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글을 옮겨와서 댓글에다가 연재를 하고 있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지만
처음 시도되는 3개월 후에 있을 우리 고향에서의 수담을 즐겁게 나누기 위하여
우리 바둑사에 영원히 회자될 오청원선생님의 '치수고치기 10번기를'
금산에서 바둑대회를(3)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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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에서 바둑대회를(3)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12.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12회)
세 번째 치수고치기.
후지사와 6단의 정선이며 도중에 7단으로 승단하더라도 오청원이 격파되지 않으면 10번기가 끝날 때까지 정선인 채 계속 둔다. 물론 오청원이 격파되면 선상선으로 계속 이어간다는 규정이었다. 후지사와는 곧 7단으로 승단할 것이 확실하며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본래 선상선 치수이므로 오청원은 맘이 편했다. 일종의 '져도 본전'이라는 생각이었으니 후지사와로서는 왜 그렇게 불리한 규정을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맘속으로는 전혀 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거나 10번기이기 때문에 4승 차이는 두 번의 치수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밑지는 장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5세 청년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다. 후지사와 6단은 당시 30세인 오청원보다 젊은 25세의 청년기사로서 일본기원에서는 가장 촉망받는 준재급. 실제로 그는 5년 후 1949년에 일본기원 최초의 9단이 된다. 대국조건은 10시간으로 하고 한판에 이틀을 배정한 것도 그 동안의 규정과 다른 것이었다.
이 치수고치기의 첫 판은 1944년 12월17일 지바의 여관 '환취'에서 벌어졌는데 태평양 전쟁의 말기인지라 소등을 하고 바둑을 두어야 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다. 흑번무적(黑番無敵)을 자랑하는 후지사와를 상대로 오청원은 약속대로 모두 백을 들고 싸우게 되었다.
제1국은 오청원이 흑의 철벽을 허물 수는 없었지만 제2국은 비로소 흑벽을 돌파하였다. 제3국은 흑의 승리, 4국은 백번 승리. 이런 식으로 승부는 호각이었다. 후지사와는 자존심이 상당히 상했다. 맘 같아서는 당장 호선으로 두어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할 오청원에게 선상선 다음 치수인 정선으로 두어서 2승 2패의 호각이라니! 더욱이 4국의 마치고 후지사와는 7단으로 승단했다. 후지사와의 의도대로라면 지금쯤 최소한 3승 1패는 달리고 있어야 할 터인데 2승 2패라니. 7단의 명패가 아까울 따름이다.
제5국은 오청원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어 6국은 후지사와 7국은 오청원의 승리.
이제는 오청원이 먼저 이기고 후지사와는 뒤따르기 시작한다. 치수고치기가 4승3패로 호각인 가운데 오청원은 한발 앞서간 것이다. 제7국이 끝난 뒤 오청원과 후지사와는 징집영장을 받고 곧바로 귀향 조치를 받으면서 둘 사이도 바빠진다. 후지사와는 제8국부터 10국까지 3연패를 당하고 치수고치기 10번기는 3승 7패로 마감한다.
후지사와를 상대한 치수고치기 10번기는 예상을 뒤엎은 결과이며 무승부에 가까운 성적을 남긴 것은 건투였다고 할 만하다. 후지사와는 다시 전후 2회에 걸쳐 10번기를 다투게 되나, 처음 10번기에서와 같이 오청원은 만만찮은 저력을 보였다.
세 번째 치수고치기가 끝나자 돌연변수가 나타났다. 바로 오청원이 종교에 귀의한 것. 그의 인생행로 중에 이해하기 힘든 대목인데, 이른바 '세광존'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맘을 먹은 다음부터는 오청원은 다시 바둑으로 컴백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곧, 치수고치기가 세 번째로 끝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그 사이 치수고치기 제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청원은 세광존의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패전 직후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 사람들은 하루의 양식을 얻기 위해 만원 전차에 흔들리며 죽기 살기로 물건 구입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중국서 건너온 오청원의 혼란스런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 뭐 그런 것 말이다. 오청원은 종교에 빠져 들었다. 이른바 세광교였다. 한마디로 특이한 종교인데, 일본의 종전 직후 불안한 세상을 틈타 구원의 손길을 뻗친 종교는 참으로 많았다. 중국인이라 종전 말미엔 심적 갈등도 심했다. 오청원은 태평양전쟁 말기엔 후지사와 7단과 10번기를 마치고 기계를 은퇴한다. 약 2년이 지나도록 일체 바둑을 두지 않았으니 은퇴라고 할 것은 없고 굳이 말하자면 대국을 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1946년 8월, 세광존에 요미우리 신문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하시모토 8단과 치수고치기로 화려하게 복귀하도록 종요하기 위함이다. 오청원은 당시 세광존과 행동을 같이 하고난 다음부터 바둑돌을 다시 잡게 될 까닭은 없다는 생각을 했고 신앙생활에 열중이었으므로 상당히 낯설었다. 2년 동안 일본 기원 건물은 공습으로 다 타버렸고 세상 사람도 기계의 향방에 관심을 둘리 만무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2년째로 접어들자 차차 관심이 부활하게 되고 '오청원은 왜 바둑을 두지 않았는가?'가 세인의 의문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46년 8월 심기일전한 오청원은 다시 바둑돌을 만지고 싶은 맘이 생기자 신문사가 기사를 선택하면 바둑을 두겠다는 뜻을 요미우리 신문사에 전달한다. 오청원의 생각은 '전쟁이 끝났으므로 장래 중국으로 돌아가서 중국기사를 통합하고 바둑을 통하여 중국 일본 두 민족의 평화에 이바지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13.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13회)
'오청원 재기하다.'
기계와 신문사는 만천하의 팬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요미우리는 일본 기원과 상의하여 하시모토 우타로 8단을 내세우기로 한다. 하시모토 우타로는 제2기 본인방이 되었고 그해 봄 승단시합에서 전승을 거두고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세광존의 명령으로 오청원은 바둑돌을 잡게 된다. 제한시간은 비상시니까 6시간으로 하자고 오청원이 제안했고 하시모토 8단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나 요미우리 신문사가 "6시간이면 너무 싱겁다!"고 하여 각자 7시간으로 낙착되었고 하루에 종결하자는 입장을 전달했다. 당시의 대국료는 각자 1만 엔이었으며 오청원의 대국료는 세광존의 자금이 되었다.
제1국. 시합 전날부터 세광존은 자기 일처럼 힘을 쓰고 오청원이 이기게 해달라고 신자 전원이 기도를 계속했으나 2년간의 공백은 너무 길었던지 흑 차례임에도 불구하고 질질 끌려다니다가 패하고 말았다.
