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왼쪽)과 안토니오 이노키는 역도산의 제자였고 라이벌이었다. 또 한일 양국 프로레슬링에 엄청난 영향을 줬던 거물들이었다.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지난 주에는 1950년대말 한국에서 처음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린 것을 시작으로 역도산이 주도했던 일본 프로레슬링이 한국에 준 영향, 국내파의 거두 장영철이 이끌었던 한국 프로레슬링의 1차 황금기, 역도산 사후 김일이 귀국해 한국 프로레슬링의 본격적인 전성기를 열어간 과정, 그리고 김일과 장영철의 파벌 싸움끝에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장영철 파동'이 벌어진 상황까지를 다뤘다. '삼위일체'는 이번 주 '한국 프로레슬링 혈투사' 하편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 프로레슬링이 마지막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절을 중심으로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의 몰락 과정까지를 소개한다.
◇안토니오 이노키, 한국프로레슬링의 마지막 전성시대를 장식한 주연급 조연
'장영철 파동' 이후에도 생명력을 유지해오던 한국 프로레슬링은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변곡점을 맞는다. 이전같은 인기를 유지하기 쉽지 않은 상황으로 점점 접어들고 있었다. '지존' 김일에게만 의존해오던 구조적 한계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국 프로레슬링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일본 프로레슬링 업계의 현황을 살펴보자.
절대자였던 역도산이 세상을 떠난 이후 일본 프로레슬링계도 분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역도산이 만들었던 일본프로레슬링협회가 유명무실해지면서 1972년 안토니오 이노키가 신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새로 만들었고, 이듬해 자이언트 바바도 전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따로 창립했다. 이노키와 바바의 라이벌 의식은 대단했는데 한국 시장 진출을 놓고 두 사람(또는 두 단체)가 경쟁 관계가 됐다. 이런 외부 환경 변화가 국내 프로레슬링업계에도 새로운 자극과 활력소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1970년대 중반 한국 프로레슬링이 마지막 붐업을 이루게 되는 과정에서 이노키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큰 영향을 끼쳤다. 이노키는 이후 한국 프로레슬링의 몰락 과정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게 된다.
1975년 김일과 이노키가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펼친 라이벌전은 국내 프로레슬링의 마지막 화양연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이노키는 국내 팬에게도 만만치 않은 지명도과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노키의 등장은 그동안 침체됐던 국내 프로레슬링 시장에 신선한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노키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이노키는 프로레슬러가 지녀야할 여러가지 요소 즉 실제로 싸운다 해도 막강함을 자랑할 수 있는 격투기 능력, 다채롭게 뛰어난 테크닉, 우람한 몸집의 전시효과, 매트의 주인공다운 호감가는 용모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3월 22일 부산을 떠나 27일 서울에서 김일과 마지막 대결을 갖는 단 엿새동안 이노키는 "프로레슬링은 쇼이기 때문에 안 본다"던 사람까지도 팬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실력위주의 레슬링을 보여주는 스트롱스타일(정통파)의 기수 이노키의 깨끗한 플레이가 환영을 받은 것이다.' ('주간스포츠' 1975년 6월 18일자)
