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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54]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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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역도산의 야망은 끝이 없었다. 스승은 키워 왔던 꿈을 하나하나씩 실현해 갔다. 그러나 꿈이 하나씩 실현될 때마다 불안과 걱정거리도 비례해 늘어 갔다. "천석꾼에 천 가지 걱정, 만석꾼에 만 가지 걱정"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말이다.


pho_200607120845410501000005010100-001.jpg
↑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은 스승 역도산인지, 나인지 물어 본다. 내가 봐도 스승과 많이 닮았다.
1963년 프로레슬링 세계 챔피언 벨트를 따기 위해 미국 장정에 오를 때 모습이다.


 
스승은 여러 문제로 고민했다. 정치권에선 후원금을 내라고 했고, 시민 단체에선 기부를 요구했다. 세무 당국에선 세금을 잘 내고 있는지 감시의 눈을 번득였고, 언론은 언론대로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같이 보도했다. 스승은 늘 이런 것들 때문에 피곤해 했다.
 
더욱이 부와 명예가 쌓여 가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 시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스승에게 시비를 걸 수 있단 말인가. 시비를 건들 받아 줄 스승인가. 직원들도 이런 스승의 성격을 잘 안다. 직선적인 스승 앞에선 입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다. 스승이 매사에 있어 일을 꼼꼼히 처리하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할 것은 없었지만 괜한 말을 했다가는 시쳇말로 본전도 못 찾는다.
 
당연히 스승에 대한 시각은 두 가지다. 하나는 터프 가이다. 스승의 사업 스타일이 굵고 직선적이라 꼼수를 두고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스승이 남을 무시하고 처지를 배려해 주지 못하는 고약한 양반이란 것이다.
 
사람에 따라 스승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지만 스승에겐 중간이 없다. 스승은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해선 변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 자신으로 인해 잘못이 발생하면 사과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진다. 변명도 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면 스승이 조금 독선적 경향이 있지만 봐 줄 만하다고 생각된다.
 
앞서도 말했듯이 스승의 사업이 확장될 때마다 여기저기서 기부를 요구해 왔다. 스승은 사회단체에는 일정 정도 기부를 했다. 그러나 야쿠자들에겐 어림도 없었다. 야쿠자들은 스승의 사업에 군침을 많이 흘렸다. 때문에 스승과 야쿠자 간에는 늘 살얼음 같은 긴장 관계가 놓여 있었다.
 
일본 언론에선 가끔 스승에 대해 "'폭력의 화신'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기사를 게재한곤 했다. 그리고 역도산이 누구를 폭행해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도 내보낸 적이 있다. 하지만 분명히 밝히는 것은 스승이 욱하는 다혈질적 성격은 있지만 누구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 폭행하며 힘을 과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스승이 폭행을 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결과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야쿠자들뿐만 아니라 힘 좋은 사내들은 스승을 미끼 삼아 유명해지려 했다. 툭하면 스승에게 싸움을 걸어 왔다. 만약 스승이 싸움을 건 이들에게 먼저 사과를 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우쭐해진다.
 
개중에는 스승을 죽이겠다는 자들도 많았다. 스승을 칼로 벤 후 한 10년쯤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나오면 "역도산을 죽인 야쿠자"라 하여 그것만으로 대단한 관록이 붙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스승이 어쩔 수 없이 한 방 날린 경우다. 스승이 어느 날 동경제국호텔에서 식사를 했다. 뒤를 따라온 불량배들이 스승에게 다가가 "얼굴 좀 봅시다"라고 어깨를 툭툭 쳤다. 몇 번이나 얘기 좀 하자며 어깨를 쳤지만 스승은 거절했다.
 
그러자 그들은 스승에게 욕을 했다. 물론 여기까진 참을 수 있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역도산, 네가 그렇게 힘이 센가? 나랑 한판 붙어 볼까? 저 ×× 겁 나니 모른 척하는 것 봐"하며 약을 올렸다. 그래도 스승이 꿈쩍하지도 않자 큰소리로 "역도산 겁쟁이! 저런 ××가 무슨 세계 챔피언이야" 하며 침을 뱉고 맥주병까지 던졌다.
 
이쯤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모르척 할 것인가? 그 다음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어느 날 스승은 신문의 가십으로 등장했다. '역도산 술집서 싸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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