2국은 1국이 끝난 후 3일째에 두어졌다. 세광존은 제1국 때보다 더 극성스럽게 오청원을 위해 기도했다. 대국 전날 세광존은 바둑에 이길 법력을 오청원의 몸에 넣어준다고 하면서 오청원과 같은 방에서 자게 하였다. 신의 이웃에 누운 오청원은 실례되는 일이 일어나면 큰일이라고 돌아눕지도 못하고 한잠도 잘 수 없었다. 결국 2국도 1국 이상으로 산뜻하지 못하여 둘 곳에 돌이 가지 않아 종반이 되자 절반쯤 죽어가는 백돌이 여기저기 산재한 상태여서 누가 봐도 오청원의 패국이 확실하였다. 그래도 "나는 져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계속 두어갔다. 중반을 지날 무렵부터 절대 우세한 하시모토 8단의 착수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기서 다 죽어가던 돌들이 살아나고 국면은 차츰 미세해지다 드디어 승패불명이 되었다. 그 바둑을 해설한 세고에 선생은 "하시모토는 아주 이상하다. 이런 바둑을 지다니 파문감!"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중반까지 승리는 확정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중반이 지난 무렵부터 무언가 기분이 들떠서 집중력이 없어졌다. 정신이 이상해졌다고밖에 생각이 안 난다." 하시모토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흑의 갑작스런 변조가 너무나 불가사의함으로 하시모토가 둘 차례가 되면 북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와서 사고(思考)를 방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또 천장에서 거미가 내려와서 하시모토의 눈앞에 드리워진 것을 보았다는 설(說)까지 파다하게 퍼져갔다. 오청원은 대국 당시 그런 일에 열중해본 적이 없으나 낭설 그 자체였다. 그러나 승부란 인간의 이성으로서 파악하지 못할 부분이 있어서 오청원은 지지 않으려는 집념과 세광존 사람들의 기도로 말미암아 하시모토의 착수를 그르치게 했다는 것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왔다 갔다 하는 모양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국에 영향을 주니까. 하시모토는 유망한 청년이었으나 2국을 패한 다음 좀처럼 이겨보질 못한다. 그러니까 바둑계에 오청원이 복귀한 첫날 그를 보기 좋게 꺾었으나 그 이후 내리 4연패를 하여 역시 오청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제3국. 오청원은 흑 차례였고 오청원은 겨우 컨디션을 되찾아 쾌승하였다. 그런데 오청원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세광존이 갑자기 10번기에 관심을 잃어버리던 것이다. 오청원에게 기운을 불러일으킨다고 동침을 허락한 그 세광존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10번기에 관심을 잃어버렸다. 생각만큼 선전효과가 오르지 않았던 탓일까. 오청원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는 일도 없어졌고 10번기의 대국일정도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이것이 오청원에게는 어쩌면 잘 된 일이었다. 세광존은 새우관(세광존과 이념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인 서클)에서 출발하고 대국 중에도 속인과 사귀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었으므로 오청원은 점심시간에도 자기 방에 틀어박혀 누구와 잡담을 하는 일이 없었고 대국이 끝나면 곧장 새우관으로 곧장 들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바둑계의 동향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편한 일이었다. 바둑계에서는 세광존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을 근심하여 빨리 세광존으로부터 손을 떼어놓아 보려고 했다. 오청원이 피하고 있으나 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보았음인지 오청원을 설득하는 사람도 없었다. 오청원이 세광존에게서 떨어지게 하는 방법은 지게 하는 방법밖에 없으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꾸 져서 인기가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세광존을 떠나게 되리라는 뜻일 것이다.
제4국은 오청원의 백 차례로 오랜만에 대각선상에 두 개나 '3, 三'을 두어 중앙에 힘겨루기가 잇따른 바둑이 되었으나 백이 리드를 잡아 오청원이 6집승을 거두었다.
5국은 하시모토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가운데 생기가 없이 대국에 임했으나 131수만에 돌을 거두고 말아 1패 후에 4연승을 하여 치수가 고쳐지기 일보직전이었다.
6국은 하시모토의 몸 상태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당분간 연기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러나 실제로 오청원이 세광존의 사정으로 대국일정을 확정할 수 없어 반년 가까이 후에 벌어진다.
오청원의 백 차례. 오랜만에 만져보는 바둑돌의 감촉이었다. 눈이 빙빙 도는 하루를 보내고 있으나 바둑판에 앉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욕심도 불안도 없이 승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하시모토는 기력이 회복되었는지 대열전을 전개했고 오청원은 근소한 차이로 흑을 따라잡지 못하고 2집패를 거둔다. 6개월간의 공백은 이렇게 오청원을 감각을 잃게 만든다.
제7국은 계속해서 같은 장소에서 치러졌다. 백의 하시모토는 중앙에 두터움을 쌓았으나 흑도 이럭저럭 흑세를 짓밟는 바둑이 되었고 중앙삭감을 성실히 수행한 흑의 불계승이었다. 다시 승패는 5승2패. 치수가 고쳐지기 바로 직전이었다.
14.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14회)
제8국은 7국이 있은 지 2개월이 지나서 벌어진다. 운명의 한판이었다. 하시모토가 지면 영락없이 치수가 바뀌는 그런 중차대한 시합이었다. 백 차례인 오청원은 중반까지 고전 중이었다. 그러나 오청원은 사실상 진 바둑에서 막무가내로 백돌을 끌어내 움직이는 최후의 승부수를 택했다. 의외로 흑이 대응을 잘못하는 바람에 역전 불계승을 거뒀다. 6승2패. 약속대로 치수가 고쳐지고 말았다. 선상선(두 번은 정선으로 한번은 호선으로 두는 치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치수가 고쳐져도 고쳐진 대로 계속 두는 것이 처음의 약속이었다. 김이 빠질 대로 빠진 하시모토는 이겨도 그만인 시합이었다. 선상선으로 두었으나 제9국은 빅, 10국은 하시모토의 불계승이었다. 그러나 치수가 고쳐진 다음이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 하시모토 8단 제1차 치수고치기 10번기 결과(오청원 기준)
․제1국(호선) 1946년 8월26일/동경 흑 5집패
․제2국(호선) 1946년 8월29일/동경 백 1집승
․제3국(호선) 1946년 9월/지바겐노다 흑 불계승
․제4국(호선) 1946년 9월/경도 백 불계승
․제5국(호선) 1946년 9월/경도 흑 불계승
․제6국(호선) 1947년 7월/고베 백 2집패
․제7국(호선) 1947년 7월/고베 흑 불계승
․제8국(호선) 1947년(호선) 10월3일/도쿄 백 불계승
․제9국(정선) 1947년 12월/지바겐노다 백번빅
․제10국(정선) 1948년 1월/시즈오카겐 백 불계패
하시모토 8단과의 10번기가 끝나자 당시 신진기사로 이름을 날리던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7단과의 3번기가 기획되었다. 사카다 7단은 그때 면도날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기풍에다 공격도 좋고 수습도 잘해 공수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훗날 일본 바둑계 영원불멸의 대기록인 통산최다타이틀 66회 획득을 자랑하는 사카다 에이오! 지금껏 깨어지지 않는 그 기록은 타이틀전이 드물었던 시절이라 그 가치는 더욱 빛나는 것이다.
