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출제하기에 앞서
이 문제의 의미를 음해(?)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봐 미리 몇 자 씁니다.
동물에게는 태생적으로 2가지 욕망이 있다는데
그게 식욕과 성욕이라나!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
인간도 동물의 범주에 속할 수 밖에 없으니 식욕과 성욕은 물론이요 그 외에 소유욕과 명예욕이 더 있
다고들 한다.
(여기에서는 성욕에 대해서만 잠깐 언급해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가장 근본적인 성욕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물론 나도 포함해서).
혹자는 그게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영향이라고는 하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은 어떤 사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표현하지 못하는 자기기만이 아닐까 한다.
어느 고승과 행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행자:출가하지 아니한 속인으로서 불도를 닦고 있는 사람)
어느날 시주를 받기위해 마을로 나왔던 주지스님과 행자가 절로 되돌아 가는데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게 된다.
소나기를 맞은 채 갈길을 재촉하며 산밑까지 왔는데 산으로 올라가려면 필히 건너야 하는 개울이 있었단다.
그 개울에 도착하니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인하여 개울물이 불어나 징검다리를 건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곳에는 불어난 물로 개울을 건너지 못한 여인네가 비를 맞아 속살이 내 비치는 옷을 입고 서성이고
있지 않은가! 그 여인도 그 개울을 건너야만 하는데 여자의 몸인지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었던 것
이다.
주지스님은 그 여자가 개울을 건너야 한다는 것을 짐작하였으나 불자의 몸인지라 그 여인을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열심히 염불만 외더란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사태를 눈치 챈 돌연 행자가 돌연 여인네에게 다가가 "제 등에 업히시지요."하더란다.
처음에는 조금 망설이던 여인이었지만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행자에게 몸을 맡길 수 밖에.
그들은 무사히 개울을 건넜고 서로 헤어져 한 참을 오는데 주지스님이 행자에게 말하길
"어찌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이 여인을 업을 수 있느냐?"하시며 나무라더란다.
그 말을 들은 행자는
"스님, 저는 개울을 다 건너는 순간 그 여인을 제 등에서 내려 놓았는데
스님께서는 아직까지 그 여인을 가슴에 담고 있네요." 했더란다.
이렇게 깊은 도를 닦는 스님마져도 여인네를 보면 마음이 흐트러 지는데 (물론 자제는 했다고 하지만)
하물며 우리같은 속물이야......
마음은 있어도 행동으로 못 옮기는 것이지(여러가지의 제약 때문에?)
한가지 다른 예(예가 될지는 모르지만)를 더 들어보자.
시와 예와 무와 아리따운 자색으로 일세를 풍미했다는 황진이의 유혹에 평생을 쌓아 올렸던 명예를
하루아침에 내 버렸던 지족스님과
이와는 반대로 황진이의 갖은 유혹을 끝까지 물리친 화담 서경덕(그러한 화담이었기에 후세에 송도삼절
이라는 칭호를 얻었는지는 모르지만)선생과는 과연 어느 누가 더 자기 감정에 충실했는지 묻고 싶다.
그 부분은 각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이제 진짜 문제로 들어갑니다.
여기에 <거시기>란 것이 있습니다.
이 거시기를 이렇게 표현한 글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크기도 하거니와 힘이 좋으면 금상첨화요
크기는 하지만 힘이 약하면 유명무실이요
크지는 아니하지만 힘이 좋으면 천만다행이요
크지도 아니하고 힘도 좋지 아니하면 설상가상이라고요.
이 <거시기>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낼려고 앞 문제를 냈는데 의외로 답을 맞추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왔습니다.
이 문제도 너무 깊이, 또 엉뚱한 생각을 하면 맞추기 어려우니 일썽 쉽게 그저 세상 살아가듯
쉽게 쉽게 생각하소서.
이 문제의 의미를 음해(?)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봐 미리 몇 자 씁니다.
