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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계획했던 2015년 8월 1일에 있을

우리 무등기우회의 ,금산에서의 바둑대회'를 자축하는 의미로

이 곳에 글을 올리고 있는데 벌써 6회를 넘겼다.

 

그 동안 바둑의 의미, 바둑 둘 때의 마음가짐 등을 올리고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서봉수의 진로배 9연승, 조훈현에게 바둑이란? 등의

글로 이이져 왔는데 이번에는

또 한 사람. 바로 목숨을 걸고 두는 승부사! 조치훈에 관련된 글을 옮겨 쓰고자 한다.

마침 오는 7월 26일에 우리의 바둑황제 조훈현과 조치훈이 서울에서 대결을 한다고 한다.

 

누가 이기고 지든 일세를 풍미하면서 한국바둑을 세계정상에 올려 놓은 조훈현과

일본 바둑계를 쥐락펴락했던 우리의 위상을 한껏 드높혔던 조치훈의 대결을 직접 관전해 보고자

이벤트에 응모는 했는데 과연 그리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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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13 13:37

    <프롤로그>

     

    1983년 드라마틱한 대역전으로 일본 기전서열 1위 기성을 쟁취한 조치훈은 84년 린 하이펑의 도전을 42패로 뿌리치고 그 이듬해 새로운 도전자 다케미야 마사키를 맞아 역사적인 서울 기성전을 갖게 된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막이 오른 85년 제9기 기성전 도전1국은 일본 프로기전 사상 처음으로 해외에서 열린 타이틀전이었다.

    서울 기성전은 사상 첫 해외 타이틀 개막전인 만큼 주최사인 요미우리의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기성 조치훈, 도전자 다케미야 이외에 입회인 사카다 에이오, 해설 고바야시 고이치 등 화려한 진용의 스태프가 따라붙었는데 그 일행 중에 일본 최고의 르포작가 사와키 고타로가 있었다는 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사와키 고타로는 서울대국이 끝난 뒤 일본으로 돌아가 그 여정의 안팎, 특히 한일 양국에 얽힌 조치훈의 심리와 소회를 그린 수필을 썼다.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아 모르고 있다가 20여 년이 지난 뒤에서야 아주 우연한 기회에 구입하게 된 마차는 달린다.

    사와키 고타로의 작품을 이야기하다가 이 수필의 존재를 알려주고 복사본까지 보내준 오시마 히데오 씨에게 감사드린다. , 즉석 통역에 원고지 200여 매가 넘는 수필의 번역까지 자원봉사해준 한국기원 정동환 홍보기획팀장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마차는 달린다는 제목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모르겠다. 수필은 조치훈이 대한항공 703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그 장면으로 뛰어들면 우리는 조치훈에 관한 몇 가지 오해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 서울 첫 방문, 마음의 상처

     

    (19851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9기 일본기성전 도전1국은 일본기전사상 최초로 해외에서 벌인 도전기인 데다 한국출신 조치훈 9단의 기성 방어전이기도 해 떠들썩했다.)

     

    대한항공 703편은 예정대로 오후4시에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조치훈과 다케미야 마사키를 필두로 한 기성전 일행은 턴테이블 앞에 모여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짐은 기내에 들고 탄 백 하나밖에 없었지만 일행들과 함께 턴테이블 앞에 같이 서있었다. 조치훈의 형 조상연이 짐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멍하니 서있는 것을 본 조치훈이 나에게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사과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비행기 안에서 같이 시간을 내서 얘기 좀 하자고 했던 것이 잘 안된 것밖에 없었는데!

    비행기가 이륙하고 수평비행이 시작된 후 나는 퍼스트클래스에 있는 그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 앉아있는 조상연과 자리를 바꿔 잠시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데 조치훈은 테이블에 놓인 종이에 시선을 꽂은 채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위에서 보니 거기에는 한글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아마도 한국에서 할 인사말을 연습하는 것 같았다.

    방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단 내 자리로 돌아왔고 30분 후에 다시 한 번 상황을 살피러 갔다. 그러나 조치훈은 여전히 의연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섯 살에 고국에서 떨어진 그에게 한국어는 일본어만큼 자유스럽게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일상적인 회화야 어떻게 소통되겠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언해야할 때는 아무래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경어를 써야할 때 어린아이가 사용하는 말을 써버렸다며 쓴웃음을 지은 적도 있었다. 한국어 인사말 연습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비행 중에 그와 대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내 자리에 몸을 깊이 묻었다. 아마도 그는 나의 그런 행동을 눈여겨본 듯했다.

     

    적어도 이 무렵의 조치훈은 한국 기자들과의 인터뷰, 한국 사람과의 대화를 기피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한국인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어도 잘 알았다. 다만 여섯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문화에 휩싸인 채 20여 년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의당 그렇듯 한국어를 상황에 맞게 구사하는 어휘력이 부족했을 뿐이다. 그래서 말을 더듬고 얼굴을 붉히게 된 것인데 대뜸, 사방에서 조치훈은 한국말도 제대로 못한다. 일본에서 좋은 대접만 받고 살다보니 조국을 잊은 건 아닌가라는 비난이 흘러나왔다. 그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폭력이었다. 81년인가, 명인을 쟁취하고 서울을 방문했을 때도 그런 상처가 있었다. 조치훈이 명인을 획득하자 한국정부에서 그를 불러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상연도 동행을 했는데 그때 한국기원으로부터 제1인자인 조훈현과 대국신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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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15 11:53

    2. 조훈현과의 친선대국

     

    (1980년 그토록 소원하던 명인에 오르고 조치훈 9단은 12월 금의환향했다. 이때 한국의 일인자 조훈현 9단과 장고와 속기 2판의 친선대국을 벌였는데, 말이 친선대국이었지 실상은 한-일 바둑의 자존심을 건 치열한 라이벌전이었다.)