당시엔 치수고치기 10번기 외의 3번기, 6번기가 많이 치러지고 있었다. 암울한 일본의 시대였으므로 보다 일본 팬들을 자극할 수 있는 라이벌전을 자주 펼친 셈인데, 지금으로 치면 조훈현 서봉수간의 라이벌전이라든가, 이창호 조훈현간의 사제대결을 자주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일본 팬들은 오청원에 열광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누군가가 그를 꺾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사카다 7단과 겨룬 3번기는 그가 아직은 오청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선상선으로 시작된 3번기는 3:0으로 시원스럽게 끝을 맺는다. 3:0으로 전적으로 따지다 보면 그것이 완승이라고 할지라도 1,3국은 오청원이 백을 들고 간신히 1집을 이긴 바둑이니 아슬아슬했다. 그 때 오청원도 소장기사의 기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훗날 사카다는 정식으로 오청원에게 10번기로 도전을 해온다.
다음 상대는 이와모토 가오루(岩本薰) 8단.
이와모토는 하시모토 8단이 2대 본인방이 되고 난후 도전자 자격을 따내 종전 직전의 히로시마에서 원폭대국을 포함해 도전기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1945년 11월에야 3승3패의 무승부로 끝이 났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최종 3차례 승부를 벌였고, 이와모토 8단은 2연승을 거둬 3대 본인방에 취임했다. 이런 이와모토와의 10번기는 제한시간 문제로 난항을 겪었다. 즉, 오청원은 하시모토 8단과의 선례를 들어 7시간 하루 마감을 주장했으나 이와모토는 13시간 3일제를 주장했다. 결국 본인방의 주장대로 결정이 났다. 제한시간을 길게 가져가려는 사람은 필시 기력에 흠집이 나 있게 마련이다. 이와모토 본인방의 기풍은 '콩 뿌리기 바둑'이라 하여 담담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담담한 것은 인품이지, 그의 바둑은 끈질기고 매섭고 패가 장기인 사람이다. 오청원도 패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므로 이 십 번기는 어느 대국을 보더라도 반드시 패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특히 제1국은 중반이후 끝까지 패싸움을 하고 있으며 종국을 하고서도 문제가 남겨진 채 당시는 '백 1집반 내지 2집승'이라는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백을 든 오청원이 바둑에서 이겼지만 그 차이가 극히 작아 패싸움을 피차 양보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순간, 가일수를 하게 되면 1집승이고 가일수를 하지 않으면 2집승이었으니 늘 이 문제로 시끄러웠다. 당시 일본기원에는 뚜렷한 바둑 룰에 관한 규약이 없었으므로 실로 난감했다. "어느 편이든 패감이 많을 경우 마지막 패는 가일수하지 않고 중국 한다."는 잠정 규정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 나중에 백 1집승으로 정정되었다.
제2국은 7월21일 온천에서 벌어졌는데 흑 차례의 오청원은 불계승을 거두었다.
제3국은 흑차례인 본인방이 본래의 실력을 발휘해서 흑의 3집반승을 거두었다.
제4국은 흑차례인 오청원이 승리, 판세는 3승1패가 되었다.
바둑에서 흑을 들면 아무래도 유리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제1국에서 백으로 1집을 이긴 것이 판 자체를 오청원 쪽으로 기울여버렸다. 마치 테니스에서 상대가 서브게임을 잃은 것처럼.
제5국은 10월, 본인방의 흑 차례였는데 중반 거의 흑승으로 되어있는 바둑을 그가 실수를 하는 통에 오청원의 역전승이었다. 이런 바둑은 되돌리기가 뭣하다. 사력을 다해도 이길까 말까 한 바둑을 다 이겨있는 것을 이기지 못한다면 치수가 고쳐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제6국은 또 오청원의 흑 차례여서, 그가 이겨 5승1패가 되었다. 치수를 고친다. 선상선이 된 것이다. 제6국이 끝난 후 종교공동체인 세우 속에서는 오청원의 아내를 악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15.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15회)
세광존도 예전만큼 세우에 열중하지 못하게 된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 무렵 세광존은 오청원과 아내를 일부러 떼어놓고 만나지 못하도록 하고 그 대신 아내의 후배를 접근시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광존이 아내를 법정에 세우려는 낌새를 알아차린 오청원은 처음으로 세광존의 의향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의사를 드러냈다. 그것이 종교와의 인연을 끊는 선언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종교와 결별하는 데는 오래 가지 않았다. 4년간의 세광존과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추호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때까지 오청원의 바둑은 순조로웠기 때문에 아무도 진정으로 오청원을 꾸짖으려 하지 않았다. 오청원을 지나(支那)인으로 경멸하고 꾸짖은 것은 세광존이 처음이다. 결국 그 복고적인 국수사상은 따라갈 수는 없으나, 세우에서의 4년간은 순수한 신자로서, 또 인간으로서 오청원이 고락을 같이 할 수 있었음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 생활을 통하여 스스로의 자만심을 반성케 하는 일도 많았고, 자기를 깊이 알 수 있었음을 오청원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제7국은 본인방이 중반을 지나기까지 흑 차례의 우위를 지키고 있었으나 끝내기에서 실수를 하여 빅으로 끝나고 말았다.
재8국. 초반은 고전하였으나 중반에 힘을 내어 백 차례로 3집반승을 거두었다.
제9국. 오청원의 흑 차례로 이틀째 결판이 나서 흑 불계승이었다. 이로써 상대전적은 7승1무 1패였다.
