 수로 탐사(1859년)
10. 오페르트의 조선 통상 시도(1866~1868년)
Ⅲ. 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 전래지
1. 성경 전래 경위
2. 리라호와 알세스트호의 조선 방문의 문화사적 의의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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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우리나라가 서양에 처음 알려진 것은 1255년 경 원조(元朝)에 파견된 프랑스인 뤼브뤼크가 『뤼브뤼크 여행기』에서 ꡐ섬의 정부 카우레ꡑ라고 하는 고려에 관한 기록에서다. 우리나라로 추정되는 모습이 서양지도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1554년 로포 호멤의 지도에서이고, 우리나라 이름이 서양지도상에 처음 기록된 것은 1568년 두라도의 지도에서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 12월 왜군을 따라 웅천항(熊川港)에 도착한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다. 그 후 1627년 네덜란드의 벨테브레가, 1653년에는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하멜은 조선에서 13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다가 1666년 동료 7명과 함께 조선을 탈출하여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1668년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다. 그는 귀국하여 소위 『하멜표류기』를 발표하니 이 책이 조선을 직접 방문한 서양인에 의해 씌어진 최초의 조선관계 출판물이 되었다.
그러나 하멜의 여행기보다 13년이나 앞선 1655년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니오의 『중국신지도첩』이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중국을 위주로 하였지만, 조선의 지도와 팔도(八道)의 명칭이 정확하게 소개되어 있어 당시로서는 개선된 조선의 모습을 서양에 최초로 알린 출판물이다. 그로부터 서양의 탐험가․선교사․군인․학자․상인들에 의해서 조선의 사정이 서방세계에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본고는 이처럼 우리나라가 서양인들에게 알려진 이후부터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기 까지의 시기에 조선을 찾아 온 서양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씌여졌다.
이 가운데에는 1816년에 영국의 리라호와 알세스트호가 충남 서천 마량진을 방문하고 이곳의 주민들과 접촉을 갖고 성경을 전해 준 일이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서천군에서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성경 전래지인 마량진을 문화관광지로 개발하고자 함에 있어 그 사실 여부와 사업의 타당성 등을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본고가 서천군의 이러한 계획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Ⅰ. 우리나라와 서양 교류의 태동
1. 아랍문헌에 나타난 신라(9세기 중엽~1154년)
우리나라의 존재가 중국이나 일본에 알려진 것은 역사 이전의 일이다. 그 후 우리나라가 서양에 알려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가야만 했고 그 초기단계에 동양과 서양의 중간 교량역할을 이슬람 문화권의 아랍․이슬람제국이 하게 되었다.
9세기 중엽의 아랍 문헌에는 많은 아랍-무슬림들이 신라에 내왕했다는 사실과 함께 신라에 관한 여러 가지 귀중한 기록이 오늘날까지 원본 그대로 보존되어 오고 있다.1) 이 기록들은 당시의 무슬림 상인이나 여행가 또는 학자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아랍․이슬람제국의 지리학자 쿠르다지바(Ibn Khurdādhibah, 820~912)는 『제도로(諸道路) 및 제왕국지(諸王國志)(Kitābu'l Masālik Wa'l Mamālik)』에서 다음과 같이 신라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중국의 맨끝 깐수의 맞은편에는 많은 산과 왕(국)들이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신라국이다. 이 나라에는 금이 많으며 무슬림들이 일단 들어가면 그 곳의 훌륭함 때문에 정착하고야 만다. 이 나라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2)
이렇듯 아랍문헌에 나타난 신라관계 기술은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신라의 자연환경과 인문지리관계, 그리고 무슬림들의 신라 내왕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3)
1154년에 이르러 무슬림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al Idrīsī, 1100~1166)가 시실리아의 노르만 왕 로제 2세에게 『로제왕의 책(Book of Roger)』으로 알려진 『천애횡단갈망자(天涯橫斷渴望者)의 산책(散策)(Nuzhatu'l Mushtāq fi Ikhtirāqi'l Afāq)』을 저술해 바쳤는데 여기에 세계지도 1장과 세분지도 70장이 포함되어 있다. 그 1장의 세분지도에 여러 개의 섬을 그려놓고 ‘신라(sila)’라고 표기하고 있다.4)
이 세계지도는 그때까지의 지리학적 지식을 모두 정리해 집대성했으며 아랍․이슬람제국의 가장 번성기이자 신라와의 교역이 번창했을 때 만들어진 지도다.
2. 뤼브뤼크의 동방여행(1253년)
1253년 교황 인노첸시오(Innocentius) 4세 및 프랑스의 루이 9세는 이슬람의 동진(東進)을 막기 위해 원(元)나라 헌종(憲宗)인 대카안(Great Khan, 大汗) 뭉케(Möngke)에게 친서(親書)를 전달하고 동시에 기독교를 포교할 목적으로 프랑스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뤼브뤼크(Guillaume de Rubruck, 1220~1293)를 몽고에 파견했다. 뤼브뤼크는 그해 5월 7일 크리미아의 이탈리아 소식민지를 향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출발, 흑해를 건너 5월 21일 수닥(Sudak)에 도착하였다. 뤼브뤼크는, “타타르인들 사이에 있는 나를 발견하였을 때, 내게는 진정으로 내가 다른 시간 다른 세상으로 옮겨진 것처럼 보였다”5)고 미지의 세계를 여행한 소감을 말하기도 했다. 1255년 트리폴리로 돌아온 뤼브뤼크는 『뤼브뤼크 여행기(Itinerarium fratris William de Rubruquis de ordine fratrum Minorum)』를 남겼는데, 이 책은 중세 아시아를 소개한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특히 이 책에는 ‘섬의 정부 카우레’6)라고 하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은 고려가 유럽에 알려진 최초의 기록이다.
3. 마르코 폴로의 동방여행(1271~1295년)
이탈리아의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는 1271년부터 1295년까지 사이에 17년동안 중국에서 생활하는 등 티베트․버어마․인도를 포함한 동양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이때의 여행기 『마르코 폴로 여행기(The Travels of Marco Polo)』7)는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의 정치․지리․풍속․인정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이후 유럽의 지도 제작자들과 지리 탐험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교류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책의 내용중에는 고려를 지칭한 ‘카울리(Cauli)’8)란 말이 수록되어 있다.
4. 마르티니오의 『중국신지도첩』(1655년)
마르티니오(Martino Martinio, 1614~1661)는 이탈리아 예수회 신부로 중국에 파견되어 항저우(抗州)와 난징(南京)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한편으로 중국의 지리와 지도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던 중 1651년에 일시 귀국해, 네덜란드의 지도 제작자 요안 블라외(Joan Blaeu, 1596~1673)의 도움으로 1655년에 『중국신지도첩(Novus Atlas Sinenisis)』9) 을 간행했다.
『중국신지도첩』은 『세계신지도첩(Theatrum Orbis Terrarum, sive Novus Atlas)』의 제6권에 해당하는 지도첩이다. 원래 『세계신지도첩』은 요안 블라외가 그의 아버지 빌렘 양스존 블라외(Willem Janszoon Blaeu, 1571~1638)의 세계지도첩 제작사업을 이어받아 완성시킨 지도첩이다. 이 지도첩은 1648년부터 암스테르담에서 라틴어판으로 출간하기 시작해 1655년에 모두 여섯권으로 완간됐으며 각 권마다 독립된 명칭을 가지고 있다. 이들 중 처음의 세권은 1642년부터 1643년 사이에 간행된 화란어본 지도첩과 같은 내용인데 마지막 세권이 새로 추가된 것이다. 처음의 제1․2․3권과 제4권은 1648년에, 제5권은 1654년에, 제6권은 1655년에 출간됐는데 제6권이 바로 마르티니오가 작성한 『중국신지도첩』이다.
