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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61]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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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까지만 야쿠자 얘기를 하겠다. 그 다음부터는 일본 열도를 달궜던 나의 프로 레슬링 세계를 들려주고 싶다.
 
야쿠자는 도쿄에만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프로레슬링 경기도 마찬가지로 도쿄에서만 열린 게 아니다.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흥행도 됐다. 당연히 일본 전국 각 지방의 지역 오야붕들까지 스승 역도산과 손을 잡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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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의 국교 수립을 위해 물밑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스승처럼 나도 한몫을 했다.
1964년 7월 1일 한국을 방문, 당시 이병두 중앙정보부 차장(왼쪽) 등 정부 관계자와 환담을 나누고 있다.
이병두 차장이 앉은 의자 손받침대에 ''CIA 차장 이병두 1964.7.1''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강한 마력(魔力)을 갖춘 스승은 인간 관계와 사업적 수단을 따지자면 도가 텄다고 보면 된다. 당시 스승의 나이가 30대 중반이었다. 그 나이의 스승이 일본 최고 거물급 인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스승은 오사카 쪽 조직원들과도 관계를 맺었지만 깊은 유대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었다. 그 지역에 경기하러 가면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하지만 핏줄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1960년대 초 오사카 밤의 문화는 조선인들이 꽉 쥐고 있었다.
 
스승과 대표적으로 친분을 맺었던 인물은 야나가와구미 오야붕 양원석이었다. 훗날 야마구치구미의 오사카 전초 기지가 됐던 이 조직은 오사카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그런 야나가와구미의 2대 오야붕인 강동화도 스승과 가까웠다.
 
오사카에는 또 다른 재일교포 조직인 명성회가 있었지만 명성회는 야나가와구미와 접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조직이 쇠퇴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당시 내가 오사카로 경기하러 가면 많은 교포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이들은 내가 일본 선수를 쓰러뜨리고, 또 서양의 거구들과 겨루는 것을 흥미진지하게 지켜보곤 했다.
 
내 경기가 끝나면 교포들이 중심이 돼 항상 걸쭉한 대접을 해 줬고, 양원석과 강동화도 교포 중 한 명으로 만난 기억이 있다. 스승은 조선인이란 사실을 숨겼지만 교포들 사회에선 스승이 조선인이란 사실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들은 스승이 오사카 등지에서 경기하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다. 같은 핏줄끼리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교포들의 자존심이나 다름없었던 스승은 이렇게 해서 일본 전 지역에서 활동하는 야쿠자들과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앞서 수차례 강조했지만 사업가·프로모터·프로 레슬러로서 일본 최고의 영웅이었던 스승은 야쿠자와는 부정적 거래는 하지 않았다. 그들에 비해 아쉬울 것이 전혀 없었던 스승은 레슬링 흥행을 위해서 어울렸을 뿐이다.
 
이런 경우는 있었다. 교포 출신 야쿠자와 스승이 얼마나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했냐면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좀 막연한 얘기 같지만 1963년 전만 해도 한국과 일본은 교류를 맺지 않았다. 그런데 그 교류의 윤활유 구실을 했던 사람이 동성회 오야붕 정건영, 스승, 그리고 스승의 후견인이었던 자민당 오노 반쿠보였다.
 
내가 일본서 맹위를 떨쳤던 1960년대 초, 물밑에서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 교섭이 시작됐다. 냉전이 극으로 치닫던 시절, 나아가 일본의 한반도 강점 때문에 감정이 좋지 않았던 시절, 한국과 일본이 국교 정상화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때 한국과 일본의 많은 인사들이 국교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스승이 서울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그 방문이 이뤄지도록 뒷받침했던 인물이 정치인 오노 반보쿠와 고타마, 동성회 정건영 등이었다. 스승과 정건영 등은 한국 중앙정보부와도 인연을 맺고 줄타기 외교의 중심을 잡는 노릇을 했다.
 
스승이 한국을 방문했던 1963년은 내가 평생 잊지 못하는 해다. 스승이 야쿠자 칼에 찔려 작고했고, 내가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던 해였다. 희비의 엇갈림은 숙명처럼 다가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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