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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50]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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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이야기가 어느덧 50회째를 맞고 있다. 내가 레슬링을 하면서 박치기 후유증으로 인해 지금까지 머리 통증에 시달린다는 기사를 본 팬 중 한 분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경기도 분당에 산다는 50대 초반의 문모씨는 "선생님이 박치기할 때 난 너무 좋아했습니다. 1970년대 장충체육관·문화체육관에서 레슬링 경기가 열리면 항상 보러 갔는데 선생님께서 박치기를 하지 않으면 '김일 박치기' 하며 연호했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아픔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박치기를 연호했으니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옆에 있는 아내가 웃으면서 "아니 문 선생님만 그랬습니까? 김일 선수가 박치기할 때면 전 국민이 박치기를 연호했지 않았습니까"라고 위로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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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링이 매개체가 돼 나와 연을 맺었던 사람들한테서 요즘 안부 전화가 부쩍 많아졌다. 하지만 나의 건강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를 위로하고, 걱정하고, 또 격려하는 팬들이 있는 한 김일은 두 번 다시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가끔 안타까워하는 팬들도 본다. 그들은 "우리 시대 영웅이셨던 김일 선생님이 조그만 병실에서 먹고 자는지 몰랐다"라며 놀라워한다. 더러는 "왜 정부가 김일 선생님 노후를 챙겨 주지 않고 내버려 두느냐"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병실에서 생활하는 내 모습이 못내 안타까운지 건설업자와 사업가들은 "아파트로 모시겠다", "실버타운으로 모시겠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강원도에 집을 지어 드리겠다"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이런 제안이 들어오면 난 그저 "고맙다"란 말만 할 뿐이다.
 
난 오갈 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병원이 있다. 을지병원은 나의 집과 다름없다. 아프다면 쏜살처럼 달려와 치료를 해 주는 의사 선생님, 외출해서 돌아오면 "어디 갔다 오셨냐"며 친절히 반겨 주는 간호사, 그리고 마주칠 때마다 나의 안부를 걱정해 주는 병원 경비원들.
 
남들은 내가 늘그막에 병원에만 있는 것을 처량하게 여길지 몰라도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병원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 병원만 떠나면 금방이라도 아플 것 같기 때문이다. 엄살이 심하다고 얘기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이 아픈 것이다. 다른 것은 참고 견딜 수 있는데 …. 이제 나이가 드니 더 그렇다.
 
병원을 떠나면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 난 병원에 해 준 것도 없다. 병원에서 받기만 했다. 그래서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차에 얼마 전 한 업체가 실버타운을 제공하겠다고 하고 주변에서 하도 응하라고 권해 일단 받아들였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선 병원을 떠나고 싶지 않다. 난 가진 것이 있다면 병원 측에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을 정도로 이 병원에 신세를 많이 졌다. 난 내가 이렇게 신세를 지며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젊었을 때 돈과 명예가 늘 내 손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돈·명예·청춘은 내 앞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도리어 가혹한 병적 고통만 남겨져 있다.
 
속된 말로 돈 없고 명예도 사라지고 병든 현재의 모습만 남아 있자 나를 아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김일은 이젠 죽었다"며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난 죽지 않았다. 정신은 또렷하다.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 스승 역도산이 왜 아직도 살아 있는 화신이라 불리는지 아는가? 그가 죽었다고 보는가? 물론 스승의 육체는 죽었지만, 정신은 살아 있다. 난 그 혼을 한국에 심을 것이다. 스승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역도산 왕국'을 건설하겠다"라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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