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에서 바둑대회를' 1과 2에 이어 3을 올린다.
금산에서의 바둑대회를(2)는 양형모님께서 쓴 바둑야사를 두 달여에 걸쳐 여러분에게 소개했다.
이번 3에서는 영원한 기성 오청원선생님의 치수고치기에 대한 글을 발췌하여 여러분을 모실 것이다.
오직 2015년 8월 1일에 있을 바둑대회(금산에서 바둑대회를 1 참조)가 성료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금산에서 바둑대회를' 1과 2에 이어 3을 올린다.
금산에서의 바둑대회를(2)는 양형모님께서 쓴 바둑야사를 두 달여에 걸쳐 여러분에게 소개했다.
이번 3에서는 영원한 기성 오청원선생님의 치수고치기에 대한 글을 발췌하여 여러분을 모실 것이다.
오직 2015년 8월 1일에 있을 바둑대회(금산에서 바둑대회를 1 참조)가 성료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둑계에선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자가 바로 오청원이다. 그의 위대함에는 승부사로서의 업적과 바둑관의 비약적 확대에 힘쓴 구도자로서의 양면이 모두 포함된다. 오청원의 승부사로서의 업적을 헤아려보면 무엇보다 ‘치수고치기 10번기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처럼 상금을 건 타이틀전이 드문 시절, 그리고 단위(段位)가 엄하게 존중되던 시절, 오청원처럼 젊은 기사가 기량을 맘껏, 그것도 타국 땅에서 펼쳐내기란 무수한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청원은 그의 생애 중 하이라이트였던 십 수 년을 이른바 승부 바둑의 극단, 치수고치기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니 승부사도 이런 승부사가 일찍이 없었다.
오청원은 1939년부터 1955년에 걸친 무려 17년간의 11번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세출의 천재를 상대를 전부 하수급으로 전락시킨 기막힌 승부사였다. 또 그의 바둑사적 업적에서 결코 빠지면 안 되는 것은 바로 ‘新포석’이라는 새로운 혁명이었다. 1930년대 초반 기다니 미노루(木谷 實)와 함께 현대바둑의 효시가 될 업적 신포석을 개발하였으니 그 업적은 바둑의 무궁무진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비밀을 캐어낸 위대한 금자탑이었다.
신포석! 그렇다. 새로운 포석. 즉 새로운 바둑이라는 뜻이었다. 젊은 바둑꾼 오청원은 화점 삼삼 천원을 삼각편대로 형성하는 독특한 포진을 선보였다. 특히 천원이란 곳은 바둑판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중심점으로 당시 바둑가에선 착수를 금기시할 정도의 신성불가침에 해당하는 곳. 바로 그 옥쇄를 풀어헤친 이가 오청원이며, 그 정신적 기반에서 현대 포석이 속도와 중앙 중시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복건성에서 태어난 오청원은 이름이 천(泉), 자(字)가 청원(淸原)이었다. 6남매의 3남으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부친은 동경제국대학을 국비 유학생으로 졸업했던 재원이며 유학 후 북경의 최고재판소에서 일을 했을 정도의 엘리트. 오청원의 바둑 인생을 송두리째 결정지은 이는 물론 부친이었다. 오청원의 부친은 일본 유학시절 일본의 뭇 프로들과 어울려 기력연마를 도모했을 정도의 열성 바둑 팬. 그는 손수 오청원을 비롯한 자식들에게 바둑을 직접 가르쳤다. 오청원의 부친은 엄한 교육을 자식들에게 시킨다. 일찌감치 오청원의 3형제를 문관시험에 나가게 하기 위해 가정교사를 붙여 개인지도에 들어갔다. 아예 소학교에는 보내지도 않았다. 그런 부친의 열성은 급기야 바둑으로 옮아오게 됐는데, 가장 먼저 규칙을 설명했고 곧장 기보를 마련해 두게 했다. 애당초 3형제에게 모두 바둑을 가르쳤으나 제일 어린 오청원이 기재를 보이자 오청원에게만 스파르타 훈련을 시키게 된다. 오청원이 살아있는 기성으로 추앙 받은 것도 알고 보면 부친의 지독한 권유에 의한 것이니,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일까.’ 필자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한다.(계속)
오청원은 두 손의 중지가 조금씩 굽어 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좀 허약했던 오청원은 부친이 가져다 준 일본의 최신 기보집을 외우다시피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당시 그 책은 너무 무거워 책을 받치다 보니 중지가 휘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불세출의 영웅이 되는 과정의 험난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청원의 부친은 오청원이 12세 되던 해 갑자기 사망한다. 폐결핵이라고 추정되는 몹쓸 병에 걸려 각혈을 한 지 2개월여, 그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만다. 유복했던 오청원의 집안이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기울고 마는 것은 당연지사! 급기야 오청원이 바둑으로써 집안일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소년가장의 처절한 신세가 된다.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것도 따지고 보면 든든한 후원자이던 부친의 죽음이 만든 일이었다. 부친의 죽음은 오청원에게나 가족에게나 몹시 슬픈 일이었으나 오청원에게는 어린 나이에 바둑으로 대성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계기가 된 것이니 아이러니하다.
