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왼쪽)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모든 것이었다. 그의 박치기 한방이면 온 국민이 시름을 잊었다.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2018년 12월 1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는 '2018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헌액식'이 열렸다. 대한체육회는 지난 2011년부터 한국 스포츠역사에 길이 남을 체육인을 국가적 자산으로 예우하기 위해서 선정위원회의 평가와 국민 지지도 조사 등을 거쳐 스포츠영웅을 선정해왔는데 이날은 한국 양궁의 '원조 신궁' 김진호와 함께 지금은 세상을 떠난 프로레슬러 고(故) 김일이 주인공이 됐다. '박치기왕' 김일이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헌액된 것은 올드팬들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금까지 대한체육회가 선정한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을 살펴보면 손기정 서윤복(이상 마라톤) 김성집(역도) 장창선 양정모(이상 레슬링) 박신자(농구) 차범근(축구) 민관식 김운용(이상 체육행정) 김연아(피겨스테이팅) 등 이른바 정통 스포츠에 해당되는 분들이었다.
프로레슬링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1960년대 중반 '장영철 파동(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사건)' 이후 프로레슬링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스포츠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그래서 김일이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헌액됐다는 것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말그대로 국민들과 애환을 같이 하면서 최고 인기스포츠의 위치를 누렸던 프로레슬링의 '복권'이자 정당한 평가를 위한 첫 걸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체육회는 김일의 공헌 사항에 대해서 '호랑이와 갓, 담뱃대가 새겨진 가운을 입고 올라 일본선수들을 누름으로써 자신이 한국인임을 당당히 알려 가난으로 힘들었던 우리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는 다소 감성적인 이유를 대고 있다. 올림픽같은 메이저 국제대회에서의 성과를 통한 국위선양이나 기록적인 의미 부여와는 사뭇 다른 접근방식이다.
'삼위일체'는 김일의 스포츠영웅 헌액을 계기로 한때 국민스포츠로 군림했던 한국 프로레슬링의 흥망성쇠를 한번 더듬어보려고 한다. 최고 인기를 누렸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반을 거쳐 어떻게 서서히 프로레슬링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는지를 당대의 자료와 각종 문헌을 통해서 살펴보겠다. 프로레슬링이 어려웠던 시절의 한국 사람들에게 줬던 특별한 정서적 공감대도 자연스럽게 뒤돌아보게 될 것이다. 오죽하면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프로레슬링을 '민족의 한과 아픔을 달래주던 민족스포츠'라고 칭했겠는가.
'경제개발이 제일의 목표였던 1960~70년대, 지금은 흔한 가전제품인 텔레비전이 한 집에 한 대있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프로레슬링이 텔레비전 중계를 하면 동네 만화가게나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프로레슬링은 전 국민을 흑백 텔레비전 앞에 끌어 모았던 최고의 인기종목이었고, 그 중심에는 김일 선수가 있었다. 김일 선수는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의 어려움을 잠시 잊게 해주는 프로레슬링의 최고영웅이었다. 외국의 거구들을 박치기 하나로 쓰러뜨리는 김일 선수의 모습은 힘들고 어려운 여건이지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국민들의 마음에 심어주기도 했다. 그의 박치기는 가난했던 시절 많은 사람들에게 고단한 삶을 지탱시켜주는 희망의 대명사 같은 것이었다. 이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 1964년 5월 20일 한 만화가게 2층 방에서 무려 60여명이 모여 있다가 2층 바닥이 내려앉아 19명이 다치는 일까지 있었느니, 이들의 인기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홈페이지, '민족의 한과 아픔을 달래주던 민족스포츠 프로레슬링'에서 인용)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실제로 유혈이 낭자한 경기도 많았다. 경기도중 피를 흘리는 김일의 모습. 사진=주간스포츠>