마지막 10국. 오청원은 그리 이겨야 할 까닭이 없어 그냥 패하고 말아 7승2무 1패로 끝났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 갔으나 중국을 대표하는 합법정부로서 대만이 일본과 국교를 트자 무국적 상태이던 오청원은 여권을 신청하였다. 1949년 가을 오청원은 국민당 정부의 중국인으로 국적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잃은 것도 있어 오청원으로서 마냥 즐거운 일만 생긴 게 아니었다. 오청원은 일본에 온 이래로 쭉 일본기원 소속기사로 활약했는데, 전후 일본기원을 떠나 요미우리 신문의 유일한 간판으로서 무소속 기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현재 일본기원 연감에 오청원은 500여 소속기사 가운데는 찾아볼 수 없고 맨 끄트머리에 있는 명예 객원기사에 실려 있을 뿐이다. 오청원은 그 과정에 대해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일본기원의 단위를 획득하는 등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고, 탈퇴한 적도 없으며, 탈퇴 의사를 표시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하태평으로 살았던 오청원은 일본 기원의 제적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20년이 지난 1966년에야 제적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이 약했던 오청원은 요미우리 신문사의 10번기 외에는 그다지 대국도 하지 않았고 일본기원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한 적도 없었다. 기원 소속이든 아니든 원하는 바둑을 계속 둘 수 있으니까 문제는 없지만 오청원은 자신이 왜 제적되었는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전후에 시합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청원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본기원에서 그를 제적시키려면 당사자에게 한 번쯤은 연락이라도 취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알리고 싶지 않을 만큼 조용히 '자르고' 싶었던 것일까.
1947년 세고에 선생이 일본기원 이사장으로 있을 때 직접 사표를 갖고 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오청원이 스승에게 확인한 결과 "여러 가지 압력으로 부득이 했다. 다음해엔 이사장직도 그만두게 되었다"면서 그 이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1947년이라면 그가 세광존에 신명을 다 바치면서 하시모토와의 10번기를 계속했을 때이고, 세상 움직임에 대해서는 무지한 때였다. 당시 패전의 혼란 속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였다. 오청원 같은 '국제인'에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할 일들이 자꾸 생기는 것을 숙명이라 해야 할까?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고에 선생에게 압력을 넣어 사표를 쓰게 했을까? 오늘날 오청원의 사표 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고에 선생은 이미 죽었다.
1949년 후지사와 구라노스께 8단이 정기대회의 성적에 따라 9단으로 승단하였다. 유일한 9단. 전전(戰前)까지는 9단이라 하면 명인(名人)밖에 없었으므로 명인에 필적하는 단위다. 지금은 일본기원 소속 9단이 120명에 달하지만 당시로는 대단한 지위다. 후지사와는 6단 시절 오청원과 10번기 대결을 펼친 바 있다. 그러나 후지사와는 당시엔 정선으로 '진검 승부'가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당시에 흑번필승의 신화를 창조하던 후지사와 6단은 오청원에게 정선으로 호기 있게 덤비다가 그만 화를 입은 바 있다. 요미우리 신문이 그를 놓칠 리 없다. 10번기의 달인인 오청원과의 10번기를 기획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오청원의 단위가 8단인지라, 선상선의 치수로 붙어야 하지 않느냐는 일부의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오청원도 7단 승단이 임박한 후지사와를 정선으로 계속 두게 한 일이 있다.
10번기의 달인 오청원이 흑을 들고 두게 한다? 기묘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오청원을 9단으로 만들어 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게 고안된 것이 '오청원 대 6,7단 선발 10번기'였다.
16.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16회)
후지사와 고라노스께(藤澤庫一朋齊) 9단과 오청원의 10번기를 최고의 빅카드로 생각한 요미우리 신문은 오청원을 9단으로 만들 작정을 했다. 그래서 6,7단 선발 10번기를 기획해낸다. 이 10번기를 통해 오청원을 자연스럽게 9단으로 승단시킬 속셈이었다. 오청원도 후지사와와의 10번기에 반대했다. 상수가 하수를 시험하는 것은 가능해도 하수가 상수를 평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요미우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후지사와가 일본 최초로 9단이 되어 한껏 주가가 뛰고 있을 때 '재야의 일인자' 오청원과 맞붙이는 것은, 이때까지 10번기를 펼쳐온 요미우리라면 기어코 성사시키려고 할 것이다. 오청원도 6,7단 선발 10번기를 통한 9단 승단이라는 기획 의도는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창 자라는 기사들을 꺾어놓고 자신이 우뚝 선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론은 '둔다'로 결정했다. 6,7단과의 10번기에 출전하기로 맘을 굳힌다.
전후(前後)의 일본 상황은 뒤숭숭하여 사람들의 잡다한 생각을 묻어버릴 수 있는 쇼킹한 이벤트를 찾고 있었기에 바둑도 좋은 '꺼리'가 됐다. 오청원도 바둑기사이기에 어떤 승부라도 물러나는 태세를 보여주는 것은 옳지 않았다. 10번기에 출전한 6,7단은 사실 10명의 신예로 뽑힌 것만으로도 즐거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타도! 오청원'을 기치로 힘차게 도전하여 왔으나 오청원이 또한 뒤에서 쫓아오는 후배들에게 질 수는 없는 일. 결과는 오청원의 8승1무1패였다.
더구나 모조리 백 차례이고 흑을 든 경우는 두 번밖에 없는 불리한 치수였는데도 오청원의 완승이었다. 오청원의 유일한 패배는 구보우찌 6단에게 패한 것이며 '빅'은 스미노 6단인데, 둘 다 관서기원 기사였다는 것은 묘한 결과였다. 당시엔 일본기원과 관서기원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청원도 일본기원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일부러 져주었다는 억측을 듣기에 딱 알맞은 성적이었다.
이 10번기가 끝나자 오청원은 1950년2월15일 일본기원에서 9단위를 받았다. 그의 나이 36세.
기다렸다는 듯이 요미우리는 후지사와 9단과 오청원간의 세기의 대결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10번기 기획에 나섰다. 오청원이 9단을 받기 직전인 1949년 11월 일본기원에서 '명예객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일본기원에 적(籍)이 없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뜻의 칭호인지 의미도 모른 채 오청원은 그 칭호를 받았다.