한국 프로레슬링이 1975년 하반기부터 새로운 호재를 맞은 것은 두가지 요소가 겹쳤기 때문이다. 하나는 시장 확대를 꾀하던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들이 경쟁적으로 한국 시장 공략을 노크했다. '신일본'의 이노키가 한국 원정경기를 통해 시장 확대 가능성을 보여준데 이어 라이벌인 '전일본'의 바바도 호시탐탐 한국 시장 공략을 노렸다. 바바는 그해 9월 대한프로레슬링협회 초청으로 방한해 한국 원정경기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또 하나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박송남이 국내에 복귀하면서 김일을 이을 새로운 스타 후보로 급격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시장에서 '박 송'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코리안 어새신(한국의 암살자)'이라는 별명답게 악역 레슬러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거구의 박송남(오른쪽)은 국내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한 레슬러였다. '해외파' 스타의 원조격이었다. 사진=주간스포츠>
'보보 브라질로부터 WWA(세계레슬링협회)의 세계 타이틀을 빼앗은 박송남은 앞으로 한국 프로레슬링의 간판 스타로 군림하게 될 것같다. 일본 프로레슬링계도 이미 박송남을 초일류급 레슬러로 꼽고 있다. 박송남은 한국의 암살자라는 무시무시한 별명까지 들어가면서 미국 프로레슬링계를 주름잡다가 지난 봄 귀국, 당분간은 한국에 뿌리를 박고 활약할 속셈인 것같다. 그동안 침체에 빠졌던 국내 프로레슬링계가 일본 프로레슬링단체의 한국진출과 박송남의 클로스업이 계기가 되어 지난 날의 황금시대를 되찾게 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주간스포츠' 1975년 10월 8일자)
박송남은 1970년 4월 미국에 처음 진출했는데 레슬러 출신 프로모터인 도리 펑크 1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거물의 뒷받침으로 미국 시장에서 크게 성공했다. 198㎝가 넘는 거구였던 그는 미국 레슬러에 비해서도 체격면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악역'으로 그의 지명도가 점점 높아지자 자택으로 협박전화가 걸려오고, 주차한 자동차의 타이어가 칼로 찢어지고, 집으로 계란투척이 쉴새없이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프로레슬링 세계에서는 미움도 인기 척도의 하나이다. 미움을 많이 받을수록 파이트 머니가 올라간다. 1975년쯤 박송남의 일년 수입이 15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7500만원)정도였다고 한다. NWA 세계챔피언급의 연수입이 20만달러였던 시절이니 박송남은 수입면에서도 초일류 수준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활동했던 조영남이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이노키의 이름은 못들어봤지만, 박송의 인기는 대단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 변화속에 노장 김일도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노키와 대한해협을 오간 라이벌 2연전에 이어 자이언트 바바와 도쿄 원정경기를 갖기도 했다. 1975년 10월 도쿄에서 벌어진 바바와의 경기에서 김일은 7분만에 무릎을 끓었다. 하지만 김일이 이노키, 바바 등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양대 산맥과 연이은 라이벌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아직 그의 상품가치가 건재하다는 증거였다. 또 이노키의 '신일본'이나 바바의 '전일본'과 직접적인 소속 관계를 맺고 있지 않던 김일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한국 프로레슬링의 붐업을 위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역도산이라는 한 스승밑에서 자라난 세 거물의 얽히고 설킨 인연과 대결은 한일 프로레슬링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상징한다.