이 지도첩은 본문 171면, 서문 및 부록 등이 81면, 속표지 1장, 채색지도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7장의 채색지도는 「중화제국신지도(Imperii Sinarum Nova Descriptio)」란 제하의 중국전도 1장과 중국의 성도(省圖) 15장을 비롯해 조선과 일본을 함께 그린 「일본지도(Japonia Regnum)」 1장이 있다. 19면에 달하는 카탈로그 중 마지막 장에는 랴오둥(遼東)과 조선8도(朝鮮八道)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지도에서 조선의 명칭은 ‘코레아(Corea)’로 표기되어 있으며 반도(半島)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 산을 여러 개 그려놓고 있으며 강은 2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압록강(鴨綠江)이 ‘얄로(Yalo)’로 되어있고 현재의 한강(漢江)으로 보이는 것은 명칭없이 표시되어 있다. 또 8도의 명칭은 비록 그 위치는 다소 부정확하나 그 중심지를 지도부호로 나타내면서 정확하게 표기하고 있다. 지도의 윗쪽으로부터 ‘함경(Hienking)’, ꡐ평안(Pinggan)’, ꡐ경기(kingki)’, ꡐ강원(Kianguen)’, ꡐ황해(Hanghai)’, ꡐ경상(Kingxan)’, ꡐ충청(Chungcing)’, ꡐ전라(Ciuenlo)’ 등으로 표기하고, 제주를 ꡐ풍마도(I. Fungma)’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한자(漢字)의 음가(音價)를 라틴어로 표기한 것으로 8도의 지칭이며, 제주가 원대(元代)에 목마장(牧馬場)으로 이용된 일이 있으므로 중국에서는 제주의 별칭을 말이 풍부한 섬인 ‘풍마도(豊馬島)’라고 부른것 같다.10) 이 지도첩은 당시로써는 개선된 조선의 모습을 서양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제주가 ‘풍마도’라는 명칭으로 세계지도상에 처음 나타나게 되었다.
Ⅱ.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
1. 최초 조선 방문 서양인 세스페데스(G. de Céspedes) 신부(1593년)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명은 오랜 전통을 지니면서 발전되어 왔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까지도 서양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비 속의 나라였다.
16세기 이후 스페인과 포루투갈인들의 극동 항해를 통하여 유럽은 중국과 일본을 현실적으로 알게 되었고, 곧 이어 중국과 일본과의 교역을 시도하는 한편 선교사를 파견하여 본격적인 동서문화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스페인 예수회 소속의 수도사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 28일 왜군을 따라 웅천항에 도착하니, 그는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이 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인들과는 접촉한 흔적이 없으며, 다만 임진왜란 당시 부관구장이었던 고메즈(P. Gómez) 신부에게 보낸 서간에서 당시의 전쟁 상황을 부분적으로나마 전하고 있다. 이 서간문은 임진왜란의 현지 목격기라는 점과 서구인이 조선 땅에서 남긴 최초의 문학적 기록이라는데 그 중요한 의의가 있다.
2. 최초의 조선 귀화 서양인 벨테브레(J. J. Welteveree)(1626년)
벨테브레는 네덜란드 리프(Rijp) 출신으로 1626년 홀란디아(Hollandia)호 선원 으로 동양에 왔다가 이듬해 우베르케르크(Ouwerkerck)호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경주(慶州)11) 근처에 표착하였다. 동료 선원 히아베르츠(D. Gijsbertz), 피에테르츠(J. Pieterz)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잡혀 1628년 서울로 압송된 뒤, 동료들과 함께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 총포 제작의 일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훈련도감군(訓練都監軍)을 따라 출전하여 청(淸)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이때 히아베르츠와 피에테르츠는 전사하였다.
그후 1653년 8월 15일 밤, 네덜란드의 선박 스페르웨르(Sperwer)호가 제주의 남쪽 바닷가에 표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멜을 포함한 36명의 생존자가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조선을 방문한 것이다. 그 해 10월 29일, 이들을 인수해 가려고 서울에서 관원들이 파견되어 왔는데, 이때에 벨테브레가 통역을 하기 위해 동행하였다. 하멜 일행이 벨테브레와 상면하는 상황을 살펴보면,
목사(牧使)는 우리들에게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 같으냐고 물었다. 우리들이 그가 네덜란드 사람 같다고 대답하였더니, 목사는 웃으며, 당신들이 잘못 보았다. 그는 조선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쌍방간에 여러 가지 말이 오간 뒤에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그 사람이 네덜란드 말로 우리들이 누구이며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12)
이렇게 해서 하멜 일행은 조선 땅에서 같은 동포인 벨테브레를 만나게 된다.
당시 벨테브레는 박연(朴淵 또는 朴燕, 朴延)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사회에 알려져 있었으며,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으나 그 후손은 오늘날까지도 알 길이 없다. 이로써 벨테브레는 조선에 귀화한 최초의 서양인이 된 셈이다.
그러나 벨테브레는 수십 년 간을 조선에서 생활하였으면서도 그 자신은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3. 제주에 표류한 하멜과 그 일행 36명(1653년)
1582년 풍리이(馮里伊)란 사람이 제주에 표도했다가 곧 중국으로 송치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들어 우리나라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13) 또, 1627년 네덜란드의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가 제주에 표착한 최초의 서양인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풍리이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전해지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로써는 그를 서양인으로 단정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듯하다.14)
또 벨테브레가 조선에 표착한 곳은 일반적으로 제주라고 잘못 알려져 있고,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6)과 『제주도지(濟州道誌)』,17) 초등학교 『사회』 6-1,18) 『사회과 탐구』 6-119) 교과서 등에도 그렇게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벨테브레가 표착한 곳은 제주가 아니고 경주 근처 해안가로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20)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 12월 28일 일본군을 따라 웅천항에 도착한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다.21) 또 제주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은 1653년 8월 16일 하멜(Hendrik Hamel, 1630?~1692)과 그 일행 36명이다.
1653년 8월 16일 새벽, 네덜란드의 스페르웨르호는 태풍에 밀려 제주 남쪽 바닷가에 표착했다. 하멜을 포함한 36명의 생존자들이 제주 주민과 처음 만나는 장면을 하멜은 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8월 18일 아침에 좀 더 큰 텐트를 만드느라 분주했는데 정오 무렵 1천명 내지 2천명 정도 의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들은 기병과 군졸들인 듯 했다. …… 그 지휘관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물었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린 손짓 발짓해 가며 일본에 있는 나가사키로 가려 했다는 걸 말해 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우린 서로 의사 소통이 안 되었고 그들은 야판(Japan)이라는 말을 몰랐는데 왜냐면 그들은 야판(Japan)을 왜나라 혹은 일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그 지휘관은 우리들에게 각각 술22) 한잔씩을 주게 하고는 텐트로 되돌려 보냈다. …… 약 한 시간 뒤에 우리에게 죽을 가져다 주었는데 우리가 그동안 굶었고 갑자기 많은 음식을 먹으면 해로울 거라고 생각한 때문인 것 같았다. …… 저녁에는 우리에게 쌀밥을 주었다. 그 날 오후에 일등 항해사는 관측을 하더니만 우리가 북위 33˚32´에 있는 켈파르트(제주도)섬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23)
하멜 일행은 처음에 자기들이 일본 근처에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원주민의 옷차림은 일본인보다는 중국인에 가까웠다. 그들은 이곳이 중국 본토에서 추방된 해적들이 사는 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원주민이 일본인도 중국인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일등항해사 헨드릭 얀스(Hendrick Janse)가 위도를 측정해 본 결과 자신들은 제주에 표착한 것을 알았다.
이들은 이듬해 6월(음력)까지 제주에서 생활하다가 서울로 이송되었다. 서울에서 약 2년간 머문 후 여수좌수영(麗水左水營)․순천(順天)․남원(南原) 등지에 분산되어 억류생활을 하다가, 1666년 8월(음력) 좌수영에 있던 하멜은 동료 7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해, 1667년 10월 나가사키에서 바타비아를 거쳐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그는 귀국해 이른바 『하멜표류기(Journael van de ongeluckighie Voyagie van't Jacht de Sperwer van Batavia ghedestineert na Tayowan in't Jaer 1653)』를 발표하니, 이 책은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이 쓴 최초의 조선관계 출판물이 되었다.
이 책은 1668년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초판본이 출간된 이후, 프랑스․영국․독일 등지에서 여러 차례의 번역본과 중판본이 나왔다.24)
4. 라 페루즈의 동해안 탐사(1787년)
라 페루즈(La Pérouse, 1741~1788)는 프랑스 해군사관 출신의 해양탐험가이다. 그는 허드슨만(灣)에서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1785년 프랑스정부는 그에게 세계일주 탐사항해를 위해 두 척의 프리깃함인 부쏠(Boussole)호와 아스트롤라브(Astrolabe)호의 총지휘자로 임명했다.