그 당시 빼놓지 못할 일화가 하나 있다. 부친이 저 세상으로 가기 며칠 전, 3형제를 불러놓고 부친은 유품을 하나씩 아들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장남에겐 탁본을, 차남에겐 소설을, 그리고 막내인 오청원에게는 기보를 주었다고 한다. 훗날 장남은 공무원이 되었고 차남은 문학자로, 막내는 기사가 되었으니 셋 다 부친의 기대대로 걸어간 셈이다. 오청원은 부친이 사망하기 얼마 전부터 북경의 한 장군에게 소개된다. 그 장군은 친일성향을 갖고 있어 국민에게 그리 신망이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권력으로 따지면 실세중의 실세로 지금으로 치면 북경시장과 경찰청장을 합친 권력가였으니 '북경의 대통령'으로 불릴만한 거물이었다. 그 장군은 바둑을 몹시 좋아하였고 고수였다고 전해진다. (계속)
2. 오청원(吳淸原)의 치수고치기 10번기(2회)
1920년대의 중국은 프로제도가 당연히 없었다. 따라서 권력자가 내놓은 약간의 돈을 상금으로 삼아 지역 고수들이 몰려들어 일종의 대회를 치르는 형식이 잦았다. 당시 오청원의 이모부는 오청원이 바둑의 세다는 소식을 전했고 흔쾌히 북경의 장군은 그를 받아들인다. 지금으로 치자면 권력자의 녹을 받는 장학생이 된 셈이었다. 그 장군에게는 오청원이나 여러 바둑꾼들이 대국을 해주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대회를 하면서 장군을 즐겁게 하는 일이 주 업무였다. 오청원은 그 당시 중국에서 한 달을 여유 있게 생활할 수 있었던 정도의 보수를 받았다.
부친의 죽음으로 가세는 급격히 기울고 집안 가재도구까지 내다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나 오청원이 가져오는 장학금 탓에 오청원의 가정은 금세 복원될 수 있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이 가르친 그 바둑으로 인해 오청원이 졸지에 가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오청원이 시대를 새롭게 창조할 인물로 인정되기엔 많이 모자랐고, 북경을 벗어나 새로운 무대로 나가는 데에도 시간이 약간 더 걸렸다. 그런데 장군의 수하에 들어간 지 1년도 채 못돼 그 장군은 실각하고 오청원에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지금으로 치자면 상금을 따낼 수 있는 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오청원은 거기에 참가하는 일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북경에는 청나라 때 조성된 큰 공원이 세 개 있었는데 당시 그중 두개의 공원에는 바둑판을 마련해둔 가게가 있었다. 따라서 북경의 바둑 팬은 두 가게에 집중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데, 거기에는 가끔 부자들이 상금을 걸고 선수들을 불러 모아 대회를 열곤 했다. 오청원은 그를 돌봐주던 장군이 사망하자 자연스레 그 공원의 ‘대회’에 자주 끼게 되었고 연전연승하여 푸짐한 상금과 상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아마추어 대회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도 독식하다 보면 상당한 재물이 되곤 했다. 가세가 기운 오청원의 입장에선 그만한 복도 없었다고 할 것이다. 사실 그곳에서의 연전연승이 북경신문에 오르락내리락 거리게 했고 그때부터 오청원은 제법 기재가 있는 소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러다 일본인 클럽에서도 소문이 자자하게 나게 되자 오청원의 주변에서는 오청원과 일본인 중 센 선수와 맞붙이는 등 일종의 이벤트가 성행하기도 했다. 신동 오청원을 보기 위해, 그가 나이든 일본인 아마추어 기사를 혼쭐내는 모습을 즐기려고 일부러 대회를 만들기까지 했으니 가히 오청원은 날개 돋친 천리마처럼 기재를 키워나갔다. 당시 구경꾼 중에 한 프로모터가 있었으니 그가 훗날 일본인 스승이 되는 세고에 겐샤꾸에게 ‘북경의 천재소년’ 오청원을 알린다. (계속)
오청원이 12세 되던 여름. 일본으로부터 이와모토 6단, 고수기 4단 일행이 방중한다. 그때 이미 오청원은 북경의 소년강자로서 이름이 자자했으니 당연히 그들에게 오청원은 소개되어지고 지도대국을 받게 된다. 이와모토는 1940년대 중반 하시모토 우따로와 함께 일본 바둑계의 거성이 되는 인물로 지금으로 치자면 단순 보급기사가 아니라 혁혁한 토너먼트 프로였다. 1902년생으로 오청원보다는 12년 연상의 장형. 그때 처음으로 일본의 프로기사와 대국하게 되는데 이와모토 6단에게 오청원은 석 점을 놓고 2연승, 두 점을 놓고 2집 패배를 당한다. 그리고 고수기 4단에겐 두 점 바둑에서 이긴다. 즉, 일본의 프로와 두 점 치수라는 실력평가를 받게 된다. 일본 정상 프로와 두 점 치수라... 이때 오청원이 거둔 성적은 혁혁한 것이었고 일본 내에서도 중국의 천재소년을 불러들이자는 여론을 형성하게 만든 기폭제 역할을 한다. 물론 그로부터 오청원이 막상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는 2년이 더 소요되며 스승이 되는 세고에와는 그동안 무려 50여 통의 서한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세고에는 마지막 제자로서 한국의 조훈현을 택한다. 세고에의 제자 중 또 한 명은 하시모토 우타로. 따라서 이 세고에는 한∙중∙일 3국의 최고수급인 오청원, 조훈현, 하시모토 우따로 등 세 사람을 동시에 거느린 행복한 기사였다. 그가 오청원의 기예를 알아듣고 얼마나 그에게 러브 콜을 했는지 증명해주는 것이 바로 50여 통의 편지다. 그런데도 2년이나 시간이 소요된 건 소개하는 측에 좀 소극적인 인사들이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기원의 부총재인 오오쿠라 남작은 2년 동안 월 200원의 생활비를 보증했고 2년 동안은 확실하게 재능을 뒷바라지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측에서는 오청원의 몸이 쇠약하다든지 날로 험악해져가는 중일관계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쪽에서는 오청원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지만 또한 쪽에서는 주저하는 일이 생겨 2년의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1927년이 되자 오청원은 북경의 기사 중 일인자가 된다. 그 해 여름 일본에서 또 다른 프로기사가 찾아오는데... 이노우에 5단이 북경을 찾아온 것이다. 당연히 북경 최고수 오청원과의 대국이 빠질 리 없고 두 점으로 맞선 오청원은 완승을 거두고, 다시 정선으로 세 판을 두어 1승1무1패를 기록한다. 당시 일본에서 4단 이상은 고단자로 불렸고, 고단자와 정선으로 두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북경에서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프로기사가 그것도 고단자인 이노우에가 정선으로 바둑을 두어 주는 것은 획기적인 일로 그 대국은 이노우에의 결단이 돋보인 대목이었다. 훗날 이노우에도 자신이 정선으로 오청원과 두기로 한 건 대단한 식견이었다고 자랑했다. 어쨌든 이노우에와 정선으로 1승1무1패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오청원의 실력을 가늠하는 단서가 된다.