◇덕수궁에서 시작된 서양씨름 프로레슬링
한국의 프로레슬링 역사는 195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3년 창간해 한동안 지식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끼쳤던 잡지 '세대'에 실렸던 글을 보면 한국 프로레슬링의 초창기 분위기가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1959년 7월 한국에는 처음으로 프로레슬링 대회의 광고가 나붙었다. 프로레슬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도 당시 국내에는 거의 없는 형편이어서 이에 관심을 갖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연합신문사의 편집국장이었던 김창문씨가 그 호쾌한 스포츠에 이해가 가서 적극 후원을 하기로 하였다. 실내경기장도 없고 운동장엔 관중들이 모일 것같지도 않으므로 대회 경기장소는 소풍객이 모이는 덕수궁으로 잡았다. 선수는 재일교포인 가네꼬(金子)를 위시해 아베(阿部) 쓰루가우미(鶴海) 라리 잭슨(미국인) 등 4명이었는데 25관이 넘는 거구들의 묘기는 첫 날에 5백명이던 관중을 사흘째에는 5천명으로 늘렸던 것이다. 덕수궁 안에는 때아닌 사람으로 붐볐다. 그리고 서양씨름이라는 이 레슬링은 곧 관중들을 무아의 지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세대' 1967년 10월호, '격랑속의 프로레슬링', p.89)
국내에서 열린 첫 프로레슬링은 한국 선수가 아닌 외국 선수들끼리 벌어진 이벤트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국내에서도 프로레슬링을 개척하려는 선구자들이 등장한다. 그 핵심은 장영철이었다. 역도산(力道山,일본어 발음으로 리키도잔)이 주도하는 일본 프로레슬링은 전후 일본열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는데, 지리적으로 일본 TV방송 전파가 잡혔던 부산을 중심으로 국내 프로레슬링의 맹아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부산에서 장영철이라는 한 청년이 상경하였다. 홍안미발의 이 청년은 프로레슬링을 수업하였다고 하면서 서울에서 첫 대회를 갖고 싶으니 매스콤에서 후원해 달라고 인사를 다녔다. 이리저리 장소를 물색하다가 서울운동장 배구장을 장소로 얻었다.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노천에서 하는 경기는 보는 이도, 하는 이도 오히려 고역이었다. 구경꾼이라고해야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사람이나 축구장에 들렸던 관중이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는 정도였다. 장영철은 그후에도 수차 서울운동장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하였다. 그 상대는 물론 함께 운동을 해온 천규덕이며 고태산 등 국내 선수들이었다. 지붕도 없는 산만한 노천시설, 그것도 눈부신 대낮의 경기는 관중의 시야가 흩어져서 안되었다. 그러나 장영철과 그 제자들은 이년을 그 상태에서 노력해왔다. 이러던중 장충체육관이 오랜 공사끝에 개관을 하였다. 장영철은 오랫동안 이것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체육관의 개관은 프로레슬링의 황금기를 가져왔던 것이다. 장영철은 즉시 장충체육관으로 장소를 옮겨서 대회를 가졌다. 낮의 운동장에서 밤의 체육관으로 옮긴 레슬링은 전혀 새 모습이었다. 라이트가 링에만 쏠려서 어두운 관중석의 관심은 한곳으로 몰리고 따라서 경기는 한층 열띠고 재미있어 보였다. 프로레슬링은 전혀 새로운 스포츠로서 팬들을 사로잡았다. 프로레슬링은 점점 선수의 수도 늘어나고 팬도 붙어 장충체육관이 생긴 후 황금시절을 맞았던 것이다.' ('세대' 앞의 글, p.90~91)
<한국 프로레슬링의 메카였던 장충체육관 전경. 사진=연합뉴스>
당시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프로레슬링 경기의 입장료가 3000원이었다고 하는데 자장면이 500원 하던 시절이니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그래도 장영철이 출전하는 경기가 장충체육관에 열릴 때면 입장권에는 프리미엄이 붙었고 암표장사가 들끓었다고 한다. 장영철과 함께 국내파 프로레슬링의 대명사였던 '당수의 명인' 천규덕의 회고도 들어보자.