그는 조사요원을 포함한 1,019명25)의 인원을 이끌고 1785년 8월 1일 브레스트(Brest)항을 떠났다. 1787년 5월 조선근해를 탐사하고, 1788년 1월 호주의 시드니에 도착했는데, 그 이후 행방 불명이 됐다.26)
당시 이 항해에는 지리학자 베르니제(Bernizet), 의무대장 롤랭(Rollin), 천문학자 다줄레(L. Dagelet), 물리학자 라마농(Lamanon), 식물학자 콜리뇽(Collignon) 등 당대의 이름난 과학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 탐험대를 조직하고 준비하며 배를 건조하는 데에 3년이나 걸렸으며 많은 재정을 투입했다. 그러면서도 이 탐험을 계획한 목적은, 첫째로 모피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누리던 영국을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여 경제적인 이익을 도모하고, 둘째로 당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을 탐험하여 새로운 식민지 영토를 확보하며, 셋째로 인도와 캐나다를 영국에 빼앗기고 난 뒤이지만 해양국가로서의 이름을 안팎으로 떨치고 싶었던 데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라 페루즈가 탐험 임무를 수행하면서 본국으로 보내온 탐사 중간보고들은 밀레-뮈로(Milet-Mureau)가 정리해 1797년에 『라 페루즈의 세계일주 탐사항해(Voyage de La Pérouse autour du Monde)』란 제목으로 파리에서 4권의 책으로 출간됐다. 다음 해인 1798년에 재판본이, 같은 해에 런던에서 영역본이, 그리고 1799년에는 스워덴어역본27) 등이 잇달아 간행됐다.
이 책은 1785년 8월 1일부터 1788년 1월 26일까지의 항해기록을 집약한 것이다. 라 페루즈 일행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하면서 주로 자연지리학적인 조사와 해양기상 조사를 진행했다. 이들은 1787년 5월 21일 제주 근해로 접근한 후 남해를 거쳐 5월 25일에는 부산(釜山) 근해를 항해했으며, 5월 29일에는 동해안을 탐사하고 울릉도(鬱陵島)를 ‘다줄레 섬(Isle Dagelet)’28)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울릉도는 물론 조선에 상륙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조선인들과의 어떠한 접촉도 불가능했으며 독도(獨島)를 발견하지도 못했다.29)
라 페루즈의 항해기는 모두 26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 관한 기술은 제 16장 후반부에 나와 있다. 이 중에서 제주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787년 5월 20일 새벽에) 나는 항해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즉시 제주도를 향해 동북동쪽으로 키를 잡았는데 제주는 우리가 일본으로 가는 해협으로 진입하기 전에 맨 처음으로 흥미를 끈 육지였다.
1635년(1653년의 잘못임)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웨르호의 난파로 유럽에 알려진 이 섬은 조선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5월 21일에는 날씨가 쾌청해서(경위도 계산을 위한) 달의 관측에 썩 좋았다. 이 섬의 최남단 위도는 북위 33°14′이고 경도는(파리기점) 동경 124°15′(현재의 그리니치 기점 경도로는 126°35′에 해당함)이었다. 나는(해안에서) 2리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 섬의 남동부 12리그의 해안을 주의 깊게 조사했고 베르니제는 윤곽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섬을 찾아내기는 무척 어렵다. 산봉우리는 6천피트 정도이고 거리는 18내지 20리그이며 섬 중앙에 솟아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의심할 나위없이 수원지(水源池)가 있다. 이 산록은 완만하게 바다로 뻗어있고 마치 계단식 교실같은 모습으로 인가(人家)가 있다. 토양은 대단히 고지대(高地帶)까지 경작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작은 평야지대의 분할이 섬의 조밀한 인구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망원경으로 보고 느꼈다. 서로 다른 종류의 곡식을 가꾸어서 다양한 색조가 아주 그럴듯한 광경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섬은 모든 외방인(外邦人)과 어떤 통신도 금지된 나라에 속해 있었고 그 나라에서는 그들의 해안에 좌초된 불행한 사람들을 노예로 고용하고 있다. 스페르웨르호에 승선했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18년(13년의 잘못임) 동안 자주 태형(笞刑)을 받으며 포로생활을 하다가 배를 타고 일본으로 탈출해서 바타비아(Batavia)를 경유하여 암스텔담으로 귀환했다.
오래전에 일어났던 이러한 실례(實例)로 해서 우리는 해안에 보트를 보낼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두척의 작은 배가 섬에서 떠나오는 것을 보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1리그 이내로 접근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우리를 감시하는 것이었고, 아마도 우리에게 조선의 해안에 와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듯 했다.
나는 항로를 자정까지 동북동쪽으로 계속하다가 다음날 동녘이 틀때까지 그대로 유지했다. 이때의 기상상태는 약간의 안개가 끼었을 뿐이고 짙은 안개는 아니었다. 나는 이때 제주의 북동단이 서쪽으로 보이는 것을 알았으며 조선에 접근하기 위해서 북북동으로 침로(針路)를 바꾸었다.30)
5. 브로턴의 남해안 탐사(1797년)
브로턴(Wim. R. Broughton)은 영국 해군 대령 출신으로, 1778년 영국 동인도회사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1790년 뱅쿠버의 북대평양 탐사대 요원으로 뽑혀 카탐호를 지휘, 디스커버리호와 함께 북미 연안을 탐사하였다. 1793년 귀국하여 프로비던스호 함장에 임명되었고, 1795년 2월 두 번쨰 탐사항해에 올랐으며, 1796년 6월 북미의 몬트리에 도착한 후 스스로 동북아시아 탐사를 결심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1797년 5월 프로비던스호가 류큐(琉球)열도에서 난파되는 불운 속에서도 87톤급의 스쿠너를 가지고 동북아시아 탐험을 성공리에 마치고 1797년 11월 무사히 마카오에 도착했으며, 1798년 5월 실론섬의 트링코말리에 이를 때까지 탐사 항해를 계속 하였다.
그의 『북태평양 탐사 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North Pacific Ocean)』는 1804년 런던에서 출간되었으며, 그 내용 중에 조선의 동해안 탐사에 관한 사실이 소개되어 있다.
브로턴 일행은 1797년 10월 3일 청진(淸津) 근해에 이르르면서부터 10월 13일 부산 연해에 도착하기까지 조선 동해안의 해안선을 위·경도 측정과 함께 스케치하였다. 또 10월 14일부터 21일까지 부산항(釜山港)에 정박하여 식수와 떌나무를 구하며 휴식을 취하는 중에 부산항 해도를 작성하고 현지 주민들로부터 우리말 어휘를 채집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부산을 조선(Tshosan 또는 Chosan)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브로우튼 자신은 우리나라를 고려(Corea)로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 주민들이 “조선(Chosan)”이라고 말하는 것을 국명이 아닌 부산의 지명으로 인식한 듯하다.
한편 이 책의 해도(海圖) 속에는 부산이 “제산항(Tshesan Harbour)”, “조상(Thosang)”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현지 주민이 발음하는 대로 기록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6. 리라호와 알세스트호의 서해안 탐사(1816년)
엘리스(H. Ellis)는 1816년 영국의 암허스트(J. W. Amherst)경(卿)이 이끄는 견중사절단(遣中使節團)의 서기 겸 수행원에 임명되어 맥스웰(Maxwell)을 선장으로 한 알세스트(Alceste)호와 홀(B. Hall)을 선장으로 한 리라(Lyra)호와 함께 항해에 나섰다. 이 사행(使行)은 중국과의 정치적 교섭 이외에 황해(黃海)와 발해(渤海) 연안의 답사와 연구를 목적으로 이 방면의 연구자들은 물론, 알세스트호의 군의(軍醫) 맥레오드(J. M'Leod)와 박물학자 에이벌(Abel), 군목 그리피쓰(J. Griffith), 화가 헤이벌(Havell) 등이 승선하였다. 그들은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여 가경제(嘉慶帝)와의 면담을 기다리는 동안에 조선의 서해안과 류큐(琉球)를 답사 실측할 목적으로 탐험을 결행하였다.31)
알세스트호와 리라호는 9월 1일 백령도(白翎島) 부근에 이르러 9일까지 서해5도 및 장항만(長項灣),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 등을 둘러 보고, 조선의 주민들과도 여러 차례 접촉을 가졌다. 그러나 조선의 백성들은 그들의 어떠한 교섭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때 조선에서는 마량진첨사(馬梁鎭僉使) 조대복(趙大福)과 비인현감(庇仁縣監) 이승열(李升烈)을 문정관으로 정하여 그들의 배에 파견하였다.32) 언어의 불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러 차례 만나 격의없는 의견과 정을 나누었다.33)
당시의 항해 기록인 엘리스의 『극동항해보고서(Journal of the Proceedings of the Late Embassy to China)』34)와 맥레오드의 『극동항해기(Narrative of a Voyage, in His Majesty's Late Ship Alceste)』35)는 1817년에, 홀의 『조선․류큐항해기(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36)는 1818년에 런던에서 각각 출간되었다.