3. 오청원(吳淸原)의 치수고치기 10번기(3회)
그 무렵 오청원의 집안은 나날이 궁핍해지고 있었다. 작은 형은 학교를 그나마 다니고 있었지만 큰형은 학교를 중퇴하고 집안일을 돌보는 상황이었다. 집안 형편은 막내 오청원이 이노우에와의 만남을 계기로 물설고 땅 낯선 일본으로 향하게 된 큰 계기가 된다.
1928년 오청원의 스승이 될 세고에의 뜻을 받들어 하시모토 4단이 북경을 찾아온다. 바로 전해 여름에 있었던 이노우에와의 대국 후 일본에서 오청원의 기재가 대단하다는 얘기가 퍼지자 정확한 기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시모토는 이노우에와 함께 후지사와 사카다 같은 걸물이 나오기 전까지 일본 바둑계를 호령하던 거물이다. 그 하시모토에게 오청원은 정선으로 덤빈다. 그리고 4집 승, 6집 승을 거두는 괴력을 과시한다. 불과 14세의 소년의 기력이 일본의 신예들과 맞먹는 수준까지 이르렀다는 얘기다.
그 해 10월 오청원은 도일하기로 맘을 굳혔다. 세고에의 문하에 들어가기로 한 것. 세고에 도장은 훗날 한국의 조훈현이 마지막 수제자가 되는데, 중국의 오청원, 일본의 하시모토 등과 함께 한중일의 최고수를 직접 키우는 행운을 갖게 된다. 오청원은 매달 200원의 생활비를 일본기원의 부총재이던 오쿠라 재벌로부터 2년간 유학비 명목으로 받기로 하고 일본에 진출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스카웃된 것이다. 200원은 당시 중류 가정의 한 달 생활비가 10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액수.
살아있는 기성으로 추앙받는 오청원이 일본 땅을 밟은 것은 1928년 10월18일. 2년 계약의 일본생활이 시작된다. 소년 오청원은 2년 후에도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어렵사리 손에 쥔 유학비 200원과 바둑으로 대성할 수 있는 기회의 땅 일본을 등지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청원의 집안에서는 2년 후 꼭 돌아오라고 부탁했고, 그도 그러리라 대답했지만 속내는 일본을 떠나올 맘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들어온 메이저리그인가! 소년의 야망은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오청원은 '마괘' 라는 중국옷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곧 일본 옷으로 갈아입었고, 선물 받은 일본옷차림으로 공식시합에 출전한다. 중국인의 시각으로 보면 서글픈 일이지만 소년에게는 일본이 좋았다. 바둑만 잘 두면 무엇이든 생기는 이 일본이 좋았다. 오청원이 일본에 건너오면서 문제가 된 것은 과연 그를 몇 단으로 인정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같으면 연구생이 아니라 스카웃된 용병기사. 따라서 당연히 프로로 인정을 하는데, 몇 단을 주느냐는 문제는 오청원의 자존심이기 이전에 일본기사의 자존심도 걸린 중차대한 문제였다. 당시 단위는 절대의 권위였다. 지금처럼 프로시합이 없던 때이므로, 일본 기사들은 승단대회가 최고 권위의 승부시합으로 인정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프로라도 치수가 단위에 따라 달라지는 최고의 권위가 단위였다.
4.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4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본에 와서 문제가 된 건 오청원에게 과연 몇 단을 인정하느냐는 것이었다. 여전히 토박이 정신에 투철한 기사들은 굴러온 돌격인 오청원이 기껏해야 초단밖에 더 되겠냐고 비아냥거렸지만 스승인 세고에 선생만이 오청원에게 3단 실력은 충분하다고 주장하여 3단격(格)으로 간주하고 정식 단위 인정시험을 치른다. 첫 상대는 그 해 정기 승단시합에서 1위를 차지한 시노하라 4단. 그와의 대국에서 오청원은 흑을 들고 불계승을 거둔다. 제2국은 슈샤이 명인과의 2점 바둑이었다. 이 시합이 말하자면 본시험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슈사이 명인은 지금으로 치면 굵직한 타이틀을 전부 보유한 실력에다 9단 이상의 단위처럼 권위로도 최고의 존재였던 살아있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슈사이 명인은 몸집이 아주 작아 35Kg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바둑판 앞에 앉아 있으면 10세 안팎의 소년으로 착각하기 쉬운 타입이다. 오청원은 여기서도 당당히 4집승을 거둔다. 이에 관한 슈샤이의 강평은 "흑의 태도는 장중견실(莊重堅實)의 극치이며 가히 최후까지 우세를 지속하고 보무당당(步武堂堂)해 백에게 파고들 틈을 주지 않은 2점 바둑으로서 쾌심의 걸작이었다." 이다. 명인에게 2점 바둑을 이긴 후 다시 무라지마 4단에게는 흑으로 5집을 이겨 3연승. 비로소 오청원은 정식 3단을 인정받게 된다. 3단을 인정받고 난 다음 오청원이 일본 바둑계로 곧장 뛰어든 건 아니다. 그는 평소에도 몸이 약해 장시간 두는 바둑은 힘들어 했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건강진단을 받게 된다. 행운당이라는 병원에서의 진단결과는 "가슴에 결핵의 자연 치유 흔적이 있어 재발될 우려가 있다. 선천적으로 몸도 허약하다. 따라서 기사의 목숨을 건 승단시합에는 1년 정도 참가하지 않아야 한다." 였는데 이 대목에서 과연 승단시합이 목숨을 건 대회일까? 지금의 관점으로는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요즘이야 단위의 절대적 권위는 무참히 깨진 시대이므로 승단대회가 가장 가치가 적은 듯하지만 당시에는 돈이 생기는 시합이 드물었을 뿐 아니라 단위의 권위가 극도로 충만한 시대였다. 그리고 단위의 높고 낮음으로 그 신분의 높낮이도 결정된다고 할 만큼 중시되던 시합이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승단시합을 대수합(大手合)이라고 부르니 이 승단대회가 가장 크게 생각했던 대회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간 첫해엔 오청원은 잡지나 신문바둑을 두었다. 지금으로 치면 이벤트 바둑이라고 보면 된다. 잡지사에서 주최하여 그 기보를 연재하기로 약속한 그런 임시 대회 말이다. 전적은 12승 7패 2무.