"어느날 장영철과 (부산)남포동 밤길을 걷는데 전파상 앞에 사람이 잔뜩 모여있어. 뭔가 가보니 일본 방송에 역도산에 나와. 그가 미국 선수들을 가라테로 쓰러뜨리면 일본 관중들이 환장하더구먼. 패전국 국민들이 레슬링을 통해 울분을 푸는 것이었지. 그걸 보고 나도 장영철에게 레슬링을 해보고 싶다고 입문하게 됐어. 둘이 부산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열었는데 반응이 좋아 '서울로 올라가자'고 의기투합했지. 1964년 동양방송이 개국했는데 개국기념으로 레슬링 TV중계를 한 것이 본격적으로 인기몰이를 하는 계기가 됐지."('문화일보' 천규덕 인터뷰, 2010년 9월 10일자)
선수층이 두껍지는 않았지만 거구의 사나이들이 맨몸으로 맞붙는 새로운 스포츠에 대중들을 열광했다. 장영철이 이끄는 초창기 국내파 프로레슬러들의 분투로 프로레슬링은 어느덧 최고 인기 스포츠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장영철은 국내 프로레슬링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사진=연합뉴스>
'1960년대 초반 한국의 프로레슬링 붐은 매우 뜨거웠다. 장영철은 아마추어 레슬링에서 닦은 기본기가 탄탄한 데다가 허공에 몸을 날려 두발로 상대방의 가슴을 치는 드롭 킥 그리고 몸을 날려 두 다리로 상대방의 머리를 휘감아 쓰러뜨리는 헤드 시저스 등 화려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한국 프로레슬링의 총수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역도산과 체형이 비슷한 데다가 역시 손날 휘두르기를 주무기로 삼았던 제2인자 천규덕, 좋은 몸집과 활기찬 레슬링으로 팬을 매료시켰던 홍무웅, 개성이 강한 인상으로 눈길을 끌었으나 경기 내용은 부드러웠던 고릴라 이석윤, 다이내믹한 레슬링의 김기남 등 그런대로 재주있는 레슬러들이 많았다.'(고두현 저, '고두현의 스포츠 이야기', p.270)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어른,아이를 가리지 않았다. 당시 아이들은 친구집 이불 위에서, 또는 학교 운동장의 모래판에서 레슬러 흉내를 내면서 노는 것이 큰 즐거움의 하나였다. 컴퓨터 게임이 없던 시절, 소년들은 몸으로 부딪히는 것이 마냥 좋았다. 초창기 프로레슬링을 보고 열광했던 소년 가운데 훗날 건국 이래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1976년 몬트리얼 올림픽)가 되는 레슬러 양정모도 있었다는 점을 꼭 특기해 두고 싶다.
'그(양정모)는 유독 프로레슬링을 좋아했다. 바로 프로레슬링이 그를 스포츠에 대해 흥미를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커다란 선수들이 나와 서로 현란한 몸동작으로 상대를 던지고 누르고 하는 모습, 그리고 우리나라 선수가 반칙하는 상대 선수들을 응징하는 모습들이 어린 시절의 그를 프로레슬링의 세계에 가두었다. 프로레슬링은 어린 시절 그의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고 레슬링에 대해 친근함을 갖게 했다.'(조준호 저, '나는 대한민국의 레슬러다! 양정모', p.117~118)
<역도산 도장에서 훈련하던 젊은 시절 김일의 모습.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박치기왕' 김일의 등장, 한국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를 열다
지금도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명사로 통하는 김일은 역도산의 제자로 일본 무대에서 활약을 하다가 1965년 6월 10일 귀국한다. 김일의 등장은 한국 프로레슬링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단시간내에 김일이 국내 프로레슬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원인은 대략 세가지로 분석된다. 선진리그(일본 프로레슬링)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한 지명도와 화제성, 국내 레슬러를 압도하는 실력,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을 포함한 해외 레슬러를 초청해 국내에서 대규모 국제 경기를 열 수 있는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보유한 점 등이 꼽힌다.