엘리스의 여행기는 이 사절단의 공식 보고서 형식을 띠고 있으며, 맥레오드와 홀의 여행기에는 조선에 최초로 성서가 전래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홀의 『조선․류큐항해기』에는 조선의 서남해안을 측량한 해도와 조선에서 채록한 낱말이 소개되어 있다.
7. 최초 조선 방문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1832년)
귀츨라프(Karl Friedrich Gützlaff, 1803~1851)는 프로이센 출신의 독일 선교사이다. 그는 네덜란드 선교회에서 수업했고 영국 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1831년 6월 솨이믈(Shimle)호를 타고 방콕을 떠나, 1832년 2월에는 다시 로드 암허스트(S. S. Lord Amherst)호를 타고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와 조선 등지를 항해했다.
저서로는 이때의 여행기인 『극동여행기(Journal of Two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 1832)』37) 를 비롯하여 『중국 역사(Geschichte des Chinesischen)』38), 『도광제전기(道光帝傳記)(Leben des Kaisers Tao-Kuang)』39) 등과 논문으로 「조선어 문법(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40) 등이 있다.
『극동여행기』는 이때의 여행기로, 255쪽부터 287쪽까지 조선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17일 충청도 서해안 고대도(古代島)에 상륙해, 조선 조정에 통상요구서와 성경을 보내어 무역과 선교를 청원했으나, 조선 조정에서는 성경을 되돌려 보내며 거절했다.
그가 조선에 머문 기간은 1개월 정도지만, 그는 이 짧은 고대도에서의 생활 중에 한글로 번역된 주기도문을 섬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감자와 포도 재배법, 술 만드는 법을 일러주었다. 또 감기 환자를 치료하는 등의 의료 활동도 했다.41)
그의 조선항해기는 7월 17일에 시작해 8월 17일에 끝났지만 그 후 3~4일 간 제주 부근 해상에 머문 것 같다. 그러나 귀츨라프가 제주에 상륙한 흔적을 그의 여행기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의 여행기 중에서 제주관계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8월 17일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모양을 한 섬들을 지나갔다. 최남단에 있는 제주도(Quelpoert, 북위 32°51′, 동경 126°23′)는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이곳은 개발이 잘 되었고 교통이 편리하여 무역관을 짓는다면 일본․조선․만주․타타르 그리고 중국과 교역하기가 아주 쉬울 것이다. 만일 이것이 안되면 이 섬을 선교 기지로 할 수 없을까? 중요한 지점인 제주도에 선교관을 세운다면 쇄국정책을 쓰는 조선 조정에 치명적인 충격을 주지 않겠는가? 조선 조정이 얼마만큼 이 섬에 대하여 억제 정책을 쓸지 나는 잘 모르겠으나 이곳에 선교를 정착하는 문제가 뉴 질란드(New Zealand)42)나 래브라도(Labrador)43)나 그린란드(Greenland)44)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선구자가 선교한 것보다는 덜 위험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한가지 진실 - 이 섬들은 기독교를 수용하지 못할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45)
이처럼 귀츨라프는 제주를 둘러본 후 일본․조선․만주․타타르와 중국을 연결하는 무역관 설치와, 선교기지 개발을 희망하는 기록을 자신의 여행기에 남겼다.
8. 사마랑호의 남해안 탐사(1845년)
벨처(Edward Belcher, 1799~1877)는 영국 해군으로 1825년 비치(F. W. Beechey)가 지휘하는 블러솜(Blossom)호에서 3년간 측량담당 장교로 근무하고, 1830년부터 4년간 아프리카 대륙의 서해안과 북부 해안을 측량하는 책임을 완수하여 해안선 측량의 권위자가 되었다. 1836년에는 측량선 설파(Sulphur)호를 지휘하여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태평양쪽 해안선을 측량하고 1839년 말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귀국 길에 올랐다.
* 사마랑호의 조선 남해안 탐사
그가 1840년 10월 싱가포르에 도착하자 중국 광둥(廣東)에서 일어난 아편전쟁에 약 1년간 참전하다가 1842년 7월 영국으로 돌아왔다.46)
그 후 1843년 1월 사마랑(Samarang)호를 지휘하여 중국에 이르는 항로를 정밀탐사하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다. 1845년 4월 홍콩에 도착한 후, 5월에 다시 홍콩을 출항해서 류큐와 제주․거문도(巨文島)일대를 탐사․측량한 다음, 일본․필리핀 등을 거쳐 1846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여행기 『사마랑호 탐사항해기(Narrative of the Voyage of H.M.S. Samarang)』47) 를 1848년 런던에서 출간했다.또 거문도와 거금도 사이의 다도해를 그린 해도에서는 거문도를 해밀턴항(Port Hamilton)54), 거금도를 오클랜드섬(Auckland I.)으로 지칭하는 등 모두 47개의 지명을 붙여 놓았다.
19세기에 들어와 제주 해상에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하게 되자, 당시 제주 지방관들과 주민들의 경계심은 고조되었다. 특히 1840년 12월(음력)에는 영국선 2척이 제주 가파도에 나타나 40여 명이 상륙하여 주민을 무기로 위협하고 소를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48) 그후 1845년 6월 25일 제주 동쪽 우도(牛島)에 벨처가 이끄는 사마랑호가 나타났다. 이때 제주에서는 벨처가 타고 온 이양선의 출현으로 민심이 크게 동요되어 섬주민들은 한라산으로 피난 가는 사태가 발생했고, 육지와의 뱃길도 끊어지는 등 큰 혼란을 겪었다.49)
사마랑호는 그날부터 우도를 기지로 삼아 약 7주일 동안에 걸처 제주와 거문도․거금도(居金島) 일대 해역을 정밀탐사․측량하여 해도(海圖)를 작성했다. 벨처의 항해기에는 3장의 지도가 별지(別紙)에 첨부되어 있는데, 그 중 1장에 제주를 포함한 거문도․거금도 사이의 조선 다도해의 해도가 명시되어 있다.50)
이 해도는 크기가 51×34cm이며,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주 부분도에서는 제주를 켈파르트섬(Quelpart I.)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한라산을 오클랜드산(Mt. Auckland)51)으로 지칭하면서 그 높이를 6,544피트(1,955m)로 기록하고 있다.52) 또 우도를 뷰포드섬(Beaufort I.)53)이라고 이름짓고 있다.
나머지 1면의 해도는 사마랑호가 류큐(Greet Loo-Choo, 琉球)를 출발해 고토(C. Goto, 五島)를 지나 우도에 도착, 제주 근해를 일주 탐사하고 거문도와 거금도 등 다도해를 탐사한 후 다시 우도를 거쳐, 고토․나가사키․류큐열도를 따라 항해한 항로를 자세하게 작성해 놓았다.
제주 방문시 벨처는 오아순(吳亞順)이라고 하는 중국인을 통역으로 대동해 제주 주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조선의 문정관(問情官)은 정의현감 임수룡(任秀龍, 1803~?)이었고 통역은 역관(譯官) 이인화(李寅和)였다. 이들의 문정은 필담(筆談)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로의 의사 소통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문정에서 현감 임수룡은 벨처에게 조선 방문의 목적과 일정 등에 관해 물었다. 이에 대해 벨처는 영국 여왕의 명에 의하여 방문하게 되었으며, 배가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정확한 해도를 작성하는 데 제주 방문의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육지에 상륙해 측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이 일련의 작업은 한 나라의 신하로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만국(萬國)의 신하로서의 책무로 간주해야 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또 벨처는 임수룡의 인상착의에 관해서, 키는 약 5피트 6인치(약 168㎝)로 준수하면서도 다부지게 생겼으며 희랍인과 비슷하다. 이마는 날카롭고(빠르고) 눈은 작지만 총명해 보인다. 체구에 비해 발은 작아 보이며 머리 스타일은 류큐인과 비슷하다. 모자는 매우 아름다운 공예품으로 테는 약 2피트(약 61㎝), 원뿔의 높이는 9인치(약 23㎝), 지름 3인치(약 8㎝) 정도이며 공작깃이 부착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55)
한편 사마랑호에는 군의관 아담스(Arthur Adams)가 동승하고 있었다. 그는 박물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조선인의 생김새와 복장․예절․무기․선박․제주의 풍경 등을 조사해 기록하였다. 그 중에는 식물 46종과 새 26종, 어류 7종, 곤충 19종, 거미 14종, 조개 29종, 그리고 해면(海綿) 2종이 포함되어 있다.