     

    1국은 신문 게재를 위한 것으로 조치훈이 이겼다. 2국은 텔레비전방송 속기였는데 개시 직전에 상연에게 한국기원의 어떤 사람이 와서 조훈현을 흑번으로 해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했다. 돌을 쥐는 시늉만하고 어떤 경우라도 흑으로 둘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조훈현은 흑번이 강하고 더구나 속기니 흑이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담합이다. 조치훈은 결코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하기는 했다. 그러자 조치훈은 이렇게 내뱉었다고 한다.

    그렇게 내가 지기를 바라나. 그래, 어떻게든지 한번 붙어보자.”

    어느 시기나 어느 곳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절대선으로 믿고 행동하는 무지몽매한 인사들이 존재한다. 조훈현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겠지만 조치훈은 적잖은 상처를 받았다. 명인을 획득하고 문화훈장을 수여하는 화려한 겉모습 그 뒤로 어느 순간부터 조치훈은 한국도 일본도 아닌 모호한 경계의 회색지대로 떠밀려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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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15 11:54

    3. 외로움, 기다림 그리고 명인

     

    (1976, 1년을 훌쩍 넘어선 긴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사와키 고타로는 변변한 일자리도 없어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일 때 라디오에서 1주일에 1, 일반인들에게 관심을 끌 만한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는 일자리가 생겼다. 그 아르바이트 프리 인터뷰어로서 만난 첫 대상이 바로 조치훈이었는데 그 첫인상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바둑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그를 인터뷰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딱히 이거라고 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조치훈이라는 사람 자체보다는 바둑에 대한 재능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반드시 조치훈이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단 수개월 전에 일본기원선수권이라는 기전에서 열띤 5번승부가 펼쳐졌다는데 18세의 젊은이에게 도전을 받는 55세의 사카다 에이오가 2연패해서 막판에 몰렸다가 이후 3연승으로 대역전했다고 들었다. 그 역전패의 주인공이 조치훈이었다.

    그가 살고 있던 곳은 나카노의 맨션이었다. 맨션이라기보다는 아파트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릴 만한 방이었는데 방문해 보고는 그 살풍경에 상당히 놀랐다. 두 칸을 연결한 방에는 가구다운 가구는 하나도 없었고 책상 하나에 작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다. TV도 없이 휑한 공간이었다. 젊은 남자 혼자 사는 방에 장식 같은 난잡함이 없는 대신 따뜻한 온기도 없었다. 냉랭한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느낌이었다.

    인터뷰는 어려웠다. 무엇 하나 제대로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질문에 대한 최소한의 대꾸밖에 나오지 않았다. 건방지다거나 거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속 어딘가가 닫혀있다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하든 재능이라는 핵심을 찌르는 말을 이끌어내려고 악전고투했지만 천편일륜적인 답변 이상을 얻어낼 수는 없었다. 나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단순한 질문만을 지껄였다.

    어떻게 하면 바둑이 세집니까?” “공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틀에 박힌 이런 답변에 조금은 낙담하면서 어차피 자포자기한 김에 더욱 단순한 질문을 반복했다.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그는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참아야 하나?” “인내한다는 거요?” “, 참아야 하는 거 같아요.”

    그러자 거기까지 말하고 그 뒤는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그것은 나만 그럴지 몰라. 나는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의식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 이기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그렇게 간단하게 승부를 져버려서도 안 되고. 나쁘고 나빠도 어딘가에 가능성이 없을까 하면서 참고, 참고 이겨내야만 하는 거예요.”

    독백은 거기에서 끝났다. 그리고 인터뷰도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지만 조치훈이라는 18세 젊은이의, 현시대에는 희귀할 정도로 절박한 사고방식이 그 가늘고 날카로운 눈과 함께 깊은 인상을 남겼다. TV 하나 없이 휑한 아파트 공간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의식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열여덟 살의 청년. 그 첫인상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상당 기간 조치훈을 대변해온 지고도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내면의 울림이었을 것이다.

     

    바둑의 문외한이었던 사와키 고타로는 그를 다시 찾아갔다. 어쩌면 그는 열여덟의 청년으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목표를 향한 절박함 또는 무엇이라고 꼭 짚어낼 수 없는 절절한 분위기를 가진 이 청년에게 매료된 듯하다. 조치훈은 다시 찾아온 사와키 고타로에게 농담 같은, 그러나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으로 훗날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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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16 17:11

    4. 명인이 될 때까지

     

    (우리말도 채 익히지 못한 6살의 나이. 일본에 가면 과자를 많이 먹을 수 있다는 말과 비행기 타는 즐거움에 부모품을 떠나 숙부 조남철 9단의 손을 잡고 비행기 트랩을 오르고 있는 꼬마 조치훈. 아무것도 모르고 들떠 흔들어대던 저 고사리 같은 손이 20여년 후 일본바둑을 제패하게 될 줄은... 조치훈은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명인이 되어야했다.)

     

    그를 처음 만나고 난 1개월 후, 나는 다시 그의 맨션을 찾았다. 잠시 잡담을 하고 난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조치훈이라는 인물에 대해 쓰고 싶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가 입을 열어 한 답변은 전혀 의외의 내용이었다.

    기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기다리라고요?”

    .” “기다린다면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나요?”

    내가 잠시 당황하면서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명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농담 같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조금은 익살스럽게 물었다. 왜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라고. 그러자 그가 내뱉듯이 말했다.

    떠들어버리면 엷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엷어진다는 것은 바둑세계의 독특한 용어 같았다. 떠들어 버리면 엷어진다.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한마디라도 입에 담으면 한꺼번에 넘쳐버릴 것 같은 뜨거운 생각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것을 떠들어 버리면 엷어진다고 표현한 것은 아닐까.