여기서 잠시 한국과 일본의 프로레슬링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도산의 존재를 빼놓고는 도저히 한일 양국의 프로레슬링 역사를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도산의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이다. 1923년 함경남도 용원면 신풍리에서 태어났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좋아 어린 시절부터 씨름에 능했다. 17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 선수로 활약하다 1951년부터 프로레슬러로 전업했다. 1953년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창립하고 프로레슬링을 최고 인기 스포츠로 키웠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집단 우울증에 걸려있던 일본 사람들에게 역도산은 말그대로 국민적 영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패전 국민이 되는 바람에 사기가 떨어져 있던 일본인들의 용기를 가장 크게 북돋워 준 인물이 바로 프로레슬러 역도산이었다. 비록 프로레슬링의 매트 위에서나마 승전국인 미국의 레슬러들을 일본 무도인 가라테에서 이름을 딴 가라데촙으로 마구 혼내주는 그의 모습에 일본 열도 전체가 열광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것은 모처럼 달아오른 프로레슬링 붐과 일본인들의 사기양양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역도산 본인은 물론 그의 측근과 담당기자들까지도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굳게 입을 다물었던 것이리라' (고두현 앞의 책,p.159)
역도산은 많은 제자를 키웠다.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 오오키 긴타로,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등 3명이었다. 오오키 긴타로(大木 金太郞)가 바로 김일의 일본식 활동명이었다. 1929년 3월 전남 고흥 거금도에서 태어난 김일은 동네 씨름판을 휩쓸던 장사였다. 우연히 역도산과 일본 프로레슬링에 흥미를 갖게 돼 27살의 나이였던 1956년 무작정 밀항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여곡절끝에 역도산의 제자가 된 그는 1959년 프로레슬링 무대에 데뷔한다. 이후 1963년 스승의 배려속에 미국 무대에 도전장을 냈는데 그해 겨울 역도산은 도쿄 나이트 클럽에서 야쿠자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역도산은 비명횡사했지만 그가 키운 제자들은 이후에도 한일 양국에서 프로레슬링의 꽃을 화려하게 피웠다.
한국과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이 시차를 두고 함께 붐업이 된데에는 묘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역도산이라는 공통된 '뿌리'와 그가 남긴 제자들의 활약을 제외하고도 말이다. 일본의 프리랜서 작가 야나기사와 다케시는 그의 저서 '1976년의 안토니오 이노키'(국내 미발간)에서 이런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는다.
'전후 혼란기에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육성이 시도됐다는 점, 텔레비전의 여명기에 최적의 콘텐츠로 발전했다는 점 등 일본의 프로레슬링과 한국의 프로레슬링은 놀라울 정도로 많이 닮아있다.'(야나기사와의 책,p.261)
프로레슬링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의 일본 사회와 한국전쟁 이후 빈곤했던 한국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대중에게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했다. 이런 대중들의 호응에 착안한 정치인들이 프로레슬링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이용했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뒷배에는 집권 자민당의 보수정치인들이 있었다. 역도산의 장례위원장을 정계 거물이었던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가 맡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절대적인 후원자 위치에는 박정희 정권의 핵심 실세들이 포진했다. 무엇보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일의 '왕팬'이었고, 김종필 박종규 김용태 등 정계 파워맨들이 대한프로레슬링협회의 회장을 맡거나 김일후원회에 관여했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김일의 귀국에도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개입이 있었다. 김일의 회고를 직접 들어보자.