이 내용은 벨처의 항해기 제2권 박물편에 소개되었으며, 1850년 런던에서 다시 『사마랑호 항해 동물지(The Zoology of the Voyage of H.M.S. Samarang)』란 제하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벨처의 항해기에는 또다른 아담스(Ernest Adams)가 조사 편집한 「어휘집(Vocabulary of Languages)」56)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12개의 나라 및 지역57)의 단어 592개와 수사(數詞) 33개 등 모두 625개의 어휘가 소개되어 있다. 조선어는 단어 531개와 수사 30개 등 모두 561개58)의 어휘가 소개되어 있다.
그때까지 서양에 알려진 조선어어휘집으로는 브로우튼(W. R. Broughton)의 『북태평양탐사 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North Pacific Ocean)』59)중에 소개되고 있는 조선어 어휘 38개와, 홀(B. Hall)의 『조선․류큐항해기』 중에 소개되고 있는 28개의 단어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렇듯 벨처의 조선 남해안 탐사는 제주와 거금도 등의 해안선을 정밀 탐사하는 효시를 이루었으며, 아담스(A. Adams)의 조선 관계 박물기를 남겼다.
9. 악테온호의 제주 해역 수로 탐사(1859년)
그러나 이들 해도에는 거문도와 거금도만 표시되어 있을 뿐 제주는 나타나 있지 않다.
블레이크니(William Blakeney, 1834~?)는 1849년 영국 해군에 입대해 악테온(Actæon)호의 경리관으로 1856년부터 1861년까지 극동 해역의 탐사활동에 참여했다.
1842년 영국에 의해서 중국이, 1854년에는 미국에 의해서 일본이 개항했고, 그 결과 조선 주변 해역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 이를 견제하려는 열강들의 충돌해역으로 변했다. 1854년 3월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선전포고60)를 하자 러시아의 극동 해역인 조선 주변해역에서도 긴장이 고조됐다. 1855년 영국함대가 타타르만에서 러시아함대를 나포하려고 했으나 수로(水路)를 몰라 실패한 이후, 영국 해군성에서는 타타르만과 조선해역의 수로조사를 위해 악테온호와 도브(Dove)호를 출동시켰다.
1857년 악테온호의 베이트(T. Bate) 함장이 광둥에서 전사한 다음 워드(John Ward)가 이 배를 지휘했다. 이 배는 1859년 5월 6일 거문도에 도착해서 약 2주일간 제주해협을 비롯한 조선의 남해안을 조사했으며 5월 18일 거문도를 떠나 쓰시마(對馬島)를 거처서 6월 9일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조사를 마친 후 6월 21일에는 울릉도를 탐사하고 타타르만과 일본 연안을 거쳐 다시 11월 23일 부산을 들려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61)
이때의 극동 해역 수로조사 활동을 기록한 블레이크니의 『40년 전의 극동항해기(On the Coasts of Cathay and Cipango Forty Years Ago)』62)가 1902년에 출간됐다.
이 책의 조선관련 부분은 제6장의 조선해협과 일본해(Korea Strait and Sea of Japan)부분이다. 이곳에는 조선관계 해도 3종과 삽화 5종이 수록되어 있다. 해도의 제목은 「일본 남해지도: 1855(Chart of Southern Portion of Japan, 1855)」, 「일본지도: 1802(Map of Japan, 1802)」, 「일본남해지도: 1876(Chart of Southern Portion of Japan, 1876)」 등이다.63)10. 오페르트의 조선 통상 시도(1866~1868년)
또 이 책에 수록된 삽화 중에는 ‘조선의 범선(Korean Junk)’이 있는데, 이 삽화는 1871년 6월 미국 아시아함대 사진촬영반이 찍은 사진을 정교하게 스케치 한 것이다.64)
이 책은 블레이크니에 의해 씌여졌지만 거문도를 비롯한 조선해도의 원도면은 거의 모두 워드가 작성했다. 이 해도는 영국 해군성에 보고됐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 책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이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해도 15종 중 제주 관련은 1종으로 「제주에서 대마도 및 고토(五島)(Quelpart to Tsusima and Goto Is.-Soundings-)」가 있다.Ⅲ. 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 전래지
1866년 3월 당시 쇄국 중인 조선과의 통상을 목적으로 영국 상선 Rona호를 타고 조선 서해안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유태系 독일 상인 오페르트(E. Oppert)이다. 그는 이미 제너럴 샤만호(General Serman)호 사건발생 이전에 두 차례나 조선해역을 순항하면서 통상교섭을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입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해 8월 영국상선 엠페레(Emperor)호로 다시 해미(海美)와 강화(江華)에 나타나 재차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그래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또다시 1868년 5월 차이나(China)호로 프랑스 신부 페롱(S. Féron)과 미국인 젠킨스(F. B. Jenkins)와 함께 충청남도 행담도(行擔島)에 정박,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하였다. 그는 덕산(德山) 가동(伽洞)에 있는 남연군(南延君)의 무덤을 굴총(掘冢)하려다 성공하지 못 하였다. 남연군은 조선 쇄국의 실권자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양부(養父)로 오페르트는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이를 담보로 대원군과 통상을 협상하려고 이 같은 무모한 행위를 실행하였던 것이다.
오페르트는 세 번에 걸친 조선 항해를 『금단의 나라 조선(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으로 남겼다. 이 책은 조선의 지리․역사․문화․풍속․언어․종교․기후․경제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으며, 오페르트의 제 1․2․3차 조선 항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조선의 문화 전반에 걸쳐서 매우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상당한 부분에 걸쳐 그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느낀 바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오페르트가 조선 항해를 마친 12년 후인 1880년 간행되었는데 조선 개화의 전후 사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에서의 서양인에 대한 증오감은 더욱 고조되었고, 이로 인해 대원군의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과 처형은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쇄국정책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1. 성경 전래 경위
2. 리라호와 알세스트호의 조선 방문의 문화사적 의의
Ⅱ의 6에서 맥레오드와 홀의 조선 서해안 탐사 부분에서 이들이 한국 최초로 우리나라에 성경을 전해 주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사실은 이들의 여행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좀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맥레오드의 항해기
맥레오드는 알세스트호의 군의로서 조선 탐사 여행에 참여하였다가 그 기록을 남겼다. 이 항해에 함께 참여하고 역시 또다른 항해기를 쓴 홀의 항해기 보다 먼저 간행되었다. 이 책은 『극동항해기(Narrative of a Voyage, in His Majesty's Late Ship Alceste)』라는 제목으로 1817년 영국 런던에서 출판되었으며, 1818년에 증보된 재판이, 1820년에 3판본이, 1820년에 스웬덴어 번역본 등이 출판되었다.
이 책의 앞부분 53쪽까지가 조선에 관한 내용이고 그 이후는 류큐(琉球)를 들러 마닐라․자바를 거쳐 영국에 도착하기까지의 일정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 중에는 정교한 채색 판화 4장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2장이 조선에 관한 그림으로 “소청도(小靑島) 주민들”과 “조선의 관리와 수행원들”이란 설명이 각각 붙어 있다. 이 판화들은 드와리스(W.H.Dwarris)와 클락크(I.Clark)의 작품으로, 동판(銅版)으로 인쇄한 후에 손으로 직접 채색을 하는 기법을 사용 하였다.
