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2342 추천 수 0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
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이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
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끊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 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나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 가 그러하듯이


* 바람벽 : 집안의 안벽
* 때글은 :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절은
* 쉬이고 : 잠시 머무르게 하고, 쉬게하고
* 앞대 : 평안도를 벗어난 남쪽지방, 멀리 해변가
* 개포 :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 이즈막하야 :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은, 이슥한 시간이 되어서


?
  • ?
    소홍섭 2009.12.04 12:19

    백석의 처지와 정황은 매우 슬프고,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다고 토로한다.
    좁은 방에 누워 희미한 불빛, 서글픈 느낌을 자아내는
    방의 차갑고 흰 벽을 쳐다보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보고 있다.
    어렵게 살아가는 늙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설령 삶이 힘이 들지라도 좌절하기보다는
    여타의 다른 사람들이나 시인들도 그러했듯이
    가장 귀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하늘이 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다.

  • ?
    소홍섭 2010.07.19 17:06
    1930년대는 한국문학사에 첫 르네상스라 할 연대라 한다.걸출한 작가와 시인이 그때 다 나왔으니
    정지용,이상,김기림,백석,임화,서정주,김영랑,박용철,김유정,이태준,박태원,김남천,한설야...
    일제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가 바뀌는 유화적인 상황에서 우리나라 모더니즘이 꽃 피울수 있었던 듯.
    이상이나 김유정은 당대 몰이해속에 불행한 삶을 감당해야 했지만
    문학사 안에 최고의 아방가르드로 찬사를 받고 살아 남아..
    언제나 현실을 가로질러 먼저 가는 자들은 외롭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럽지만
    예술가의 천형으로 받아 들여지는 듯..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7 우리시대 문화코드 작가 공지영 1 소홍섭 2008.10.27 1882
46 9회 동창의 10번째 모임후기 소홍섭 2008.11.25 1963
45 새년이 왔구나 2 김용두 2009.01.06 1551
44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소홍섭 2009.01.08 5528
43 산행 모임공지(3월15일 수리산) 소홍섭 2009.02.26 1626
42 금산동중 폐교에 대한 짧은 생각.. 소홍섭 2009.03.05 1928
41 문학계의 큰별 소설가 이청준 1 소홍섭 2009.03.13 2169
40 산행모임 공지(수리산 5월10일) 소홍섭 2009.05.04 1813
39 산행모임 공지( 운길산 6월14일)) 소홍섭 2009.05.22 1749
38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 소홍섭 2009.08.06 1984
37 썩으로 가는길(군대가는 후배에게)/박노해 1 소홍섭 2009.08.11 3548
36 아버지의 뒷모습/주자청 1 소홍섭 2009.08.13 4064
35 산행모임 공지(10월11일 관악산) 소홍섭 2009.09.30 1705
34 이문구의 관촌수필 소홍섭 2009.10.06 2621
33 정종두 동창 아들 돌 잔치 (11월 20일 금 ) 2 소홍섭 2009.11.05 2024
32 동창모임 공지 소홍섭 2009.11.11 2700
»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2 소홍섭 2009.12.04 2342
30 동창 송년모임 공지(12월19일 토요일) 소홍섭 2009.12.04 2046
29 2009년 올해의 책 소홍섭 2009.12.29 2233
28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김대중 1 소홍섭 2009.12.29 239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Next
/ 5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