'내가 일본에서 맹활약을 펼치자 한국의 언론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말쑥한 정장 차림의 한국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한국 중앙정보부 소속 요원이었다. 1964년 6월 중순으로 기억된다. 그는 다짜고짜 "한국에 올 수 없느냐"며 고국 방문 의향을 타진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당신은 꽤 유명하다. 각하(박정희 대통령)께서도 당신의 활약상을 너무도 잘알고 있다. 한국에서도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여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한국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면서 왜 정부가 나의 귀국을 원했는지 알 것같았다. 태평양 전쟁후인 1950~1960년대 초반에 스승(역도산)은 거구의 미국 선수들을 쓰러뜨리며 패전후 일본인의 미국 컴플렉스를 후련하게 씻어줬다. 한국 정부도 나에게 스승과 같은 구실을 기대했던 것같았다.'(김일 회고록, '굿바이 김일',p.207~211 발췌 인용)
<김일(왼쪽)이 스승 역도산의 사진 앞에서 챔피언 벨트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김일의 말처럼 한일 양국의 대중들이 프로레슬링에 빠져든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가상의 적'을 상대로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인 미국의 레슬러였고, 한국에게는 식민지 시절의 원수인 '왜놈' 레슬러였다. 그래서 선수이자 사실상 한국 프로레슬링의 절대적 프로모터였던 김일은 "프로레슬링은 민족 감정을 배경삼아 성립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김일은 선이었고 상대 선수는 악이었다. 이마를 물어뜯기고 빤쓰에 숨겨온 포크에 찍혀 피투성이가 된 김일을 보며 온 국민은 분노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는 순간 터지는 박치기. 일본인들이 거구의 미국 선수들을 메다꽂고 가라테촙으로 쓰러뜨리던 역도산에게 열광했듯이, 우리는 김일에게 열광했다. 그는 당시 국민들의 쾌감과 카타르시스의 분출구였을 뿐 아니라 암울했던 과거, 감추고 싶은 과거에 대한 자괴감과 콤플렉스를 단숨에 날려버리는 배출구였다. 그의 전성기는 한국 근대사의 암흑기였다. 어둡고 컴컴한 때였다. 김일의 시대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그저 막막하고 입에 풀칠하는게 감사할 때였다.' (정희준 저, '스포츠 코리아 판타지',p.115~116)
'그는 역사의 상처를, 민족의 울분을 치유해준 사람이었다. 열여섯살부터 씨름판을 휩쓸었고 일본으로 건너가 역도산에게서 필살기 박치기를 연마한뒤 '일본 놈'들과 '양놈'들을 메다꽂는,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을 연출했다. 그의 거대한 체구는 우리의 왜소함을 잊게 해주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120킬로그램을 넘나드는 체중으로 외국 선수를 메다꽂고 그들을 도망다니게 하는 모습에 우리는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이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깃발을 치켜듦과 동시에 갖게된 외모 콤플렉스가 결국 스모 선수들에 대한 동경과 외경함으로 연결됐듯, 우람함 김일의 사이즈와 괴력은 주눅들어 있던 우리의 어깨를 펴게 해주었다. 박정희보다 유명했던 그를 시중에 널려있는 스타라 칭할 수는 없다. 영웅이라는 말로도 2% 부족하다.' (정희준 저, '어퍼컷',p.30~31)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매스미디어의 등장도 프로레슬링 활성화와 빼놓을 수 없다.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이 텔레비전 콘텐츠의 총아였듯이 한발늦게 '안방극장 시대'를 연 한국에서도 이에 걸맞는 콘텐츠와 스타가 필요했다.
'당시 한국은 1961년 12월 KBS TV(서울텔레전방송국)가 개국한데 이어 1964년 TBC TV(동양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가 서울과 부산에 개국하면서 흑백 TV 방송 시대를 맞았다. 본격적인 방송국 개국과 함께 그 방송에 걸맞은 스타가 필요했던 성싶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한국과 일본의 상징적인 스타로 나를 지목했다.'(김일 회고록,p.212~213)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뜨거워지자 KBS는 1965년 11월 8일 프로그램 개편시 'TV스포츠'를 화요일 오후 7시30분으로 옮기면서 프로레슬링을 분리해 수요일 오후 7시30분에 고정편성했다. 그러면서 11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 프로레슬링을 특집으로 편성했다.' (강준만 저, '한국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p.66)
새로운 오락과 스타가 필요한 대중의 욕망,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권 실세의 니즈, 달라진 대중매체의 환경 등이 맞물리면서 김일의 귀국과 함께 한국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는 본격적으로 만개했다. 하지만 이는 얼마가지 않아 '장영철 파동'이라는 역풍을 만나게 된다.
◇국내 프로레슬링을 강타한 '장영철 파동', "프로레슬링은 쇼다!"