    나는 알았다고 답했다. 명인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가 명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가 명인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롭고 완고하며 부러지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알았다, 명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거의 그에 대해 쓰는 것을 포기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조치훈에 관한 뉴스는 그 이후에도 알게 모르게 귀에 들어왔다. 1976년 명인전 본선리그에 진입. 그러나 도전자가 되기는커녕 시드잔류도 못하고 함락. 동년에 손에 넣은 왕좌 타이틀도 익년에 빼앗겨 버렸다. 내가 그를 만난 후 2, 3년은 그에게 있어서 문자 그대로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는(은인자중하는) 세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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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16 17:14

    5. 한국인, 일본인의 거리

     

    (1980년 꿈에 그리던 명인에 올랐다. 오다케 히데오 9단에게 411패로 도전7번기를 끝내는 순간 조치훈은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까?)

     

    79년 조치훈은 드디어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공식기전 서열7위 기성(碁聖)전에서 예선부터 도전기까지 12연승의 기록을 세우면서 오타케 히데오를 스트레이트로 물리치고 타이틀홀더가 됐다. 그리고 이듬해 오타케가 가지고 있던 명인에 도전했고 411무로 타이틀을 획득하며 이시다 요시오, 린 하이펑에 이어 스물넷의 젊은 명인이 되었다. 명인에 오른 조치훈은 산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가속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81년에는 다케미야로부터 본인방을 빼앗으며(42) 사상 네 번째 명인-본인방을 기록했다. 82년 오타케가 가지고 있던 십단 마저 빼앗으며 사상최초의 명인-본인방-십단이 되었고 83년에는 당대의 거장 후지사와마저 넘어버렸다.

     

    명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던 조치훈과 사와키 고타로의 은밀한(?) 약속. 그들의 재회가 이루어졌고 몇 차례의 의기투합을 거쳐 85년 제9기 기성전 개막전 서울대국의 동행으로 이어졌다. 사와키 고타로가 한국의 바둑팬들에게 들은 조치훈은 한국 사람들은 조치훈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그의 생각과 거리가 있었다. 조치훈이 국위를 선양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생각은 일치했지만 늘 조치훈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인 다케미야에게는 당연히 승리하기를 희망했지만 상대가 조훈현으로 바뀌면 태도가 모호해졌다. 결국, 조치훈은 일본인과 싸울 때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인과 싸울 때는 일본인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는 게 사와키 고타로가 한국 팬들의 말에서 받은 느낌이었다. 그는 여기에 서봉수를 끼워 넣으면 그 심리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조훈현은 한국의 1인자지만 일본유학을 거쳤다. 따라서 일본에 거주하는 조치훈과 싸우면 조훈현을 응원하지만 서봉수와 싸우면 이번에는 일본유학을 가지 않은 서봉수를 응원한다는 것이다. , 한국 팬과 프로의 거리는 그 프로와 일본과의 거리와 반비례한다는 얘기다.

     

    민감한 조치훈이 처음 서울을 방문했을 때 그런 미묘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게 사와키 고타로의 생각이었다. (다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이전에 그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어느 때인가 여섯 살이 된 딸아이 마도카(麻堵花)가 갑자기 질문을 해왔다.

    아빠는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이야

    그가 이렇게 대답하자 딸이 의외라는 듯이 소리를 높였다.

    에이, 일본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태어났잖아.”

    그럼 마도카는요?” “역시 한국 사람이야.”

    그러자 딸이 강한 어조로 부정했다.

    아니에요. 가마쿠라에서 태어났으니까 가마쿠라사람이에요

    그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고 했다. 한국 국적이긴 하지만 딸은 아무리 보아도 일본사람이다. 그러나 이 아이가 일본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래의 일본소녀들보다 훨씬 높은 허들을 몇 개씩이나 더 넘어야만 한다. 그런 생각을 하자 애처로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으로 귀화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역시 나는 한국 사람이었다.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것을 일본에서 얻었고 한국이 나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유인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있다. 그것은 간단히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연어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는 단숨에 그렇게 말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거기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때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얘기로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함정이라는 단어가운데는 성인이 되어 처음 서울을 방문했을 때 받은 상처의 깊이가 미묘하게 굴절되어 가슴에 옹이가 박힌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한국의 문화훈장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한 잡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와 고향은, 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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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17 15:02

    6. 서울에서 개최된 85년 기성전(1)

     

    (1985년 서울에서 개막전을 펼친 9기 기성전 도전 7번기는 일본기전사상 처음으로 해외에서 벌인 도전무대로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85년 제9기 째에 이른 기성은 명인, 본인방을 포함한 3대타이틀 중에서 가장 새로운 타이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프로바둑계 최고를 상징하는 기전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상금이 컸기 때문이다. 명인전이 2천만 엔, 본인방전이 16백만 엔인 것에 비해 기성전은 타이틀전 승자에게 23백만 엔, 패자에게 5백만 엔의 상금을 지급했다. 또 상금과는 별도로 기성 7백만 엔, 도전자 45십만 엔의 대국료가 계상돼 있기 때문에 타이틀방어에 성공하면 무려 3천만 엔을 손에 쥐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일단, 기성을 방어하면 차기 타이틀전을 보장받기 때문에 최소 12백만 엔의 수입까지 보장된다.

     

    42백만 엔. 이런 큰 돈이 걸려있기 때문에 기성을 획득하는 순간 인생 역전이라는 말이, 일본 프로들은 상금이 작은 세계대회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2008년 현재 기성전 우승상금 42백만 엔). 그러나 일본 프로바둑 최고의 자리를 지칭하는 기성도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역사가 짧은 탓에 일반인들은 기성이 명인보다 상위라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 아무리 최고의 상금을 강조해도 후발주자라는 약점 때문에 최고라는 이미지가 선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오랫동안 일본 프로바둑 최고(最高)의 자리는 전국시대의 효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로부터 그대야말로 진정한 메이진(名人)’이라는 말을 들었던 닛카이(日海)의 고사에서 유래된 명인(85년 당시 신, 구 명인전 포함 24기 진행)’의 몫이었고 최고(最古)는 그 닛카이의 아호로써 당대 최강자에게 계승되는 이름이었다가 훗날 일본 최초의 프로타이틀전 명칭으로 바뀐 본인방(85년 당시 40기 진행)’의 몫이었다.