드디어 10번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후지사와 9단이 좀처럼 승낙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6단 시절 오청원에게 흑번필승의 신화를 이어가겠다고 호언장담한 끝에 선상선(先相先)의 치수로 나섰다가 연패를 기록했던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그런 그가 무슨 원수를 졌다고 오청원과의 사활을 건 10번기를 서두를 것인가! 더욱이 그는 일본 최초의 9단이다. 일본 최초의 9단으로서 명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위치인데 섣불리 10번기를 해서 치수라도 고쳐진다면, 치수가 문제가 아니다. 설사 패하기라도 한다면 최초의 9단 입장에서는 얼굴에 먹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요미우리는 안달이 났다. 신문 기보도 빨리 작성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후지사와 9단이 고집을 부리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미우리가 지금까지 10번기를 기획할 때마다 안 하겠다고 한 기사는 없었다. 그 즈음 하시모토는 이와모토 8단과의 대국에서 혼인보자리를 되찾고 관서기원을 일본기원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뛰고 있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하시모토 혼인보와의 2차 10번기였다. 제1차 10번기는 오청원이 치수를 고쳐놓았기에 선상선(先相先)으로 출발하였다. 그래서 오청원은 하시모토와의 예정에 없던 치수고치기를 거행하게 됐다. 반면 후지사와는 시간을 좀 벌고 있었다. 후지사와도 결국엔 10번기의 전장(戰場)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지만. 오청원의 전후 첫 10번기의 상대로 나선 하시모토(橋本宇太郞)는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원래 오청원의 다음 상대는 '천하제일의 명검' 후지사와(藤澤庫一朋齊)였으나 그가 시합에 나서지 않자 대타로 지명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1946년 1차 10번기를 치를 때 하시모토는 승단시합에서 전승을 기록하고 있었고 제2기 본인방을 획득, 최고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시모토는 오청원과 인연이 깊은 기사인데, 46년 오청원이 세광존에 빠져 있다가 기계(棋界)에 복귀하며 처음 바둑돌을 잡았던 상대이기도 하다. 당시엔 그가 3승 6패 1빅으로 오청원에게 패퇴했는데, 이번에 또 본인방 5기 타이틀을 따내며 다시 한 번 기회를 맞은 것이다. 하시모토는 5기에 이어 6기에도 본인방을 지켜내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하시모토와의 10번기 준비는 잘 되고 있었다. 제한시간도 '10시간에 2일'제로 결정돼 속기파인 오청원의 요구대로 끝났다.
16회는 분량이 길어 2회로 나누어 싣습니다.
또한 이번 토요일 및 일요일은 금산에서 생활해야 하므로 연재를 쉽니다.
제1국이 막을 올린다. 오청원이 1,2국을 연승하고 제3국째는 쌍방이 수를 잘못 보아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였다. 최후의 실수를 했던 오청원의 패배. 초반전은 꽤 빡빡하게 흘러갔다. 제4국은 빅이었다. 2승 1패 1무승부. 그러나 제5국은 오청원의 승리. 3승 1패 1빅이었으나 6국은 또 빅. 7국에서는 하시모토가 백을 들고 불계승을 거두었다. 3승 2패 2빅. 하시모토는 일본기원에 반기를 들고 관서기원을 막 독립시켰던 인물이다. 당시엔 소속도 불분명했고 일본기원 소속기사보다도 관서기원의 기사들이 꿀리지도 않았다. 그런 탓인지 하시모토는 오청원과의 10번기에서 그런대로 잘 버티어 나가고 있었다. 사실 관서기원의 총수로서 10번기에서 참패한다면 막 출범한 관서기원의 체면은 말이 아닌 것이다. 하시모토는 열심히 싸웠다. 10번 승부로서 치수가 바뀌는 일은 없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이 좀 빠진 오청원은 8, 9국을 이겨 마지막 대국에서 이기면 치수를 바꾸게 되어 있으나, 하시모토도 끝끝내 잘 버텨내 백 차례에서 4집을 이겨 치수를 지켜냈다. 선상선. 본래가 선상선인 치수에서 5승 3패 2무승부라면 오청원이 잘 싸운 전적이었다. 더욱이 2무승부가 있다는 사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짜릿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애당초 후지사와와의 대국이 예정되었으나 대타로 나선 하시모토로서도 잘 싸운 시리즈였다.
이제 운명의 오청원-후지사와 10번기가 본격적으로 재논의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차피 맞붙어야 할 운명이었다. 후지사와가 기세싸움에서 꿀린 결과라 할까. 일본 최초의 9단으로 일본기원의 희망인 그와 오청원간의 10번기는 여론에 밀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후지사와측의 사정은 복잡하였다. 슈사이(秀哉) 명인의 은퇴 이후 공석이 되어 있는 명인의 자리가 탐이 났을 수도 있다. 본인방의 세습은 중단되었으나 상징적인 의미로 기계의 1인자가 되는 '어른'의 위치인 명인에 오르려는 데에 오청원과의 10번기가 흠집이 될 수 있던 것이다. 오청원과의 10번기는 후지사와의 입장에서 원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론, 요미우리에서 하시모토와의 2차전의 사고(社告)를 내면서 후지사와를 자극시킨 것이 그와의 치수고치기가 성립한 가장 큰 이유였다. '바둑 팬'의 희망이었던 오청원과 후지사와와의 맞대면은 오청원이 언제든지 받아들일 태세인데도 불구하고 후지사와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승단 후 후지사와 9단은 슬럼프 기미를 보이며 1949년 추계정기대회에서 3승 3패, 50년 춘계대회에서 2승 4패, 혼인보전에서는 3승 3패로 부진해 섣불리 10번기를 가질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17.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17회)
오청원-하시모토 2차전에 관한 요미우리 신문의 사고(社告)를 읽은 후지사와 9단은 크게 화를 내며 일본기원의 기관지인 기도(棋道)에 "나는 언제든지 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요미우리가 무례하다고 비난했다. 이에 요미우리도 "어느 쪽이 무례한가?"라는 글을 실으면서 오청원-후지사와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계속 난항을 겪게 된다. 수개월이 흐른 후 감정을 삭인 양측은 후지사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화해하면서 오청원-후지사와 10번기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러나 이번엔 제한시간을 몇 시간으로 하느냐로 싸웠다. 장고파인 후지사와는 13시간을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았고 오청원은 10시간 이틀제를 고집했다. 제한시간은 어느 기사에게나 문제가 된다. 특히 오청원 같이 감각적 바둑을 구사하는 천재형 기사에게는 제한시간이 짧으면 좋겠지만, 장고파 기사에게 제한시간은 생명과도 같다. 그러나 아무리 생명과 같은 것이라도 상대가 있는데, 한쪽의 주장만을 담기엔 무리가 따른다. 오청원은 1일 마감을 원칙으로 하는 사람이다. 바둑은 예술로서의 측면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경기다. 2일 이상 되면 동료들의 충고 등 아무래도 불순한 요소가 끼어들기 십상이다. 또 국제적인 경기로 보급하기 위해서도 1일 마감제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짧다고 반드시 바둑의 내용이 떨어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속기일지라도 훌륭한 기보가 많이 남아 있다. 어쨌든 70Kg대의 몸무게를 자랑하는 후지사와는 16시간을 해도 끄떡없겠지만 오청원 같은 약골은 16시간 앉아있기엔 힘이 부친다. 오청원의 주장은 기껏해야 10시간 2일제로 두자는 것이다. 후지사와는 시간에 대해서는 완강한 뜻을 갖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과거 1차 10번기에서 패한 것도 속기에 강한 오청원의 속전속결 작전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결국 13시간으로 결정났다. 뜻을 굽히지 않는 후지사와에게 질려버린 요미우리 담당자는 훗날 "후지사와와의 10번기 만큼 애를 먹은 기억이 없다"고 회고했다.