5.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5회)
일본무대 첫해부터 오청원의 재주와 끼는 빛을 발한다. 시사신보사에서 주최한 승발전에서 일곱 번째 선수로 참가한 오청원은 기다니 4단과 대국하게 된다. 기다니는 한국의 조남철 김인을 비롯하여 오다케 다케미야 고바야시 그리고 조치훈까지, 일본바둑의 영웅들 모두를 길러낸 일본바둑의 대모(代母). 그리고 훗날 오청원과 함께 바둑계의 폭풍을 몰고 온다.
그러나 이 기다니와의 만남은 수월치 않았다. 자존심 강한 오청원이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 궁리해낸 것이 흉내바둑이다. 흉내바둑이란 무엇인가. 오청원은 흑을 들고 첫수를 천원에 갖다 놓는다. 바둑판의 정중앙 말이다. 그 다음은 바둑판이 천원을 중심으로 점대칭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상대가 두는 대로 저쪽 반대편에서 그대로 따라두는 것이다. 오청원이 이렇게 흉내바둑을 둔 것은 철저히 연구정신의 발로였다. 과연 이렇게 두면 백이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부터 품었던 사람이다. 흉내바둑은 오청원의 ‘탐구심’과 ‘승부기질’이란 두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탐구심은 '이렇게 흉내바둑을 두면 그 끝은 어떻게 될까' 라는 식의 궁금증을 직접 실행한 뒤 확인하는 절차이며, 기질은 바로 기다니라는 거장에게 이길 도리가 없으니 이런 '변칙'으로 판을 좁혀간 다음 좁혀진 전장에서 싸우겠다는 심사이니 승부사다운 면모라 하겠다. 아무튼 기다니와의 흉내바둑은 62수까지 이어졌고 그 이후 기다니의 완착을 등에 업고 앞서가는 바둑을 둘 수 있었다. 그러나 후반 들어 오청원 역시 실수를 범해 결국은 3집을 지게 된다. 대국이 끝났을 때는 전차도 끊어진 심야였고 기다니와 오청원은 기원에서 밤을 새며 바둑 이야기로 동트는 새벽을 맞이한다. 그때 기다니와 오청원은 맘을 터놓는 사이로 발전한다. 어쨌든 오청원이 일본에 건너온 지 2년이 넘도록 기다니에게는 흑을 들고도 좀체 이기질 못했다. (계속)
오늘 오후부터 내일(혹시 모레)까지는 연재를 할 수 없어 계속 이어 올린다.
1930년 오청원은 건강이 회복되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춘계 승단시합에 참가한다. 당시 3단의 신분이었으나 춘계승단대회에서 7승1패를 기록하고, 추계대회에서는 7전 전승을 기록, 1위로 4단으로 승단한다. 당시 승단시합은 지금으로 치자면 타이틀전에 버금갈 진검승부였으니 오청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할 자료가 된다. 1931년 승단대회에서는 춘계 6승2패, 추계 8전 전승. 다시 1932년에는 춘계 8전 전승, 추계 7승1패로 당당히 5단까지 다다른다. 오청원은 훗날 회고록에서 1928~1932년에 가장 열심히 공부한 해였을 것이라고 썼다.
어찌 타고난 재능이라고 해서 수 삼년의 노력으로 오늘날의 영광의 궤적을 그릴 수 있으랴. 아마도 그 회고는 열심히 공부한 다음해인 1933년은 운명처럼 오청원이 신포석을 창안한 해라는 것과 연관이 있을 듯싶다. 다만 그가 승승장구하던 그즈음엔 기력에 비해 저단인 상황. 따라서 그가 흑을 들고 둘 때가 많았다는 점도 관계가 있다. 오청원은 흑으로 공부할 땐 혼인보 수책(秀策), 백을 들었을 때 공부는 수영(秀榮)의 시합바둑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 즈음엔 아무래도 흑 차례일 때가 많았으므로 견실한 수책류를 주체로 하여 흑번무적(黑番無敵)의 시절을 만들기도 한다. 특히 1932년 시사신보에서 주최한 승발전(이기면 계속 두는 연승방식)에서 무려 18연속 승을 기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1928~1932년에 오청원은 무려 9할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비교하자면, 한국의 이창호가 프로무대에서 가장 활발히 성적을 올릴 때도 9할은 이르지 못했다. 단 일 년의 성적도 9할이 된 적은 없다. 그러나 오청원은 무려 6년간의 통산 성적이 9할이었으니 그 기재에 대해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오청원을 말하면서 빠질 수 없는 신포석은 1933년 싹을 보인다. 오청원과 기다니와의 10번기에서 뚜렷한 징후를 보이는데, 이 10번기는 오청원의 승부바둑 10번기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기다니와의 10번기에서 오청원은 흑 차례일 때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4연성 포석을 선보인 바 있고, 기다니도 뚜렷하게 귀보다는 중앙의 세력을 중시하는 타법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달라지고 있다는 이 대목이 중요하다. 젊은 두 기사는 그런 혁신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기다니와 오청원의 신포석시대는 두 젊은 청춘기사의 개인의 시대를 넘어 바둑의 청춘시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신포석시대는 청춘의 창조와 모험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바둑계 자체를 선연하고 화려하게 재창조시킨 신풍이었다.