또 이 책에는 조선에 최초로 성서가 전래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책에 실린 그림은 서양인이 조선을 방문하고 조선 사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최초의 채색 그림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은 마량진첨사(馬梁鎭僉事) 조대복(趙大福)으로 그는 조선 최초로 성서를 전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체리 브랜디(Cherry Brandy)를 마신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맥레오드의 항해기 중에서 성서 전래에 관한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16년 9월 5일 첨사 조대복은 알세스트호의 선상에서 문정을 하면서 맥스웰 함장에게 중앙 정부로부터 회신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맥스웰 함장은 첨사에게 여러가지 선물을 주면서 그의 마음을 사보려고 애썼으나 그는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배의 서가에 들어간 첨사는 벽면 서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을 보자 노기가 풀렸고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이책 저책 만져 보다가 유달리 크고 장정이 가장 아름다운 성서를 뽑아서 이리 저리 뒤져 보면서 “좋다”를 연발하였다. 첨사는 물론 그 책이 성서(bible)인 것은 알지 못하였다. 맥스웰 함장은 첨사가 하선할 때에 그 성서를 선물로 주었다. 첨사는 그 성서를 받을 때에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것과 같이 정중하게 받았으며 공문서를 다루는 것과 같이 신중하게 해안으로 옮겼다.
2) 홀의 항해기 [첨부파일 참조]
홀(1788~1844)은 영국 해군장교로 지질학자인 제임스 홀(James Hall)경(卿)의 아들이다. 1816년 9월 리라호의 선장으로 알세스트호와 함께 조선의 서남해안을 탐험하는 등 세계 여러 나라를 항해하였으며 여러권의 항해기를 남겼다.
그의 조선 항해기는 『조선․류큐항해기(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란 제목으로 1818년 영국 런던에서 출판되었으며, 1820년 재판본을 비롯하여 1818년 필라델피아 판본 등이 있다.
이 책은 서문 및 목차가 16면, 본문 222면, 부록 107면, 단어집 94면 등 모두 439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 가운데 조선에 관한 내용은 앞부분 57쪽까지이고, 그 이후는 류큐에 관한 내용이다. 부록에는 5장의 해도와 함께 자세한 항해기록을 수록하고 있으며, 특히 조선의 서남해안을 측량한 해도 1장이 수록되어 있다. 또 이때 수집한 “조선의 낱말들” 28개를 소개하고 있으며, 동판화 가운데 “조선의 관리와 서기”라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의 주인공은 마량진 첨사 조대복이다.
홀의 항해기 중에서 현감 이승렬이 책을 받을 때의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홀 일행이 마량진에 도착한 이튿날인 1816년 9월 5일에 첨사 조대복은 비인 현감 이승렬을 대동하고 다시 리라호를 방문하여 문정을 계속하였다. 배의 서가에서 현감 이승렬은 학식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책을 함부로 뒤적거리면서 그 중 한 권을 품에 안고 구걸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택한 것이 대영백과사전 중의 한 권 이었으므로 홀 함장은 부득이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대신 더 아름다운 책(book)을 주었다. 현감 이승렬은 그것을 대단히 기쁘고 감사하게 받았다.
또 첨사 조대복이 성서를 받을 때의 상황을 보면,
알세스트호와 리라호가 마량진을 막 떠나려고 할 때 조대복은 알세스트호로 맥스웰 함장을 다시 방문하였다. 조대복은 어떠한 선물도 받지 않으려 했지만 선실에서 서적을 구경하는 동안 성서(bible)에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들이 선물로 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선실을 떠날 때 다시 권하였더니 이번엔 사양하지 않고 감사한 표정으로 받아 기분좋게 돌아갔다.맺는말
리라호와 알세스트호의 조선 서해안 방문은 조선 최초의 성서 전래 이외에도 서해안 탐사 지도를 작성함으로써 서양과의 새로운 항해 길을 열게 되었다. 이것은 1797년 라 페루즈의 동해안 탐사와 1804년 브로턴의 남해안 탐사에 이어 비로서 조선 전해안의 해도가 완성되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리라호의 군의관이 비인현감 이승렬을 진찰하게되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서양의사에게 진찰을 받은 기록을 남겼다. 비록 현감 이승렬은 환자로 오인되어 억지로 진찰을 받았지만 서양 의사에게 서양식 진찰을 받은 것 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또한 우리 의학사에서 특기 할 만한 일이다.
또 홀의 항해기에는 조선의 서해안 주민들로부터 수집한 “조선의 낱말들” 28개를 소개하고 있어 최초의 조선어휘 모음집이 되기도 한다. 당시 어휘를 수집했던 영국인들은 조선 주민들의 어학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그 밖에도 홀의 항해기에는 “조선의 관리와 서기”라는 그림이, 맥레오드의 항해기에는 “소청도(小靑島) 주민들”과 “조선의 관리와 수행원들”라는 그림이 각각 실려 있는데, 이 그림은 조선 사람의 실지 모습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리라호와 알세스트호의 조선 방문으로 보다 풍부하고 자세한 조선에 관한 정보가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1832년 귀츨라프의 조선 방문시에는 물론 서양과의 개항이 이루어지기까지 이들의 항해기는 중요한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지금까지 13세기 중엽부터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된 1876년 사이에 전개된 우리나라와 서양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인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까지는 서양에서 우리나라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때이다. 이 시기의 기록으로는 9세기경에 씌여진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의 지리학자 쿠르다지바의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서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특산물을 소개하고 있으며, 1154년 무슬림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의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에서 신라를 여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프랑스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뤼브뤼크는 몽고를 여행하고 1255년에『뤼브뤼크 여행기』를 남겼는데, 이곳에는 ‘섬의 정부 카우레’라고 하는 고려에 관한 서양 최초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탈리아의 마르코 폴로는 1295년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서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의 사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고려를 지칭한 ‘카울리’란 말을 단 한번 소개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고려를 서양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렇듯 이 시기에 서양에서 출간된 우리나라 관계도서는 불과 몇 종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고작해야 신라․고려 등의 국호를 지칭해 소개한 정도이다. 따라서 제주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명은 오랜 전통을 지니면서 발전되어 왔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까지도 서양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비 속의 나라였다. 16세기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의 극동항해를 통해 유럽은 중국과 일본을 현실적으로 알게 되었고, 곧이어 이들 나라와 교역을 시도하는 한편 선교사를 파견해 본격적인 동서문화의 교류가 시작됐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스페인 예수회 소속의 수도사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 28일 일본군을 따라 웅천항에 도착하니, 그는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이 되었다. 벨테브레는 네덜란드 사람으로 1627년 오베르커크호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경주 근처에 표착했다. 그는 동료 선원 2명과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1628년 서울로 압송된 뒤, 동료들과 함께 훈련도감에서 총포 제작의 일을 했다. 그 후 1653년 8월 16일 새벽, 네덜란드의 스페르웨르호가 제주 남쪽 바닷가에 표착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멜을 포함한 36명의 생존자가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조선을 방문한 것이다. 이때 웰테브레는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서 억류생활을 하고 있을 때인 1655년 서양지도상에 ‘풍마도’라고 제주를 지칭한 명칭이 최초로 나타나게 된다.
1666년 하멜은 일행 7명과 함께 조선을 탈출해 1668년 암스테르담에 도착한후 『하멜표류기』를 출간했다. 이 책이 서양에 알려지자 서양에서는 조선을 경악과 공포의 나라로 생각하게 되었고 아예 조선 부근의 항해를 꺼리게까지 되었다. 그리하여 하멜 이후 1세기가 넘도록 조선을 찾은 서양인은 없었다.
1787년 프랑스의 해양탐험가 라 페루즈는 우리나라 남동쪽 근해를 탐사하였다. 1816년 영국의 알세스트호와 리라호는 조선의 서남해안을 탐사하고 제주 근해를 둘러보았다. 이때의 항해기가 엘리스, 맥레오드, 홀에 의해서 각각 출간되었다. 1832년 귀츨라프는 조선과의 통상과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 서해안을 찾아 왔다가 고대도 등에서 약 1개월간을 머물면서 서교와 통산을 요구하기도 했다. 1845년 벨처는 제주 근해를 일주하면서 해안선을 정밀 측량했고, 블레이크니는 1859년 제주해협을 비롯한 조선의 남해안 수로를 조사했다.
19세기 중엽까지도 우리나라는 서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우연히 조선 근해에서 난파당한 표류자와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려는 탐험가, 선교사들만이 조선을 찾아왔다.