1951년 10월 후지사와 9단과 접촉을 시작한지 2년여 만에 2차 10번기가 빛을 보게 된다. 이 10번기는 소화(昭和)시대 20년대(1945~1954)를 통틀어 최대의 쟁기(爭期)로 꼽힌다. 오청원은 평소 대국에 임하면서 '절대로 이겨야 한다!'든지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강박 관념을 갖는 쪽은 아니다. 승부는 운이 좋은 쪽에서 이긴다고 보기 때문에 전야제 때 밝히는 임전소감에도 강한 승부 의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대국이 성립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세상소문도 떠들썩했기 때문에 상당히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의 임전소감은 간단했다. "내가 평상심을 지킬 수 있으면 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이 승부는 후지사와 9단의 수읽기에 뒷받침된 강펀치에 오청원이 정확한 대국관으로 맞서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하느님만 알고 있는 것이다.
제1국은 10월20일부터 3일간 린노라는 절에서 열렸다.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든 산속 대국이었다. 후지사와 9단의 흑 차례였는데, 돌이켜보면 호선으로 두어본 것도 후지사와로서는 처음이었다. 일본기계 공식랭킹 1위와 일본기계의 풍운아이자 비공식랭킹 1위를 달리는 오청원의 대결이 시작됐다. 태산 같은 덩치에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후지사와! 그 앞에 조그마하고 가녀린 몸매에 눈빛만은 초롱초롱 빛나는 오청원!
50수를 지날 때부터 흑은 좌변의 백 모양에 쳐들어와 일찌감치 엎치락뒤치락 혼전의 양상이었다. 흑은 백 모양을 송두리째 깔아뭉개고 백인 오청원도 흑을 자기 집 속으로 몰아놓고 흑을 잡으러 갔다.
18. 오청원(吳靑原)의 치수고치기 10번기(18회)
피차 한발도 물러설 곳이 없는 전면전! 이 전면전이 벌어지자 바둑은 단명국이 예상되었다.
운명의 시간은 착착 다가오고 있었다. 흑은 백 모양을 깔아뭉개려 하였고 백을 든 오청원도 자신의 집 속으로 쳐들어온 흑을 소탕하러 나섰다. 장렬한 공방전은 끝끝내 한 수 부족한 흑이 돌을 거두고 말았다. 94수만에 오청원 불계승. 단명국이었다. 그런데 한 수 모자란다는 것은 착각이었고 오청원이나 후지사와나 판을 잘못 보고 있었다. 종국 후 기록계가 그 '수순'을 지적하자 두 사람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수를 잘못 본 것은 역시 천하를 양분하는 기계(棋界) 최초의 9단과 언더그라운드 바둑 대부가 2년여 만에 속개된 바둑에서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수를 잘못 보아 돌을 거두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당시엔 멋있게 수를 다 놓아보지 않고도 안 되는 수면 돌을 거두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므로 간혹 실수는 있을 수 있었다. 후지사와로서는 불운하게 패했다고 할 수밖에.
제2국은 오청원의 흑 차례였는데, 거의 승리를 거두는 장면에서 과수(過手)가 튀어나와 '아차'하는 순간에 역전당하고 말았다.
제3국은 백 차례. 우세한 흑을 필사적으로 따라잡아 빅을 만들었다.
제4국에서는 다시 흑 차례인데, 패하고 말아 4국까지는 오청원이 1승2패 1무승부였다.
오청원은 덤이 없는 시합에서 흑을 들고 두 번이나 연속으로 지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더욱이 제5국은 오청원이 백 차례가 아닌가. 여기서 진다면 1승3패1무승부가 되어 대단히 괴로운 입장에 처하게 된다. 오청원에게 5국은 중차대한 한판이었다. 흑차례인 후지사와 9단은 단단하게 두어 나가 이틀째 끝나도 흑의 흐름은 흐트러진 데가 없이 백이 밀고 들어갈 틈조차 주지 않았다. 흑을 들면 이런 점이 유리한 것이다. 두텁게 기다리다 백이 무리를 하면 그때 가서 과실을 따먹으면 된다는 식이다. 어지간히 기력 차이가 나지 않으면 흑으로서는 잘 패하지 않는다. 테니스에서 서비스권을 가진 쪽이 가진 유리함이랄까! 흑을 들면 당연히 이기는 것이고 백으로 한번쯤 이기게 되면 번기(番棋)는 유리하게 진행되는 셈이었다. 3일째 저녁 쌍방이 필사적인 승부에 몰입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정전이 되어 주위가 침침해졌다. 그러나 오청원과 후지사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정전에는 익숙해 있어 승부에 몰두하고 있는 두 사람은 전등이 꺼져도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 불이 들어오면 "앗 차차!"하고 놀라면서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어 제쳤다. 결국 제5국은 전등이 켜진 다음부터 격렬한 싸움바둑으로 대바꿔치기 끝에 백이 승리를 가져갔다. 쌍방이 테니스에서 말하는 상대의 서비스권을 따내는 악전고투 끝에 2승2패 1무승부로 균형을 이루었다.
제6국이 분수령이다. 제5국까지의 명승부는 이제 다 지난 일. 나머지 다섯 판에서 한판만 이기면 치수가 고쳐지는 일은 없다. 서로 4승차가 나야만 치수를 바꿀 수 있다는 약속에 따라 1무승부가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즉 어느 한쪽이 1승을 거두어 3승1무가 되면 설사 상대는 전판을 모조리 이긴다 하더라도 6승3패1무밖에 안 된다. 6승과 3승은 4승 차이가 아니므로 자존심은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오청원의 괴력이 발휘된다. 후지사와 9단의 버티기도 이제 기운이 다되었던지 오청원은 6국부터 10국까지 내리 5연승을 거둔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오청원-후지사와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그렇게 치수가 고쳐졌다.
후지사와 고로스케 9단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본 최초의 9단이 두 번의 기회에서 한 번은 자만심으로 승리하지 못했고, 두 번째는 금세기 최고의 기사로 주목을 받았지만 속된 말로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일패도지(一敗塗地) 하고 말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오청원이 10번기에서 승승장구하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후지사와 9단은 제3차 치수고치기를 신청한다.
