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에 오르면 상대방과 눈싸움을 벌인다. 그 눈을 보면 경기에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 승패를 예측할 수 있다. 나의 눈은 이미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글거렸던 눈은 그날 따라 동태눈이 되었다.
'땡'하는 공이 울렸다. 그는 맹수처럼 덤벼들었다. 그는 보디슬램·쪼우기·꺾기 등 프로레슬링 모든 기술을 동원, 나를 매트에 내동댕이 쳤다.
난 그저 때리면 맞고, 던지며 던져졌다. 링밖에선 "오오키 긴타로 왜 그래, 정신차려!"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또 안타까워하는 팬들의 눈빛도 들어왔다. 전의를 거의 상실하고 매트에 드러누운 나에게 그는 육중한 몸을 덮쳤다.
심판이 원·투·스리 카운터를 외치자 본능적으로 몸을 밀쳤다. 자신의 매운 맛을 아직 보지 못했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헤드록을 걸면서 공격했다. 나의 비명은 경기장을 뒤덮었다.
난 그날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한 불효자식이기에 그렇게라도 실컷 맞고 싶었다. 자신의 공격에 대해 방어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자, 그도 이상했는지, 자신을 가리키며 "공격해봐" 라며 제스처를 취했다.
본능적일까. 순간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역류하다시피 했다. 그에게 코뿔소 처럼 돌진하 듯 달려들었다. 그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로프로 밀친 후 반동으로 튕겨져 나오는 그의 배에 박치기를 가했다. 급소에 맞아 고통하는 그를 보디슬램으로 매트가 부서지도록 세게 던졌다.
링은 함성의 도가니였다. 난 그의 머리에 특기인 박치기를 마구 해댔다. 그는 나의 공격에 정신을 못차렸다. 결국 그에게 역전승을 거뒀다. 심판이 나의 손을 들어줬지만 기쁘지 않았다. 관중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링에서 내려왔다.
스승 역도산은 내가 경기에서 승리한 것 보다 경기를 앞두고 왜 사라졌는지, 그리고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이유가 뭔지 따질 태세였다. 로커에 스승이 들어왔다. 스승은 "너 뭐하는 녀석이야"라며 야단치기 시작했다.
난 스승의 추궁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숙이고 "다음부턴 절대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사과만 했다. 평소 같았으면 주먹과 발이 먼저 날아왔을 것인데 스승은 나에게 무슨일이 생긴 거라는 직감을 했을까. 목소리를 낮추면서 "무슨 일이 있냐?"라고 물었다.
난 머뭇머뭇거리다 "아버님이 작고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스승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니 갑자기 눈물이 핑돌았다. 스승은 나의 말에 대답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런 일이 있었구먼"하면서 "진작 얘기하지 이제 말해"라며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스승은 아마도 나를 따로 불러 위로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저도 내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슬픔은 참고 견디고 극복해야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흘러야만 해결될 것 같았다. 난 아버지 타계를 계기로 내가 왜 타국에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 프로레슬링을 하는지, 도대체 나의 미래는 뭘까. 솔직히 누굴 위해 종을 울리고 있는지. 지난 3년간 잃어버렸던 나의 존재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프로레슬링을 그만둘까란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프로레슬링 이외에는 없다. 결론은 프로레슬링 선수로서 대성공하는 것이다. 프로레슬링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것만이 불효자식 상처를 치료 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난 다시 예전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왔다. 스승은 나의 어깨만 툭 쳐 줄뿐, 별말은 하지 않았다. 텅빈 도장에 남아 땀과 눈물을 섞어가며 훈련 또 훈련했다. 훈련을 거듭하던 어느날 스승은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 한명을 데리고 도장에 왔다. 턱이 인상적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