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계획했던 2015년 8월 1일에 있을
우리 무등기우회의 ,금산에서의 바둑대회'를 자축하는 의미로
이 곳에 글을 올리고 있는데 벌써 6회를 넘겼다.
그 동안 바둑의 의미, 바둑 둘 때의 마음가짐 등을 올리고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서봉수의 진로배 9연승, 조훈현에게 바둑이란? 등의
글로 이이져 왔는데 이번에는
또 한 사람. 바로 목숨을 걸고 두는 승부사! 조치훈에 관련된 글을 옮겨 쓰고자 한다.
마침 오는 7월 26일에 우리의 바둑황제 조훈현과 조치훈이 서울에서 대결을 한다고 한다.
누가 이기고 지든 일세를 풍미하면서 한국바둑을 세계정상에 올려 놓은 조훈현과
일본 바둑계를 쥐락펴락했던 우리의 위상을 한껏 드높혔던 조치훈의 대결을 직접 관전해 보고자
이벤트에 응모는 했는데 과연 그리 될지!!!!!!!!
<프롤로그>
1983년 드라마틱한 대역전으로 일본 기전서열 1위 기성을 쟁취한 조치훈은 84년 린 하이펑의 도전을 4승 2패로 뿌리치고 그 이듬해 새로운 도전자 다케미야 마사키를 맞아 역사적인 ‘서울 기성전’을 갖게 된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막이 오른 85년 제9기 기성전 도전1국은 일본 프로기전 사상 처음으로 해외에서 열린 타이틀전이었다.
‘서울 기성전’은 사상 첫 해외 타이틀 개막전인 만큼 주최사인 요미우리의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기성 조치훈, 도전자 다케미야 이외에 입회인 사카다 에이오, 해설 고바야시 고이치 등 화려한 진용의 스태프가 따라붙었는데 그 일행 중에 일본 최고의 르포작가 사와키 고타로가 있었다는 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사와키 고타로는 서울대국이 끝난 뒤 일본으로 돌아가 그 여정의 안팎, 특히 한일 양국에 얽힌 조치훈의 심리와 소회를 그린 수필을 썼다.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아 모르고 있다가 20여 년이 지난 뒤에서야 아주 우연한 기회에 구입하게 된 『마차는 달린다』.
사와키 고타로의 작품을 이야기하다가 이 수필의 존재를 알려주고 복사본까지 보내준 오시마 히데오 씨에게 감사드린다. 아, 즉석 통역에 원고지 200여 매가 넘는 수필의 번역까지 자원봉사해준 한국기원 정동환 홍보기획팀장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마차는 달린다』는 제목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모르겠다. 수필은 조치훈이 대한항공 703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그 장면으로 뛰어들면 우리는 조치훈에 관한 몇 가지 오해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 서울 첫 방문, 마음의 상처
(1985년 1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9기 일본기성전 도전1국은 일본기전사상 최초로 해외에서 벌인 도전기인 데다 한국출신 조치훈 9단의 기성 방어전이기도 해 떠들썩했다.)
대한항공 703편은 예정대로 오후4시에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조치훈과 다케미야 마사키를 필두로 한 기성전 일행은 턴테이블 앞에 모여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짐은 기내에 들고 탄 백 하나밖에 없었지만 일행들과 함께 턴테이블 앞에 같이 서있었다. 조치훈의 형 조상연이 짐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멍하니 서있는 것을 본 조치훈이 나에게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사과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비행기 안에서 같이 시간을 내서 얘기 좀 하자고 했던 것이 잘 안된 것밖에 없었는데!
비행기가 이륙하고 수평비행이 시작된 후 나는 퍼스트클래스에 있는 그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 앉아있는 조상연과 자리를 바꿔 잠시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데 조치훈은 테이블에 놓인 종이에 시선을 꽂은 채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위에서 보니 거기에는 한글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아마도 한국에서 할 인사말을 연습하는 것 같았다.
방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단 내 자리로 돌아왔고 30분 후에 다시 한 번 상황을 살피러 갔다. 그러나 조치훈은 여전히 의연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섯 살에 고국에서 떨어진 그에게 한국어는 일본어만큼 자유스럽게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일상적인 회화야 어떻게 소통되겠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언해야할 때는 아무래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경어를 써야할 때 어린아이가 사용하는 말을 써버렸다며 쓴웃음을 지은 적도 있었다. 한국어 인사말 연습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비행 중에 그와 대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내 자리에 몸을 깊이 묻었다. 아마도 그는 나의 그런 행동을 눈여겨본 듯했다.
적어도 이 무렵의 조치훈은 한국 기자들과의 인터뷰, 한국 사람과의 대화를 기피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한국인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어도 잘 알았다. 다만 여섯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문화에 휩싸인 채 20여 년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의당 그렇듯 한국어를 상황에 맞게 구사하는 어휘력이 부족했을 뿐이다. 그래서 말을 더듬고 얼굴을 붉히게 된 것인데 대뜸, 사방에서 조치훈은 한국말도 제대로 못한다. 일본에서 좋은 대접만 받고 살다보니 조국을 잊은 건 아닌가라는 비난이 흘러나왔다. 그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폭력이었다. 81년인가, 명인을 쟁취하고 서울을 방문했을 때도 그런 상처가 있었다. 조치훈이 명인을 획득하자 한국정부에서 그를 불러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상연도 동행을 했는데 그때 한국기원으로부터 제1인자인 조훈현과 대국신청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