6.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6회)
당시 일본 바둑계 최고수였던 슈사이 명인의 환갑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대국에서 오청원은 자신이 창안한 신포석을 유감없이 구사했다. 오청원의 정선으로 시작된 대국에서 흑의 첫 수가 우상귀 '3.3', 계속해서 좌하귀 화점, 그리고 세 번째 착점이 천원으로 마치 바둑판을 대각선 방향으로 길게 연결하는 듯한 오청원의 신포석은 마치 '천마가 하늘을 나는 듯 호쾌했다!'(오청원, 기다니와 함께 신포석 이론을 창시한 바둑 평론가 야스나가 하지메의 표현).
이에 대해 슈사이는 기존의 포석법대로 얌전하게 두 귀의 소목을 차지했다. 이 바둑 기보가 신문에 보도되자 온 천하의 바둑인들은 "야, 오청원이 천하의 슈사이 명인을 상대로 천원에 두었다!"며 찬반양론으로 갈려 갑론을박을 펴는 등 난리법석이었다. 당시 바둑 열기는 요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특히 종래의 케케묵은 형식에 얽매였던 바둑을 자유롭게 해방시킨 신포석법은 질풍노도와 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오청원의 인기는 대단했다. 어느 대중 잡지에서 실시한 예능인에 대한 인기투표에서 오청원이 문인 미술가 등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으며 일설에는 '기생조차 오청원을 짝사랑했다!'고 하니 '바둑은 몰라도 오청원은 안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슈사이 명인과의 대국은 오청원에게 그리 유쾌한 기억을 남기지는 못했다. 이 바둑은 1933년 10월16일에 시작되어 다음해 1월29일에 끝났다. 장장 3개월이 넘게 대국이 진행된 것이다. 물론 이 기간 동안 계속해서 바둑을 둔 것은 아니고 제한시간을 각자 24시간으로 하되 하루에 얼마 동안 바둑을 진행하다가 백 차례의 슈사이가 "오늘은 여기서 그만!" 하면 대국을 중지하고 며칠 후에 다시 속개하곤 했다. 게다가 요즘처럼 두 대국자가 대국 장소에서 합숙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적당한 날을 받아서 대국을 계속하기 때문에 백 차례에서 중단한 슈사이로서는 좋은 수가 생각날 때까지 며칠이라도 연구할 수가 있는 셈이다. 물론 이것은 오청원에게 매우 불공평한 진행방식이었으나 당시 바둑계 최고 실력자였던 슈사이 측의 뜻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원칙이나 상식보다는 강자의 권위와 특권이 우선하기 마련인 것이다. 슈사이의 거듭된 대국중지 선언으로 인해 3개월 동안 무려 13차례나 대국 중단과 속개를 거듭했던 이 바둑은 피차 팽팽한 접전이 계속되다가 160수에 이르러 슈사이로부터 묘수가 등장해서 결국 오청원이 두 집을 졌다. 후일 슈사이의 묘수는 휴식기간 중 본인방 문중의 제자들이 스승의 바둑을 놓고 공동 연구를 벌인 끝에 발견한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아 물의를 빚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해 본인방 문중에서는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지만 당시 슈사이와 오청원의 대국이 중단될 때마다 제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동 연구를 했던 것은 사실이고 보면 충분히 심증이 가는 얘기다. 당시 묘수를 발견한 장본이이라고 지목됐던 마에다 노부아키는 10여년이 지난 후 이 문제에 관해 질문을 받고 "그 수를 내가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생(슈사이)이 그것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불손이다. 당시 우리 젊은이들이 공동 연구를 하고 있으면 선생께서 가끔 예고 없이 들어와 지켜보곤 했지만 한 번도 연구에 직접 참여하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표현은 매우 완곡하지만 당시 상황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당시 일본 바둑계에서는 오청원을 내심 동정하면서도 불공평한 대국 운영 방식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바둑 팬은 오직 '불패의 명인'과 '신포석의 창시자'가 맞붙었다는 외형적 사실에만 관심을 집중했을 뿐 슈사이의 불공평한 중단 연발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명인의 승부 집착이 최선의 수를 찾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으로 비쳐져 감동의 물결을 일으킬 정도였다. 덕분에 주최사인 요미우리 신문은 판매부수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등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계속>
7.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7회)
치수고치지 10번기는 무예자의 진검승부와 같은 것이었다. 가혹했다. 진검승부란 한번 무너지면 가면을 빼앗긴 프로레슬러처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운명의 치수고치기에서 패하게 되면 대등했을 터인 상대방에게 뚜렷하게 한단의 격차가 생기고 맞수시합을 둘 수 없게 된다. 그간 쌓아온 명예는 상처가 나고 또다시 치수고치기를 하지 않는 한 바둑계의 일인자 자리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실제로 재승부란 거의 불가능하므로 1회 한도의 필사적인 승부다. 특히 기계 일인자를 다투는 치수고치기 시합에서 승자는 대단한 명예를 얻는 반면 패자는 그것으로 기사생활을 마감하는 경우가 흔하다. 고래로 바둑계의 제1인자의 지위인 명인기소(名人碁所)를 정하는 대국은 단 한 번 만인 치수고치기로 10번기, 20번기를 행하는 일이 많고 대국자는 목숨을 걸고 반상의 사투를 벌여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에도 시대에 있어 혼인보(本因方), 야스이(安井), 이노우에(井上), 햐야시(林) 등 4대 문파에서는 명인기소를 다투는 치수고치기 승수는 언제나 심각하고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다.