이미 승부는 끝난 것이고 만신창이가 된 다음이나, 만약 이긴다면 그나마 반 본전은 하는 셈이다. 그리고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10번기 사상 처음으로 오청원을 이기는 기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후지사와의 기대는 깨졌다. 제3차 치수고치기는 선상선으로 출발하였으나 정선치수로 바뀌고 만 것이다. 기계의 충격파는 대단했다. 후지사와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선상선인 치수가 정선으로 고쳐질 것이란 생각은 못 했던 것이다. 괴력이 따로 없었다. 고수의 깊이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오청원은 6국 만에 5승1패로 4승차를 만들었다. 치수가 정선으로 바뀌자 더 이상 대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 두다가 두 점 치수까지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마지막 제6국 때는 한 판만 지면 치수가 바꿔지는 상황이어서 후지사와 9단은 일본 기원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하여 품속에 사표를 넣고 다녔을 만큼 배수의 진을 쳤다. 그러나 그 마저도 무위로 끝난 것이다.
19. 오청원(吳靑原)의 치수고치기 10번기(19회)
이제 오청원의 치수고치기도 바야흐로 하이라이트를 넘어섰다. 후지사와와의 세 차례에 걸친 치수고치기는 오청원 인생의 하이라이트였으며, 이로써 '난다 긴다' 하는 기사들과는 전부 선상선 또는 정선으로 치수를 바꿔놓았다. 그래서 오청원은 바둑을 둘 수 있는 맞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기다니 미노루(木谷實)나 후지사와의 경우 한창 때의 전력이었으므로 오청원에게 지지만 않았더라도, 10번기에서 설사 지더라도 치수가 바뀌는 일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기사생활을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승부의 세계는 그렇게 냉혹한 것이다.
이번엔 사카다가 오청원을 찾아왔다. '면도날'이라고 불리는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1949년에 이와모토(岩本薰)와의 치수고치기에서 이와모토는 "내가 격파당해도 내 뒤에는 사카다가 있거든"이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 정도의 기재였다. 훗날 일본바둑사상 최고 기사의 반열에 오르는 사카다는 통산 66회 우승을 차지해 타이틀 횟수면에서 새 금자탑을 세운다. 그 무렵 사카다는 각 기전에서 발군의 성적을 올려 그의 시대가 다가오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팬들이 사카다와의 10번기를 학수고대한 것은 당연했다. 첫 10번기 이전에 오청원은 사카다와 6번기를 선상선의 치수로 둔 적이 있는데, 그때는 1승4패 1무승부로 완패했다. 따라서 선상선으로 맞선 사카다가 호선으로 치수를 바꿀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이미 후지사와와의 운명을 건 치수고치기도 끝난 이후여서 오청원이 최선을 다할 것이란 전망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만 반짝 2승2패를 기록했을 뿐, 오청원은 내리 4연승을 거두어 6승2패로 치수를 바꾸어 버렸다. 정선이다.
그후 또 다른 일류 기사인 다카가와(高川格) 본인방과의 10번기도 따로 이뤄졌다. 다카가와 9단은 2기 본인방부터 내리 9연패를 이루어 최근 조치훈 9단이 1998년 본인방 10연패 기록을 갱신할 때까지 일본 바둑사의 다카가와(高川格) 본인방과의 10번기는 결과적으로 오청원의 마지막 10번기가 된다. 다카가와 본인방과는 1952년 이래 3번기 시합을 치러 오청원이 연승 중이었으나 치수고치기 10번기라서 새로운 마음으로 덤벼들어야 한다. 다카가와 본인방은 비력(非力)이라 일컬어지는데, 그의 대국관의 정확성과 균형에 대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본인방을 연속방어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시하지 못할 존재다. 그가 본인방 9연패를 차지한 것은 그의 집중력을 잘 대변해주는 요소. 불세출의 천재 오청원이 두각을 나타낸 후 당대의 최고수로 지목된 기다니(木谷實), 가리가네(雁金準一), 이와모도(岩本薰), 후지사와(藤澤庫一朋齊), 사카다(坂田榮男)가 줄을 이어 도전했으나 전부 패퇴한 지금 남은 자는 다카가와 뿐이다. 그렇다고 다카가와가 앞서 스러져간 위인들 보다 더 센 것은 아니었으나 남아있는 고수 중에는 유일했다.
이번 10번기는 치수는 호선, 제한시간은 사카다의 경우와 같이 10시간 이틀제였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3연승을 올려 4국이 다카가와 본인방에겐 막판이 되었는데, 그는 흑 불계승으로 막판의 고비를 가까스로 비켜갔다.
이어 5국은 오청원의 흑승. 제6국은 본인방의 흑승. 제7국은 오청원의 흑승. 그러나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였다. 제8국에서 오청원은 백 차례에서 1집승을 거두고 드디어 치수를 6승2패로 고쳐 놓았다. 이렇게 다카가와 본인방마저 무너지자 당시의 일류기사는 오청원과 1단 차이(선상선)내지 2단 차이(정선)가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요미우리 신문사는 치수고치기 10번기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기다니와의 가마쿠라 10번기부터 15년 동안 계속된 10번기가 끝났다는 것은 오청원에게 안도의 느낌과 함께 쓸쓸함도 안겨주었다.
그도 치수고치기 15년이 가장 기력에 충실해 온 시기였음을 밝힌다. 처절한 승부세계의 진면목을 보여준 치수고치기 10번기! 앞으로 이것보다 더 쇼킹한 기획이 벌이질 수 있을지 의문인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15년 동안 11번의 대국에서 모조리 승리했다는 것은 오청원의 탁월한 기량 외에 그 무엇이 있었다. 바로 정신력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중국인으로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바로 철저한 승부욕으로 나타났을 수 있다. 돌이켜 보건데 치수고치기 10번기는 여러 가지 기전 중에서 기사의 기술과 명예를 건 필사적인 승부였다. 다른 모든 타이틀이 중차대하더라도 타이틀을 잡느냐 못 잡느냐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치수고치기는 당대 톱클래스에 오른 특정의 두 기사가 맞상대해서 승부를 겨루는 대국이므로 다듬은 기술을 다하고 그 정신을 다 바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그 기보의 일국(局) 일국엔 피어린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후학들에게 필독서가 되고 있다는 점은 시대를 달리해도 최선을 다한 한 판이라 그만한 교과서가 따로 없다고 하겠다.
오청원은 승부에 있어서는 승리자이자 승부를 초월한 입장에서는 그는 동양문화의 정수이다.
그의 기풍은 변환자재(變幻自在) 화려하기 그지없다. 나는 그처럼 순결한 예술가를 본일이 없다. 노벨상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오청원론이다. <끝 >
오늘로 오청원 기성님의 치수 고치기를 마치고
다음 주부터는 회를 바꾸어
서봉수의 진로배 9연승에 얽힌 이야기를 싣겠습니다.