     

    요미우리신문이 기획한 프로바둑 사상 최초의 해외 도전기는, 9기 기성전을 바둑가의 최대화제로 떠올리고 동시에 이렇게 한 발 앞서 나감으로써 역시 조치훈이 타이틀을 보유중인 명인전의 주최사 아사히신문에게 최초라는 훈장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울 기성전의 대국 장소는 소공동 롯데호텔 33층 로얄 스위트룸. 1박에 13백 달러나 하는 이 특별한 공간은 복도가 별도의 열쇠를 사용하는 문으로 차단된 국빈급 객실이었다. 실내에는 넓은 거실과 세 개의 침실이 있었는데 거실에 접한 회의실이 대국실로 사용됐다.

    아침 910분 전. 와후쿠(和服)차림의 다케미야 마사키가 대국장에 들어섰다. 다케미야는 도전기 때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대국에 임하는데 전통의상을 입고 3대 타이틀전에 임하게 된 것은 4년만이다. 4년 전, 바로 앞에 앉게 될 조치훈에게 서열 3위 본인방을 빼앗긴 이래 입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잠시 뒤 말끔한 양복차림의 조치훈이 자리에 앉았다.

    돌을 가려주십시오

    입회인 사카다 에이오의 선언에 따라 조치훈이 백돌 바둑통에 오른 손을 넣어 한 움큼 돌을 쥐어 들어 올렸고 거의 동시에 다케미야가 흑돌 하나를 집어 바둑판 위에 올려놓았다.

     

    조치훈이 주먹에 쥐었던 돌을 바둑판 위에 올려 두 개씩 보기 좋게 정렬시켰다. 여덟, , 열둘, 열넷, 열여섯, 열여덟, 스물. 남은 돌은 두 개. 짝수다. 도전자 다케미야가 홀수를 선택했으니 흑을 쥘 권리는 조치훈이 갖는다. 사카다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오고 두 사람은 각각 옆에 있던 백돌 통과 흑돌 통을 교환했다.

     

    흑돌 하나를 들어 올려 천천히 우상귀에서 좌상귀를 향한 소목에 제1착을 놓는 조치훈. 사방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20~30인이나 되는 사진기자들을 위해 조치훈은 3, 4번이나 같은 곳에 돌을 놓는 동작을 반복했다. 팬들에게 좋은 사진, 좀 더 생생한 현장의 느낌을 전달하는 일은 사진기자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팬들이 보는 즉시 아, 하고 감탄할 만한 자세를 만들어 주는 프로들의 협조다. 소리 없이 고요하게 흐르는 이 진행을 지켜본 사와키 고타로는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나에게는 실로 아름다운 의식(儀式)으로 투영되었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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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20 17:51

    7. 서울에서 개최된 85년 기성전(2)

     

    대국 개시 후 30. 입회인 사카다와 해설자 고바야시가 모니터가 설치된 별실에 들어서면서 검토가 시작되었다. 조치훈이 차례차례 귀를 차지해 우상, 우하, 좌하 그리고 23수 째에 장고에 몰입해 좌상귀 침입을 결정하면서 검토실의 긴장을 고조시킨다. 이것으로 4귀를 모두 점령했다. 조치훈의 극단적인 실리와 다케미야의 극단적인 세력의 대치. 훗날 일본의 바둑저널은 조치훈과 류()가 조금 다르면서도 비슷한 극단적 실리 취향을 가진 특급 지하철고바야시와 우주류다케미야의 대결을 두고 리얼리티즘과 로맨티즘의 격돌이라는 그럴 듯한 타이틀로 포장했다. 이를테면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싸움이랄까. 그런데 특이하게도 고바야시와 유사한 실리 기풍으로 보이는 조치훈과 다케미야의 대결에서는 그런 비유를 본 적이 없다. 왜 그럴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조치훈의 바둑에는 단순하게 실리의 기풍으로 묶어버리기에는 어쩐지 부족한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땅속 깊숙이 들끓는 마그마처럼 뜨거운 그것은, ()도 틀도 없는 무정형의 사유(思惟)로 조치훈 바둑의 근간을 이룬다. 미세한 승부를 결할 때는 본능적으로 실리를 향해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조치훈이 그리는 세계는 좀 더 크고 넓고 깊다. 때로는 고바야시보다 더 처절하게 바닥을 기지만 때로는 다케미야가 감탄할 만큼 광활한 우주를 그려낸다.

    , 나는 바닥에 떨어질까 겁이 나서 3선 이하로는 돌을 놓지 못한다니까. 그따위 시시한 지하철 바둑에는 질 수 없지!”

    고바야시에게는 이런 독설을 예사로 던지며 단 한 마디도 양보하지 않는 앙숙이면서 조치훈만은 높이 평가하고 그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줄 만큼 가까운 이유도 그런 내면세계의 유사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승부의 역학관계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상하리만큼 좋았다. 조치훈과 고바야시가 서로 치열하게 뺏고 빼앗기는 도전과 응전의 라이벌이었다면 다케미야는 일방적으로 조치훈에게 타이틀을 가져다준 공로자였다. 81년에 본인방을 안겨준 사람도 다케미야, 86년에 조치훈이 고바야시에게 빼앗겼던 명인을 10년 뒤인 95년에 빼앗아 그 이듬해 바로 조치훈에게 넘겨준 사람도 다케미야였다.