이처럼 우리 나라와 서양간의 교류는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과의 교류 자체를 조선의 지방관은 물론 조선 조정에서는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항상 서양측의 일방적인 접촉으로만 이루어졌다. 이들의 조선 방문 및 조선 근해 탐사의 사실들은 거의 그때마다 그들의 나라는 물론 서양 여러 나라에서 책과 지도로 간행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물론 이들의 내용이 다소 빈약하거나, 잘못 전해지는 것도 없지는 않지만, 당시의 사정을 이만큼이라도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놀랍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1816년 9월 4일 알세스트호의 함장 맥스웰과 리라호의 함장 홀 등이 마량진을 방문하고, 마량진 첨사 조대복에게 성서를 전해준 사건은, 성서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최초의 사실로서 한국기독교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외교사,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에 관한 체계적인 자료 수집은 물론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은 역사적인 유래를 갖고있는 서천군에서는 이를 문화 관광자원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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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무함마드 깐수, 『新羅․西域交流史』, 檀國大學校出版部, 서울, 1992, p. 2.
2) 위의 책, p. 314, 재인용; 朴大憲, 『西洋人이 본 朝鮮 - 朝鮮關係 西洋書誌』 上卷, 壺山房, 서울, 1996, pp. 16~17 참조.
3) 무함마드 깐수, 앞의 책, pp. 152~153 참조;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 17.
4) 무함마드 깐수, 앞의 책, p. 151.
5) 르네 그루쎄(René Grousset) 지음, 김호동․유원수․정재훈 옮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출판사, 서울, 1998, p. 400.
6) 貝塚茂樹 저, 李龍範 편역, 『中國의 歷史』, 中央新書 1, 서울, 1980, p. 239, 재인용; 무함마드 깐수, 앞의 책, p. 313;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 13.
7) 이 책의 원 제목은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로서 영어로는 Description of the World로 옮겨지고 있다. 국역본으로 마뉴엘․콤로프 編, 金永基 譯, 『마르코․포로 大旅行記』, 東方文化硏究院, 서울, 1956; 마르코 폴로 著, 鄭雲龍 譯, 『東方見聞錄』, 乙酉文化社, 서울, 1964(新裝版 世界思想全集 10, 1983); 曺佐鎬 譯, 『東方見聞錄』, 삼진사, 서울, 1975; 蔡義順 譯, 『東方見聞錄』, 학원출판공사, 서울, 1978(세계사상대전집 권11, 1993); 權美英 譯, 『東方見聞錄』, 세계교양사상백선 권3, 일신서적출판사, 서울, 1991; 최호 譯, 『東方見聞錄』, 홍신사상신서 권49, 홍신문화사, 서울, 1994; 김호동 역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사계절출판사, 서울, 2000 등이 있다.
8) 김호동 역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사계절출판사, 서울, 2000, p. 225.
그러나 鄭雲龍은 ‘카울리(Kauli)’ (마르코 폴로 著, 鄭雲龍 譯, 앞의 책, p. 120)라고, 金永基는 ‘카르리(Karli)’ (마뉴엘․콤로프 編, 金永基 譯, 앞의 책, p. 193)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번역자들이 참고로 한 原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9) Martino Martinio, Novus Atlas Sinensis a Martino Martinio Soc. Iesu descriptus (Theatrum orbis terrarum. Vol. Ⅵ), Cumprivilegio S. C. Maj. et Orəd. Fœə. Belg. , Amsterdam, 1655.
10)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p. 78~79.
이에 대해 신복룡은 ‘풍마’를 ‘탐라’의 誤記라고 보고 있다(H. 하멜 지음, 신복룡 역주, 『하멜표류기』, 집문당, 서울, 1999, p. 11, 주11).
11) J. J. Weltevree가 조선에 표착한 곳은 일반적으로 제주도로 알려져 있다(韓榮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9, p. 36참조). 그러나 이에 대하여 丁奇洙는 G. Ledyard의 저서를 근거로 하여 慶州라고 주장하고 있다. 丁奇洙, 『韓國과 西洋』, 乙酉文化社, 서울, 1988, p. 36, 註 34) 참조.
12) 丁奇洙, 앞의 책, p. 29.
13) 李能和, 『朝鮮基督敎及外交史』, 朝鮮基督敎彰文社, 京城, 1928, 下篇, p. 67(“西洋人馮里伊等이 漂到濟州어늘”); 李丙燾 譯註, 『하멜漂流記』, 博文文庫 9-10, 博文書館, 京城, 1939, p. 10, 註一(“宣祖十五年 三月에는 西洋人 馬里伊란 者가 濟州島에 漂到”); 洪以燮, 「서울에 왔던 歐美人」, 『鄕土서울』 第1號,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서울, 1957, p. 120(“文獻撮要 所在의 西洋人「馬里伊」…… 아마 그도 포츄갈 商人의 한사람이었을 것같다”); 金昌洙 譯, 『하멜漂流記』, 乙酉文化社, 서울, 1983, p. 285(“西洋人으로서 朝鮮에 첫발을 디딘 사람은 …… 宣祖 一五年 三月에 西洋人 馮里伊”); 崔鍾庫, 『西洋人이 본 韓國法俗』, 敎育科學社, 서울, 1989, p. 9(“서양인으로 조선에 첫발을 디딘 사람은 …… 선조 15년 3월에 서양인 빙리이<馮里伊>”); 權仁赫, 「17세기 조선의 對外認識과 하멜 漂着」, 『하멜 漂着地에 대한 학술세미나』, 제주도사연구회, 제주, 1999, p. 16(“조선에 가장 먼저 발을 들여놓은 서양인으로는 선조15년(1582)에 표착한 마리이<馬里伊>”) 등.
위의 李丙燾와 洪以燮의 인용문 중 ‘馬’자의 밑줄은 필자가 표시한 것으로 ‘馮’자의 誤記이다. 따라서 權仁赫의 인용문 중 ‘마리이(馬里伊)’의 ‘마(馬)’자는 ‘馮’자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또 崔鍾庫는 ‘빙리이(馮里伊)’라고 음역 했는데, 이는 ‘풍리이(馮里伊)’라고 해야 옳은 듯 하다. ‘馮’자의 音價는 “빙”과 “풍”이 있는데, 姓氏를 말할 때는 “풍”으로 읽어야 한다(張三植 編, 『大漢韓辭典』, 省文社, 서울, 1964, p. 1732 참조).
14)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 5.
15) 鄭載崙, 『閑居漫錄』, 第二卷; 金錫翼, 『耽羅紀年』, 瀛洲書館, 濟州, 1918, pp. 53~54.
1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편찬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성남, 1991, p. 36(박연 項, 韓榮國 기술).
17) 濟州道, 『濟州道誌』 第1卷, 濟州道, 濟州, 1993, p. 911.
18) 교육부, 『사회』 6-1,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서울, 1998, pp. 54~55.
19) 교육부, 『사회과 탐구』 6-1,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서울, 2000, p. 58.
20) 「接待倭人事例」, 『釜山市史』 第2卷, 釜山, 1963, p. 79; Gari Ledyard, The Dutch Come to Korea,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Seoul, 1971, pp. 32, 89~90 참조; 레드야드 編, 朴允熙 譯, 『하멜표류기』, 三中堂文庫 125, 三中堂, 서울, 1975, pp.51~52, 137 주6 참조.
21) 자세히는, 朴哲, 『예수회 신부 세스뻬데스 - 한국 방문 최초 서구인』, 西江大學校 出版部, 서울, 1987 참조.
22) 원서에는 ‘arac(아락)’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李丙燾와 강준식은 ‘燒酒’로, 金昌洙와 김태진은 ‘술’로, 신복룡은 ‘毒酒’로 번역 또는 추정하고 있다. 이병도는 이 부분을 ‘아락’이라고 원어 그대로 음역하고 원저자의 주(쌀 혹은 椰子實 및 기타로 만든 술)를 밝히면서, ‘燒酒’를 이름 한것 같다고 자신의 주를 더했다.
한편, 영한사전에는 ‘arrack’을 “아라크 술(야자즙․당밀 등으로 만드는 中近東의 독한 증류주)”(동아출판사 편집국, 『동아 프라임英韓辭典』, 동아출판사, 서울, 1989, 개정판, p. 140)라고, 불한사전에는 ‘arac(k)’을 “(쌀․사탕수수로 빚은) 리쾨르, 아라크 소주”(李彙榮 編, 『엣센스佛韓辭典』, 民衆書林, 서울, 1991, p. 125)라고, 독한사전에는 ‘Arrak’을 “쌀로 만드는 인도의 火酒”(지명렬, 『동아 프라임獨韓辭典』, 동아출판사, 서울, 1991, p. 130)라고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앞의 연구자들은 ‘arac’을 영어․불어․독어 등의 사전적 풀이에 근거하여 ‘燒酒’, ‘술’, ‘毒酒’ 등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arac’은 제주도 토속 말인 ‘아래기(또는 ‘아랑주’, ‘아랑기’, ‘아랭이’)’의 음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 하다. ‘아래기’는 소주를 이름하는 제주도 토속 말이다(李基文, 『國語語彙史硏究』, 東亞出版社, 서울, 1995, p. 247 참조).