단차(段差)에 의한 치수라든지 치수고치기가 바둑계 관습에서 없어지게 된 것은 혼인보 슈사이가 은퇴하며 세습 명인제도가 폐지되고 그 후 모든 타이틀전에서 따르도록 한 다음부터다.
400년의 바둑역사를 본다면 극히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치수고치기 10번기는 본질적으로 종래의 치수고치기와 다를 바 없다. 기사생명을 건 살과 뼈를 깎는 매치였다. 특히 요미우리라는 단골간판으로서 10번기를 둔 10년은 글자 그대로 배수의 진이었다. 일본기원의 뒷받침이 없어 10번 승부에서 패한 중국인 오청원을 일본 바둑 팬들이 알아줄 리 만무했다. 좌우간 치수고치기 10번기는 (곧, 진검승부의 두려움?) 두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다. 지금 기사들은 그런 것이 사라져 다행일 것이다. 현재 타이틀전은 한두 번 져도 명예에 상처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치수도 달라지지 않고 몇 번씩이나 도전할 기회가 있다. 타이틀 수도 많고, 누가 강한지 뚜렷한 순위를 매기는 것도 없다.
오청원은 즐겨 10번기를 둔 것은 아니다. 1939년 기다니와의 10번기를 효시로 1955년 다가카와까지 당대 최고수를 상대를 해서 실로 10회, 100국 가까이 치수고치기 십 번기를 두었다. 이것을 가지고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10번기'라 부르고 있다. 사실 이 치수고치기 10번기 만큼 당시 처절한 맛이 있던 것은 없다. 뭐니뭐니해도 "일본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므로 세상의 눈은 정상에 있는 두 사람에게 집중된다. 두 사람은 생활을 걸고 명예를 걸고 돈까지 건다. 보는 사람은 손에 땀이 차고 한 점 한 점에 껑충 뛰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한다. 이토록 스릴 있는 건 없다. 현재의 승부 형태로 정착되어 있는 7번 승부도이 점에서는 10번기의 발바닥도 미치지 못한다. 그 처절함은 짐작하리라.
1939년 9월. 오청원의 최초의 10번기가 치러졌다. 기다니 7단과의 10번기. 오청원이 활약하던 나이는 아직 20대. 기다니도 갓 스물을 넘은 한창 나이로서 둘 다 신진기사. 특히 건장사에서 벌어진 제1국은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국으로서, 1933년의 홍인보 슈사이 명인에게 신포석으로 대항한 일국과 함께 오청원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바둑이다. <계속>
8. 오청원(吳淸原)의 치수고치기 10번기(8회)
제1국은 9월28일부터 3일간에 걸쳐 건장사의 승방에서 두어졌다. 돌을 쥐어 기다니의 흑 차례다. 기다니의 바둑은 혼인보 슈사이 명인의 은퇴바둑에서부터 신포석 세력을 중시한 위치 높은 기풍에서부터 자리를 낮추어 착실히 집을 장만하는 기풍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차분히 집을 장만하고 상대방의 모양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기다니와의 바둑은 쳐들어온 돌을 둘러싸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곤 했다. 이 바둑도 흑은 낮게 귀를 차지하고 중반 가까이 흐르자 백의 모양에 쳐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흑이 튼튼히 집을 마련하는 동안 백은 발 빠르게 모양을 이룩하여 첫날은 흑이 여간 뒤진 모양이 아니었다. 이틀째는 흑 모양에 백이 쳐들어와 대접전이 되었고, 돌파전에 흑이 성공한 듯 했으나 국면은 흑에게 그다지 호전되지 않아 흑이 약간 고전이란 인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흑77수부터 3일째로 접어들어 엎치락뒤치락 바둑은 한결 확대되어 쌍방이 무척 착수가 어려운 대목이 따랐다. 기다니는 한수마다 끙끙거리며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기록을 살펴보아도 흑95수에 52분, 흑97에 65분, 흑101 에 55분. 기다니가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120수 째 오청원이 두 집정도 벌려고 미끄러져 들어간 수가 실착이었다. 흑의 거센 반격에 부딪쳐 큰 패가 생겼다. 기다니와 오청원은 필사적이었다. 이때 관전기자인 미호리 마사우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대국은 진검이다. 바둑 두는 사람은 필사적이다. 치수를 건 10번 승부의 결전을 새겨 넣을 이 일전은 마지막 날 밤늦게 귀기(鬼氣)가 사람에게 다가서고 처절함이 땅을 치는 한 장면을 전개하였다."고. 그것은 흑57이 두어진 직후 기다니 7단이 코피를 낸 다음부터다. 이토록 가슴이 콱 막히는 반측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서둘러 열어 제친 미닫이 유리문, 산에서 불어오는 밤의 냉기는 건장사의 선방 구석구석까지 얼어붙어가는 것이다. 그 복도에서 이제 제한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기다니 7단이 데굴데굴 몸부림치고 있다. 머리를 수건으로 식혀가면서 "저편에서 생각하는 동안 나도 생각하고 싶은데!"라고 외치는 것이다. 한때는 억지로 바둑판을 안았으나 "안 돼!"라고 비틀거리며 다시 나둥그러지는 것이다.