    아무튼 그것은 뒷날의 얘기. 다케미야가 32수 째를 둘 무렵 점심시간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각각 자기 방으로 돌아가 식사와 휴식을 취했는데 사와키 고타로가 복도에서 본 다케미야의 두 뺨이 겨우 3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눈에 띌 만큼 홀쭉해져 있었다!’고 하니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로맨티스트 다케미야도 이때만큼은 최고라는 목표를 향해 사력을 다했던 것 같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바둑의 흐름도 점점 확실해져 갔다.

    백이 어떻게 세력을 정리할 것인가로, 결정되겠네요.” 알기 쉬운 고바야시의 설명.

    별실에는 사카다, 고바야시 이외에 요미우리신문사의 관계자, 일본텔레비전의 취재팀, 일본기원 취재팀 등이 모여 있었고 조치훈의 맏형 조상연이 이곳과 2층의 대강당 사이를 바쁘게 왕래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 기성전 개최 코디네이터 같은 역할을 했고 동시에 한국어로 공개해설을 맡았기 때문에 지그시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소파에 앉아서 사카다와 고바야시의 검토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입구에 불쑥 조남철이 나타났다. 조상연과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인사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사카다를 만나러 온 것처럼 조남철이 가운데로 들어오자 조상연은 잠자코 방을 나가버렸다. 그런 노골적인 반목은 꽤나 이상한 모습이었다. 조치훈이 45수 째를 두자 다케미야가 다음수를 봉수하자고 제의했다. 오후 5. 다케미야가 46수 째를 종이에 기록해 봉투에 넣으면서 첫날 대국이 끝났다. 대국실에서 나온 두 사람의 얼굴은 대조적이었다. 조치훈은 술에 취한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고 다케미야는 그 반대로 창백했는데 엷게 수염이 자라 더욱 초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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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21 10:53

    8. 조남철, 조상연 숙질간의 반목(1)

     

    그날 밤 사와키 고타로는 한국기원의 프로기사와 바둑저널리스트를 만나 조남철과 조상연의 갈등에 대해서 들었다. 대부분의 의견은 조상연에게 잘못이 있는 쪽으로 일치했다. 도일 당시 한국기원 단이었던 조상연은 일본기원의 프로가 된 뒤에도 한국기원의 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70년대 초 한국기원에 분쟁이 일어났고 조남철을 필두로 한 대부분의 기사들이 한국기원을 탈퇴해 새롭게 대한기원이라는 조직을 만들었을 때 조상연은 몇몇 기사들과 한국기원 쪽에 남았다. 숙부가 기사생활의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데 조카가 배신했다며 기사 전원이 분개했다. 분쟁은 대한기원이 이겨서 기사들에게 신뢰가 두터웠던 황용주 이사장 체제로 수습되었는데 조상연에 대한 기사들의 분노는 제적이라는 사태로 이어졌다. 희한한 일은 분쟁이 해결됐을 때 유력 일간지에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는 것이다. ‘조상연 단의 중재로 한국기원과 대한기원 대타협, 조상연 단이 분쟁 해결의 일등공신.’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신문기사가 심각한 오보였거나 그게 아니라면 한국기원이 분쟁해결의 일등공신에게 제명처분이라는 감당 못할 상(?)을 주었거나.

     

    사실, 상당수의 한국기원 직원들이 알고 있는 조상연의 제명 사유는 전혀 다르다. 동생 조치훈이 일본에서 명인이 되자 그 후광으로 서울에서 조치훈후원회라는 사단법인을 만들고 잡지(조치훈후원회 회보에 이은 월간바둑세계)까지 발행해 한국기원의 권익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조상연에게 쏟아진 비난은 대체로 이랬다. 명색이 프로기사라는 자가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면서 국제행상인 같은 짓으로 돈을 번다. 이번에도 바둑판을 잔뜩 가지고 왔는데 그게 다 돈벌이다. 조치훈은 인기가 없다. 그것도 다 조상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인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조치훈쯤 되면 좀 더 인기가 있어야 하는데 사사건건 한국기원의 이익에 반하며 기사의 품위를 해치는 형 때문에 인기가 떨어진다는 얘기였다. 표적은 어느새 조상연을 넘어 조치훈으로 바뀌었는데 그 대부분은 사실과 별 관계없는 감정의 배설이었다. 특히, 조치훈은 한국어가 서툴고 일본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한국의 영웅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은 듣고 있던 사와키 고타로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너무 가혹한, 비난을 위한 비난이었다. 어린 시절에 다녔던 동경한국학원 이외에는 거의 한국어수업을 받지 못했고 소년기부터 성년기까지 일본어만을 사용해야 하는 환경에 둘러싸인 조치훈에게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라거나 일본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억지에 가까운 요구였다.

    한국에 가면 말이 어눌하다고 비판하는데 내 처지에서 보면 오히려 여섯 살에 외국에 온 것치고는 잘한다고 해줘야 하는 거 아녜요?”

    언젠가 사와키 고타로가 들었다는 조치훈의 항변은 어쩐지 서글프다. 한국 사람에게 조치훈의 상황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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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21 10:54

    9. 조남철, 조상연 숙질간의 반목(2)

     

    조치훈의 영광은 형 조상연 5단의 그림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동생을 팔아 치부한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터무니없는 오해 중 하나는 조상연은 이재에 밝다는 바둑계 사람들의 굳은 믿음(?)인데 사실, 조상연이 축적한 부()의 대부분은 진짜로 이재에 밝은 부인의 손에 의해 이루었다는 사실을 그 주변 사람들은 다 안다.

