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7월 13일) 새벽,
지난 밤늦게까지 무언가를 하다가 쉬 잠이 들지 않아 TV를 켜보니 OCN채널에서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란 영화를 막 시작하려고 한다.
‘어, 무등산 타잔! 저 사람은 ‘사람을 네 명이나 죽이고 도피하다가 잡혀 사형된 살인마(?)인데.’라고 의아해 하는데 자막에서는 ‘빈민들의 영웅 무등산 타잔!’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 알고 있구나!’라는 직감에 나는 화면을 주시하였고 나도 모르게 점점 영화에 몰입하여 영화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왜 나는 이 사건을 모르고 있었을까? 왜 나는 박흥숙을 한낱 살인자로만 인식하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에 잠을 못 이뤘다.
나는 여기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논픽션과 픽션의 조화인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만 즐기기로 하자. 그러나 우리는 ‘박흥숙’이라는 인간에 대하여 그 인간이 보고 느낀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1970년대라는 그 시대에 대해서는 알아보기로 하자. 그래서 오늘(7월 14일), 나는 박흥숙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많은 기사 중에 눈에 띄는 기사를 옮겨와서 편집했다.
『70년대의 도시빈민 사건가운데 속칭 ‘무등산타잔’이라고 불리는 광주광역시에서 벌어진 사건이 있다. 철거민 박흥숙(남) 사건은 도시빈민운동사를 검토하는 데 있어서 1970년 6월 8일 서울시가 마포구 창전동에 야심차게 추진했던 지상 5층, 15개동 규모의 와우아파트 한 동이 푹석 주저앉는 사건과 함께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박흥숙 씨는 날쌔고 탄탄한 몸놀림으로 ‘무등산타잔’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광주시 양동의 철물공장노동일을 하면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도 했던 그는 쇠 파이프로 사제 총과 총알을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사건이 벌어진 1977년 4월 20일 새벽 광주시 동구청 철거반 직원 7명이 속칭 무등산 증심사 계곡 덕산골 주변의 한 무허가 집을 철거했다. 이 집은 비록 무허가였지만 박흥숙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이 단란하게 살던 곳이었다. 자신이 살던 집이 철거로 불에 타자 분노한 청년 박흥숙 씨는 철거반 직원 오 모 씨를 인질로 잡았다. 그리고 붙잡힌 오 씨를 구출하고자 동료직원 4명이 차례로 다가오자 박 씨는 흉기를 휘둘러 철거반 원 네 명을 숨지게 하고 이들을 구덩이로 던져버렸다. 그는 사건 직후 도주하였다가 서울에서 검거되어 1978년 5월 사형 판결이 났다.
그 후, 각계각층에서의 구명운동이 시작 된다. 당시 구명회원 참여자에 따르면 “공부해 보려고 꿈을 갖고 사는 소시민이었다. 평소 효성이 지극했고, 순진한 성격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사람을 네 명이나 잔인하게 살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당초 63명 정도의 회원을 시초로 광주 전역에 구명운동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 박흥숙은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는데 최후진술을 통해
“당국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도 그 추운 겨울에 꼬박꼬박 계고장을 내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을 개 취급했다. 집을 부숴버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장 오갈 데 없는 우리들에게 불까지 질렀다. 돈이나 천장에 꽂아두었던 봄에 뿌릴 씨앗도 깡그리 타버렸다. 이처럼 당국에서까지 천대와 멸시를 받아야 하는 우리인데 누가 달갑게 방 한 칸 내줄 수 있겠는가? 옛말에도 있듯이 태산은 한 줌의 흙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대하 또한 한 방울의 물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살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출처: MBC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보도자료]
이와 같은 최후진술을 남긴 박흥숙은 1980년 12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사형된 지 25년이나 지난 후에야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또 다시 세상에 알려진 박흥숙 사건은 한 개인의 엽기적인 범죄 행각이나 살인마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사건이었다.
어찌 보면 이 사건처럼 많은 이들이 철거에 시달리다 소리 소문도 없이 생존권을 박탈당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사건을 잘 알지 못했던 이유는 그 사건이 내가 군 복무 중(1976.7~1979.3)에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며 내가 그를 살인마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이유는 그의 사형집행에 대한 짤막한 기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시대를 같은 곳에서 살았으면서도 당신의 아픔을 알지 못했던 것을 사죄하면서 삼가 명복을 빕니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문제로 노동계가 시끄럽다.
김진숙 씨는 또 어찌될꼬?
다시는 박흥숙과 전태일 같은 희생이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