금산의 최고 고수분의 급수가 어떻게
되시나요?
아마급수와 기원급수중 아무렇게나 좋습니다
인터넷상 금산바둑동호회가 있나요?
오로바둑.터이젬 등
인터넷상의 동호회는 없고
오로에서 5단으로 활동하는 회원의 실력이
중간 정도입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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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금산에서 바둑대회를(1) 38 | 김철용 | 2015.01.07 | 16669 |
공지 | 신거금팔경(新居金八景) 13 | 달인 | 2012.01.11 | 42231 |
공지 | 거금대교 개통 이후 거금도 버스 노선표 및 운임 3 | 운영자 | 2011.12.17 | 59177 |
공지 | 매생이 문의 하시는 분들께 2 | 운영자 | 2004.02.07 | 85173 |
192 | 금산면 소망의 등달기행사~ | 김선화 | 2014.11.03 | 2311 |
191 | 고흥군" 명칭사용 100주년 기념 인터넷정보검색 대회 안내 | 김선화 | 2014.11.03 | 3320 |
190 | 금산초등학교 교육과정 운영결과 페스티벌~ | 김선화 | 2014.11.05 | 2302 |
189 | 인천에서 고흥 시외버스 개통안내 2 | 금산 | 2014.12.06 | 6390 |
188 | 책을 출간했습니다 1 | 박성준 | 2014.12.11 | 2320 |
187 | 서울에 사는 영어강사 귀촌하고 싶습니다. | 영어샘 | 2014.12.23 | 2308 |
186 | 민박 추천해 주세요 2 | 경기맨 | 2015.01.12 | 2651 |
185 | 운명의 그순간 | 달무리 | 2015.01.15 | 2016 |
184 | 고흥 온라인 쇼핑몰 ★고흥청정마켓★ 홍보 | 경제유통과[고흥군] | 2015.01.28 | 2427 |
183 | 금산에서 바둑대회를(2) 34 | 무적 | 2015.01.30 | 3113 |
182 | 말로만 들었던 보이스 피싱을! 1 | 김철용 | 2015.02.06 | 2305 |
181 | 임진왜란과 전라좌수영 | 소홍섭 | 2015.03.03 | 2720 |
180 | 운영자님께의 건의 | 무적 | 2015.03.18 | 1795 |
179 | 궁금한점이 있어서 문의 드립니다. 1 | 가는거야 | 2015.03.23 | 1964 |
178 | 금산에서 바둑대회를(3) 14 | 달인 | 2015.03.29 | 2658 |
177 | 아주 근사하고 색다른 | 화수분 | 2015.04.04 | 2127 |
176 | 2015년 풍수해보험에 가입해보세요~ | 금산면사무소 | 2015.04.08 | 2864 |
» | 금산에서 바둑대회를(4) 12 | 하수 | 2015.04.28 | 3209 |
174 | 금산에서 바둑대회를(5) 9 | 무적 | 2015.05.19 | 2871 |
11.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11회)
운명의 4국이 찾아온다. 제4국은 1942년 2월25일부터 27일까지 두어졌다. 이 대국 직전인 2월 7일에 오청원은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은 나카하라 가즈꼬였다. 결혼 후 지금까지 회로하고 있는 오청원 부부는 8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제결혼이라는 낯선 상황을 잘 극복했다. 오청원에게는 이 대국이 결혼 후 첫 시합이었다. 오청원은 흑 차례였으므로 이 바둑을 이기면 아주 우위에 서게 되지만 지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시합이었다. 큰 자리를 선점한 오청원은 3일째 오후에는 우세를 굳혀 3집을 남겼다. 제4국을 이김으로 해서 3승1패로 앞서나갔다.
제5국은 5월2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오청원이 중국대륙에서 돌아온 것은 대국 3일전이었다. 오청원은 피로가 가시지 않은 채 대국에 임했으며 3일간의 격전을 이겨낼 수 있을 지가 근심거리였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5국은 오청원으로 쉽게 기울었다. 다섯 판 중 가장 회심의 작품이었다. 오청원은 백을 잡고 완승을 거두었다. 이 무렵 오청원은 신앙에 열중하고 있었다. 시합보다도 오히려 신앙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1938년 요양소에서 퇴원한 이래 병후임에도 불구하고 시합이다, 종교다 하면서 뻔질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병이 재발하지 않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가리가네 8단과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4승1패가 되었다. 만일 6국을 오청원이 이기면 치수를 고치게 되었으나 관계자가 가리가네 선생의 몸과 마음을 염려해서 6국 이후는 중지하였다.
치수고치기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치수가 고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잘 된 일이었다. 이미 4승1패만해도 사람들은 오청원이 이긴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고, 굳이 치수를 바꾸지 않더라도 가리가네 8단이 호선으로 대국을 해준 것 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5국까지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오청원 기준)
제1국(1941년 8월5일~7일.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백 불계 승
제2국(1941년 10월1일~3일.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흑 6집 승
제3국(1941년 12월27일~29일.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백 4집 패
제4국(1942년 2월25일~27일.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흑 3집 승
재5국(1942년 5월2일~4일.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백 불계 승
가리가네 8단과 치수고치기가 끝난 후 1943년 가을 오청원은 기다니와 더불어 8단으로 승단하였다.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상대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8단진 중에서는 더 이상 적당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파죽지세로 승단하고 있는 후지사와 쿠라노스케 6단이 뽑히게 되었다. 후지사와 6단은 우리가 알고 있는 괴물 후지사와 슈코와는 다른 인물이다. 흉내 내기의 명수가 되는 후지사와는 일본기원 최초의 9단이 된다. 후지사와 6단은 당시 흑번필승의 신화를 창조하는 기대주였는데 당시 오청원도 정기 승단대회에서 2번을 싸워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강자였다. 치수고치기는 후지사와가 6단 그리고 오청원이 8단이어서 2단차가 나서 문제가 되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후지사와와는 정선의 치수였다. 오청원도 후지사와에게 백을 들고 이긴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라 썩 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후지사와도 7단 승단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관계로 7단이 된 다음 선상선으로 두고 싶다고 말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국 관계자를 설득하지 못하고 선으로 두게 되었다. 당시는 일본의 전황이 불리해 신문의 바둑란도 크게 축소되었다. 여간 인기가 아니고선 신문에 실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두 승리자의 대결은 몹시 흥미를 끌었다. 두 승리자란 오청원과 비슷한 번기에서 후지사와도 완승을 거두고 있었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