    땅을 사거나 집을 사도, 주식투자를 해도 내가 하면 거의 손해를 봤는데 지수엄마가 하면 다 오르는 거야. 그 사람 재복 하나는 타고난 거 같아.”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다. 월간바둑세계에 입사해 몇 년 동안 곁에서 지켜본 그는 재테크에 그다지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국기원이 맹렬하게 비난했던 조치훈후원회설립, 월간바둑세계운영 등 바둑관련 사업도 대부분 적자이거나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기는 정도였다.

    잡지고 출판이고 다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타고난 천성이 바지런해서 가만히 앉아 놀지 못하는 데다 애들 삼촌(조치훈)하고 관련된 일이기도 해서 대놓고 말릴 순 없지만 지수아빠는 돈벌이에 재주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의 말은 오래 전에 들었던 부인의 은근한 타박과도 일치한다. 설혹, 그런 일들로 돈을 벌었다고 해도 정상에 오르지 못한 프로기사가 생계나 좀 더 윤택한 생활을 위해 기왕이면 익숙한 바둑과 관련된 용품이나 출판사업을 하겠다는데 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에게 부자의 재능이라고 꼽아줄 만한 것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근면함검소함일 것이다. 월간바둑세계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면, 가장 먼저 출근해 쓰레기자루를 들고 직원들의 자리를 일일이 돌며 휴지통을 비우는 작업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는데 점심식사는 거의 가까운 식당의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로 해결했다. 그는 사장의 권위같은 겉치레가 아예 없는 사람이었다. ‘조상연은 보따리장사라는 폄하도 그의 처지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다. 부인의 남대문 액세서리가게로 세련된 디자인의 일제 액세서리를 부지런히 사다 나르거나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바둑용품을 사오는 정도였는데 불로소득이나 부정축재의 수단도 아닌, 열심히 발품을 팔아야 하는 노동이 그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결국, 비난의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은 돈푼깨나 벌면서 한국의 동료들에게는 조금도 베풀지 않는 인색한 조상연에 대한 시기였다. 미덕이라고 해야 할 그의 근면함은 프로의 품위를 해치는 채신머리없는 행동이 되었고 혼자 하든 누가 찾아와 함께 하든 된장찌개로 점심을 해결하는 검소함은 접대의 기본도 모르는 야박한 처사로 왜곡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행한 일은 어쨌든 모양이 좋지 않았던 조남철-조상연 숙질간의 오랜 갈등이 조남철 선생 타계 전에 극적인 화해로 매듭지어졌다는 것인데 제명처분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이들 숙질간의 갈등이 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바람은 한국기원 소속 전문기사로 돌아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소명 기회조차 없이 불출석 제명처분을 당한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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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22 15:43

    10. 여덟 살짜리 눈에 비친 시골뜨기 천재

     

    대국 이틀 째 아침 9. 입회인 사카다가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하루 전에 다케미야가 기록한 봉수점을 밝혔다. 7. 검토실의 기사들이 예상했던 수였다. 다케미야가 7에 백돌을 올려놓는 것을 본 조치훈은 좌우로 몸을 비틀었다. 몸 안의 뼈에서 뿌드득 소리가 날 만큼 근육이 뭉쳐있는 것 같았다. 조치훈도 다케미야도 숙면을 취하지 못해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사진촬영이 끝나자 모두 대국실을 나와 검토실로 향했다. 모니터에 비친 수순이 상당히 빨리 진행되고 있었는데 57수 째 흑이 백의 세력 안으로 뛰어들었다.

    뭐야, 이거. 내 예상대로 되는 거 아니야?”

    검토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카다가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카다는 개막 전야제 석상에서 대국자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예상을 했다. 다케미야는 당연히 세력작전으로 나올 것이고 조치훈은 실리를 확보한 뒤 다케미야의 세력 안으로 뛰어들어 먹느냐 먹히느냐의 격렬한 생사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세력 안에서 흑이 살면 이길 것이고 일망타진하면 백이 좋겠지. 어떻게 될까.”

    국면의 흐름은 사카다의 예상대로 전개되고 있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의 예상대로 흐르고 있었다. 사카다뿐 아니라 이 대국을 지켜보는 관계자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66수 째에 장고를 시작한 다케미야는 정오를 넘기고도 다음 수를 두지 않은 채 점심시간을 맞았다.

     

    이 대국의 해설을 맡아 서울 기성전에 동행한 고바야시는 조치훈보다 4년 연상. 기타니도장 입문은 조치훈이 2년 빨랐는데 홋카이도(北海道)출신의 열두 살 까까머리로 도장 문턱을 넘어선 고바야시는 여덟 살짜리 조치훈의 눈에도 촌티가 줄줄 흐르는 시골뜨기였다. 그때 조치훈에게 2점을 놓고 시험기를 두었는데 기량의 차이가 있었다. 승리한 조치훈은 무심코 고바야시를 조롱했다.

    , 그렇게 둬서는 프로고 뭐고 아무것도 될 수가 없어.”

    이 경험은 고향에서 천재소년이라는 말을 들었던 고바야시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어린 제자들에게 ‘2점 시험기를 지시한 기타니 선생의 의도가 어떻든 이 충격은 고바야시에게 강력한 에너지로 작용했다. 이후 고바야시는 주위에서 보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바둑에만 몰입했고 조치훈이 열 살 프로입단이라는 목표달성에 실패한 해에 보란 듯이 입단에 성공했다. 조치훈이 입단에 실패한 뒤 죽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배경에는 한국으로 쫓겨나고 싶지 않다는 것 외에 고바야시의 입단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입단 전까지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한수 아래의 동문 고바야시에게 선생(사범님)’이라고 불러야 했기 때문이다. 1년 뒤 입단한 조치훈은 고바야시를 사범님이라고 부르지 않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고 한다. 두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 지더라도 너에게만은 질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치열하게 부딪치는 라이벌로 성장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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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22 15:46

    11. 안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어려웠다

     

    검토실에는 조훈현이 있었다. 한국기원은 공식적으로 기성전을 외면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기사 개인으로서는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큰 승부였다. 아무튼 조훈현은 깊은 관심을 보이며 첫날부터 얼굴을 내밀었다.