'영원한 라이벌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 역도산의 제자이자 선후배 사이였던 그들과 나는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관계였다. 레슬링을 시작한 것이 나이 서른살때. 그 뒤로 1년 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가 후배로 들어왔다. 이노키는 브라질에서 왔고 자이언트 바바는 원래 야구선수였다가 레슬러로 전향했다. 두 사람 모두 나이가 나보다 10년 이상 어려서 큰 형님 대접을 받았다. 이노키는 데뷔전도 치르게 직접 도와줬다. 그는 처음에 나를 잘 따랐다. 머리는 영리하지만 약삭빠른 편이었다. 바바는 우직했다. 이노키는 잔기술이 많았고 바바는 2m10㎝ 가까이 되는 키에서 몸을 날려 치는 16문킥으로 이름을 얻었다. 때론 라이벌로, 때로는 의형제처럼 지냈다. 이노키와 바바는 나와 실력도 엇비슷했다. 데뷔 초기에는 내가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지만 그들의 기량도 갈수록 늘었다. 챔피언 벨트를 걸고 실력대결을 벌인 것은 각각 3번 정도. 내 전적은 바바와 이노키 모두에게 1승1무1패였다.' ('경향신문' 1998년 연재, '나의 젊음, 나의 사랑:프로레슬러 김일'에서 인용)
<김일(오른쪽)이 자이인트 바바에게 원폭 박치기를 날리고 있다.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김일과 이노키는 1960년 처음 만났다. 김일은 스물여덟 살때인 1957년 역도산의 문하생으로 프로레슬링에 입문했고, 이노키는 역도산이 브라질에서 발굴해 열일곱 살이던 1960년 역시 역도산체육관에서 본격적으로 프로레슬링을 배우게 됐다. 두 선수가 처음 격돌한 것은 1960년 도쿄의 다이토체육관에서였다. 이 경기는 이노키의 데뷔전이기도 했는데, 스승 역도산은 레슬링에 입문한지 채 1년도 안된 이노키의 첫 상대로 비정하게도 한방을 쓰는 김일을 지목한 것이다. 당시 김일의 나이는 서른한살, 반면 이노키의 나이는 열일곱살에 불과했다. 김일은 시간을 일부러 끄는 여유까지 보이다가 경기 시작 7분6초만에 가볍게 승리를 거뒀다. 두 선수의 나이차가 열네살이나 나는데 (마지막 대결을 펼친 1975년까지)15년 동안이나 라이벌 대결을 펼쳤다는 것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그 15년이란 김일의 경우 나이가 서른 한살부터 마흔 여섯 살이었고, 이노키는 열일곱 살부터 서른 두살이었다.' (김동훈 저, '신들의 전쟁 세상을 뒤흔든 스포츠 라이벌',p.92~94)
프로레슬링에는 '시멘트 매치'라는 은어가 있다. 이는 일체의 사전 시나리오없이 완벽하게 진검승부로 펼쳐지는 경기를 뜻하는 업계 은어다. 프로레슬링 역사에는 유명한 '시멘트 매치'가 꽤나 많이 있다. 나중에 언급하는 박송남-이노키 전도 대표적인 '시멘트 매치'였다. 김일은 생전 인터뷰에서 동문인 이노키, 바바 등과 실제로 누가 가장 강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하면서 자부심을 드러낸 적이 있다.
"무제한 대결인 '시멘트 매치'는 내가 왕입니다. 스파링을 하다가 열을 받으면 이것저것 안가리고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서로 붙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걸 시멘트 매치라고 합니다. 각본도 없고 인정사정 볼 것없습니다. 바바가 이노키한테 이겼고, 나는 둘 다 잡았습니다." ('월간조선' 2005년 10월호, '이건실이 만난 스포츠인물:김일편'에서 인용)
이것은 여담이지만 올드팬에게는 또하나의 스타 레슬러로 기억에 생생한 여건부(일본이름 호시노 칸타로)의 국내 무대 등장도 이노키의 한국 시장 진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노키가 한국 시장 공략을 위해서 히든카드로 준비했던 것이 바로 여건부였다. 지금의 50대 이상 중장년들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여건부의 '알밤까기'를 한두번 흉내낸 기억이 있으리라. 일본 고베 태생인 여건부는 부친의 고향이 대구였다. 학창 시절때는 복싱을 했지만 1962년부터 역도산의 제자로 프로레슬링에 입문했다. 훗날 신일본프로레슬링의 회장직도 맡았던 그는 2010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 선수시절의 여건부 모습. 사진=주간스포츠>
◇박송남과 이노키의 '시멘트 매치', 한국 프로레슬링의 운명을 좌우하다
1976년 10월 향후 한국 프로레슬링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경기가 열렸다. 한국에서 김일의 뒤를 이어 흥행 견인차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박송남과 일본 최고의 격투기 스타 안토니오 이노키가 10월 9일 대구, 10일 서울에서 2연전을 갖는 스케줄이었다. 이 경기는 1970년대 중반 침체기에 들어선 한국 프로레슬링을 회생시키기 위해 기획된 빅 카드였다. 한국 시장 진출을 본격화하려는 이노키의 '신일본'과 '포스트 김일'을 키우려는 한국 프로레슬링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성사됐다.