앞서 살펴봤듯이 한국 프로레슬링은 일본 프로레슬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서 태동했다. 그 중심에는 국내파 레슬러의 태두 장영철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던 김일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는 법. 파벌 갈등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역도산이 처음 서울을 방문한 것은 1963년 1월 8일이었다. 역도산이 도착한 날 김포공항에는 한국에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킨 장본인 장영철 등 레슬러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미 역도산과 김일은 아마추어 레슬러 출신인 장영철이 한국에서 뜨거운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프로레슬링 시장으로서 한국의 가능성을 살피는 것도 방한 목적 가운데 하나였던 역도산은 장영철을 비롯한 한국 레슬러들을 냉정한 눈초리로 살펴보았다. 역도산은 한국 최초의 본격적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 완공을 계기로 한국 진출을 진지하게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한국인 핏줄이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김일에게 앞으로 한국에서의 주역을 맡길 속셈이었다. 자신이 이끄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영향권 아래 한국 시장을 포함시키고, 김일을 내세우려는 역도산에게 장영철을 비롯한 한국 프로레슬러들을 어떻게 장악하고 대접하느냐 하는 것은 풀어야할 또 하나의 과제였을 것이다. 그후 역도산이 사망하고 1965년 김일이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했을 때 한국의 프로레슬러들은 김일을 지지하는 쪽과 장영철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쪽 두파로 나뉘었다.'(고두현 앞의 책, p.269~272)
<1963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역도산(가운데)이 당시 김현철 내각수반(왼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일파'와 '장영철파'의 갈등이 폭발한 것이 바로 '장영철 파동'이다.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김일은 귀국 이후 첫 이벤트로 극동헤비급선수권전을 열었다. 장영철과 맞대결을 펼쳐 완승했다. 국내 프로레슬링 권력의 축이 급격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장영철은 위기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965년 11월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 대회 일정이 잡혔다. 장영철의 상대는 일본에서 중상급 수준으로 알려진 오쿠마였다. 그런데 오쿠마의 새우꺾기 공격에 허리를 유린당한 장영철이 비명을 내지르자 링사이드에 있던 장영철의 제자들이 경기장에 난입해 오쿠마에게 폭행을 가했고 난장판이 벌어진 끝에 경기는 중단됐다. 이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장영철이 "프로 레슬링은 쇼"라고 발언했다는 것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이 파동의 전말이었다.
왜 이런 파동이 벌어졌을까. 여러가지 억측과 설이 난무했다. 김일이 오쿠마를 사주해 장영철을 수단 방법가리지 말고 '박살'내라고 했다는 게 대표적인 설이다. 김일은 생전에 이런 설을 극구 부인했다. 장영철도 자신이 "프로 레슬링이 쇼"라고 직접 말한 적이 없다고 억울해 했다. 장영철이 경찰 조사 과정에서 '프로레슬링은 특성상 반칙이 일부 허용되지만 여기에도 어느 정도 룰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한 것을 기자들이 '프로레슬링=쇼'라고 잘못 해석해 과장보도를 했다는 것이다. 당시 분위기를 한번 생생하게 되살려보자.
'장영철측은 이렇게 그때를 말했다. "우리는 김일이 경기장에서 장영철을 못쓰게 만들어 링에 못서게 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링 주변에 기다리고 있다가 오쿠마가 장을 다치게 하려는 것을 보고 뛰어들었다." 한편 김일측은 이렇게 말했다. "경기 전날 장은 오쿠마에게 져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 없다고 하자 김일과의 결별을 각오하고 경기장에서 난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런 양측의 격돌은 실은 한국내의 실권을 둘러싼 싸움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면에서 낫다고 자부하는 김일은 권력층의 후원을 힘입어 장을 예속시키려고 하는 반면 장은 장대로 수년동안 공들인 탑을 하루아침 사이에 빼앗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세대' 1967년 10월호 앞의 기사,p.93)
경위가 어쨌든 간에 '장영철 파동'은 국내 프로레슬링에 큰 상처를 줬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오해 가운데 하나가 장영철 파동이 한국 프로레슬링 몰락의 원인으로 직접 지목된다는 점이다. 사실 그렇지는 않다. 이후에도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계속됐다. 하지만 이 파동이 국내 프로레슬링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장영철의 폭로로 이후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내리막길을 걷다가, 10월 유신이후 박정희가 김일 후원회를 적극 지원하고 나섬으로써 김일체육관이 건립되는 등 다시 붐을 맞게 된다.'(강준만 앞의 책,p.67)
#'삼위일체' 레슬링 1편인 '한국 프로레슬링 혈투사' 하편은 오는 11일 오전에 포스팅됩니다.
기사제공 위원석 칼럼
기사발췌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748793&memberNo=35231836&navigationType=pu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