23) H. Hamel, tr. B. Hoetink, Verhaal Van Het Vergaan Van Het Jacht De Sperwer En Van Het Wedervaren Der Schipbreukelingen op Het Eiland Quelpaert en Het Vasteland Van Korea(1653~1666) Met Eene Beschrijving Van Dat Rijk, Martinus Nijhoff, 'S-Gravenhage, 1920, pp. 7~9; 헨드릭 하멜 저, 김태진 역, 앞의 책, pp. 23~25.
24) 『하멜표류기』의 異本 및 번역본에 대하여는, 李丙燾 譯註, 앞의 책, pp. 3~7; 레드야드 編, 朴允熙 譯, 앞의 책, pp. 202~207; 강준식, 『우리는 코레아의 광대였다』, 웅진출판주식회사, 서울, 1995, pp. 299~309 참조.
25) 이에 대해 韓相復은 253명이라고 말하고 있다(韓相復, 『 西洋學에서 본 韓國學』, 海潮社, 서울, 1988, p. 16).
26) 당시 프랑스 정부에서는 라 페루즈의 행방을 찾아 시디니로 수색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27) La Pérouse, tr. Samuel Odmann, Resa Omkring Jorden af herr de La Perouse, John Pfeiffer, Stockholm, 1799. 자세히는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p. 94~95 참조.
28) 울릉도를 최초로 발견한 천문학자 Dagelet의 이름을 따서 이렇게 지었다. 그후 서양 지도상에서 울릉도는 ‘Isle Dagelet’로 나타난다.
29)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p. 94~95.
30) 韓相復, 앞의 책, pp. 16~18.
31)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p. 96.
32) 國史編纂委員會 編, 『朝鮮王朝實錄』 卷47, 國史編纂委員會, 서울, 1973, 純祖十六年丙子七月丙寅條.
33) 박대헌, 「1백년 전 서양인들 눈에 비친 이 땅의 사람들-서양고서(古書)에서 본 조선인의 모습」, 『Morning Calm』 Vol. 16 No. 2, Korean Air Lines Co. Ltd., 서울, 1992. 2, p. 78.
34) Henry Ellis, Journal of the Proceedings of the Late Embassy to China, John Murray, London, 1817.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p. 96~99 참조.
35) John M'Leod, Surggeon, Narrative of a Voyage, in His Majesty's Late Ship Alceste, to the Yellow Sea, along the Coast of Corea, John Murray, London, 1817; John M'Leod, Surggeon, Voyage of His Majesty's Ship Alceste, along the Coast of Corea, to the Island of Lewchew, John Murray, London, 1818, 2nd ed.; John M'Leod, M.D., Voyage of His Majesty's Ship Alceste, to China, Corea, and the Island of Lewchew, John Murray, London, 1820, 3rd ed.; John Mac-Leod, Capitaine Maxwells Resa på Gula Hafvet, Iångs kusterne af Corea och öarne Liu-tchiu, hos Palmblad & C., Upsala, 1820.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p. 100~109 참조.
36) Captain Basil Hall,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John Murray, London, 1818; Captain Basil Hall, Voyage to Corea, and the Island of Loo-choo, John Murray, London, 1820, 2nd ed.; Captain Basil Hall,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 Abraham Small, Philadelphia, 1818.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p. 110~119 참조.
37) Charles Gutzlaff, Journal of Two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 1832, John P. Haven, New York, 1833; Charles Gu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 1833, Frederick Westley and A. H. Davis, London, 1834, 2nd ed.; Ch. Gützlaff, tr. J. Ekelund, Nyaste Underrättelser om Östra Indien och China, Hos B. M. Bredberg, Stockholm, 1836. 자세히는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p. 132~137 참조.
38) Karl Fridrick August Gützlaff, Geschichte des Chinesichen Reiches von den Ältesten Zeiten bis auf den Friden von Nanking, Hrsg. von Karl Fridrich Neumann. Stgt. und Tübingen, Cotta, 1847.
39) Karl Fridrick August Gützlaff, Leben des Kaisers Tao-Kuang, Leipzig, 1852. 자세히는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p. 150~153 참조.
40) Charles Gützlaff, 「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 The Chinese Repository, Vol. 1, Canton, Nov. 1832, pp. 266~277. 자세히는 이응호, 「Gützlaff 목사가 쓴 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의 연구」, 『열므나 이응호박사 회갑 기념 문집 - 문을 두드리는 이』, 성결교 신학교 출판부, 서울, 1987, pp. 61~90 참조.
41)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p. 132~133.
42) 영연방의 일원. 남서태평양의 섬들로 구성됨.
43) 북미 동북부 허드슨(Hudson) 만과 대서양 사이에 있는 반도.
44) 북미 동북방의 세계 제일의 큰섬. 대부분이 북극권에 속해 얼음으로 덮여 있음.
45) Charles Gu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 1833, Frederick Westley and A. H. Davis, London, 1834, 2nd ed., p. 288; 이진호, 『동양을 섬긴 귀츨라프 - 한국에 최초로 온 개신교 선교사의 일대기』도서출판 에이멘, 서울, 1988, pp. 74~75.
46) 박대헌, 앞의 책, 上卷, p. 73.
47) Edward Belcher, Narrative of the Voyage of H. M. S. Samarang, during the years 1843~46, Reeve, Benham, And Reeve, King William Street Strand, London, 2 Vols., 1848.
48) 濟州道, 앞의 책, 第1卷, p. 930.
49) 사마랑호가 제주에 나타났을 때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제주에 유배중이었다. 그는 당시 민심의 동요를 목격하고 아우 명희(命喜)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이 상황을 전하고 있다. 崔完秀 譯, 『秋史集』, 현암사, 서울, 1986, pp. 271~272.
50) 이 해도의 명칭은 「Chart of the Northern Seas of China & Japan Including the discoveries of H. M. S. SAMARANG」이다.
51) 오클랜드는 영국 해군성 장관의 이름.
52) 한라산의 실제 높이는 1,950m이다.
53) 뷰포드는 영국 수로국장의 이름.
54) 해밀턴은 영국 해군성 차관의 이름.
55) Edward Belcher, 앞의 책, Vol. 1, pp. 329~330.
56) Edward Belcher, 앞의 책, Vol. 2, pp. 533~571.
57) 12개의 나라 및 지역의 언어는 영어(English)․스페인어(Spanish)․말레이어(Malay)․비사야어(Bisayan)․Sooloo(Sulu, 필리핀군도어?)․Iloco(말레이시아어?)․Batan(Batak, 수마트라어?)․Cagayan(?)․Tagala(Tanggla, 자바어?)․중국어(Chinese)․일본어(Japanese)․조선어(Korean) 등이다.
괄호 안의 ?는 확실치 않은 사항이다(陳佳榮, 『中外交通史』, 學津書店, 香港, 1987, p. 349; Sulu, p. 348; Batak, p. 345; Tagala 참조).
58) 이에 대해 韓相復은 558개라고 소개하고 있으며(韓相復, 앞의 책, p. 337), 金在勝도 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金在勝, 『近代韓英海洋交流史』, 仁濟大學校 出版部, 金海, 1997, p. 80).
그러나 필자가 원전을 확인한 결과 어휘수는 모두 561개였다.
59) William Robert Broughton,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North Pacific Ocean, T. Cadell & W. Davies in the Strand, London, 2 Vols., 1804.
60) 크림전쟁(Crimean War, 1853. 10~1856. 2).
61) 韓相復, 앞의 책, pp. 377~379 참조; 朴大憲, 앞의 책, pp. 392~393 참조.
62) William Blakeney, R. N., On the Coasts of Cathay and Cipango Forty Years Ago, Elliot Stock, London, 1902.
63) 위의 책, pp. 164, 167, 171.
64) 朴大憲, 앞의 책, 上卷, p. 393, 주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