'지난 봄 이노키는 박송남을 신일본프로레슬링이 주최하는 월드리그전에 초청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스케줄이 바뻤던 박송남은 이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미국에 단단한 기반을 닦아놓고 풍족한 생활을 즐기고 있으면서도 박송남은 한국 매트에 대한 향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일시 귀국했다가 지난 봄 미국으로 떠날 때에도 "국내에서 프로레슬링이 다시 지난 날의 붐을 되찾을 여건이 마련된다면 언제든지 돌아오겠다"고 말했었다. 이노키는 이번의 두번째 한국 원정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심고 일본의 다른 두 단체를 제치고 신일본프로레슬링과 한국 프로레슬링 시장 사이에 단단한 레일을 깔 속셈인 것같다. 한편 박송남은 이노키와의 대결을 통해 외국 프로레슬링시장에서 받고 있는 만큼의 인정을 고국 팬들에게서도 받는 기회로 삼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박송남-이노키전 흥행이 제대로 성공을 거둔다면 이노키의 신일본프로레슬링은 한국 프로레슬링 시장에 더욱 기반을 굳히게 될 것이며 박송남은 새로운 스타로서 국내에서도 인정받게 될 가능성이 짙다' ('주간스포츠' 1976년 10월 13일자)
<이노키(왼쪽)는 무하마드 알리와 세기의 대결을 펼쳤다. 사진=주간스포츠>
1976년은 이노키에게 매우 특별했던 한해였다. 유도 세계챔피언 출신 윌리엄 루스카와 이종격투기 대결을 펼쳐 호쾌한 승리를 거둔 그는 내친 김에 세계 최고의 슈퍼스타인 프로복싱 세계헤비급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 맞대결을 성사시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그해 6월 26일 일본 도쿄 부도칸에서 벌어진 알리와 이노키의 대결은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속설처럼 싱거운 무승부로 끝났다. 이노키는 경기내내 링바닥에 누워서 알리에게 발길질만 해댔다. 경기가 끝난 뒤 승부조작설도 나도는 등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다. 이노키는 이 대결로 세계적인 지명도는 얻었지만 그다지 실속은 없었다. 그는 박송남과의 대결을 위해 방한한 뒤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알리와의 대결 여파로)홍콩, 홋카이도, 센다이 등 여러 곳에서 열릴 예정이던 내 경기가 취소됐다. 내가 이끄는 신일본프로레슬링은 영업상의 손해를 입었으며 개인적으로도 내 이미지가 망가졌다"고 토로할 정도로 코너에 몰려있었다. 이노키에게는 반전이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박송남과의 원정 2연전이 성사된 것이다.
이 2연전은 결과적으로 '시멘트 매치'가 됐고, 박송남은 처참하게 패했다. 이노키는 손으로 박송남의 눈을 파기도 하고, 척수에 직접적인 엘보 공격을 가하기도 하면서 잔인하게 경기를 펼쳤다. 국내 팬들을 큰 충격에 빠졌다. 김일을 대체해 한국 프로레슬링의 슈퍼스타가 될 것으로 기대됐던 박송남은 무참하게 패한 뒤 쓸쓸히 다시 미국 시장으로 돌아갔다. 이노키는 일본내에서 체면을 차렸지만 한국팬에게는 그동안 쌓아올린 좋은 이미지를 다 날려버렸다. 그리고 한국 프로레슬링는 부활의 계기를 잃어버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상편에서도 인용한 야나기사와 다케시의 저서 '1976년의 안토니오 이노키'(국내 미발매)는 '제5장 대구의 참극'에서 이 잔혹했던 시멘트 매치의 막전막후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 일부를 인용해 본다.
'안토니오 이노키와 박송남의 경기는 처음부터 싱글 2연전의 계약이었다. 싱글 2연전이 짜여진 경우, 처음 경기에서 A가 B에게 이기고, 그 다음 경기에서는 B가 A를 이기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다. 예를 들어 첫 경기인 대구에서는 외국인인 안토니오 이노키가 한국인 박송남에게 비겁한 수단을 써서 승리를 강탈하고, 두번째 경기의 서울에선 분노한 박송남이 이노키에게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달려들어 복수를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된다면 관객도 만족해준다. 관객이 원하는 결과를 제공하는 것이 프로레슬링이라는 엔터테인먼트인 것이다. 하지만 이노키는 두번째 서울 경기에서 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본의 NET가 텔레비전 중계를 했기 때문이다. 무하마드 알리와의 경기가 매스컴으로부터 혹평을 받아 다시 자신의 강인함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 시기에, 박송남 따위에게 지는 모습을 일본의 시청자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한국의 바바'라는 별칭을 가진 레슬러(박송남은 거대한 덩치덕에 한국의 자이언트 바바로 통했다)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노키가 (최대 라이벌인)바바에게 질 수는 없지 않은가.'(야나기사와의 책,p.270~271)
야나기사와는 자신의 책에서 이 경기가 '한국 프로레슬링의 종언'을 가져왔다는 과감한 분석을 내놓는다.
