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테즈!` 올드 레슬러 팬들은 루 테즈를 `철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항상 "진실로 순수한 레슬러를 한 최후의 사람"이라는 찬사를 덧붙인다. 루 테즈는 명실공히 WWA(World Wrestling Association)가 배출했던 최고의 스타이자 레슬링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루 테즈는 세계 레슬링계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완벽했던 기술 소유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전매 특허 기술인 백 드롭에 안토니오 이노키는 감탄, 훗날 그 기술을 응용시켜 자신의 기술로 만들었을 정도였다. 스승 역도산뿐만 아니라 나 역시 그와의 관계가 각별했다. 2002년 폐렴으로 세상을 뜬 루 테즈는 1995년 4월 2일 일본 도쿄 돔에서 열렸던 나의 은퇴식 때 휠체어에 앉은 나를 손수 밀면서 링까지 안내했다. 그때는 그가 더 오래 살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이승에서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스승과 영원한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루 테즈는 1965년 나와도 맞붙은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WWA 타이틀를 놓고 겨뤘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WWA 타이틀전이었다. 당시 난 경기를 압도했다. 그런데 갑자기 관중이 던진 의자에 머리를 맞고 찢어져 결국 루 테즈에게 지고 말았다. 루 테즈는 개인적으로 "그때의 승자는 김일이다"라고 치켜세워 주곤 했지만 어디까지나 진 것은 진 것이어서 패자는 나다. 그와 난 서로를 존경하면서 국경과 세대를 초월한 레슬러의 우정을 나눴다. 너무도 보고 싶은 루 테즈. 그 루 테즈를 처음 본 것은 57년 10월 초였다. 루 테즈는 스승과 세기의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스승은 그와의 대결에서 이기기 위해 대단한 집념과 의욕을 보였다. 매일 같이 혹독한 훈련을 소화했다. 그때 스승이 운동하는 장면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대개 스타급 선수가 되면 적당히 몸을 만든 후 링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스승은 그렇지 않았다. 스승에게는 `적당히`란 말이 없었다. 스승은 뼈를 깎는 훈련을 거듭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던 스승은 훈련밖에 몰랐다. 체육관에 틀어박혀 훈련에 몰두했다. 툭 하면 링위로 나를 불렀다. 아마도 나를 루 테즈라 가상하고 공격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스승의 매질은 루 테즈를 염두에 둔 것이란 생각도 든다. 57년 10월 초 루 테즈가 역도산과 경기를 갖기 위해 처음 일본을 방문했다. 루 테즈의 방문을 앞두고 일본 전역이 들떴다. 스승은 루 테즈가 일본을 방문하기 전 일본프로레슬링 커미셔너 자리에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를 앉혔다. 또 일본프로레슬링 협회 이사장 자리에는 거물급 정치인 나라하시 와타루가 취임했다. 당시 루 테즈의 환영식에는 오노.와타루를 비롯한 일본 정.관계 인사와 스포츠.연예.문화계 등 약 200여 명이 참석하는 큰 성황을 이뤘다. 정말 대단했다. 일본 언론은 스승과 루 테즈의 일거수 일투족을 매일 보도했다. 그만큼 스승과 루 테즈의 경기는 일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경기는 프로레슬링 흥행면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표는 일주일 전 전부 매진됐다. 고라쿠엔 구장에 3만 관객이 모였다. 그때가 1957년 10월 7일로 기억된다. 스승과 루 테즈가 펼치는 NWA 세계 헤비급 선수권대회의 61분 3라운드 승부였다. 일본 국민이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일찍 귀가를 서두르는 바람에 도쿄 시내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난 그때 링 사이드에서 이 경기를 지켜봤다. 공이 울리자마자 스승은 루 테즈로부터 공격당했다. 스승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순간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었다. 일간스포츠 | 2006.05.17 09:22 입력 정병철 기자 <계속>
사진=이호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