사실은 이 관전기자가 쓴 관전기 때문에 오청원은 시달림을 받게 된다. 기다니가 쓰러진 것이 코피 때문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줄곧 미세한 바둑이었던 데다가 흑이 줄곧 고전이었던 것이 자신의 실착으로 국면이 호전되어 한숨을 쉬던 중 "휴우"하고 긴장이 풀리다보니 그만 빈혈을 일으킨 것이라 생각했다. 기다니는 대국 중 피로가 쌓이면 가끔 빈혈증세를 보였다. 하시모토와의 대국에선 빈혈을 일으켜 30분간 휴식을 취하고 바둑을 둔 일이 있다. 하시모토의 말에 의하면 그 바둑은 큰 끝내기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기다니는 30분 휴식 중 누워있으면서 머릿속으로 바둑판을 그려 자기의 한 집 승을 읽어내었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오청원은 기다니에게 마음을 쓸 계제가 아니었다. 반면에 있는 한 대국자는 어떤 상태로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많다. 실제로는 긴 의자에 누어있을 텐데 '데굴데굴 구른다.'는 표현은 과장된 것이다. 독자에게는 마치 괴로워 몸부림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휴식 후 큰 끝내기에 들어가 184수째 다시 오청원의 실착이 나와 마침내 흑 우세로 되고, 이대로 두어 가면 흑이 2-3집 앞서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그 목전인 193수에 이르러 기다니는 실착을 범해 오청원이 승기를 잡고 패를 건 끝에 역전시켰다. 백의 2집 승이었다. 오청원의 100국 가까운 치수고치기 10번기 중 이와 같은 격전으로 치른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10번기의 처음이기도 하려니와 오청원의 일생 중 본인방 혼인보 슈사이와의 은퇴기념 대국과 함께 가장 절실한 한판이었다.
9.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9회)
그런데 1939년이라고 하면 중일전쟁이 확대일로를 거듭 하고 일본에서는 국수주의가 사회를 뒤덮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시류 속에 앞에 나온 관전기사가 신문에 실렸을 때 독자의 반응은 대단하였다. 기다니가 코피를 내고 괴로워하는데 모른 체 하면서 계속 두어나가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왜 곧장 휴식을 취하도록 해주지 않았는가? 무사의 인정을 모르는 냉혹비도(冷酷非道)한 승부의 마귀라고 하는 비난의 소리가 쇄도하였다. 당연하겠지만 동료기사 중에 오청원이 예에 어긋났다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기다니가 독자의 그런 관심을 귀찮게 생각했다. 협박장이 날아들었다. 오청원은 야스나가와 상담하니 야스나가는 "오선생이 10번기를 이기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만 답했다. 세고에 선생은 10번기를 중지시켜야 할 것인가 크게 고민했으나 "바둑꾼은 비록 반상에서 목숨을 앗겨도 행복한 일이니 당당히 두어가시게!"라면서 격려해주었다.
1940년 4월. 원각사의 제1국 외 에도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4국은 2승1패의 뒤를 이어 이 십번기의 결과를 좌우하는 일국이었다. 오청원의 흑번이었으나 백인 기다니가 과수를 추궁해 와 끝내기에 들어설 무렵, 필쟁점인 역 끝내기를 두어 거꾸로 한집을 남길 수 있었다. 사실 이때 오청원이 졌다면 2승2패. 그러면 십번기의 상황도 달라지고 오청원의 십번기가 이렇게 100국 가까이나 두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치수고치기가 걸린 6국이었다. 1939년 10월 원각사내의 자그마한 암자였다. 6국을 앞두고 오청원은 구레 이즈미라는 일본 이름을 다시 오청원으로 돌렸다. 바둑 팬의 열망 탓이었다. 호적은 그대로 두고서 '오청원'이라고 이름만 다시 바꾼 것이다. 5국에서 패하자 기다니는 오랫동안 길렀던 장발을 싹둑 잘라 중머리가 되었다. 막판에 몰린 6국부터 분위기를 일신하자는 뜻이었다. 오청원은 본래 까까머리였으므로 둘이서 승방에서 대국하면 선승(禪僧)일 것이라고 동요기사들은 웃기도 했다. 오청원이 6국을 이겨 5승1패. 드디어 기다니를 선상선으로 치수를 바꿔놓고 말았다. 치수고치기에서 치수는 바꿔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4승차, 예를 들면 4전 전승이나 7승3패가 되어 치수를 바꾸기로 한 약속이 그대로 실현되자 호선만을 두던 상대는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것은 아직 승부가 아니라는 반론을 폈다. 이름 하여 '신예 10번기'라고 명명한 것이다. 기다니를 신예로 보아 그들의 뭉개진 자존심을 만회해보려는 소치였다. 이제까지의 대국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오청원과 기다니와의 10번기 결과 ; 오청원 기준>
1국(1939년 9월28일~30일) 백 2집 승
2국(1939년 12월26일~28일) 흑 불계 승
3국(1940년 3월15일~4월9일) 백 5집 패
4국(1940년 6월12일~6월14일) 흑 1집 승
5국(1940년 8월4일~8월6일) 백 불계 승
6국(1940년 10월16일~10월18일) 흑 불계승
10.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10회)
1941년 6월, 두 번째 10번기가 성사되었다.
기다니와의 가마쿠라 10번기가 종료되자 요미우리 신문사는 다음 치수고치기 10번기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청원을 상대로 하려면 현재엔 재야에 있지만 슈사이 명인 이후 바둑계의 최장로인 기정사 총수, 가리가네 준이찌(雁金準一) 8단을 제외하면 따로 없을 것이란 결론이 나왔다. 당시 일본기원에는 8단이 따로 없었으므로 원래 같으면 가리가네 선생과는 호선으로 둘 수가 없는 상태지만, 가리가네 선생이 오청원과 호선으로 한번 두고 싶다고 한 바 있어 요미우리 신문사가 나섰다.