    백이 괴롭네.” “여기가 너무 느슨했어.”

    고바야시의 말에 조훈현이 좌상 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어투에는 일본기사에 대해 지지 않으려는 투지가 담겨있었다. 조훈현의 일본유학 시절, 둘은 친구 사이였고 둘 간의 공식대국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아무튼 기록상 조훈현이 고바야시를 압도했기 때문에 그런 자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이 흑은 죽지 않을 것 같은데.”

    백 세력 안에 침입해온 흑을 잡지 못하면 다케미야에게는 승산이 없다. 두 사람의 검토는 상당한 신뢰가 있어서 그때부터 검토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승부가 결정된 것처럼 행동했는데 스피커를 통해 대국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모니터에 비친 조치훈의 얼굴은 그렇게 일방적인 형세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는 하변을 기듯이 좌에서 우로 이동해갔고 시간도 오후 5시를 넘어섰는데 화면에 보이는 조치훈은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다가 기록원에게 저녁식사를 위한 봉수는 몇 시냐고 물었다. ‘다섯 시 반이라는 대답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조치훈의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봉수할까요?” “뭐 좋을 대로.” “그냥 둬버릴까요?”

    저녁을 먹지 말고 계속두기로 합의한 후 조치훈은 또 신음을 토했다.

    바보 같은 수를 둬버렸네. 기껏 생각해서 이런 수를 두나. 정말 바보 같은 놈이군.”

    그러나 조치훈의 그런 엄살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서 검토실의 누구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관전기자는 어느 쪽이 계속두자고 했는지 여기저기 열심히 묻고 다녔는데 누군가가 다케미야라고 하자 사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다케미야가 곧 던지겠군.”

    그러나 91~95수를 두면서 토해낸 조치훈의 신음은 아무래도 상대가 백기를 들어올리기를 기다리는 승자의 것이 아니었다. 실은, 그때 조치훈이 실수를 범했고 그 바람에 다케미야가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정작 검토실에서는 다케미야가 돌을 거두기를 기다리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다케미야가 기합을 넣듯 따악, 부채 접는 소리를 내자 누군가가 부르짖듯 말했다.

    던졌다!”

    준비하고 있던 사진기자가 대국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가까스로 멈추는 해프닝이 벌어진 뒤 바로 이어진 사카다의 말이 검토실을 흔들었다.

    뭐야, 흑이 이상하게 됐잖아.”

    고바야시와 조훈현이 긴장된 표정으로 다시 검토를 시작했다. 그 사이에 공방은 일순 좌상귀로 옮겨지고 있었다. 조치훈의 신음과 다케미야의 투덜거림. 이미 제한시간을 다 소비하고 초읽기에 몰린 조치훈은 계시원의 재촉에 거푸 비명을 질렀다.

    알았어, 알았다고!”

    백이 우하 쪽의 선전으로 상변 쪽에 두터운 벽을 쌓으면서 고바야시와 조훈현은 동시에 잘못하면 우상 쪽 흑이 죽겠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치훈은 초읽기에 고전하면서 힘겹게 돌을 놓았고 다케미야는 숨도 안 쉬고 응수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다케미야에게 독이 됐다. 조치훈이 143, 145를 두는 순간 조훈현이 맥 풀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 그것으로 살아버렸네.” “살았군.”

    고바야시도 중얼거렸다. 동시에 다케미야의 착수 속도가 뚝 떨어져 한수, 한수 장고가 이어졌다. 그것으로 승부가 끝난 것 같았다. 잠시 후 다케미야의 자조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안뇽하시무니까인가.”

     

    종국은 오후 843, 240수였다. 조치훈은 복기 검토 중간에 2층에 운집해있던 한국 팬들에게 인사를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잠시 후 돌아오자 이번에는 KBS의 인터뷰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어로 질문하고 한국어로 대답했기 때문에 내용을 알 수 없었던 사와키 고타로는 옆에 서있던, 일본어를 할 만한 사람에게 무슨 내용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무엇인가 투덜거린 뒤 가르쳐주었다.

    이 시합에서 어디가 가장 어려웠냐고 물으니까 안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하네요.”

    그 순간, 사와키 고타로는 전율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안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그것은 마치 조치훈 자신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 같은 말이 아닌가. 어쩌면 조치훈은 이 한판의 대국을 통해서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국후 감상은 길게 이어졌다. 도전 첫 대국을 져버린 다케미야는 평소와 다름없이 밝은 표정이었는데 검토가 끝날 무렵 웃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치훈 군, 그렇게 흔들흔들하면 정말 뒤가 염려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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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23 14:38

    12.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기자가 생각하는 조치훈은 바둑에 관한 한 지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승부사다. ‘목숨을 걸고 둔다는 말을 유행시켰던 청년기의 조치훈은 8-90년대 (프로바둑을 지향하는) 청소년들이 가장 닮고 싶어 했던 우상이었고 86년의 교통사고 이후의 휠체어대국은 20여 년이 흐른 지금 하나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상금에 관한 한 여전히 최고액을 자랑하는 일본에서 랭킹 1~3위를 석권하는 대삼관(大三冠)’을 네 차례나 기록했고 타이틀 획득 수에서도 일본 프로바둑 신기록(71, 2위 사카다 에이오 64)을 보유하고 있으니 부와 명예를 확실하게 거머쥔 셈인데 그는 과연 행복할까.

