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수군전력은 고흥사람들이었다.
-임진왜란과 전라좌수영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 남해안 방어는
전라도 지역은 강진에 병영,여수에 좌수영,해남에 우수영,
경상도 지역은 울산에 좌병영,진주에 우병영,동래에 좌수영,거제에 우수영이 있다.
전라좌수영 관할 5관(육지행정)은 순천도호부,낙안군,보성군,흥양현,광양현이고
5포(수군행정)은 사도진,방답진,여도진,녹도진,발포진등이 있다.
5관5포는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 재해권을 장악하여 왜군을 격파하고
국난을 극복하는 원동력이었다.
이중 발포진은 충무공 나이 36세인 1580년 발포만호로 수군으로는 최초 발령지이다.
이곳에서 18개월을 재임했다.
구분 |
지역 |
지휘관(벼슬) |
관할구역 |
5관 (육지행정구역) |
순천도호부 |
부사(종3품) |
여수시,순천시 일원 |
광양현 |
현감(종6품) |
광양시 일원 | |
낙안군 |
군수(종4품) |
보성군 벌교읍 순천시 낙안면 | |
보성군 |
군수(종4품) | ||
흥양현 |
현감(종6품) |
고흥권 일원, 여수 삼산면 | |
5포 (수군행정구역) |
방답진 |
첨사(종3품) |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
사도진 |
첨사(종3품) |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 |
여도진 |
만호(종4품) |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 |
녹도진 |
만호(종4품) |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 |
발포진 |
만호(종4품) |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
임진왜란시 전라좌수영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순신의 장계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옥포파왜병장>,<견내량파왜병장>,
<부산파왜병장>에 그 이유가 잘 남아 있다.
옥포해전에서 부상자 1명, 당포해전에서 전사자 13명 부상자 37명,
견내량 해전에서 전사자 19명 부상자 110명,부산포 해전에서 전사자6명 부상자 25명으로
모두 211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들을 수군진 소속별로 보면 흥양수군 39명(전사6,부상33),사도수군 34명(전사4,부상30),
여도수군29명(전사6,부상23),녹도수군 16명(전사4,부상12),발포수군13명(전사2,부상11)순이다.
총211명 사상자중 고흥수군은 131명(전사22명,부상109명)으로 전체 62%를 차지 하였다.
그만큼 임진왜란에서 고흥수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으며
고흥수군이 전라좌수군의 정예부대였음을 의미한다.1관 4포가 고흥지역에 위치하여,
특히 수군전력의 핵심인 5포중 4포가 고흥에 있어 주도적으로 해전승리를 이끌었다.
고흥수군이 최적의 전투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전라좌수영의 전력은 해전에 동원된 인력과 물력이 모두 지역에서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수군 특성상 선상위의 경험과 항해시 물길,풍랑 대처,배멀미등 전선의 격군(노를 젓는 사람)과
사부(활을 쏘는 군사)등 실전에 수행할 병력도 현지 원주민들이었다는 것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다. 수군 전력은 고흥사람들이었다.
여기에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이 발포만호를 지내 전술과 전력 등 지략을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객사 뜰에 서 있는 오동나무를 가야금으로 사용하려고 베어 올리라는
명령을 거부해 첫 파직을 당한 곳이다, 발포 마을 가운데 느티나무 밑에 ‘충무공이 머무신 곳’
을 기념한 비석이 세워져있다.그 탑에“저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나라의 물건은 사사롭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수군의 직책은 선장,포도장,사부,포수,격군,타공으로 나누어져 있다.
선장은 배의 지휘관으로서 군선과 수군을 통솔하며,포도장은 선내의 치안과 질서를 담당한다.
사부는 활을 쏘는 군사이며,포수는 승자총통을 쏘는 군사이다. 격군은 노를 젓는 사람으로
노군이나 농노문이라도 하며,타공은 키를 조정하는 사람이다.
고흥수군의 장수들은. 판옥선을 만들었고 이순신과 함께 각종 해전에 참여한 정걸(1514~1507)
아우 송희립과 함께 이순신 휘하에서 해전에 참여하고 의병을 모집한 송대립(1550~1597),
임진왜란 당시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으로 영남지역 원병파병을 주장하고
지도만호로 이순신휘하에서 활약한 송희립(1553~1623),통제사 이순신의 선봉장 신여랑(1564~1593),
이순신 휘하에서 중군으로 당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진무성(1566~미상),
진도군수로 명량대첩에 큰 공을 세운 송덕일(1566~1616),정운(1543~1592)등이다.
정운장군은 영암사람으로 성품이 강직하여 관직에 오래있지 못해 재주를 애석하게 여긴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녹도만호로 부임해 갑옷,전선,노등 병기를 손질하고 전선을 건조하고 군마를 잘 보살피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원균이 전라좌수군의 출병을 요청 할 때 일부 장수들이 관할지역을 들어 출전을 거부 할 때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과 어영담은 출전을 원 하였다.
당시 정운은 “영남도 우리 땅이고 호남도 우리땅이니...지금 적은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이때에는 급히 병사를 이끌고 반격하여 한편으로는 호남을 지키고 한편으로는
영남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라고 출병을 원하였다. 이순신이 이끌던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 해전에 참여하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정운은 옥포해전에 큰 전과를 올리고 부산포해전에서 선봉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했다.
그는 전투중 “나의 죽음을 적이 알지 못하게 하라”라는 말을 남겼으며,
이순신은 그의 순국소식을 듣고 “오른팔을 잃었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보성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안방준(1573~1654)은 <부산기사>에
“국가의 보전이 호남의 보전에서 연유 하였고, 호남의 보전은 순신의 수전에서
연유 하였고,순신의 수전은 녹도만호 정운이 앞장 선데서 나온 것“이라고 평했다.
지금 녹동 쌍충사에 손죽도 전투의 (1587년,정해왜변)명장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과
모셔져 있다. 정운장군의 부산포해전 전사일이 부산시민의 날이다.
임진왜란 고흥수군의 혁혁한 공에 의해 승리 하였으며,
전라좌수군의 핵심전력은 고흥사람과 함께한 장수들이었다.
자료출처 ; 섬문화 답사기 여수고흥편 /김준(전남발전연구원)
(1592,여수의 전라좌수영군)(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발포역사전시체험관
개인적으로 김준박사의 섬문화 답사기를 읽으며 고향에 대한 역사를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서로는 섬과바다,다도해사람들,해양생태와 해양문화,갯벌을 가다,한국 어촌사회학등 다수 있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하는 독서다.
섬에 대한 다양한 글에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사랑한다는 말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