오청원을 일본기원의 대표로, 가리가네 8단을 기정사의 대표 자격으로 10번기를 실현시켰다. 물론 호선이었다. 요미우리신문은 일찍이 혼인보 슈사이와 명인자리를 다투다가 재야에 숨은 가리가네 8단을 재등장시켜 가리가네 8단이 승리하면 바둑계의 장로로 후대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가리가네가 슈사이 명인과 결별하고 결성한 기정사는 일본기원과 원래 사이가 나쁘고, 특히 단위가 비비꼬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기원에서 기정사와의 치수고치기 10번기를 허락해줄 리 만무했다. 이런 이유로 가리가네는 오청원과의 10번기를 위해 기정사를 떠나 경운사를 결성하였다. 그런데 가리가네의 인덕을 따르던 기사들은 모두 경운사에 참가하는 바람에 기정사를 모두 경운사로 옮겨놓은 형태가 되었다. 가리가네 8단이 기정사를 떠나 일본기원으로서도 그 이상 그와의 대국을 거부할 이유도 없어졌다. 오청원과 가리가네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이렇게 성립됐다. 제한시간은 가리가네가 장시간을 요구하고 오청원은 단시간을 희망했다. 요미우리 신문사의 조정 끝에 제한시간은 16시간으로 결정되었다. 대국장은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이 치수고치기에는 일본기원의 명예가 걸려있었다. 오청원이 진다면? 일본기원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리가네는 일본기원 소속이 아니었으므로 그 때까지 일본기원엔 그와 대국한 일도, 그의 기보를 연구한 일도 없었다. 오청원은 오직 한번 4단 시절 요미우리 선발전에서 그와 만나 흑을 잡고 2집을 이긴 일이 있다.
1941년 8월. 3일간의 제1국은 가리가네의 흑번이었으나 오랫동안 공식시합에서 떨어져 있던 탓인지 가리가네는 실력 발휘를 못하고 불계패했다.
제2국은 10월에 열렸다. 오청원의 흑번이었다. 이 바둑에서 오청원은 가리가네의 힘을 실컷 맛보았다. 끈적끈적한 힘의 무시무시함은 다른 기사와의 시합에서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첫째 날 엎치락뒤치락 결투가 벌어져 육탄전이라고 해야 할 싸움은 사흘째 계속되었다. 오청원은 중반부터 악전고투했다. 오청원은 가리가네의 맹공을 견디며 백이 약간 우세하다는 평가 속에 3일째를 맞았다. 3일째 밤은 둘 다 악전고투였는데, 특히 가리가네는 고령이어서 관전하던 사람들의 말로는 어깨 숨을 쉴 정도라고 했다. 흑이 약간 고전했으나 승패불명인 채 계속 되더니 끝내 기력의 한계에 이르렀음인지 208수만에 오청원의 6집 반승으로 끝났다. 이 바둑이 만일 가리가네의 실착이 없었더라면 후세에 남을 명국으로 기록될 만 하다.
제3국은 12월27일 열렸다. 흑의 가리가네는 백의 큰 모양에 쳐들어와 오청원을 짓밟고 오청원은 수습에 명수다운 솜씨를 발휘했으나 끝내 4집을 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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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청원의 치수고치기
<서문>
최근 한국을 대표하는 기사 이세돌 9단과 그의 영원한 라이벌 중국의 구리9단 사이에 10번기가 시작되어 이세돌 9단이 1승을 거뒀다. 피차 6승을 먼저 거두면 끝나는 승부로, 승자는 8억원 정도의 상금을, 패자는 여비조로 3천만 원 정도만 지급하는 승자독식의 숨 막히는 승부가 앞으로 1년 동안 매월 마지막주 일요일에 펼쳐지는 것이다. 10번기 하면 현재 100살로 생존해있는 영원한 기성 오청원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 스토리를 훌륭하게 정리한 글이 있어 혹시라도 바둑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흥미거리로 제공한다. 원본은 슈퍼스톤-인터바둑에 있는 글이다.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지만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슨 대수랴.
(이 글을 옮겨 쓰는 오늘 현재로는 오청원 기성님도 타계하셨으며, 이세돌과 구리의 10번기는 이세돌이 6승 2패로 이겼다.)
1. 오청원(吳淸原)의 치수고치기 10번기(1회)
과거 일본에서는 명인을 9단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만 불러줬고 한때는 최고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에게만 명인이란 칭호를 불러주었다. 그러나 명인은 꼭 바둑에서만 쓰이는 명칭은 아니다. 도자기를 잘 빗는 사람도 명인이 되고 요리의 극치를 달리는 사람도 명인의 반열에 넣곤 한다. 그러나 바둑만큼 명인이란 이름이 잘 어울리는 부류가 또 있을까 싶다. 동서고금을 살아온 바둑의 명인 중에 개인에게서나 팬들의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명승부를 다시 한 번 리와인드 시켜보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먼저 바둑이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오청원이다.
오청원(吳淸原). 그는 살아있는 기성(棋聖)이다. 중국 본토 발음으로는 우칭위엔. 그러나 '우칭위엔'하면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어 한자의 우리식 발음 그래도 오청원이라고 하겠다. 그는 1914년생이니까 올해 무려 91세가 된다. 한국의 바둑 대부 조남철보다는 9년 연상, 일본의 사카다보다는 6년 연상이다. 아직도 생존해 있다. 아직도 정정하다. 빅게임이 있으면 어디든 날아가서 검토실의 상좌를 차지하고 젊은 기사들과 어울려 복기 검토에 열중하는 싱싱한 기성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그의 일생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느라고 몹시 바쁘다고 한다. 제자로는 일본서 활약하고 있는 린하이펑(林海峰)이 있고 한국서 활동하고 있는 ‘철녀’ 루이나이웨이(芮乃偉)도 수제자. 오청원은 언제나 시대를 달리 하는 영웅들과 비교대상이 될 만큼 출중한 기재였고 시대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통합한다고 해도 가장 위대한 기사로 꼽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