'박송남이 안토니오 이노키에게 두번 연속으로 진 경기는 한국 프로레슬링업계에게 크나큰 데미지를 남겼다. 박송남은 한국프로레슬링업계의 영웅이었고, 누구나 동경하는 미국에서도 가장 성공한 레슬러였고, 제왕인 김일을 초월한 단 한명의 한국인 레슬러였다. 하지만 박송남은, 복싱 선수(알리를 뜻함)를 상대로 누워서 빌빌거렸던 비겁자(알리와 대결에서 이노키의 경기 스타일을 비유한 표현)에게도 피범벅이 되도록 참패한 것이다. 어차피 한국의 영웅따위 그 정도 실력인 것이다. 팬들은 크게 낙담했다. 박송남의 패배는, 단순히 한 명의 레슬러가 패배한 것이 아니라, 한국프로레슬링 그 자체의 패배였다. 일본인에게 완전히 나가떨어진 한국 프로레슬링은 어떻게 꿈을 품을 수 있을까. 그 이후 한국 프로레슬링업계는 불꽃이 사라진 듯 했다. (한국내 유력 프로모터였던)김두만은 1979년에 다시 신일본프로레슬링을 한국에 초대했지만, 메인 이벤트는 안토니오 이노키 대 윌리암 루스카의 이종격투기전, 세미파이널은 후지나미 타츠미 대 여건부의 대결이었다. 한국에는 메인 이벤트를 담당할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이노키는 한국 프로레슬링에서 꿈과 희망을 남김없이 빼앗아가버린 것이다.'(야나기사와의 책,p.281)
<이노키(아래)가 거구인 박송남의 공격을 허리로 받아내고 있다. 사진=주간스포츠>
1976년 이노키를 둘러싼 여러 상황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다보니 한국 프로레슬링의 몰락 원인에 대해서 이노키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평가한 느낌도 준다. 하지만 박송남-이노키전의 여파로 한국 프로레슬링이 화려한 재기의 기회를 잃은 것은 객관적인 사실에 가깝다. 당시 국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잡지로 군림했던 '주간스포츠'는 박송남-이노키전 이후 국내 프로레슬링 기사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 잡지가 당대 대중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을 다루는 대중지였음을 감안하면 프로레슬링이 급속하게 인기를 잃어버렸다는 확실한 증거로 풀이할 수 있다. '주간스포츠'는 1981년 2월에야 거의 4년 넘어 만에 두 페이지에 걸쳐 프로레슬링 기사를 다시 다루는데 그 제목도 '프로레슬링 붐 다시 일어날까'였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봄날은 그렇게 갔다.
그래서 '한국에는 역도산(김일을 뜻함)도 있고, 자이언트 바바(박송남을 뜻함)도 있었지만 이노키(김일의 뒤를 이어 흥행 견인차 역할을 해줄 차세대 슈퍼스타를 뜻함)가 없었다'는 야나기사와의 지적은 뼈아프다.
◇에필로그:저물어가는 한국 프로레슬링 황금시대의 마지막 삽화들
어쩌면 한국 프로레슬링은 '박정희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스포츠였는지도 모른다. 최고 권력자가 프로레슬링을 좋아했고, 배고프고 힘들던 대중들도 그저 김일의 박치기 한방에 온갖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박정희 사후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한 뒤에 거짓말처럼 프로레슬링은 처절하게 몰락의 길을 걷는다. 육사시절 골키퍼 출신이었던 전두환은 프로레슬링은 굉장히 싫어했던 것같다. 이런 일화도 남아있다.
'그(전두환)가 군포에 여단장으로 있을 때, 청와대로 박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가 대통령이 프로레슬링 중계를 보고 있자 "각하, 레슬링은 쇼인데 뭐 하러 보십니까"라고 했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전두환 집권 이후)이제는 프로레슬링이 혼날 차례였다.'('월간조선' 2005년 10월호, '이건실이 만난 스포츠인물:김일편'에서 인용)
한국 프로레슬링은 대표했던 김일은 이 시기에 두가지 악재를 동시에 맞닥뜨린다. 하나는 자신을 싫어하는 집권세력의 등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이었다. 김일의 퇴장과 함께 한국 프로레슬링의 황금시대도 사실상 같이 막을 내리게 된다.
