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향 거금도의 자랑이자
세계 프로레슬링에 전무후무한 전설적인 인물로써
8.15해방에 이어 민족상잔의 6.25전쟁의 페허속에서
이땅의 모들 사람들이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을때
홀연히 나타난 우리의 김일선수!!!!!!!!
김일선수 경기가 있는날이면
각 부락별로 1~2대밖에 없는 흑백 TV 앞에
온동네 사람들이 모여앉아
김일선수가 초반에 상대편의 반칙으로 고전하는것을
가슴아프게 보다가
박치기 한방으로
김일선보다 두세배 나 큰 미국선수(자이안트 바바)나
특히 일본놈(안토니오 이노끼)을을 때려 눕일땐
전국민이 서로 껴안고 울고, 웃었고
"우리도 할수있다"!!!!!!는 자신감과 희망,
그리고 민족적 자긍심을 전국민에게 심어주웠 습니다.
지금의 월드컵 과 올림픽이 그때에 비하면 세발의 피라고나 할까?????
특히 그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서
김일선수를 종종 청화대로 초청하셔서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때 김일 선수의 건의로
우리 금산은 물론 벌교-고흥-녹동까지 "전기"가 가설되게 된것입니다..
생전의 김일선수의 대담중에
레스링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것이 무엇이냐? 고 질문하자
주저없이 "박치기 할때"!!!라고 말씀하시면서
"박치기 한번 할때마다 내머리는 부서질 정도로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4천만 국민에게 삷의 용기와 자신감, 기쁨을 줄수있었기 때문에
박치기를 할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하신적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영웅은 가시고 없지만
우리후손들에게
우리고장에도
한때는 대한민국은 물론 전세게 레슬링계에
큰족적을 남기신분이 있었다는것을 기리기 위해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서
기념관 / 체육관이 건립중입니다....
하지만 예산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좌절에 빠져있을때
우리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어주신분에대한
동향인으로써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하는것이 아닌지.....
이제 우리가 나설때가 된것같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참여을 부탁드립니다...
생몰
- 1929년 3월 3일 ~ 2006년 10월 26일
- 데뷔
- 1958년 프로레스링 데뷔
- 경력
- 2000년 선수 은퇴
19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헤비급챔피언
- 수상
- 2000년 체육훈장 맹호장
1994년 국민훈장 석류장
김일(金一(Kintaro Ohki), 1929년 2월 24일 - 2006년 10월 26일)은 한국의 레슬링 선수이다.
1929년에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에서 태어난 김일은 1957년 역도산 체육관 문하생으로 입문하면서 레슬링을 시작했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 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의 활약을 했다. 한국 프로 레슬링 1세대 격인 장영철 천규덕 등과 함께 레슬링의 전성기를 꾸려가다 1970년대 중반 현역에서 은퇴했다. 현역시절 라이벌로는 일본의 안토니오가 있었는데 김일 선수가 병환으로 입원하자 문병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사업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게다가 선수 생활의 후유증으로 1987년부터는 각종 질병에 시달러다가 1994년 1월에 귀국해 을지 병원에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하다 2006년 10월 26일에 그곳에서 만성신부전증 및 심장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제자로는 이왕표 선수가 있다.
금번 김일 체육관건립 대회를
고향의 추진위원님들과
재경고흥 및 금산향우회관련 단체의 임원들과
각마을 향우회장님들이 참석하여
각 마을 향우회별 모금을 하기로 합의 했습니다.....
따라서 본부락 계좌로 찬조해주시면
김일 기념 사업회에
찬조자 와 찬조금액을
함께 통보하면
기념사업회에서
전국적으로 일자별(찬조자 와 개인별 찬조금액을)
공지할 예정입니다
향우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후원에 참여하고싶으신분은
농협, 356-0298-3184-13, 예금주(전용원, 재경상하촌향우회)
.
故 김일선생님의 크나큰 공적이 자손만대에 이어져
후손에게 물려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기념체육관
으로 준공될 수 있도록 모금운동에
향우민들의 작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금액에 상관없이
후원자 공지와
체육관건립에
긴요한 믿거름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