동물에게는 태생적으로 2가지 욕망이 있다는데
그게 식욕과 성욕이라나!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
인간도 동물의 범주에 속할 수 밖에 없으니 식욕과 성욕은 물론이요 그 외에 소유욕과 명예욕이 더 있
다고들 한다.
(여기에서는 성욕에 대해서만 잠깐 언급해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가장 근본적인 성욕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물론 나도 포함해서).
혹자는 그게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영향이라고는 하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은 어떤 사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표현하지 못하는 자기기만이 아닐까 한다.
어느 고승과 행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행자:출가하지 아니한 속인으로서 불도를 닦고 있는 사람)
어느날 시주를 받기위해 마을로 나왔던 주지스님과 행자가 절로 되돌아 가는데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게 된다.
소나기를 맞은 채 갈길을 재촉하며 산밑까지 왔는데 산으로 올라가려면 필히 건너야 하는 개울이 있었단다.
그 개울에 도착하니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인하여 개울물이 불어나 징검다리를 건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곳에는 불어난 물로 개울을 건너지 못한 여인네가 비를 맞아 속살이 내 비치는 옷을 입고 서성이고
있지 않은가! 그 여인도 그 개울을 건너야만 하는데 여자의 몸인지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었던 것
이다.
주지스님은 그 여자가 개울을 건너야 한다는 것을 짐작하였으나 불자의 몸인지라 그 여인을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열심히 염불만 외더란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사태를 눈치 챈 돌연 행자가 돌연 여인네에게 다가가 "제 등에 업히시지요."하더란다.
처음에는 조금 망설이던 여인이었지만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행자에게 몸을 맡길 수 밖에.
그들은 무사히 개울을 건넜고 서로 헤어져 한 참을 오는데 주지스님이 행자에게 말하길
"어찌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이 여인을 업을 수 있느냐?"하시며 나무라더란다.
그 말을 들은 행자는
"스님, 저는 개울을 다 건너는 순간 그 여인을 제 등에서 내려 놓았는데
스님께서는 아직까지 그 여인을 가슴에 담고 있네요." 했더란다.
이렇게 깊은 도를 닦는 스님마져도 여인네를 보면 마음이 흐트러 지는데 (물론 자제는 했다고 하지만)
하물며 우리같은 속물이야......
마음은 있어도 행동으로 못 옮기는 것이지(여러가지의 제약 때문에?)
한가지 다른 예(예가 될지는 모르지만)를 더 들어보자.
시와 예와 무와 아리따운 자색으로 일세를 풍미했다는 황진이의 유혹에 평생을 쌓아 올렸던 명예를
하루아침에 내 버렸던 지족스님과
이와는 반대로 황진이의 갖은 유혹을 끝까지 물리친 화담 서경덕(그러한 화담이었기에 후세에 송도삼절
이라는 칭호를 얻었는지는 모르지만)선생과는 과연 어느 누가 더 자기 감정에 충실했는지 묻고 싶다.
그 부분은 각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이제 진짜 문제로 들어갑니다.
여기에 <거시기>란 것이 있습니다.
이 거시기를 이렇게 표현한 글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크기도 하거니와 힘이 좋으면 금상첨화요
크기는 하지만 힘이 약하면 유명무실이요
크지는 아니하지만 힘이 좋으면 천만다행이요
크지도 아니하고 힘도 좋지 아니하면 설상가상이라고요.
이 <거시기>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낼려고 앞 문제를 냈는데 의외로 답을 맞추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왔습니다.
이 문제도 너무 깊이, 또 엉뚱한 생각을 하면 맞추기 어려우니 일썽 쉽게 그저 세상 살아가듯
쉽게 쉽게 생각하소서.
거시기를 물으시는데
거시기도 맥락이 있어야 거시기 아니것습니까.
농경사회에서는 거시기의 역활이 무쟈게 중요했을 것이므로
아마도 거시기는
소(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