'국내에 레슬링스타들이 나타나고 해외에서 명성을 얻어가자 박정희 대통령은 내게 체육관을 지으라고 하사금을 내렸다. 1972년 정동 문화체육관 건설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떻게 나랏 돈만으로 체육관을 지을 수 있는가." 나는 내 돈도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돈으로 1000만원을 집어넣었다. 1975년 체육관을 개관했다. 김일체육관. 개관 당시 고사를 2번이나 지냈다. 잘될 듯하던 체육관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체육관을 내놓게 됐다. 재단법인으로 돼있던 체육관이 내 소유가 아니란 것을 그때야 알았다.' ('경향신문' 1998년 연재, '나의 젊음, 나의 사랑:프로레슬러 김일'에서 인용)
<말년에 투병 생활을 하던 김일(오른쪽)을 이노키가 방문해 위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링을 떠난 것은 1980년 5월. 제주도 경기후 링위에 서본 적이 없다. 5.18로 어수선했던 시절. 제주도에서 대규모 국제대회를 준비중이었다. 그때 제주도만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내려졌다. 군중집회나 대규모 행사는 꿈도 못꿀 때였다. 하지만 이미 경기 포스터가 나붙었고 경기 당일 제주 공설운동장에는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인산인해라고 할까. 어림잡아 5만명이 될듯 싶었다. 계엄군들이 깜짝 놀랐다. 계엄령하에서 레슬링 경기라니. 하지만 이미 모인 사람들을 되돌려 보낼 수도 없는 노릇. 오히려 이들을 해산시키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판이었다. 처음에는 바짝 긴장하던 군에서도 결국 경기를 진행하도록 허락했다. 그날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후 김일체육관이 문화방송으로 넘어가고 한때 장안동에 체육관을 세웠지만 그것도 어려웠다. 그때 나이가 52살.' (경향신문 연재물에서 인용)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프로레슬링은 TV화면에서 사라졌다. 대신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화면을 메웠다. 1981년에는 김일후원회도 해산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재단법인 김일후원회가 설립됐다. 초대 회장에는 당시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취임했다. 김종필 국무총리도 후원회장을 역임했다. 이 후원회는 나를 후원하는 재단법인이라기보다 레슬링 발전을 위한 단체였다. 그런데도 신군부가 이를 해산시켰다. 서울 정동 김일체육관은 문화체육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로 미루어 볼 때 한국 프로레슬링의 몰락은 어쩌면 신군부와 관련이 있었다. 몰락의 원인은 또 있었다. 한국 프로레슬링은 너무 나에게만 의존했다. 내가 나이가 많아 링에서 내려오면서 대체할 만한 스타가 나오지 않았다. 1981년 컬러TV 보급과 함께 프로스포츠가 출범한 야구 축구 등이 활성화되면서 국민은 프로레슬링은 외면했다.'(김일 회고록 '굿바이 김일',p.240~241)
김일의 후계자였던 이왕표는 2010년대 중반까지 한국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되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래도 옛 영화를 되찾지는 못했다. 이왕표도 2018년 9월 4일 암투병끝에 향년 64세로 스승의 곁으로 떠났다. 그렇게 또 한 세대가 지나갔다.
사족
지난 주 '한국프로레슬링 혈투사' 상편이 포스트된 뒤 축구자료수집가 이재형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김일의 말년 모습이 담긴 사진을 제공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김일은 은퇴뒤 수산업에 뛰어들었다. 한동안 호황을 누리다가 결국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업에 실패했다. 이후 불우한 노년을 보냈다. 뇌졸증으로 쓰러진뒤 투병생활도 일본 지인의 도움으로 후쿠오카에서 보냈다. 그러던중 서울 을지병원 박준영 이사장의 권유로 1994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2006년 타계할 때까지 을지병원의 한 병실에서 말년의 시간을 가졌다. 영웅을 영웅으로 대접한 후원자가 있었기에 외롭지만은 않았다. 아래 사진은 2004년 김일이 투병생활을 하던 을지병원의 병실에서 자신의 전성기 시절 사진을 선물받고 기뻐하는 모습이다. 김일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헌액되는 것이 마땅한 진정한 '시대의 영웅'이었다. 고 김일 선생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김일이 을지병원에서 전성기 시절 자신의 사진을 선물받고 감회에 젖어있다. 사진=축구자료수집가 이재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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