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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76]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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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레슬링·축구·야구 할 것 없이 스포츠에는 늘 홈 링과 홈 그라운드 이점이 있다. 우리 상대는 미국 서부 태평양 연안을 휘어잡고 있던 랩 마스터 콤비였다. 그들 역시 홈 링의 이점을 안고 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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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WWA(세계레슬링협회) 제23대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후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차고 기념 촬영했다.
1963년 12월 처음 세계 태그챔피언이 됐을 때 허리에 찬 벨트는 지금 누가 차고 있는지 모른다.


 
이들은 클린 파이트를 위주로 하는 레슬러가 아니었다. 이들을 상징하는 것은 격렬함·괴력·터프함·난폭함·광기였다. 때문에 그들이 링에 오르면 괴물로 돌변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했다. 예상대로 이들은 링에 올라오자마자 우리를 잡아 먹을 듯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난 그런 제스처를 취한 선수들을 많이 봐 그들이 그렇게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 선수들을 주눅들게 하려는 그들의 모습이 귀엽게까지 보여졌다.
 
이들에 반해 난 정통 레슬러를 고수했다. 난폭함과 광기 레슬러와는 거리가 먼 클린 파이터였다. 내 얼굴에 어디 광기와 난폭함이 묻어 있는가? 부드러움과 격렬함, 전혀 다른 두 스타일의 경기는 분명 팬들의 구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링 아니운수는 양 선수들을 소개했다. 마침내 1라운드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내가 먼저 경기에 나섰다. 이들은 변칙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처음엔 변칙 공격술에 고전했다. 상대가 변칙적이어서 쉽사리 박치기를 날릴 수 없었다. 탐색전을 펼쳤다. 관중석에선 "빨리 동양 선수를 끝내라"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난 지금까지 경기와 달리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상대를 약 올리기 시작했다. 상대는 빨리 흥분했다. 손바닥으로 나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충격은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반칙이었다. 심판에게 아프다는 시늉을 하면서 어필을 했다. 심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차피 홈 링이 아닌 이상 심판이 그 정도 반칙에 상대 선수에게 주의를 줄 리 만무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상대가 반칙으로 나오자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반칙을 했다. 그도 계속 반칙을 해댔다. 그럴 때마다 심판을 향해 반칙이라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상대는 보디 슬램에 이은 보디 프레스로 선제 공격을 가했다. 매트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진 나에게 누르기를 시도했다. 경기는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관중은 미국인 선수가 성인이라면 동양인인 우리를 중학생 정도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미국 관중이 흥분할 만한 장면을 보여 주면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난 미스터 모터와 교체한 후 링 코너에서 숨을 고르고 그들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교체하면 경기를 끝내겠다고 마음먹었다.
 
모터 선배와 교체해 링안에 들어갔다. 경기는 한층 더 격렬해졌다. 이 경기가 싱겁게 끝날 줄 알았던 그들도 시간이 점점 흐르자 초조해 하는 것 같았다. 넘어져도 일어나고, 프레스를 가해도 밀쳐내는 것에 대해 혀를 내두르기 시작했다.
 
그때 상대를 로프로 던졌다. 그리고 붕 뜬 상태에서 미사일처럼 날아 배를 향해 박치기했다. 머리를 먼저 받을 것이란 예상을 했던 그들은 의외로 박치기가 배에 꽂히자 일어나지 못했다. 그대로 뻣뻣하게 링 위에 쓰러졌다.
 
난 그제서야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그의 이마를 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받았다. 점프해서 받고, 뛰어가서 받고, 그리고 로프 위에 올라가 떨어지면서 받고 …. 상대는 박치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동료가 녹다운 지경에 이르자 코너에 있던 선수가 반칙을 하기 위해 링으로 달려 나왔다. 마찬가지로 미사일처럼 날아가 그의 가슴을 받았다. 그는 데굴데굴 뒹굴며 링 밖으로 도망쳤다.
 
쓰러진 상대의 가슴을 덮쳤다. 심판이 셋을 세도록 상대는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내 세계 타이틀 매치를 획득했다. 한국과 일본 교포들은 발로 바닥을 구르고, 이 꿈 같은 결말에 흥분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도 땀과 눈물로 뒤범벅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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