    안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는 그의 말이 오래전 유력일간지 기자칼럼에서 본 기억 그대로 순수하게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웠다는 말로 치환될 수 있다면, 그리고 한국바둑계와 팬들이 그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주었다면 그는 행복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한국을 떠나서, 한국의 바둑계를 떠나서 이야기되는 조치훈은 대단히 유쾌하고 위트 넘치는 사람이지만 그는 한국을 떠날 수는 있어도 한국인임을 부정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그가 생각하는, 20년 전의 한국인 조치훈은 그다지 행복한 것 같지 않다. 강으로 돌아오는 연어의 숙명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함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씁쓸하게 웃었던 것처럼 마음 속 깊은 곳의 한국을 떨쳐버리지 못한 조치훈은 한국어 구사가 서툴러서 또 일본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에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그저 바둑으로 일본인을 이기는 조치훈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그 어느 집단에도 속해 있고 그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인가?

    한국인으로서의 그는 오랜 시절 외로웠다. 오해가 쉬운 말이 아닌, 온몸으로 절절하게 나는 외롭다고 외칠 만큼 그는 외로웠다. 치열한 그의 승부세계와는 뜻밖에도 거리가 먼 구름, 바람, 숲을 대상으로 마음을 담은 그의 부채 휘호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고운(孤雲), 풍삽삽(風颯颯), 운림지정(雲林之情).

     

    그는 본인방 타이틀 5회 방어 기념식에서 하객들에게 나누어준 부채에 군간백일치(君看白日馳) 하이현상전(何異弦上箭)’, 흐르는 시간은 막 쏘아지려는 화살과 같다는 당대(唐代)의 문인 이익의 시 두 구절을 휘호로 옮겨 기사생애의 반환점에 대한 소회를 담았는데 그 5년 뒤 하객들에게 가벼운 웃음으로 약속했던 본인방 10연패를 이룩했다. 사실, 그의 타이틀 획득과 방어, 심지어는 상실까지도 이런 예언자적 일화가 많았고 그것이 그를, 그의 승부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그의 어록에 남겨진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라는 말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애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바둑이지만 그런 바둑에 생의 모든 의미를 걸 수밖에 없었던 승부사로서의 감회가 담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명구로 꼽힌다. 요즘 그의 마음은 10여 년 전 어느 날 대국 도중에 활짝 펼쳐든 부채의 자필 휘호로써 헤아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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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 2015.07.24 11:19

    13. 오유지족(吾唯知足)

     

    이 말은 석가모니께서 수행 6년의 깨달음을 유언처럼 제자들에게 전한 말이라던가. 오직 스스로 족함을 안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태어난 곳을 향해서 또 그곳의 사람들을 향해서 얼마나 많은 빛깔의 애증을 떠올리고 가라앉혔을까. 단 한 사람의 육친, 그런 사람이니까

    서울 기성전으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그날 밤 조치훈과 만나기로 약속한 사와키 고타로는 일본기원 기자실에서 혼자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조치훈과 대만출신 왕리청의 대국이 비치고 있었다. 조치훈은 기성전 도전기 중간에도 몇몇 기전에서 바둑을 둬야만 했는데 이 대국도 그중의 하나였다. 조치훈은 9시에는 끝날 테니 10시경에 만나자고 말했지만 바둑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10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잠시 후 패싸움에서 이겨 조치훈이 근소한 차로 왕리청을 이겼다. 12시가 지날 때까지 검토가 계속되었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모두 기진맥진했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택시로 시부야까지 나가 넓은 테이블이 있는 바에서 시원하게 맥주를 한잔 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일주일 전의 서울 이야기로 돌아갔다.

     

    사와키 고타로는 마차는 달린다의 마지막 장면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가족과 고향은 점점 더 멀어졌다. 한국인으로서의 조치훈은 일본인을 바둑으로 이기는 사람으로만 받아들여졌다. 그게 조치훈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조상연은 조치훈이 10대 초반일 때 바둑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때린 적이 있었다. 어린 동생은 울면서 대들었다. 왜 나를 일본에 데리고 왔느냐, 누구에게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내 인생을 어떻게 해줄 건가. 지금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조상연은 생각했다. 그렇다. 확실하게 나는 이 녀석의 부모와 고향을 빼앗아버렸다. 나에게 이 녀석을 때릴 자격이 있기나 한가. 기성전이 끝난 후에 한국기원은 격렬하게 조상연을 비난했다. 요컨대 조치훈을 이용해서 혼자서만 단맛을 다 빨아먹었다는 것이다. 조치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용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형은) 단 한 사람의 육친, 그런 사람이니까.”

    많이 취했음에도 그다지 피곤해 보이지는 않았다. 맥주를 마신 후에 진을 두세 잔 마시고 철수하기로 했다. 택시 안에서 조치훈이 입을 열었다.

    서울에서 돌아오는 날 아침, 한국기원 이사장에게 인사하러 갔었는데 그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아요?”

    글쎄.”

    당신도 형하고 손잡고 엉터리 같은 일을 하고 있지.”

    그런 말은 서로 안 하는 게 좋은 거 아닌가?”

    그 뒤는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서울에서 대국이 끝난 뒤 인터뷰에서 했던 안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어려웠다.’ 그의 말을 생각했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안에 들어와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번 떠나 버린 고향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던가. 택시가 멈추자 그럼 이만.’하며 그가 내렸다. 맨션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지친 뒷모습을 보면서 그의 뒤를 쫓아가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언젠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싼 여관 같은 곳에서 머물면서 한국여행이나 한번 해보자. 진짜로.’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택시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이내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하수 2015.07.24 11:28

    어떤 형상(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망라한다)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또한 같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 다라 매번 느끼는 감정이 달라질 것이다.

     

    이 글을 읽노라니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서 생활해야 했던

    그리고 자기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일가를 이룬 조치훈의 아픈 마음이 찡하다.

     

    오는 27일에 있을 조치훈과 조훈현의 대결을 기다리며 이 란의 연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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